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첨 장군 묘(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이치리 산34
강민첨 장군 묘로 가는 안내판
가는 길에 우측으로 바라다 보이는 풍경
멀리 느티나무 뒤쪽으로 사우와 묘소가 바라다 보인다.
입구에 효도 '효' 자를 새긴 비석
강민첨 장군 묘 안내문
홍살문
은열공 강민첨 장군 사적비
강민첨 장군 묘소로 올라가는 길
홍살문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가면 소나무가 둘러쳐진 산밑에 강민첨 장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고려 현종 때 거란족의 침입을 막은 강민첨(姜民瞻, ?~1021 ) 장군의 묘소이다. 강민첨 장군의 본관은 진주(晉州), 고려가 건국한지 46년 되던 963년(광종 14)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본래 선비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거란족 10만 대군이 침입하자 강감찬(姜邯贊, 948~1031)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물리쳤다. 그 공로로 1019년 응양상장군주국. 우산기상시가 되고 추성치리익대공신에 기록되었으며, 이듬해 병부상서가 되었다.
1021년(현종 12)에 59세로 세상을 떠나자 왕이 은렬공의 시호를 내리고 국장으로 이곳에 예장했다고 한다. 또한 고려 문종이 즉위한 뒤 거란병을 크게 섬멸한 그의 공을 높이 사, 삼한벽상공신으로 공신각에 형상을 그려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본받게 했다. 강민첨의 공덕을 추모하는 영당과 사당은 현재 하동 두방영당과 진주 은렬사가 있다.
강민첨 장군 묘
원형으로 조성된 봉분 아랫부분에 잘 다듬은 둘레석을 둘렀으며, 묘의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묘소 옆에는 2기의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좌우로 동물상, 동자상, 망주석, 문인석(文人石)이 세워져 있다.
묘소 제일 아래 양쪽에 무인석(武人石)이 세워져 있다.
강민첨 장군의 묘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고려시대 개성에서 관직에 있다가 불교가 성행하던 고려시대에 행정업무를 보던 성환에 있는 봉선 홍경사 절 일대에 도적들이 끌어 관청 업무를 보러 이곳에 내려와 계시니 도적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은 절은 없고 절을지은 내력을 적은 홍경사 갈기비가 국보7호로 지정되어 남아 있으며, 일대의 혼란스러움을 잠재우고 살다가 돌아가시자, 명당터인 이곳 대술면 이치리에 안장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강민첨 장군 묘소에서 앞을 바라보았다. 가을빛과 더불어 평화로운 이치리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강민첨 장군 묘에서 아래쪽을 바라보니 2기의 묘가 있어 내려가 보았더니 마부의 묘와 말무덤이 있어 의아했다.
마부의 묘
자신이 모시던 장군이 돌아가시자 말의 목을 치고 자신도 자결하여 후손들이 함께 장사지내 주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장군이 타던 말무덤
사우 담장에는 곱게 물든 단풍나무 잎이 하나둘씩 벌써 떨어지고 있다.
묘소에서 내려오면 예산재(禮山齋)라는 현판이 걸린 사우가 있다.
예산재에서 앞쪽으로 돌아가면 경앙문이 나오고 그 옆쪽으로 관리사가 있다.
경앙문(景仰門)
해마다 음역 10월 5일이면 전국에서 은열공 강씨 종친들이 모여서 시제를 지낸다. 올해는 11월 7일날 강민첨 장군의 후손들이 모인 가운데 시묘제가 열렸으며 은열공 간민첨 장군의 제례는 충과 예, 효의 정신을 기리는 묘제, 기신제, 탄신제, 춘향례 등 일년에 4차례의 제를 지내고 있다. 진주강씨는 고구려 때 도원수를 지낸 강이식을 시조로 삼고 고려명장 강민첨 장군을 중시조로 인헌공파, 은열공파, 박사공파, 소감공파, 관서공파로 분류된다.
사우 문이 잠겨서 담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았다.
출처:문화재청
진주 은열사 강민첨 장군 영정(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3호)
어느새 은행나무도 노오란 옷을 모두 벗어버려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입구에는 오랫동안 예산재 재장으로 많은 공을 남기고 퇴임한 심당 강태생 모선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강민첨 장군 묘소에서 나가는 길
묘소쪽을 다시한번 바라보고 아쉬움을 남긴채 길을 떠나왔다. 가까운 시일에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 있는 두방영당(斗芳影堂)과 진주 옥봉동에 있는 은렬사(殷烈祠)를 찾아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출처: A Bird Of Paradise 원문보기 글쓴이: 극락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