월간중앙 (2018년 1월호) ‘이케다 다이사쿠 칼럼’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마가리타 박사의 ‘불굴(不屈)’
“겨울은 춥다. 그래서 봄은 더 아름답다”
20대에 남편 잃고 아들 키우면서 동양학에 매진…
‘숙명은 바꿀 수 있다’는 법화경 가르침에 힘 얻어
△1996년 2월, 세이쿄(聖敎)신문사에서 이케다 다이사쿠 SGI 회장과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동양학연구소 마가리타 보로뵤바 여사가 만나 대화하고 있다. / 사진:한국SGI
“남편은 너무나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언어학자 보로뵤바 데샤톱스키는 아내 마가리타 씨와 어린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저는 레닌그라드대학교 재학 중에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다방면에 지적 호기심이 매우 많고, 인도·유럽어족 연구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고문서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제가 거기에 감염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남편의 첫 제자로, 가장 열정적인 제자가 됐습니다.”
마가리타 씨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소련과학아카데미 동양학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어린 아들 니콜라스를 껴안고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지? 우리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머지않아 마가리타 씨는 마음을 정했다. 남편이 하던 연구를 이어서 하자. 눈을 반짝이며 중앙아시아의 문서를 해명하겠다던 남편의 꿈을 내가 이루자.
그러나 연구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중앙아시아는 다양한 언어가 있고, 다양한 민족이 흥망한 곳이다. 수많은 어학을 공부하는 것부터가 산 넘어 산이었다. 남아 있는 기록이 딱 하나뿐인 어구도 있고 지방 사투리도 있다. 흘림체로 쓴 문서도 많았다. 문서의 의미를 겨우 알게 돼도 불전(佛典)인지 힌두교 성전인지를 분별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문서는 조각난 것이 많아 해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어학뿐 아니라 역사를 비롯한 다방면의 지식이 필요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인내’라는 두 글자로 등반했다. 그러나 어둡고 험난한 언덕길을 올라 시야가 넓어졌을 때의 기쁨은 비할 데 없었다.
“변변치 못해도 학문의 역사에 공헌했다고 느끼는 순간만큼 큰 기쁨은 없습니다.”
마가리타 씨는 강한 인내심으로 오로지 배웠다. 상트페테부르크의 혹독한 겨울, 추운 방에서 손을 비비고 입김을 불어가며 등 뒤에서는 늘 남편의 다정한 숨결을 느꼈다. 둘이서 실크로드의 옛 풍광 속으로 들어갔다.
높고 험준한 산맥, 건조한 초원지대와 사막,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오아시스, 실크로드는 결코 살기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늘 ‘지혜’를 추구했다. 새로운 기술이나 발명품이 나오면 그 지혜는 결코 그곳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빛’은 반드시 퍼지려고 한다. ‘지혜’도 반드시 퍼지려고 한다. 그 힘으로 실크(비단)와 철, 종이와 유리라는 지혜의 결정이 이 길을 통해 세계로 퍼졌다.
불교라는 ‘지혜의 보석’도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해지고 넓혀졌다. 상인·유목민·농민·기술자·예술인·군인·외교관, 다양한 민족의 다양한 그룹이 오가며 이 ‘지혜의 길’을 탄탄히 다졌다.
실크로드가 아직도 인류를 매료시키는 이유는 살기 위한 ‘빛’을 추구한 인간의 드라마가 빛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동양학연구소 사람들은 이 ‘빛’을 지키고 전하는데 인생을 바쳤다. 그것은 세차게 불어대는 찬바람에 꺼지기 쉬운 촛불을 지키기 위해 몸을 바치는 모습과 흡사했다.
독일 나치에 ‘900일 동안 포위’ 당했을 때도 연구원들은 사본을 지키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끊임없는 맹공격 속에서 포위되거나 비처럼 쏟아지는 소이탄을 맞기도 하고, 극심한 추위와 기아에 시달려야 했다.
밝힐 빛도 없는 암흑 속에서 학자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면서 필사적으로 문헌을 지켰다. 문서를 태우면 온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절대 그러지 않고 문헌 위에 엎드리듯이 죽어갔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연구자는 두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이 있었기에 인류의 ‘빛’을 지킬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불굴의 정신은 살아 숨 쉬었다. 도난 경보 장치가 없던 시대에는 마가리타 씨도 다른 사람들과 교대로 망을 보며 잠도 자지 않고 문헌을 지켰다.
불법(佛法)은 ‘겨울은 반드시 봄이 된다’고 설(說)한다
마가리타 여사를 만났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사는 불교와 별로 인연이 없는 러시아에서 불교 중에서도 법화경을 꾸준히 연구하셨습니다. 40년 동안 부도 명성도 지위도 안중에 없으셨습니다. 진정한 학자입니다. 숭고한 인생입니다.”
아들도 훌륭하게 성장해 화학박사가 됐다. 아들 내외가 집 근처에 살아 박사는 손녀가 성장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마침 그날은 니치렌(日蓮) 대성인이 탄생하신 날이었다(1996년 2월 16일). 대성인은 남편을 먼저 보내고 병약한 몸으로 자식을 키우면서 열심히 산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 “겨울은 반드시 봄이 되느니라” 하고 격려하셨다.
나는 이 구절을 박사에게 선사했다.
“어머니로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박사는 승리의 봄을 쟁취하셨습니다. 러시아의 겨울은 춥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봄은 더 아름답지요. 봄이 찾아온 기쁨도 크지 않을까요?”
마가리타 박사는 나서는 사람은 아니지만 심지가 강하고 대지처럼 크나큰 마음을 소유한 여성이다. 박사의 법화경관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법화경은 박사의 인생 그 자체가 아닐까.’
마가리타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법화경이 왜 많은 사람을 매료시켰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불교는 인간을 숙업(宿業)에 속박당하는 존재라고 설했습니다. 그러나 법화경은 ‘인간이여, 자신의 힘을 믿어라’ ‘운명을 개척하라! 숙명은 바꿀 수 있다’고 민중에게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비록 예기치 못한 불행을 만난다 해도 더는 한탄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내가 웃는 얼굴로 대하면 사람들도 나를 웃는 얼굴로 대해준다’ 이렇게 깨닫기 때문입니다!”
40년 동안 법을 찾아 떠난 여행이었다. 남편이 이끌어준 머나먼 ‘이 길’을 걸어 여기까지 온 지금, 마가리타 여사의 웃는 얼굴에는 ‘마음의 꽃’이 활짝 피었다.
월간중앙(2018.1)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마가리타 박사의 ‘不屈’.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