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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욕망하는 기계들 Les machines désirantes
1.1 욕망하는 생산 (La production désirantes)
앙티-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
들뢰즈와 가타리, 최명관, 민음사, 1994(원 1972) 608쪽.
Deleuze et Guattari,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Minuit, 1972, p. 494.
[그림(원 6): Richard Linder, Boy with machine, 1954, o/c, 40 x 30, Mr and Mrs C.L. Harrisson, Batavia, Ohio)]
제1장 욕망하는 기계들, 1절 욕망하는 생산 1-15.
기계라는 용어에 집착하지 말자. 데카르트가 동물기계론을 말하면서 신체를 기계의 작용으로 본 이래로, 의사인 라메트리(1709-1751)는 인간 기계론(L'Homme Machine, 1747)을 쓰면서, 당대의 생리학의 도움으로 경험과 관찰에 의해 인간을 규정하려 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한 것은 경험을 쌓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경험의 축적이 기억과 연관 있는 지는 아직 실증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 들뢰즈는 그 기계가 기계이긴 한데, 욕망하는 기계라고 한다. 그 기계가 욕망으로써 무엇을 생산하는가? 그 생산의 토대는 무엇인가? 자연을 토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생산을 한다. 그 생산의 과정에서 다른 생산들과 차이가 있다. 차이를 생산한다고? 차이와 반복(1969)에서 말하는 등질반복 말고 이질반복을 생산한다고? 이질반복이란 서로 서로가 다른데 반복이라는 말이 성립하기는 할까? 개체로서 특이자에는 새로운 생성이지 이질반복일 수 없다. 그러면 무엇이 이질 반복하는가? 자연이다.
과정은 자연(la nature, 본성) 속에 등재하며, 자연(본성)과 동일성이루며, 현존의 성립이 완성이자 목표이다. 현존체로서 기계 단위에는 우선 부분들의 연결들이 있다. 단위 기계는 우선 기관이 없다. 그 단위는 내 주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는데, 그 때마다 변하는 것이 단위일 수 있는가. 그럼에도 그 변하고 있는 단위가 단위이라고, 자아라는 이미지는 평생을 살면서 동일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동일하게 되려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이 변화하고 흐르는 단위는 또한 자연(본성) 체제 안에서 흐름이다. 마치 벩송의 의식(기억, 생명)이 자연 의식 일체의 흐름 속에 단위이듯이 말이다. 이런 의식을 지닌 기계가, 마치 의식의 이미지처럼, 따로 개별성을 갖는 한에서 불모이고 불임이며 쓰잘데기 없다.
욕망하는 기계의 접속 또는 연결의 방식은 언어의 접속과 연결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표현함에 있어서 다른 용어를 쓸 수 없는 인간 지적 구조의 한계가 있다. 예로서 자연과 본성은 우리표현은 다르지만 서구 언어는 동일단어이다. 그 자연의 연결은 언어의 연결과 다르다. 그럼에도 언어로 표현하지 않고는 전달이 안 되잖아요라고 한다. 그래서 언어는 랑그도 빠롤도 포함해서 몸짓도 그리고 몸에서 흐르는 이미지도 언어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글에서 마찬가지도 글의 이미지도 있고 흐름도 있다. 음악과 영화에서 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글을 음표나 필름조각들로 생각하는 이들은 원자론적 입장에서 재현에 관심을 두고 있다. 흐름의 글은 사건과 마찬가지로 흐름이며 과정이다. ‘욕망하는 기계’ 한 항이지 욕망과 기계가 떨어졌다 붙었다는 개념들의 연결이 아니다. 언어의 결합방식이 이미지의 결합방식과 다르다고만 생각하자.
왜냐하면 언어의 결합방식 3가지(더하기 의미 생산)는 평면 위에 그림을 나열하는 것에 닮았다(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 욕망하는 기계는 평면을 혼성하는(composant) 노력이 들어있어서 배열과 배치도 각 기계에 따라 다르다. 스키조 환자의 평면은 그가 겪는 사건들의 과정이 있으며, 그 살아있는 평면에서 환자가 세계로부터 수동이며, 살아있는 평면의 노리개와 같다는 것을 환자는 느낀다. 가끔 그 환자의 절박함은, 아주 가끔 일반인도 그리고 누구나도, 그 평면의 요동치는 흐름에 휩쓸려 자신이 사라지고(죽는다)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환자는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모든 아픔과 고뇌를 뒤로 하고 살아있는 또는 욕망하는 기계로서 몸부림친다. 평면(자연)의 출렁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이 몸부림이 욕망하는 기계의 단위(통일성)이다. 이게 이데아처럼 일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온몸이 몸부림치며 거부할 것이다. 이게 우주와 같은 보편성이라고 해도 냉소할 것이다. 그 평면은 영원하고 동일반복으로 계속하는 우주를 만들어본 적도 없다. 어느 특이자도, 공자든 싯달다든, 소크라테스든, 예수든, 마호멧이든 영원이었을 수도 없었고, 연속성일 수도 없었다. 스토아적 표현으로 그 시대 그 장소에서 장면은 영원하며,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장면으로서 잘려진 단면고 같은 평면이다, 그러데 이 변화하고 요동치는(살아 움직이는) 평면이 출렁이는 순간에 생명의 난바다로 회귀하여 어느 먼지가루와 같이 거품 한 방울로 되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출렁이는 평면의 사건은 있었고 있고 또한 있을 것이다. (56R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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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욕망하는 기계들 Les machines désirantes 7- [몸의 기능]
제1장 제목 ‘욕망하는 기계들’이란 인간의 ‘몸의 부분들’, 즉 정신분석학에서 ‘부분대상들’을 말한다.
§1은 분열증이 자연과 관계에서 생산이라면, §2는 편집증이 자본과 관계에서 표면에 등록을 한다. 그 표면은 자본 자체는 생산이 아니기 때문에 표면에 기록을 지닌다.
§3에서 독신기계가 주제이다. 자연의 생산과 달리 사회생산이 반(反)생산이며, 독신기계는 소비의 측면이다. 소비는 주체가 있으니 주체의 등장을 알린다. 이 주체는 자아가 아니다.
LS §24. LS §32 M. Klein AO C1§1, C1§2, C1§3,
Si-, alors: connecta 함언[유일계열] 접속(connexion공그기) et.. puis et 인간-자연 생산
ou bien : disjonction 선언 발산 발산 soit... soit... 산업-자연 배분
et... et.. : conjonction 연언 수렴 수렴 C'est donc 사회-자연 소비
(39wmj)
욕망하는 기계 정신분석 스피노자
편집증 기계 리비도 자아 부분대상 현실계 술어(속성) 클라인 부분
기적적 기계 누멘 사회 집합 상상계 선술어(속성집합) 칸트의 범주종합
독신 기계 볼륍타스 타인 개체 기호계 양태 라깡의 편집자
전체(다양체) 총체(신) 세상 혼합 실재계 실체 들뢰즈의 분열자
# 현실계는 욕망하는 생산인데 비해 기호(상징)계는 생산이며 소비인 상징적 기호(시니피앙)이다. 정체성의 문제는 자아에 관련 있으며, 개인은 이미 관계 규정과 역할 속에 들어 있어서 규칙을 따라야 한다.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미 기호화된 체계 속에 편입이다. (40m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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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욕망하는 생산 (La production désirantes - 7, 15. [자연-생산]
[소위 자연 생산(변증법)은 순환으로 흐름과 접속으로 되어 있다. 증기-구름-비-강-바다-증발: 에너지의 순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새로운 생산에는 강도를 더한다. (41WLH)]
1.1.1. 정신분열자의 산보 - Promenade du schizo 7.
그게(Ça) 어디서나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멈춤 없이, 때로는 중단되면서, 그게 숨쉬고, 그게 뜨거워지고, 그게, 먹는다. 그게 똥을 누구, 그게 성교를 한다. “그것(le ça)”이라고 말했다니 그건 얼마나 큰 오류인가. 어디서나 그것은 기계장치가 된다. 이건 전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연결과 짝맞추기가 있는 기계들의 기계인 것이다. (7)
기계-기관은 기계-근원에서 가지 연결(branchée, 분절의 의미)로 되어있다. 하나는 흐름을 내보내고 다른 하나는 그 흐름을 끊는다. 젖가슴은 젖을 생산하는 장치이고 입은 젖에 짝맞추는 장치이다. (7)
태양항문(Anus Solaire), 그게 [잘] 지내고 있다(ça marche)는 것을 확신해 보시라. 재판장 슈레버 어떤 것을 느끼고 어떤 것을 생산하고 그리고 어떤 것으로 이론을 만들 수 있다. 어떤 것은 스스로 생산한다. [그것은] 기계의 효과들이며 메타퍼가 아니다. (7)
정신분열자의 산보: 이것은 소파에 누운 신경증 환자보다 더 나은 모델이다. 약간 야외, 즉 바깥과 관계이다. 예를 들어 뷔히너(Georg Büchner 1813-1837)가 재구성한 렌츠(Lenz)의 산보가 있다. 산보하고 있을 때 렌츠는 그를 돌보는 목사 집에 돌아왔을 때 렌츠와 다르다. 그 목사는 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과 관련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와 관련하여 그를 사회적으로 자리잡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산보할 때 그는 다른 신들과 함께 또는 숫제 신 없이도 가족 없이,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이 자연과 더불어 눈에 파묻혀 산 속에 있다. “내 아버지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그는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나 좀 내버려 두세요.” (7-8) [목사라는 제도적 가정에 머물 때와 달리 자연 속의 인간은 자연과 기계적 연결 관계에 들어간다.]
렌츠는 인간과 자연의 구별 이전에, 이 구별을 결정짓는 모든 좌표축 이전에 자리잡고 있다. 그는 자연을 자연으로서가 아니라 생산의 과정으로서 살고 있다. 이제 거기에는 인간도 없고 자연도 없으며, 오로지 이것이 저것을 또는 저것이 이것을 생산하고 그리하여 기계들을 연결시키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도처에 생산하는 또는 욕망하는 기계들, 정신분열증적 기계들, 즉 류적 생명 전체가 있다. 자아와 비-자아, 외부와 내부는 [구별하여] 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8)
베케트의 작중인물들이 외출하고자 결심했을 때, 분열증자의 산보이 이어지는 것을 보자. 먼저 그들의 행동을 그 자체 하나의 정교한 기계인양 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음에 자전거이다. 자전거-경적기계는 어머니-항문기계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8)
여기서 관능(volupté)의 생산은 어떤 것인가? [베케트(1906–1989)의 말론 죽다(Malone meurt, 1958)의 마지막 부분에서, 페달(Pédale) 부인이 정신분열증자를 산보에 데리고 나가, 의자가 달린 마차에 태우기도 하고, 배에 태우기도 하고, 사연속에서 피크닉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의 지옥기계가 준비되고 있다. (9)
피부 밑에 신체는 과열된 공장이요,
그리고 그 바깥에서,
환자가 빛나고,
그는 반짝이고
그의 모든 모공들로부터
터져서. (9)
[이 세(슈레버, 렌츠, 말론)가지 예는 분열증 환자에게서 그게 작동하는(ça marche, 진행하는) 방식과 그 장면을 예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첨가의 시(詩)로 아르또를 인용했다.]
1.1.2 자연과 산업 - Nature et Industrie
우리는 정신분열증의 자연주의적 축[극점]을 고정시키려고 주장하지 않는다. 분열증자의 독특하고 류적인 생활은 자연의 독특한 극점이 전혀 아니고, 생산의 과정으로 자연이다. 여기서 과정(processus)이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어떤 차원에서 자연과 산업이 구별될 수 있음직하다. (9)
인간-자연(homme-nature), 산업-자연(industrie-nature), 사회-자연(société-nature)이라고 하는 이 구별적 관계는 사회 안에서 흔히 “생산(production)” “분배(distribution)” “소비(consommation)”라고 불리는 비교적 자율적인 영역들을 구별하는 조건이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구별들은, 그 발전된 형식적 구조에서 볼 때, (맑스가 지적했듯이) 자본과 분업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자본가란 으레 전체의 진행에 있어 자기와 그 전체의 요소들이 굳어져 고정되어 있다고 보는 그릇된 의식을 전제하고 있다. (9)
그러니 모두가 생산이다. 생산적 생산들(productions de productions), 능동과 수동들의 생산; 등록적 생산들productions d’enregistrements), 분배와 배치들의 생산; 소비적 생산들(productions de consommations), 향락들(de voluptés, 관능 쾌락), 고뇌들, 및 고통들의 생산이다. 모든 것이 생산이기 때문에 등록들은 곧바로 소비되고, 이 소비들은 직접 재생산된다. 이 셋의 [연결 방식]관계가 과정(processus)의 첫째 의미이다. 즉 등록과 소비를 생산 자체 속에 집어넣고, 동일한 진행 속에 생산들로 삼는 것. (10)
1.1.3 과정 - Le processus 10 19
둘째로, 그 과정 속에서 인간-자연의 구별이 없다. 생산 또는 산업으로서 자연에서, 인간의 류적 생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연의 인간적 본질이 일체가 되어 있다. 이 때 산업은 더 이상 유용성이라고 하는 외면적 관계에서 파악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생산 그리고 인간에 의한 생산으로서 자연과 더불어 산업의 근본적 동일성 속에서 파악된다. 인간은 만물의 왕이 아니고, 오히려 온갖 형태의 온갖 종류의 깊은 생명과 접촉하고, 별들 및 심지어 동물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기관-기계를 에너지-기계에 연결시키되, 나무를 자기 신체에, 젖을 입에, 태양을 엉덩이에 연결시킨다. 우주의 기계들에 영원히 맡겨져 있다. 이것이 과정의 둘째 의미이다. (10)
인간과 자연은 서로 마주 대하고 있는 두 개의 항, 심지어는 원인작용(causation), 이해, 또는 표현의 관계(원인-결과, 주체-대상 등)에서 파악되는 두 개의 항이 아니고 생산자와 피생산자가 본질적으로 하나를 이루고 있는 동일한 실재성이다. (10)
욕망하는 생산은 유물론적 정신의학의 효과적인 범주이며, 이 정신의학은 분열증환자를 자연인(Homo natura)[인간본성]으로 제시하고 취급한다. 하지만 하나의 조건이 있고, 그 조건은 과정의 셋째 의미를 구성한다. 그 셋째 의미는 목표로도 목적(fin)으로도 취급되지 않으며, 그것이 무한히 계속되는 것과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11)
... 로렌스(Lawrence)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하나의 과정을 하나의 목표로 삼았다. 모든 과정의 목적(마지막)은 그 무한한 과정의 연속이 아니라 과정의 자기 완수(son accomplissement)이다…” 분열증과 사랑은 마찬가지이다. (11)
어떠한 정신분열증적인 특수성도 정신분열증적인 본징(entité, 임상실체)도 없다. 정신분열증은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우주이며, 마치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인 실재성”처럼 초기적 보편적 생산이다. (11)
1.1.4. 욕망하는 기계, 부분적 대상들과 흐름: ...과 ...과
- Machines désirante, objets partiels et flux: et .. et
욕망하는 기계들은 이항규칙, 즉 결합체제 아래 있는 이항기계들이다. 언제나 다른 기계와 짝을 이루는 기계이다. 생산적 종합 즉 생산적 생산은 연결(connective) 형식을 갖는다. “또(et)” “또 그리고(et puis)”… 이것이 언제나 흐름을 생산하는 기계와 이것에 연결되어 흐름을 끊고 흐름을 채취하는 다른 기계(젖가슴-입)가 있기 때문이다. (11)
욕망은 흐르게 하고, 흐르고, 그리고 끊는다. 밀러(Henry Miller, 1891-1980)가 자기의 욕망의 노래 속에 말한다. “나는 흐르는 모든 것을, 심지어 수정하지 않은(non fécondés) 난자를 나르는 월경의 흐름을 좋아한다.” (11)
모든 대상은 흐름의 연속을 가정하며, 모든 흐름은 대상의 파편화(fragmantation)를 가정한다. 틀림없이 각 기관기계는 세계 전체를 자기 자신의 흐름에 비추어, 즉 자기에게서 흘러나가는 에너지에 비추어서 해석하다. 눈은 모든 것을 – 말하는 것, 듣는 것, 똥누는 것, 성교하는 것 – 보는 항목들로 해석한다. (12)
1.1.5. 첫째종합: 연결적 종합 또는 생산의 생산
- La première synthèse connective ou production de prodution 12
연결적 종합의 짝이룸, 즉 부분-흐름 [두 부분들 사이는 흐름과 흐름의 연결]인 대상은 또한 다른 형식, 즉 생산된-생산하는 [형식]을 취한다. 생산하는 것[이제]은 항상 생산된 것[어제]에 접목되어 있다. (12)
정신분열자의 작품을 생산의 과정에 결부시키지 않고서 기술할 수도 없고, 또 기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도 안된다. [뒤프레의] 가공되지 않은 예술의 노트(Cahiers de l'art brut)
다른 예를 들면, 미쇼(Henri Michaux 1899-1984)는 욕망의 진행인 생산의 진행에 대응하는 분열증적인 탁자를 묘사한다. “.. 그것은 무엇인지 나도 모르는 그 자신의 일을 그 책상은 계속해 왔다‥…놀라운 일은, 그 책상이 단순하지도 않으면서, 또한 정말로 복잡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 마치 정신분열자가 그린 그림들이 온갖 모양을 잔뜩 그려 넣은 것처럼 온갖 것을 붙인 책상이었다....‥…그것은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되어 운반하기도 힘들게 되었다.... 그것은 전혀 편앙하지도 않고, 부르주아의 것도 아니고, 소박하지도 않고, 시골티가 나지도 않고, 요리용도 작업용도 아니었다. ... 그것은 실행[작동]을 멈춘 모터를 상상케 할 수 있었다.” 정신분열자[자연]는 보편적 생산자이라고 한다. (12)
책상의 미완성은 생산의 지상명령이다.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 1908- )가 잡동사니(bricolage) 작품을 규정할 때, 여러 가지 특성이 잘 결부되어 있는 하나의 전체라고 정의한다. 즉 그것은 다양하고 모양이 기괴하지만 제한된 자재와 규준의 소유이다. 단편들을 항상 대로운 단편화 속에 들어가게 하는 늘역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생산하는 작업[능동]과 생산되는 것[수동], 도구 전체와 만들어지는 것의 전체가 구별될 수 없게 된다[자연]. (13)
린드너(Richard Lindner 1901-1978)의 회화작품 「Boy with Machine」(1954)는 아주 크고 부어오른 소년이 자기의 작은 욕망하는 기계들을 기술적인 사회적 기계에 접속시켜 작동시키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왜냐하면 나중에 보겠지만 이것은 이미 어린이 진실한 일이다.). (13)
1.1.6. 기관없는 신체의 생산 Production du corps sans organes 13
생산하는 것, 생산된 것, 이 양자(생산된-생산하는)의 동일성(identité)이 있다. 동일성이란 선형계열에서 이 셋째 항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화되지 않은 거대한 대상이다. 이 모든 것이 한 순간 멈추고, 모든 것이 엉킨다(그러고는 모든 것이 곧 다시 시작할 것이다). (13) [대주고, 받고, (접속한) 하나(단위)가 있고, 또한 총체적 흐름 속에 있고, - 이렇게 4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3항과 4항의 양면성-]
어떤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진행하지 않고,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윤회의 수레바퀴(la roue des naissances) 밖에 나가 젖을 빠는 입도 없고 똥 누는 항문도 없을 것이다. (13-14)
그러나 자유롭고 절단 없는 상태에 있는 하나의 순수한 유체(流體)가 하나의 충만 신체 위를 미끄러져 가는 중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우리를 하나의 유기체[신체]가 되게 한다. 그러나 이 신체는 그와 같이 유기체가 되는데서, 다른 유기체와 조직을 갖지 않는 데에 고통을 느낀다. 숫제 조직됨이 없이 유기체가 되지 않았던 것[제3의 유기적인 점]이 차라리 나을 법도 하다. 진행의 한가운데에, 제3의 시점으로서의 “불가해한 전적인 일시 정지”[도 있다]: “입도, 혀도 없다. 이도 없다. 목구멍도 없다. 식도도 없다 위도 없다 배도 없다, 항문도 없다.” 자동기계들[분절기계들, 산업기계들]은 한 순간 정지하고 그것들이 분절해 둔 비 유기적 덩어리[분절없는 생산기계, 자연]를 출현시킨다. 기관 없는 충만한 신체는 비생산적이고 불모이며, 불임이다. (14) [부분으로서 작동하지 않은 유기적 전체- 충만신체]
아르또(Artaud 1896-1948)는, 그가 아무형태도 없이 또 아무 모습도 없이 있었던 때, 이것[신체]을 발견했다. 죽음 본능, 이것이 그 이름이요, 죽음에는 모델이 없다. 왜냐하면 욕망은 또한 죽음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가득한 신체는 부동의 운동자이다. (14) [넷째 항(기관 없는 충만신체: 자연)의 심층의 흐름은 부분들의 죽음이다.]
재판장 슈레버는 “오랫동안 위 없이, 장 없이, 폐도 없이, 식도도 찢겨, 오줌보도 없이, 늑골이 꺾인 채 살았다. 그는 가끔 자기 자신의 목구멍의 살을 일부 뜯어 먹었다. 만사가 이런 식이다.” 기관없는 신체도 비생산적이다. (14)
기관들 없는 신체는 시원적 무(néant)의 증거가 아니며, 상실된 총체의 나머지도 아니다. 그것은 특히 어떤 투영도 아니다[재현이 아니다]. 자기 신체를 가지고, 또는 신체의 이미지를 가지고 보아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이미지 없는 신체이다. 그[이미지 없는 신체]는 비생산적인 것이고, 그는 생산된 곳에서 현존하며 2항선형 계열의 셋째 시간에 현존한다. 그[이미지 없는 신체]는 생산작업 속에 영속적으로 재투사 된다. 긴장병(catatonique)을 앓는 신체가 욕조의 물속에서 생산된다. 기관없는 충만신체는 반(反)-생산작업이다. 그러나 이것은 생산작업을 반(反)생산작업에, 반(反)생산적 작업의 요소에 짝짓는 것이며, 연결적 종합의 또는 생산적 종합의 특성이다. (옮. 3:36, 56QLJ)
(7:04, 56RLB)(7:30, 56R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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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 렌츠(Jakob Michael Reinhold Lenz, 1751-1792), 참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1813 뷔히너(Georg Büchner, 1813–1837)[스물넷] 독일 작가, 극작가, 혁명가, 의사, La Mort de Danton, 1835), 렌츠(Lenz, 1835)
1818 맑스 (Karl Marx, 1818-1883), 독일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가, 사회학자, 혁명가. 1844년 초고(Manuscrits de 1844)(1844 수(手)고본, 경철수고)
1842 슈래버(Daniel Paul Schreber, 1842-1911) 독일 판사, 스키조프레니아로 유명하다. “슈레버(Schreber)의 예 1911(51세때)”
1885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 영국작가, 아롱의 좆(Aaron's Rod, 1922: La Verge d'Aaron)(tr. fr. Gallimard, p. 199).
1891 밀러(Henry Miller, 1891-1980), 미국 소설가, Tropique du Cancer, 1934 “나는 흐르는 모든 것을, ... 좋아한다.” (11)
1896 아르또(Antonin Artaud, 1896–1948) 프랑스 작가, 시인, 시각예술가, 수필가, 극장주. 반 고흐 사회의 자살(Van Gogh le suicidé de la société, 1947) (9)
1897 바따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 프랑스 작가, 철학자, 소설가, 시인, 수필가, 사서. La Part maudite, précédé de La notion de dépense (1933), avec une introduction de Jean Piel, Paris, Éditions de Minuit, coll. « L'Usage des richesses », 1949 ; réédition Paris, Le Seuil, coll. « Points », 1967
1899 미쇼(Henri Michaux 1899-1984), 벨기에 작가, 시인, 화가. Qui je fus (1927), Un barbare en Asie (1933), La nuit remue (1935)
1901 린드너(Richard Lindner 1901-1978) 독일 출신 미국화가. 「Boy with machine, 1954」, o/c[Oil on canvas], 40 x 30[102 x 76.4 cm, 40 1/8 x 30 inches], Mr and Mrs C.L. Harrisson, Batavia, Ohio)
1901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 프랑스 화가, 조각가, 조형예술가, 가공되지 않은 예술의 노트(Cahiers de l'art brut)(Collection de l'Art Brut)
1906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 아일랜드 소설가, 드라마 작가. 말론 죽다(Malone Dies, 1958): Malone meurt)에서 마담 페달이 분열증환자를 산보에 데려간다. (9)
1908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 1908-2009)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 야생적 사유(La Pensée sauvage (1962)
(56RL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