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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전례 원문보기 글쓴이: Mark
제 1 장 그리스도교 전례의 본성
[전례]라는 용어에 대한 고찰은, 그 용어가 유래한 고전 희랍어에서부터 헬레니즘, 성서 그리고 그 이후의 문서들을 차례로 살펴봄으로 이루어진다. 이어서, 구약과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그리스도교 예배의 의미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겠다.
1.1. 전례2)
오늘날 제의적 의미로만 사용되는 [전례]라는 용어의 역사는 사실은 다양한 시기에 따라 여러 의미를 수용하는 과정을 거쳤음을 보여준다.
[전례(리뚜르지아liturgia)]라는 용어는 고전 희랍어에서 유래한다. 그 희랍어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동사형-전례하다-은 레이뚜르게인leitourghein, 명사형-전례하는 사람-은 레이뚜르고스leitourghos)는 라오스laos(이오니아에서는 레오스leos, = 백성)와 에르곤ergon(= 일, 업무) 두 단어의 합성어에서 유래한다.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를 문자그대로 번역한다면, "백성을 위한 업무", 혹은 "공동선을 위한 직접적인 봉사"가 된다.
1.1.1. 헬레니즘에서
그리스 백성에게 있어서,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의 애초의 근본적인 의미는 아주 협소한 것으로써, "법이나 관습에 규정된, 그리고 공동선을 위한, 그래서 많은 금전의 투자를 필요로 하며, 통상적으로 조국에 공헌하기를 원하는 부유한 시민으로부터 행해지는 봉사"를 말했다. 거기에는 여러 종류의 레이뚜르기아가 있었다: 그리스식 극장에서의 합창단의 공연, 한 선박의 장비, 국경일에 한 부족에 대한 환영 등. 나중에 특히 이집트 지역에서 이 단어는 모든 공공사업을 일컫는 말로 이해되었다. 또한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대표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제의적 봉사를 뜻하게 되었다.
1.1.2. 구약성서에서
구약성서 '70인역'(LXX=그리스어역, 약 기원전 250-150)에서, 이 용어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에 의해 행해진 성전의 제의적 봉사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들의 번역을 위해 사용되었다. 즉, 레이뚜리기아leitourghia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거행되는 대중적이고 공식적인 예배를 뜻하는 전문용어로, '70인역'이 라뜨레이아latreia(예배)나 둘레이아douleia(공경)로 번역하는 백성에 의한 사적인 예배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70인역'으로써 헬레니즘 영향아래에 있는 유대민족의 종교적 정서 안에 도입된 용어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는 이스라엘의 제의직무의 특징들을 표현하는데 특히 적합했다. 사실, 이 용어는 "어떤 장엄함과 연관된 대중적 봉사, 공동선익을 목적으로 하는 업무, 그리고 공식적으로 선발된 자에게 한정된 직무"등의 의미를 포함하기에 더욱 그러했다.
1.1.3. 신약성서에서
신약성서에서 이 용어는, 구약성서에서 약 150회 나타나는 것에 비해, 그 다양한 형태를 모두 합해도 겨우 15회 나타난다. 그 의미는; 대중적 언어로 '영예로운 대중적인 봉사'라는 세속적 의미; 구약성서의 제의적 의미; '영적 예배'라는 의미; 그리고, 그리스도교 예배라는 뜻으로는 단 하나의 본문이 있으니, 그 직역을 소개하면: "그들이 단식을 하며 주님께 예배드리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말씀하시니..." (사도 13, 2)이다. 이것이 나중에 그리스도교 전례liturgia christiana라고 불릴 이름을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신약성서 본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 어휘가 성찬을 일컫는다고 확실하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모여서 기도하였고, 그 기도는 안수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파견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이 불확실하고, 또 비록 그 예배의 성격과 내용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다 할지라도, 신약성서에서 유일하게 이 곳에서 레이뚜르게인leitourghein이 그리스도교 예배를 가리킨다는 것은 증명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나 그 파생어가 사도행전 13, 2의 경우를 제외하고 그리스도교 예배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틀림없이 그 단어들이 구약성서의 레위 사제직에 너무 밀접해 있었고, 또 그 사제직은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상황에서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한 편, 신약성서는 성별된 사람, 성별된 제구, 예배, 성전, 예배장소 등을 말하기 위해 제의적 용어의 사용을 회피한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제의적인 용어들(예배, 희생제사, 희생제물, 봉헌 등)은 자주 그리고 통상적으로 세속적인 환경과 사물들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언어적 변덕이 아니라 신약의 아주 정밀한 편집의도를 찾아볼 수 있다: 제의적 의미에서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는 다만 유대인들의 공적 예배만을 의미하며(루가 1, 23; 히브 8, 2.6; 9, 21; 10, 11 참조); 이 단어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적용되었을 때는 영적 예배의 삶을 말한다는 것이다(로마 15, 16; 필립 2, 17 참조).
1.1.4. 속사도시대 문헌에서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는 곧 유대기원 그리스도교 계통의 속(續)사도시대 문헌에서 - '디다케'3), '클레멘스 교황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4) 등 - 구약성서의 제의적 의미와 함께, 그리스도교의 제의적 의미로 또 성찬례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교 예배를 두고, 그 이전의 유대 예배와 비교하여 말하는 이런 방식은, 틀림없이 이 용어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로 하여금 유대 제의적인 의미를 떨쳐버리고, 초 세기에 교회용어로 정착되는 길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예루살렘 대성전의 파괴(70년) 이후, 예수의 제자들은 모세의 규정을 그저 참되고 결정적인 종교를 위한 준비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제 구약성서적 예배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구원적 예배의 예표로 이해되었다. 이런 정황에서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는 (옛 예배에서 새 예배로 넘어가는) 교량역할을 하는 단어이다.
1.1.5. 그 이후 시대에
이 용어는 그렇게 정화되었음에도 교회의 여러 지방에서 동일한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동방(그리스어권)에서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는 일반적 의미로는 그리스도교 예배를, 특수한 의미로는 성찬례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 결과로 오늘날 특정한 전례예식에 의한 성찬례를 우선적으로 의미한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 바실리오, 성 야고버, 성 마르꼬 등의 리뚜르지아liturgia를 말하는 데; 이것은 특정 성찬예절과 성찬기도에 의해 거행되는 성찬례를 말하는 것으로, 그 단어의 그리스어 어원에 의한 뜻이다. 반면에, 서방(라틴어권)은 그 용어를 완전히 모르고 있었다. 사실 신약성서의 대다수의 희랍어 용어들에서처럼, 이 용어는 라틴화되지 않았다. 따라서 서방 라틴어권에서는 수 세기동안 리뚜르지아liturgia대신 무누스munus(직무), 오피치움officium(업무), 미스테리움mysterium(신비), 사끄라멘뚬sacramentum(성사), 오뿌스opus(업무), 리뚜스ritus(예절), 악찌오actio(행위), 첼레브라찌오celebratio(전례거행) 등의 어휘를 사용하였다. 서방세계에 라틴용어 리뚜르지아liturgia는 16세기에야 비로서, 옛 전례서들과 교회의 예배에 대한 것들을 가리키는 학문용어로써, 다시 등장하게 된다. 18-19세기에 개신교회또한 이 용어를 채택하여, 그리스도교 예배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비오 10세 교황(재임1903-1914) 때와 그 이후 1917년의 교회법전을 출발로 하여 교황청 문서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곧 서방교회의 공식 용어로 계속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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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성서에 나타난 예배의 개념5)
이제 성서에 나타난 예배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역사적 탐구라기 보다는, 성서신학적 종합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약성서는 예배의 독창적 개념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삶이 기원하고 발전한 토대와, 구약성서 예배와 관련된 그 연속성의 흐름을 무시할 수는 없다.
1.2.1. 구약성서에 나타난 예배
종교적 인간은 신적존재와 만나기 위해서 일상(소위 말하는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특별한 시간, 공간, 사람, 행위 등에 상징적 가치를 부여하고, 이들을 하느님과의 상봉을 위해 선별된 것들로 간주한다. 이렇게 해서 거룩한 영역이 생긴다.
성서적 전통도 거룩함(성성)에 대해 많이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성성을 마치 분리된 공간개념 - 특히 세속으로부터 - 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항상 그 전통 안에 있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배와 일상 사이에 긴밀한 연결을 이룩하도록 만드는 저변의 역동성은, 바로 역사의 하느님이신 야훼에 대한 신앙이다. 다른 종교의 제의구조들은 삶을 향하여 있으니, 사실 그것들은 삶과 역사가 포함하고 있는 의미들을 상기시키는 표지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정체성을 역사 안에 개입하신 하느님과의 관계 위에 세운다. 그러므로, 그 예배는 역사적이고 예언적이다. 이런 예배의 역사적이고도 예언자적인 본질을 보다 잘 표현하는 개념은 바로 기념제memoriale6)이다. 이것은 마치 서랍의 밑바닥에서 옛날의 빛바랜 사진들을 되찾아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과거로부터 수집된 일정한 기억들을 회상하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제의적 기념memoria은 공동기념commemoratio의 살아있는 행위이다. 한 백성이 또는 한 집단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이런 공동기념 행위를 통해서이다. 원초적 과거는 이런 식으로 복구되어 오늘날에 살아있는 기원설화가 된다. 기원설화는 은총의 선물로 현재에 받아들여진다.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모든 계획은 이 전통에 뿌리박기 마련이다. 사람은 과거의 기념을 가지기에 비로소 미래를 가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선조들"이 아니라 (신명 5, 3) 현 세대와 계약을 체결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는, 예배의 중심적 역할이 과거에 대한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현재화에 있음을 보여준다. 예배는 이렇게 시공의 간격을 잊어버리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려 한다: 하느님은 과거에 여러 장소에서 그저 활동하신 것이 아니라, 동일한 방법으로 또 효과적으로 "지금 여기에hic et nunc" 활동하신다. 파스카 기념제에서 이스라엘은 과거를 마치 현재에 주어진 선물처럼 받아들이고, 이 선물은 미래의 약속을 보증해 준다. 미래에 대한 이런 전망은 새 계약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에 의해서 다만 조금씩 그 광대함에 도달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역사가 언급될 때, 출애급은 가장 토대가 되는 역사체험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정치적 측면에서는 해방과 백성의 형성이라는 흐름이지만, 종교적으로는 참회와 야훼에 대한 신앙의 수용이라는 흐름이며, 그 자체로 특정한 종류의 예배를 설정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섬기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형성되어 '사제적 백성'으로 탄생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영성에서 예배와 계약의 이행 사이에는, 즉 예배와 삶 사이에는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구약성서는 계속 반복하여 예배와 삶 사이에 존재하는 이 내밀한 결합을 강조한다. 여호수아 24장의 시켐의 대중연설은, 과거사를 구세사로 선포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따라 율법을 준수하는 백성의 응답 사이의 밀접한 관련를 힘있게 강조한다. '해방자이신 아훼를 역사 안에서 만남', '예배에서 그 만남의 흥겨운 거행', 그리고 '계약에 충실한 일관된 삶의 응답'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 근본적인 순간들이다. 여호수아에 대한 백성의 응답도 웅변조이다.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 야훼를 섬기고 그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여호 24, 24). '섬기다'라는 동사의 사용은 주님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의탁을 표현한다. 이상적 삶의 전망 속에 역사, 예배, 그리고 율법 간의 긴밀한 관계가 드러난다.
예배에 대한 이런 이상적 전망이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삶을 항상 이끌어 주지는 못하였다. 이스라엘은 형식주의의 유혹에 자주 빠지게 되어, 야훼에 대한 신앙의 응답을 형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사이에 실질적인 결별이 심해졌고; 예배는 예배를 이끌어내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도, 또 예배에 뒤따라야 할 삶으로부터도 분리되어 버렸다. 이스라엘이 넘어간 유혹은 삶의 수준에서 계약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잊어버린 채, 예배 그 자체에 집착한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예언자들의 태도가 해석되어야 한다. 제의의 변질에 대한 격렬한 예언적 비판은 유명하다. 그들은 희생제사에 대해(이사 1, 11-13; 예레 7, 21-22; 아모 5, 21-25 참조), 성궤에 대해(예레 3, 16), 성전에 대해(예레 7, 14; 26, 1-15) 실랄한 판결을 선언한다. 하느님께서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이사 29, 13)라고 말씀하시는 그런 예배를 이들은 고발한다. 신적계획의 증인인 예언자들은 마음없는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하느님과의 계약 조건들을 선언하면서, 다가올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예배를 향하도록 초대한다(에제 37, 26; 40-48 참조). 이런 모든 비판은 예배를 능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계약의 생생한 실천 속에서 예배를 보존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예언적 비판을 역사와 예배 - 역사에 대해 기념제를 거행하고 내적인 윤리생활을 돕는 예배 - 에 대한 단순한 비판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이다. 예언은, 역사적 현재 그리고 종말론적 미래 뿐만 아니라 역사의 과거와도 관련을 가지고 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에게 그때까지 살아왔던 것들, 그리고 지금은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상기시킨다(예레 2, 11 참조). 그들은 예배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만나는 장소로 존재해야하는 예배의 올바른 역할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제의적 실천을 단죄한다. 즉, 아모스에게 있어서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단순한 제의적 행위나 이론적이고 지적이고 사색적인 탐구도 아니요, 내면과 관련된 신비체험도 아니라, 정의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 속에 행해진다(아모 5, 4-6;14-15 참조). 또한 예레미아는 성전에서 참회의 열매없는 말뿐인 예배의 헛됨을 고발한다(예레 7 참조).
벤 시라(집회서의 저자)는 율법에 대한 충실과 제의적 예배를 긴밀히 결합시킴으로 예언 전통의 진정한 상속자로 자신을 드러낸다. 집회서 35장에 의하면 율법의 실천은 그 자체로 참된 예배이다. 벤 시라는 예배에 관해서는 엄격한 예배주의자이며, 동시에 율법을 지키는 데 민감한 율법주의자이다. 구약성서에서 "율법(토라torah)"이란 구약시대 계시 전체, 즉 구원으로 이끄는 길을 따르도록 초대하는 주님의 말씀과 행업으로 이루어진 신적 계시 전체의 가장 기본적인 메시지를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예배는 예언적 고발의 압력으로 정화되었다. 이런 이기적이고 형식적인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도 그리스도는, 완전한 예배를 시작할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말라 3, 1-4)과 진정한 예배를 살아갈 필수적 조건인 참된 정의의 의미를, 시편기도를 통해 보전하는 "가난한" 마음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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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배
구약성서에서 신약성서로 넘어감은 동시에 '연속성'과 '단절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예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참된 것이다.
공생활 기간동안 유대 전례봉사 앞에서 예수께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우선 느껴지는 것은 '종속성'과 '자유' 이 둘이 혼합된 태도이다. 예수께서는 한편으로 자기 백성의 제의적 실천을 준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예배보다 정신을 우위에 두는 예언자들의 노선을 따른다(마태 5, 23-24; 마르 12, 33 참조). 그리스도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 실천으로 율법을 요약하고 꿰뚤는다. 같은 방법으로 예수께서는 예배의 영역에서 예배자체의 가치/무가치를 결정하는 근본조건을 드러내니, 그것은 사랑과 형제에 대한 용서(마태 5, 23-24; 15, 5-9; 마르 7, 6-9 참조)였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영적이고 참된"(요한 4, 24) 예배, 즉 당신 자신의 실천으로 모범을 보인, '자신 자신의 온전한 삶으로 봉헌되는' 새로운 예배를 설립한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구약성서적이고 유다이즘적인 모든 제의규범들은 소멸되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의 시작과 함께 사람은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들게 되었고, 따라서 이해하면서 기쁘게 하느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예배는 "참신한" 것이니, 왜냐하면 삶과 병행하여 이룩해야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실존 자체 때문에 성립되기 때문에, 즉 "그리스도 안에" 생활하는 사람들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실존은 그리스도교 예배의 충만이다. 왜냐하면, 예배라는 명칭에 합당한 모든 것은, 사람들을 위해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신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결정적 사건에 의해 표시되었기에 그러하다. 히브리서는 구약성서의 모든 제의적인 용어들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그리스도는 성전이요, 아니 성전보다 위대한 이요; 영원한 대사제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최고 전례집전자liturgo이며;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유일한 중재자이다. 그리스도의 전 실존은, 자신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봉헌하는 데서 절정에 도달하는(히브 10, 5이하 참조), 속죄의 사제직무였다. 영광스럽게 되시고나서,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당신의 사제직을 수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고,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로마 5, 1이하, 히브 10, 19이하 참조).
성전을 두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 19)은, 제의적 형식주의에 대한 예언적 비판을 너머, 예배 자체의 새로운 창립을 선언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참신성은 다만 파스카 이후에야 밝혀질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예수의 영광스러운 육신 이외의 성전을 가지지 않는다. 또한 그의 십자가만이 제대요, 그분의 존재 자체만이 사제요 희생제사다. 그리스도의 육신, 혹은 그분의 인성은 하느님의 성전으로 존재하는 이외에, 또한 - 구약성서적 예언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때 - 옛 제의적 규범의 희생제물들을 대체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최후까지 성취하려는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리스도교 예배로 하여금 새롭고 참신한 단계로 향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태도는 새롭고 유일한 제의적 모범이 된다.
예배 규정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이제 그 백성에게 - "유대인이건 그리스인이건" - 더 이상 성전과 율법으로 대표되는 구원의 이중적 설립을 통해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함께하시고; 그리스도인들의 '우선적' 예배는 사랑과 신앙을 통해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이런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교 전례 봉사를 가리키는데 제의적 용어들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니; 그 용어들은 성전의 구약적 예배를 특징짓는 데 필요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현존 동안 이룩된 사건들과 세상 안의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암시하는 데 필요할 뿐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감도를 받아 그리스도와의 통교 속에서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고,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1베드 2, 5)게 된다. 신자들의 일반사제직sacerdotium commune을 선언하는 이 유명한 구절(또한 1베드 2, 9참조)은 공동체의 영역에서의 사제적 봉사를 말하는 것이기 보다는, 일상적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이 세상을 향한 사제적 임무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이 임무의 "세속적" 특성과 또한 "말로 설득하지 않더라도"(1베드 3, 1)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그 목적성을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세상 안에서 신앙인의 온 실존은, 성령의 선물에 충실히 수미일관하게 살아감으로 이 마지막 시대의 완전한 제사, 즉 참으로 '영적인 제사'가 된다. 이 교리는 성 바오로의 다음 말씀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영적) 예배입니다"(로마 12, 1).
세속으로부터 떼내는 선발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별sacralizzazione'이라는 유대 개념은 세속의 '성화sanctificatio'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었으니; 신약성서의 발자취에 따른 그리스도인들의 전례와 희생제사의 첫째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으로 일상의 윤리적 삶을 성화하는 것이다.
사도교회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행위에 영감을 받아, 예식성ritualitas을 철회하지 않고도 그 강조점이 예식성에서 실존재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도록 하였고; 더 나아가, 여러 성서본문들은 '삶의 예배를 마치 성찬례의 연장으로 보는 시각'의 흔적을 제시한다(1고린 11, 17-34; 로마 12, 1-2; 1베드 2, 4-5; 요한 4, 23-24; 히브 10, 1이하 참조). 아버지께 대한 완전한 복종과 인류에 대한 봉사의 삶을 산(마르 10, 45 참조) - 다시말해 참된 희생제사요, 참된 예배가 된 - 예수께서는, 지상생활을 마치실 때 빵을 쪼개어 나누고 포도주 잔을 함께 마시는 제의적이고 상징적인 동작을 통해 그 삶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시었다. 이런 제의적이고, 반복가능하고, 전례로 거행할 수 있는 동작을 통해, 예수께서는 그분의 삶을 제자들에게 넘겨주시어; 제자들로 하여금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예절'과("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Hoc facite in meam commemortionem") 또 각자의 '실존'을 통해("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Accipite et manducate") 그분의 삶을 기념토록 한다. 비록, "기념제memoriale"로 남겨주시려고 몇몇 제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성찬을 행하기는 하셨지만(아마도 성찬은 파스카 만찬을 배경으로 이루어 졌으며, 그리고 그것은 대중을 위해 마련된 성스런 장소에서의 집회라는 배경에서가 아니었으리라), 예수께서는 제의적인 희생제사를 드리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삶의 희생제사(자신의 증여와 봉헌이 되는 죽음)를 봉헌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각자의 삶을 하느님께는 합당하고, 형제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봉헌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그리스도의 중재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희생제사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가능성은 결국 그분의 희생제사의 열매 안에 지속적인 종속성으로 남는다. 이 종속성은 필수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실존 속에 구체화 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성사들, 특히 성찬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 안에서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요, 또한 고유하게 그리스도교 예배에서 특히 성찬례에서 종말론적 결정적 실재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런 전례거행은 구원의 때kairos - 다시 말하면, 과거에 이룩된 구원이 성사적으로 현재화되고, 종말론적 결정적 실재를 미리 맛보게 하는 은총의 순간을 - 이룬다. 사실, 신앙인들은 - 개인적으로건 공동체적으로건 - 성찬례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한 몸을 이룸으로, 신적 생명의 통교 속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린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중재행위의 성사이기에,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중재의 영향을 실질적으로 충만히 받도록 해준다. 성체성사없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은 그리스도의 실존에 충만하게 결합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교 예배를 정리할 수 있다: 즉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결정적인 사건의 기념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영적으로 참되게"(요한 4, 23-24) 예배하는 진실한 사제적 백성이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1고린 12, 12-13참조)을 이루는 구원받은 이들의 새로운 공동체가 거행하는 기념이다.7)
[이 글은 현재 로마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중인 대구대교구 장신호 요한보스코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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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부분은 마티아스 아우제(Matias AUG )의 저서 Liturgia - Storia, Celebrazione, Teologia, Spiritualit , Edizoni Paoline, 1992 Milano, pp. 11-23"의 번역이다.
2) A. Romeo, Il termine "leitourghia" nella grecit biblica, in: Miscellanea liturgica in horerem L. Cuniberti Mohlberg, vol. 2, Roma 1949, pp. 467-519; K. Hess, Servire, in: Dizionario dei concetti biblici del Nuovo Testamento, a cura di L. Coenen - E. Beyreuther - H. Bietenhard, Edb, Bologna 1976, pp. 1741-1743; S. Marsili, Liturgia, in: Aa.vv., Anamnesis - La liturgia, momento nella storia della salvezza, Marietti, Torino 1974, pp. 33-45; Id., Liturgia, in: NDL, pp. 725-742; J. L pez Mart n, "In spirito e verit ". Introduzione alla liturgia, Edizioni Paoline, Cinisello Balsamo 1989, pp. 52-55.
3) "여러분은 자신들을 위해 감독들과 봉사자들을 선출하되 주님께 합당하고 온순하고, 돈을 좋아하지 않고, 진실하며, 인정된 사람들을 선출하시오. 그들이 여러분에게 예언자들과 교사들의 직무(leitourghian)를 수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다케 15, 1; 정양모 역주, {사도들의 가르침 - 디다케}, 분도출판사, 1993, pp. 96-97).
4) "그분이 우리에게 봉헌과 전례를 명하시되 무질서하게가 아니라 정해진 시간과 상황에 따라... 대사제에게 특정한 전례 임무가 맡겨지고..." ( Clemente, Prima ai Corinti 40, 2.5, in: I Padri Apostolici, traduzione e introduzione e note a cura di A. Quacquarelli, Citt Nuova, Roma 19894, p. 76, 역자 사역).
5) S. Lyonnet, La natura du culte dans le Nouveau Testament, in: Aa.vv., La Liturgie apr s Vatican II. Bilans, tudes, perspectives, Cerf, Paris 1967, pp. 357-384; F. Hahn, Il servizio liturgico nel cristianesimo primitivo, Paideia, Brescia 1972; M.-F. Lacan, Culto, in: Dizionario di teologia biblica, pubblicato sotto la direzione di X. L on-Dufour, Marietti, Genova 19724, pp. 236-242; E. Schweizer - A. D ez Macho, La Chiesa primittiva, Paideia, Brescia 1980; A. Bergamini, Culto, in: NDL, pp. 333-340; X. Basurko, El culto en la poca del Nuevo Testamento, in: Aa.vv., La celebraci n en la iglesia, I. Liturg a y sacramentolog a fundamental, S gueme, Salamanca 1985, pp. 53-70; B. Maggiani, Liturgia e culto, in: Nuovo Dizionario di teologia biblica, a cura di P. Rossano - G. Ravasi - A. Girlanda, Edizioni Paoline, Milano 1988, pp. 835-847; L.-M. Chauvet, Simbolo e sacramento, Una rilettura sacramentale dell esistenza cristiana, Ldc, Torino-Leumann 1990; Aa.vv., La liturgie dans le Nouveau Testament, in: Introduction la Bible, dition nouvelle, vol. 9, Descl e, Paris 1991.
6) 이 용어는 히브리 어근 ZKR("기억하다")에서 유래한다. Zikkar n과 azkarah는 자주 70인역(LXX)에서 mnem synon 혹은 an mnesis로 번역되었다. (K. H. Bartels, Memoria, in: Dizoinario dei concetti biblici del Nuovo Testamento, 위의 책, pp. 990-996 참조).
7) A. Vanhoye, Liturgia e vita nel sacerdozio dei laici, in: Aa.vv., Sacerdozio e mediazioni. Dimensioni della mediazione nell esperienza della Chiesa, a cura di R. Cecolin, Messaggero, Padova 1991, pp. 21-40.
제 2 장 전례의 역사
전례는 역사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맞추어 여러 형태의 복합체로 표현된다. (전례의 본성에 대해서 이미 제 1 장에서 살펴보았다). 전례는 "신적 제정인 연고로 변경할 수 없는 부분과 시대의 변천을 따라 변경할 수 있는... 혹은 변경하여야 하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전례헌장 21). 우리는 바로 그 변화의 역사를, 즉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립된 '전례의 신적 제정'에서부터 세월의 흐름에 따라 교회의 전례거행에 천천히 발생했던 수정, 변화, 발전의 역사를 살펴볼 것이다. 이 역사의 주요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현 시대의 전례거행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바탕이 된다. 그리고, 과거의 역사에 대한 비평적 연구만이 앞으로의 변화를 이끌어갈 힘을 제공할 것이다.
이 장에서는 전례의 '일반적인' 역사를 살펴본다. 여기서 제공되는 전망은 그리스도교 전례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계들만 더욱 분명히 살펴보게 되며, 특히 서방전례에 한정될 것이다.
2.1. 출발의 시대
2.2.1. 사도전통에 따른 첫 전례
신약성서에서 사도전례의 체계적인 서술을 찾을 수는 없지만, 부가적인 설명을 요하는 몇몇 부분과 암시들을 발견할 수는 있다.
제 1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레이뚜르기아leitourghia라는 용어가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교 전례를 가리키기 위해 단 한번만 등장한다는 사실은, 초세기 사도 공동체가 전례적 예배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기보다, 그리스도교 전례의 '참신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교회는 유다이즘의 자취 위에 태어나 그 배경 속에서 걸음마를 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유다 예배에 동참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거기서 멀어져 갔다.3)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구약성서와의 연속적이면서 동시에 불연속적인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교적 삶의 참신성에 대해 점점 더 자각하게 되었다. 고유의 특성에 대한 - 또한 전례의 영역에서도 - 이런 자의식의 확립은, 70년에 발생한 예루살렘 대성전의 파괴 이후에 최고조에 도달한다.
유다기원을 부정하지 않으며, 아니 오히려 그것과 관련을 갖고, 사도교회는 새로운 예배 형태를 창조하니, 그리스도교 전례의 발전은 거기서 그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 중에 중요한 것들을 여기서 살펴보자.
신약성서가 공동체의 전례거행에 대해 말할 때 지속적으로 '모이다'와 '함께 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마태 18, 20; 1고린 11, 17.20.33-34; 14, 23.26; 사도 4, 31; 20, 7-8; 히브 10, 25; 야고 2, 2 등 참조). 신자들이 함께 모이는 것은 그리스도교 전례의 뜻 깊은 요소이다.4) 예루살렘의 초기 공동체는 처음부터 시간기도를 위해 대성전에 모였다. 그와 동시에, 특정한 집(=교회의 집domus ecclesiae, oikoi ekkles as)에서도 모였고, 그 모임은 시간이 갈수록 그 중요성이 더해갔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었다"(사도 2, 46). 성서의 다른 부분에 비추어 볼 때 - 비록 대부분의 본문이 일상의 종교적 식사인지 혹은 성찬을 다루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할지라도 - '애찬(아가페 식사)' 혹은 '성찬'(1고린 11, 17-34 참조)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1세기에 특히 유다기원 공동체에서 성찬례는 일상의 식사와 함께 행하여졌다. '성찬', '애찬'과 함께 '사도들의 가르침', '형제적 친교' 그리고 '기도'가 있었다(사도 2, 42.47; 4, 24-31; 12, 5 참조). 이런 총체적 상황에서, 유다의 기도 형태들이 - 축복의 기도birkat ha-mazon나 어휘들: 알렐루야alleluia(묵시 19, 1-6 참조), 아멘amen(1고린 14, 16; 묵시 5, 14; 7, 12; 19, 4 등), 호산나osanna(로마 16, 27; 갈라 1, 5; 필레 4, 20; 1디모 1, 17 등) -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특히, 주님께서 부활하심을 매주의 기념일로 지내는 '주일'의 전례적 모임은 곧 특별한 중요성을 가졌다(1고린 16, 2; 사도 20, 7; 묵시 1, 10 참조). 파스카의 연례적 거행은 나중에 나타날 것이다. 파스카 주일은 곧 연례적 파스카 기념일로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여러 성서 본문 중에 사도 바오로가 유다의 파스카 예식을 언급하는 고린토 전서에서 그것을 추론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넘이절(과월절) 양으로서 희생되셨습니다"(1고린 5, 7). 이 본문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유다의 파스카 양의 희생을 대체한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확실히 드러나 있다.
사도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집행한다(사도 2, 38).문맥에 의하면 이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예고한 "성령에 의한" 세례이며(마태 3, 11; 마르 1, 8; 루가 3, 16; 요한 1, 33 참조), 예수 친히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이다(요한 3, 3-5 참조).
요약하면, 사도공동체는 전례의 고정된 규정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이미 고유한 전례 형태를 소유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성찬례와 세례와 기도를 위한 모임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다른 전례형태 - 안수, 병자도유, 참회 등 - 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적다.
이 시기에 전례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데 본질적인 것은 네 가지 요소이다: 1.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 2.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3.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는 그분의 현존에 대한 자각; 4. 성령의 활동.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전례적 봉사를 위한 모임과 세상에서의 봉사를 위한 모임을 서로 분리하지 않았는데, 예수께서 '거룩함(聖)'과 '세속(俗)'간의 경계를 초월하신 데 따른 영향이 여기에서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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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II-III세기의 전례
이 시기의 그리스도교 전례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저자들은 사도시대 교부들 - 디다케, 로마의 클레멘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스미르네의 폴리카르포 등 - 이다. 사도시대 교부들 중에 철학자인 유스티노 순교자의 증언은 중요하다. 그리고, 로마의 히폴리토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교회규정 - '사도전승traditio apostolica'으로 희랍제목에서 번역되는 215년경의 문서로 이것은 전통을 변질로부터 보전하려는 상당히 보수적인 노선을 따른다. - 에서 처음으로 몇몇 전례문을 찾아볼 수 있다. 히폴리토는, 전통적인 전례문을 소개하면서도, 숙련된 주교들에 의한 자유로운 기도문 작성의 권리(자율성)를 인정한다. 히폴리토를 이어 3세기 중엽에는, 세례, 성찬례 그리고 서품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라틴어 그리스도교 초기 작품을 대표하는 테르툴리아노와 치프리아노의 저작들이 아주 중요하다.
위에 언급된 저자들은 주교, 사제, 부제 서품식; 기도에 대한 규정; 성찬례; 그리스도교 입문성사; 주일; 연례적 파스카의 거행 등에 대해 동일한 소식을 전한다.
2-3세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다 히브리-아람어권 세계로부터 희랍세계로, 시리아어(아람어)와 특히 희랍어와 라틴어를 통해 전해진다. 이 때는, 교회의 삶의 다른 부분에서와 동일하게 전례의 영역에서도 '창조성'과 '자발성improvvisazione'의 시대였다. 모순적으로 보일지라도, 초세기 전례는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또한 고유하게 보편적이었으니, 사도전통이 결정적으로 정경화 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자발성'도 전통적 원칙과 규정을 -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불변의 요소 - 지키는데 충실할 것을 전제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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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IV세기의 전환
콘스탄틴 황제의 칙령(313년)은 교회에 평화를 선물했지만,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주변세상을 향해, 또 로마제국을 향해 열리도록 하였기에, 특히 도시에서 쉽지만은 않은 개종을 발생시키고, 또 그 당시만 해도 그리스도교 영역에서 어느 정도 무관했던 이교의 제의요소들에 대한 불가피한 접촉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그 영향은 전례의 영역에도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이 전례형태의 충만한 발전의 시작이다.
전례거행은, 특히 큰 도시들에서, 이제 황제와 가족들의 도움으로 건설된 "바실리카"에서 거행되었고, 그것은 전례를 더욱 성대하게 하였다. 일반 가옥(교회의 집domus ecclesiae)에서 성전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성전은 "제단"을 필요로 했다. 이제 원하던 시기에 펴던 '밥상'이라는 개념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고, 오히려 구약성서에서 언급되었고, 결코 잊혀지지 않은, 고정된 '제단'이라는 외형을 추구하게 되었다. 중요 성전 옆에는 "세례당"이 세워졌다.
황제의 뜻에 의해, 주교들은 제국의 고위관직에 준하게 되었다. 주교와 사제들에 대한 이런 사회적 평가는 또한 관료복장을 착용하도록 했고, 여기에서 전례복이 발전하게 된다. 5세기 이후 로마남성들은 옛 복식(긴옷)을 버리고 짧은 형태의 프랑스-독일 복식을 따라갔지만, 전례 직무자들은 옛 축제복장을 그대로 유지하였고, 후에 이것이 고유한 전례복식이 된다.5)
주일의 전례거행은 이제 국법에 의해 보호되었다. 4세기 후반에 부활시기와 성탄시기를 포함하는 전례주년의 최종 구조를 형성하였다.
콘스탄틴의 칙령에 의한 박해의 종결과 더불어 신앙의 증거자(순교자martiri)들은 특별한 관심과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순교자 공경은 이미 동방에서 비롯하였다. 예를 들어 약 2세기 중엽 소아시아의 스미르네의 공동체는 순교자 폴리카르포(+155 혹은 156)6) 주교에 대한 연례적 기념을 거행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순교자들의 무덤 옆 혹은 위에 세워지는 무덤성당memoria이 나타난다.
기도의 발전을 위해, 특히 일상의 시간기도의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사건은 4세기의 '수도생활monachesimo'의 성립이었다.
그 이후의 전례형성에 있어서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콘스탄틴의 평화 이후 전례, 윤리, 신학적 측면에서 점점 증대된 중심지 교회의 영향이었다. 이것이 같은 언어, 같은 지역, 같은 문화를 가지면서도 다른 특징을 가진 전례를 형성하는 기원이 되었고, 중소 도시 교회들은 중심지 교회의 모범과 실례를 따르게 된다. 큰 윤곽에 있어 단 하나의 사도적 토대에서 출발하여, 아주 넓은 자율성을 거쳐, 총주교좌 등 중심지의 모범을 따른 교회지역의 범위 안에서의 전례의 통일로 정착하게 된다.
이 시기의 변천은, 그리스도교 전례가 "영적" 예배로 존재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면서도, 몸담고 있는 주위환경의 문화, 사회,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으로부터도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전례가 고유의 특징을(혹은 특정한 국민성을) 취득하였다는 것은, 현상에 대한 비평적 시각을 막지는 않더라도, 우선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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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전례의 분류
여러 전례의 형성은 로마제국의 우방국들 안에 (로마제국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원심력이 나타난 때와 상응하니; 디오클레찌아노(재임 284-305)황제가 더욱 유연한 통치를 위해 도입한 지방분화도, 콘스탄틴 황제가 비잔틴에 황제령을 설치하고, 로마제국을 네 개의 도(道)로 분할한 노력도, 이미 시작된 하강곡선을 멈출 수 없었다. 서로마제국은 476년 로몰로 아구스톨로의 폐위와 함께 사라진다. 그후 서방에는 더 이상 황제도 제국도 없으며, 이론적으로 비잔틴의 통치권을 인정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완전히 독립적인 독일권 군주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들만 있을 뿐이었다.
로마제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은, 종교, 경제, 문화의 상황에 따라 각 교회지역으로 하여금 필요한 모든 실천규범disciplina을 재정비하도록 하였으니; 곧 여러 지방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미 5세기초에 총대주교좌는 소속 교회의 모든 생활 - 전례를 포함하여 - 의 통일성을 유지하도록 법제화되었다. 그것은 같은 지역교회의 전례적 특성을 조절한 고유전례를 성립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5세기 이전에, 어떤 주교가 다른 주교에게 전례문제를 지도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2.2.1. 동방의 고유한 전례7)
서양사람들은 리뚜르지아liturgia와 리뚜스ritus를 특별한 구별 없이 사용하지만8), 좁은 의미로 말할 때, 리뚜스ritus는 제의적인 것뿐만 아니라 한 교회의 행정과 법적 규범까지 포함한다.
3-4세기 초반의 전례는 지형적 위치에 따라 둘로 분류할 수 있다: '시리아-안티오키아' 계통과 '알렉산드리아' 계통. 로마제국의 지방중심이요, 여러 공의회가 개최되었던 콘스탄티노플은 특별한 그리스도교 전통을 가지지 못해, 거의 모두를 - 전례를 포함하여 - 안티오키아로부터 전수 받는다. 이렇게 하여 5-6세기의 교회분열 이후 결정적인 전례분류들이 형성되는데, 더욱 중요한 전례들을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2.2.1.1. 동 시리아 전례집단 혹은 시리아-메소포타미아 전례집단은 에페소 공의회(431)이후 네스토리오 주의에 동조한 교회들이다. 이들은 484년경 뫂수에스타의 테오도로의 신학을 보존하기로 결정한다. 그후 약 8세기동안 서 시리아-그리스에 대해 폐쇄적인 교회정책을 편다. 이것이 이 전례집단이 초기 전례형태를 유지하는 이유이다. 네스토리오 교회의 원대한 선교활동은 수세기 동안 유지되어온 인도 서남해안의 교회로 영역을 넓혀나갔다.
2.2.1.2. 반 칼체도니아 전례집단은 칼체도니아 공의회(451)의 결정을 거부한 교회들이다. 서 시리아, 아르메니아, 곱트, 이집트 교회 등을 포함하기에 아주 복잡한 전례집단이다. 교의와 교계제도에서는 안티오키아의 영향이 발견되나, 전례에서는 비잔틴의 영향이 감지된다.
2.2.1.3. 칼체도니아 전례집단은 칼체도니아 공의회에 동조하는 칼체도니아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좌와,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좌 소속 교회의 일부를 포함한다. 이 전례집단은 비잔틴 전례의 요소를 항상 더 받아들였다. 성화상논쟁 때, 팔레스틴의 수도환경의 전례가 잘 정돈된 비잔틴 전례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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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서방전례들
4세기부터 서방전례에 대한 간접증언은 아주 많이 증가하나, 전례본문은 더 나중에 나타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전례전통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2.2.2.1. 로마전례 - 로마전례의 고유하고 참된 본문은 상대적으로 늦게 전해져온다. 가장 오래된 본문은 [베로나 성사집sacramentarium veronese](6세기 후반)이며, 미사를 위한 기도문들을 적어놓은 소기도서libelli missarum들을 사회달력에 맞추어 정리했으나, 훼손이 심해 1월에서 3월까지의 부분(사순시기와 부활시기)은 포함되어있지 않다.
그리고 나서 7세기 말엽 파리 근교에서 필사된 [젤라시오 성사집sacramentarium gelasianum vetus]이 있다. 이 성사집은 로마의 전례를 소개하며, 가장 오래된 기도문들은 6세기 로마 전례의 기풍을 간직하고 있다. 원본은 로마의 본당titulus의 전례에 도움을 주기 위해 편찬된 것으로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최초의 참된 의미의 성사집이다. 이 성사집은 성탄 전야로부터 모든 전례 주년을 포함하고, '전례주년temporal'과 '성인축일sanctoral'을 분리하였으며, 또한 다양한 예식서를 포함하고 있다.9)
[그레고리오 성사집sacramentarium gregorianum]은 그 제목 때문에 보통 그레고리오 대교황(재임 590-604)의 작품으로 간주하지만, 호노리오(재임 625-638)교황 때 편집된 것이며, 교황집전 전례를 드러낸다. 이 성사집에서는 '전례주년'과 '성인축일'이 서로 섞여 있으며, 몇몇 주일들은 바로 직전에 거행된 축일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10) 하드리아노 1세(재임 772-795)교황은 개정 표준판을 요청한 샤를르 대제11)에게 [그레고리오-하드리아노 성사집sacramentarium gregorianum hadrianum]을 보낸다. 프랑스 교회의 필요성에 의해 아니안의 베네딕토(+821)에 의해 마련된 부록, '후꾸스꿰Hucusque'가 덧붙여진다.
그리고 8세기와 그 이후에 다양한 형태의 혼합 성사집들이 무수히 나타나는데 이들은 [8세기 젤라시오 성사집]이라 불린다.12)
로마의 성사집들이 상대적으로 늦게 나타난 것에 비교할 때, 그 본문들 중 몇몇은 레오 1세(재임 440-461), 젤라시오 1세(재임 492-496), 비질리오(재임 537-555) 교황들에게까지 그 작성시기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오늘날 로마 전례에서 사용하는 전례기도문의 대부분은 바로 이런 옛 전통들에서 취해진 것이다.
순수 로마 전례의 요소를 동방전례들이나 다른 서방전례들의 것과 비교해 보면, 로마 것의 정확하고, 절도 있고, 간결하고, 장황하지 않고, 덜 감성적인 단순성과; 거룩하고 동시에 인간적이고 영적이며 문학적인 위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신학의 특징적 요소 중에 강조할 것은, 기도들이 통상적으로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 하느님께ad Patrem per Christum in Spiritum Santum' 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 감사기도canon romanus'는 그것이 유일한 양식으로 있다는 점에서, 스페인 전례나 갈리아 전례 혹은 동방 전례의 여러 감사기도문들과는 구별된다.
2.2.2.2. 아프리카 전례 - "갈리아(프랑스) 전례와 스페인 전례는 동시에 형성되었고, 미사 구조에 있어 초기요소를 간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북서 아프리카 전례로부터 유래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널리 퍼져있다. 북서 아프리카 전례는 그리스어 사용기를 거쳐서 라틴어 사용기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 전례를 그저 로마 전례의 한 부류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은, 로마는 다마소 교황(+384) 시대까지 희랍어를 사용한 반면, 아프리카는 이미 치프리아노(+258) 때부터 라틴어를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이 전례의 본문들은 유실되고 없다. 단지 3-4세기의 아프리카 교부들의 저작에서 간접증언만 발견될 뿐이다.13)
2.2.2.3. 갈리아(프랑스) 전례 - 갈리아 전례에 대해, 아를르Arles의 체사리오Cesario 성인(+542)과 뚜르Tours의 그레고리오(+594)의 강론집에 포함된 몇몇 정보들을 발견할 수 있다. 6-7세기의 순수 갈리아 전례를 증언하는 고유하고 참된 문서들은 모두 조각들이다. 이 전례는 프랑스 지방에서 거행된 것으로, 통일성을 부여할 뛰어난 중심교회가 없는 탓에 아주 많은 지방색을 가지고 있다.
갈리아 전례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로마 전례의 절제와 단순성을 찾아볼 수 없으며; 기도문들의 종류가 많아졌고, 문체는 장엄하고 화려한 색조를 풍기며 때로는 장황하고 지루한 느낌마저 준다; 기도는 자주 성부 하느님이 아니라 성자 그리스도를 향한다; 예식들은 항상 더 많은 요소를 포함한다. 성찬례에 관해 살펴볼 때, 성찬제정문 바로 앞 뒤 부분을 포함하여 매일 매일 바뀌는 기도문으로 구성된 감사기도의 구조는 특징적이다. 그것은, 감사기도의 전체적 윤곽 속에 전례주년의 주제와 고유의 전통적인 주제 사이의 혼합을 이루게 한다. 이것으로 갈리아 전례는, 고정된 양식의 감사기도를 가진 로마, 암브로시오 전례와 구분된다. 스페인 전례는 갈리아 전례와 더 유사하고, 오히려 더 발전되고 완성된 부분도 있다. 자신의 영토에 로마 전례를 공식적으로 도입키로 한 샤를르 대제의 결정으로, 9세기 초 갈리아 전례는 결정적으로 사라지게 된다.14)
2.2.2.4. 스페인 전례 (모자라비 전례) - 이 전례는 이베리아 반도의 정치적 통일기인 6세기에 나타난 전례이며, 그레고리오 7세(재임 1073-1085)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거행되었다. 몇 년 후 톨레도Toledo를 아랍세력으로부터 탈환하였을 때(1085), 아랍인들의 통치에서도 신앙을 지킨 이들(=모자라비mozarabi)을 위해 이 도시의 6개 본당에서 옛 스페인 전례를 계속해서 사용하도록 허락되었다.
스페인 전례의 형성과 발전은, 1. 한편으로 스페인 교회의 위대한 교부들의 교리적 문학적 작품연대와 함께 한다: 우르젤의 유스티노(6세기 초반), 레이다의 요한(7세기 중엽), 레안드로(+600), 그의 동생인 세비야의 이시도로(+636), 그리고 톨레도의 힐데폰소(+667) 등; 2. 다른 한편, 무수한 스페인 공의회의 법제화 덕분이다. 특히, 비시고틱 시대(540-681)에만 공의회가 24회 개최되었다.
스페인 전례의 특징은 갈리아 전례의 특징과 아주 유사하다. 고유한 내용을 살펴볼 때, 스페인 전례의 기도문에서 삼위일체와 강생의 신비에 대한 가톨릭 교리의 핵심을 명백히 하려는 교의적 염려를 찾아볼 수 있다.15)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82년 스페인 전례의 예식서들을 개정하기 위한 전문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88년 새로운 [스페인 미사경본Missale hispano-mozarabicum]은 경신성사성으로부터 'ad interim'인준을 받았다.16)
2.2.2.5. 암브로시오 전례 - 이 전례는 밀라노라는 중요한 지역교회(교구)의 생생한 전례로 존재하기를 그쳐본 적이 없기에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다. 이 전례가 그저 단순하게sic et simpliciter 암브로시오Ambrogio(+397) 성인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음에도, 그의 이름에 따라 명명되었다. 암브로시오 전례의 필사본들은 - 미사 기도문이나 전례력이나 - 이미 로마 전례의 영향을 많이 받은 9세기 이후의 것들만 전해져 온다. 그러므로 이 문서들은 부분적으로만 암브로시오 전례 고유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동방과 갈리아 전례와의 접촉을 드러내는 요소도 있다.
암브로시오 미사의 구조는 로마 미사의 구조와 아주 유사하다. 몇몇 저자들은 아프리카-갈리아-스페인 전례와의 접촉점이 되는 더욱 초기의 공통구조를 재구성해볼 수 있는 요소가 여기에 있다고 주장한다.17)
1970년 암브로시오 전례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일을 맡은 위원회가 설립되었는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따른 전례개혁의 첫째가 되었다. 1976년에 [미사경본Messale ambrosiano secondo il rito della santa Chiesa di Milano]이, 그리고 1981년에 [시간전례서Diurna laus. Salterio a uso delle comunit di rito ambrosiano]가 발간되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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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중세의 서방전례
중세 서방 전례의 발전은, 독창적인 창작보다는 적응이나 복제에 불과했다. 창조성은 오히려 전례행위의 주변에서 나타났다: 신심행위, 부속가, 신자들과 또한 전례집전자를 위한 사적기도 등. 전례의 다수성은 16세기 트렌토 공의회에 의해 성립될 단일성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2.3.1. 프랑크-카롤링 시대
7세기와 8세기 전반에 알프스 산맥 이북에서 로마 전례와 갈리아 전례의 혼합이 이루어 졌으니, 이때가 바로 전환기이다. 로마 전례에 대한 일반적인 호감과, 많은 주교와 수도원장의 갈리아 전례에 대한 불만(지나치게 다양한 형태), 널리 퍼진 부정확함 등이 원인이었다. 영국출신 보니파시오(+755) 주교는 프랑크 지역 백성을 로마전례에 합치시키려 했고, 그의 친구인 멭츠의 크로데강고(+766) 주교도 같은 생각을 가졌다. 이런 의도는 정치권의 노력을 방향 지웠다. 뻬삔 왕은 754년 자기 왕국에 로마 전례를 의무화하였고, 그런 노력은 785-786에 샤를르 대제에 의해 완성에 도달한다.19)
그러나 사실상 로마 전례라고 생각하고 도입한 것은 이미 갈리아적 요소가 섞인 것들이었고, 그 후에도 갈리아적 적응과 변형을 가하게 된다. 그리하여 새로 정비된 전례의 형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여러 가지 요소들의 발전; 풍부하고 다양한 기도문들; 새로운 양식(더 길고, 좀 더 장황하고, 극적인 표현들). 성찬의 전례에 대한 우의적allegorica 설명은 그 이해를 결정하였다. 이런 우의주의allegorismo의 대표적 인물은 분도회원인 알퀸Alcuin(+804)과 그의 제자요 샤를르 대제의 주요고문인 멭츠의 주교 아말라리오Amalario(+814)였다. 우의주의는 전례적 상징과 표징의 의미를 이상하고 환상에 찬 성서적 접근을 통해 설명해보려고 시도함으로써, 전례예절들을 한낱 대중적인 구경거리의 하나로 전락시키고 만다.
샤를르 제국의 붕괴는 경제적 영향을 끼쳐 전통적 경제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봉건제도feudalismo라는 새로운 경제상황은 또한 전례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9세기의 전례-신심적인 개인주의의 전반적인 배경이 된다. 신심주의devozionalismo는 전례의 대용으로 자리잡는데, 그것은 강한 종교적 심성과 자연스러움을 강조하여 제의적 표현과 신심행위를 단 하나의 공간으로 마련하려고 노력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심을 왜곡하고 또한 시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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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로마의 몰락과 독일의 영향
로마교회는 카롤링 제국의 붕괴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로마는 교회법적 활동을 계속했지만 지도력이 약해져, 거의 어떤 교회도 무엇을 조절하거나 개선하기 위해 더 이상 로마에 문의하지 않게 되었다.
로마가 자신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있을 때, 독일 문화권이 탄생하고 성장하였다. 제국의 붕괴로 독일은 옛 서양문명의 모든 유산을 차지하게 된다. 이것은 오토Otto 1세(+973)가 권좌들 차지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스스로 옛 카롤링 제국 체제의 개혁자로 자처했지만, 실은 보수주의자였다. 영적 분야에 있어서 그의 아내 아델라이드Adelaide가 적절하게 도와주었다. 우리는 전례분야에 미친 이들의 영향을 살펴보아야 한다.
앞에서 언급된 성사집들은 전례의 순서에 대한 설명 없이, 대체로 전례 거행에 필요한 기도문들만 수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식서들]ordines은 고유하고 참된 의미의 예식서이며, 대다수는 알프스 산맥 이북에서 형성되었다.
서방전례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작품은 약 950년경 마인쯔Mainz의 성 알바노Albano 수도원 수사들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나중에 [로마-독일 주교예식서Pontificale romanum-germanicum]라 불리는 것으로, 소위 [옛 로마 예식서Ordo romanus antiquus]에 갈리아식 본문들이 첨가되어있다. 10세기 후반(정확하게 오토 1세가 황제대관을 위해 로마에 간 962년)에 이 전례서는, 교회적 문화적으로 아주 어려운 시기에 있던 로마에 되돌아온다. 로마는 9-10세기 초 간신히 필사본들을 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은 순수 로마 전례일 것이라는 추정과 함께, 신속히 받아들여졌다. 동일한 사건이 (가져온) 다른 필사본들에게도 일어난다. 순수 라틴 양식으로 로마를 출발한 전례서들은, 갈리아와 독일에서 손질되고, 변해서 돌아왔지만, 결국 로마의 고유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옛 로마 전례는 갈리아-독일식 옷을 입고 로마에 돌아오고, 여기부터 '교황청 전례'라는 서방의 통일된 전례를 향한 걸음이 시작된다.
9-11세기 동안 크게 번진 '성체성사논쟁'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카롤링 시대와 그 이후, '상징'과 '실재'는 마치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생각되었다. 상징은 지시해주는 사물로 생각하여, 구별되는 다른 것을 향한 주의를 끌게 하는 사물로 생각하였고; 실재는 만질 수 있고 잡을 수 있는 물리적 실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성체성사논쟁의 저변에 깔린 배경이며,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이 시대의 성찬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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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그레고리오 개혁
그레고리오 7세(재임 1073-1085) 교황과 함께, 교회생활 뿐만 아니라 전례에 대한 쇄신이 로마에서 시작된다.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시작된 개혁은 그 바탕에 성직계를 개화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배경이 전례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설명한다. (그러나 전례를 사제직에 한정된 고유한 것으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전례는 사실 그 집전자에게 성성(거룩함), 생활의 충실성, 품위를 요구한다. 이런 방식으로 성직계의 잃어버린 품위를 다시 확립하도록 하였다.
교황권위에 대한 강한 자의식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 그레고리오 개혁은 로마 주변의 모든 교회의 실질적인 일치를 보장할 목적으로 중앙집중화의 과정을 밟는다. 이런 배경에서 스페인 전례의 폐지, 성인 교황들의 축일을 모든 교회에서 거행토록 한 결정, 주교서품식에 교황에 대한 충성서약의 도입 등이 진행된다.
그레고리오 개혁에 따른 전례서 개정을 이끈 원칙인 '복고'는, 역사적 실제 상황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로마, 갈리아, 독일 전례의 근본구조를 받아들이고 체계화하는데 그친다.
이 모든 개혁의 교회론적 배경은 교계적이고 동시에 교회법적이다. 평신도들은 강하게 성직화된 전례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전례에서 성직자들이 차지하는 우위를 감소시키려고 하지 않았고, 그 이해를 도우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사제직에 대한 평판을 높이고; 전례 행위 앞에서 신비에 대한 감각을 계발하고; 신심행위(비록 전례의 옷을 입었지만)에 자리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레고리오 7세 이후 라틴교회의 개혁은, 일찍이 샤를르 대제가 자신의 제국을 위해 실현했던 전례적 일치를, 교회론적 원칙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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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보편전례를 향하여
그레고리오 7세가 애호한 '서방전례의 일치'라는 이상은 세월이 지나면서도 다른 교황들에 의해 계속 유지되었다.
2.3.4.1. 혼합 혹은 총합 전례서 - 그레고리오 7세의 후계자들은, 라테란 대성전의 전례로부터 독립한 교황전용 경당(소성당)의 전례에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이후의 개혁은 교황청 소성당의 전례라는 영역에서 실현된다.
인노첸시오 3세(1198-1216)의 전례적 업적은 무엇보다도 전례서의 개정에 치중되어있다. 원래 성찬례나 시간전례에 직무를 맡은 사람들은 각자가 맡은 부분에 대한 전례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줄어들어 모든 것을 사제가 맡게 되었고, 그 결과 사제의 비중은 점점 더 커져갔다. 사제는 이제 실질적으로 유일한 행위자가 되었고 평신도들은 더욱 수동적으로 참례하게 되었다. 이 때, 미사의 다른 부분 - 독서(처음에는 독서집lectionarium), 응송(처음에는 응송집antiphonale) - 들도 (기도문들을 모아놓은) 성사집sacramentarium 안에서 찾을 수 있게 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이 과정의 마지막 결과는 13세기의 '총미사경본missale plenarium'이다. 사제 개인이 드리는 미사를 위해 아주 유용하게 준비된 이 책은 보편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13세기의 소위 [교황청 관례에 따른 미사경본missale secundum consuetudinem curiae romanae]인데, 작은 형제들(프란치스꼬회)이 받아들여 그들의 선교여행에 항상 지참하고 다니는 덕에 곧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20)
미사경본이 탄생한 것과 같은 과정이 교회의 기도를 위한 전례서에도 똑같이 발생한다. 편의를 위해, 개인적인 시간기도를 위해 등의 이유로, 시간전례를 바치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담아 아주 작은 한 권의 전례서로 편찬하였는데, 이는 '소성무일도breviarium'라 불리게 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로마 교황청 관례에 따른 소성무일도Breviarium secundum consuetudinem romanae curiae]이며, 1223년 공식적으로 이 성무일도를 받아들인 작은 형제들(프란치스꼬회) 덕분에 곧 널리 전파되었다.21)
2.3.4.2. 중세 말기의 전례생활 - 프랑스 비엔느Vienne 공의회(1311-1312)와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사이의 시기에 전례 생활과 영성이 아주 많이 쇠약해지는 현상이 점진적으로 나타난다. 교황의 아비뇽 천도와 서구 교회에 대립교황이 생기는 최악의 사건들을 생각하면 수긍이 간다. 성직계와 신자들 사이에도 분열이 생기는 데 - 몇몇은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 성직계는 세속화되고, 신자들은 대중 신심을 불태우는데 전념하게 된다.
이 시기 신심은 감정의 강렬함, 내적 세계에 대한 관심의 증대, 열정의 극대화 등을 대체로 나타낸다. 예를 들어, 성체를 구체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등, 감각적으로 경험하려는 경향; 객관적 가치보다 잘못 이해된 것이라도 주관적 차원에 대한 강조; 예술은 복잡해지고; 대중 신심과 전례에서는 반복함으로 (예를 들어 미사를 반복해서 참례하는 등) 만족하려는 경향 등이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 신심의 새로운 형태가 나타나는데, 더욱 친밀한 느낌에 의한 더욱 실재적인 신심으로, 예수의 삶의 더욱 인간적이고,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다. 같은 상황이 마리아 신심의 영역에서도, 또 일반적으로 모든 성인 공경에서 발생한다. 주목할 것은, 13세기와 그 이후 대중 신심은 전례적인 신심과 비교해 볼 때 항상 더 자율적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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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트렌트 공의회와 전례
15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하부 - 평범한 사제들, 수사들, 신자들 - 로부터 영적 개혁의 소망이 나타난 것인데, 반면에 고위 성직계는 영적으로 부족하거나 나빠졌고, 더 고위층은 전통 종교심과 인문주의에 따른 삶의 개념을 혼합하고 있었다.
2.4.1. 근대 신심devotio moderna
이런 배경에서, 14세기 말 네덜란드의 그루트Groote(+1384)가 주도하고 곧 서유럽에 퍼져나간 근대 신심운동을 보아야 한다. 근대 신심의 특징은 고행의 실천, 체계적인 기도생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묵상 등이다. 이 영성의 고전적 작품은 켐피스Kempis의 토마스(+1471)가 지은 [준주성범Imitatio Christi]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건전한 영적 혁신이었으나, 전례의 테두리 밖에 머물고 만다. 열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신심에서 - 주변적인 영역이지만 - 그들의 영성생활을 위한 영양분을 탐색하고 발견한다.
2.4.2. 트렌트 공의회의 전례 개혁
교회의 위기 상황에서, 교회의 "머리와 지체로부터"의 개혁에 대한 열망이 16세기 초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근본적인 변화의 주장과 엄중한 고발을 서로 연결시킬 수 있었고, 그런 방식으로 광범위한 동의와 협조를 획득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신학적 관점뿐만 아니라 전례거행의 측면에서도 로마전례를 부정하고 고발하였다.
많은 어려움을 겪고, 마침내 트렌트 공의회(1545-1563, 여러 번 중단되었음)를 개최하게 되었다. 공의회는 우선 프로텐스탄트 개혁자들로부터 제기된 보다 시급한 교회의 문제를 다루어야 했고; 마지막 회기가 되어서야 겨우 전례개혁을 다루기 시작했다.22) 관련 위원회의 작업이 끝난 후, 공의회는 제 22회기에서(1562년 9월 17일) 교의 교령 "미사의 거룩한 희생에 대한 교의와 신조"와 두 개의 규율 교령을 발표하는데, 그 중에 중요한 것은 "미사 거행에 있어서 준수할 것과 피할 것에 대한 교령"이다.23)
교의 교령decretum dogmaticum은 미사의 희생제사적 성격과 산 이와 죽은 이을 위한 미사의 속죄 효과에 대해 정의한다. 또한, 사제 홀로 영성체를 하는 미사, 백성이 참석하지 않는 미사, 그리고 성인들을 기념하는 미사의 합법성을 선언한다. 끝으로 미사기도문의 무류성(오류에 빠지지 않는 자유로움)을 선언한다.
규율 교령decretum disciplinare은 보다 드러난 잘못과 남용을 바로잡으려고 한다. 불경스럽거나 전례를 방해하는 모든 태도를 단죄하는 이외에, 천박하거나 선정적인 모든 종류의 노래와 음악을 성당 안에서 금지하였고; 사제가 임의로 미사의 예절과 기도문을 선택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미신적 색채를 풍기는 미사의 "숫자적" 참례는 단죄되었다. 끝으로 주교들은 전례의 질서를 확립할 의무와, 특히 미사예물에 대한 남용을 막을 의무를 지게 되었다.
전례서의 개정은24) 오랜 작업과 민감한 결정들을 요구하기 때문에, 공의회가 그것을 달성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 준수할 원칙과 기준들을 제시하면서 그 개정의 임무를 교황에게 위임하였다. 개혁은 몇몇 전례서에 한정할 이유가 없었기에 전례의 모든 영역에 보편적으로 확대되었다. 개혁은 또한 몇몇 나라에 한정될 의무가 없었기에 모든 서방에 유효한 표준이어야 했다. 이런 기준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의 소망과 합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 특히 프랑스는 자신들의 부흥기에 고유한 내부 규정을 갖기를 원하였다.
전례는 지나치게 사적이거나 의심이 가는 후대의 첨가를 제거하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했고, 또한 전통의 흐름에 따라가야 했으며, 끝으로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비판과 개정에 의해 전례에 야기된 혼란한 상태를 평정하여야 했다. 성인 축일과 기원 미사의 수를 줄여, 미사와 시간전례의 우선권을 전례주년에 되돌려 주어야 했다. 또한 미사통상문을 고정시키고, 의무적으로 지켜야 할 일반적 지침도 만들어야 했다.
공의회의 이러한 결정은 곧 실행되었다. 비오 5세 때인, 1568년에 [로마 소성무일도Breviarium romanum]가 발간되고, 1570년에 [로마 미사경본Missale romanum]이 발간되었다. 이어서 다른 전례서들도 발행되었다. 이들을 소개하는 교황칙서는, 200년이상 경과한 고유의 관습을 가진 교구나 수도회를 제외한, 모두에게 이 전례서들을 사용할 것을 의무로 규정하였다. 1587년 식스토 5세 교황에 의해 설립된 '전례성Congregatio riti'은 신자들의 전례규정 준수를 지도, 감독하였다.
트렌트 개혁의 몇몇 "폐쇄성"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프로테스탄트들의 태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몇몇 올바른 개혁을 제시했다: 라틴어가 아닌 토속어에 의한 예절; 두 가지 형상에 의한 영성체; 미사 안에서 거행되는 영성체; 미사의 거행에 존재하는 지나치게 사적요소의 제거; 특히, 남용의 제거 등이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교회전통의 고유한 유산에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결국,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내적 태도에 대한 논쟁 속에 많은 것들을 (몇몇 올바른 것들도 함께) 거부한다.
트렌트의 개혁업적은 무엇보다도 15세기의 위기로부터 전례를 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한정된 작업이었다: 당대의 혼란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전례를 고정시켰지만, 전례를 실생활로부터 멀어진 상태로 만들고, 신자들로 하여금 영적 갈증을 대중적 신심의 형태로 해소하게 만들었으며, 이렇게 해서 의식하지 못한 채 바로크 시대의 종교문화의 기원을 제공한다. 다른 한편, 성사의 상징들에 대한 어떠한 재평가 작업도 없이 최소한의 합법성을 선언하여, 예를 들어, 축성된 빵으로만 이루어지는 영성체, 단순히 "유효성"만 추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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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바로크 시대의 전례
바로크는 17세기의 문학과 예술에서 나타난 풍미와 양식인데, 기이하고, 관습에서 벗어나고, 과장되고, 장식적인 경향을 가진다. 이것은 트렌트 공의회와 그것에 충실한 실천가들, 즉 당대의 위대한 교황과 주교들에 의해 개선된 그리스도교 정신 속에 성장한 것이다. 교회의 신앙을 구했고, 진리 안에 머물러 있음에 대한 자각의 표현이어서, 승리와 성취의 감격이 엿보인다. 바로크 문화는 근본적으로 축제 분위기이다.
삶의 바로크적 의미는 교회의 공식 전례를 항상 더 거창하게 하였다. 미사는 '눈과 귀를 위한 만찬'처럼 여겨졌다. 전례는 신자들이 관람하는 공연 - 위대한 왕의 궁전에서의 공연 - 처럼 여겨졌다. 이미 아빌라의 테레사(+1582)는 하느님을 '전하'라 부르곤 하였다. 이 화려한 형태는 특히 '주의 성체 성혈 대축일Corpus Domini'의 행렬, 수많은 간구, 순례, 성화에서 나타나다. 개인주의를 중세와 비교해 살펴보면, 지나친 남용들이 사라진 것을 제외하고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 미사 중에도 신자들은 묵주기도나 수많은 기도서들에서 발견되는 신심기도들을 바치곤 하였다. 신자들에게 미사통상문을 돌려주려고 불어로 번역했던 프랑스의 사제 부와셍Voisin의 시도는 알렉산드로 7세(1655-1667)에 의해 '신성모독'으로 단죄되었다.
바로크 시대의 사건 중에 긍정적으로 기록할 것은 전례학의 발전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특히 이태리와 프랑스에서, 전례원전들과 그와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서적들을 출판하였다. 또한, 17세기의 프랑스 영성에는 전례로부터 영감 받은 요소들이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베륄르의 베드로(+1629)의 영성에서는 - 특히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른 교부들을 연구하였는데 - 강한 '하느님 중심주의Teocentrismo'를 발견한다: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일체로."25)
17세기 후반의 유럽적 양심에는 계몽주의를 향해 개방되는 위기의 운명이 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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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계몽주의
계몽주의illuminismo는 18세기에 유럽에 나타난 철학적 문화 운동인데, 인간적 경험의 모든 가능한 영역에 이성적 분석을 적용하면서, 미신, 선입견, 무지를 타파할 것을 제안한다.
이 문화의 영향 아래 전례는 사목을 위한 유용성의 관점에서 단순하게 파악되었고, 공동체적 성격이 강조되었으며, 단순성과 합리성에 더욱 도달할 것을 도모한다. 바로크 문화에 반대하여, 전례의 본질적 논리를 향한 길을 찾는다. 사효성opus operatum의 잘못되고 지나친 적용에 반대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의 인효성opus operantis의 참된 가치를 밝히려 한다.
이런 배경 속에 전례 개혁의 몇몇 시도들이 있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에는 로마의 인준을 받지 않은 프랑스 지방 전례liturgia neo-gallicana들이 나타난다. 피스토이아의 시노드(=대의원회의, 1786)와 같은 전례개혁의 다른 시도들은, 교의적 단죄에 의해 소멸되었다. 1780년부터 피스토이아와 프라토의 주교였던 시피오네 릿치Scipione Ricci에 이해 주도된 이 시노드는 긍정적인 면들이 없지 않지만; 이들은 얀세니즘의 영향을 받았으며; 교황의 권위에 대해서나, 자신들이 아끼는 전통에 깊이 연관된 신자들에 대해서나, 돌발적이고, 정돈되지 못하고, 부적절하고, 무례하게 처신하였으며; 특히 전례의 개혁을 위한 적절한 준비가 심리적으로도 교의적으로도 되어 있지 않았다.26) 이들과 다른이들의 시도들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것을 주도하는 이들의 약간은 이단적이 경향과 지나친 이성주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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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전례와 19세기의 가톨릭 부흥
19세기 초,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마치 추의 왕복운동처럼 낭만주의Romantismo가 나타난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옹호하고, 감수성과 환상으로부터 영감 받은 개인주의와 역사적, 전통적 예배에 근거한 감성을 옹호한다. 보다 많은 경우에 낭만주의는 전례를 마치 역사적 논거로 혹은 미적으로 마음에 드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전례의 본질은 이 사조와 완전히 별개였다. 낭만주의는 그 자체로 가톨릭적인 운동이 아니었고; 비록 몇몇 낭만주의자들이 나중의 가톨릭 부흥에 동참했고, 가톨릭 부흥에서 낭만주의적 요소들을 가끔씩 발견하기는 하지만, 이것과 후대의 가톨릭 부흥은 동일시 될 수 없는 것이다.
올바른 개념으로, 가톨릭 부흥이란 계몽주의 동안 잃어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중세 초기와 또한 로마와 긴밀한 결합을 추구한다. 이런 태도는 전례에 대한 관계를 또한 특징 지우는데, 존경해야 마땅할 가치가 있는 로마전례의 원형을 발굴하고 계발하기를 원하고, 전례를 통해 열정을 회복하기를 원한다. 이 태도의 특출한 대표자는 베네딕토회 솔렘Solesmes 수도원의 창립자요 원장인 프로스페 게랑제Prosper Gu ranger이다. 게랑제의 근본적인 직감은, 전례를 교회의 기도로 표현한 그의 작품 [전례주년L Ann e liturgique]에 나타난다. 사실 전례는 모든 학파의 이론이나 방법론들을 초월하여 그리스도교 기도의 진정한 모범이다.
이 가톨릭 부흥기에 후대의 전례쇄신을 위해 중요한 것은 전례의 역사에 대한 학문적 활동이다. 교부들과 원전들에 대한 저작들이 광범위하게 출판된다: 미녜Migne는 라틴 교부문헌들과 희랍 교부문헌들에 손댔고, 빠르게 출판하였다. 이 때, 가톨릭 부흥의 단계에서 보통 일방적으로 찬양된 중세-트렌트의 전례에 대한 더욱 비평적인 사고의 싹이 돋기 시작한다. 또한 주목하여야 할 것은 20세기초의 기념비적 출판인 [그리스도교 전례와 고고학 사전Dictionnaire d arch ologie chr tienne et de liturgie]이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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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20세기의 전례운동28)
21세기의 전례운동은 자율적이었고, 교계제도의 기관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보다는 통제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전례운동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내부적으로 교황들의 업적과 신학자와 사목자들의 활동으로 구별해 볼 수 있다. 비오 10세의 자의교서 [시급한 일들 중에서Tre le sollecitudini](1903년 11월 22일)는 "교회가 거행하는 공적이고 장엄한 기도에 대한, 그리고 성사거행에 대한 능동적 참여"에 대한 염려를 표현한다. 이 교서가 바로 사목적 단계에 있어서 전례운동의 진정한 시작의 토대라고 말할 수 있다. 베네딕토회 수도자인 람베르트 보두엥Lambert Beaudouin(+1960)은 이를 자신의 전례적, 사목적 활동의 화두로 삼는다. 말리네에서 열린 벨기에 가톨릭 기관들의 연석회의에서 행한 그의 연설은, 전례운동이 수도자들의 범위를 넘어, 훨씬 더 넓은 지평을 향해 열린 순간이라고 여긴다. 이 모임에서 보두엥은 전례가 가톨릭 교의의 기초적인 교리를 확립하고, 영성 생활을 자극하고 양육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례운동은 독일에 전파되었다. 전례에 대한 이해와 참여를 증진시킨 것은 특히 마리아 라흐Maria Laach의 수도원이었다: 오도 카젤Odo Casel(+1948)이 두드러진다. 그는 교부학과 종교학 연구를 통해, "전례는, '근원적 신비'인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의 구원업적과 함께 마치 구원의 운반자처럼 현존하게 되는 신비들의 거행"이라는 확신에 도달한다. 마리아 라흐의 수도자들이 신학자와 접촉하고 있는 동안에,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1968)는 '전례정신'을 젊은이들에게 확산시켰고, 피우스 파르쉬Pius Parsch(+1954)는 오스트리아에서 본당차원의 대중적인 전례운동을 진행하였다.
전례운동의 순탄한 항로는 수많은 토론을 불러일으킨 의심과 반대들에 부딪힌다. 이런 논쟁 속에서, 비오 12세의 회칙 [하느님의 중개자Mediator Dei]는 전례운동의 노력을 인정하고 몇몇 개념을 정확히 하는 등 전례적 요구에 대응한 결정적인 문서였다. 또한 교황은 전례의 부분적 개혁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요한 23세에 의하여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야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 글은 현재 로마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중인 대구대교구 장신호 요한보스코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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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주. 이 부분은 마티아스 아우제(Matias AUG )의 저서 Liturgia - Storia, Celebrazione, Teologia, Spiritualit , Edizoni Paoline, 1992 Milano, pp. 24-51 의 번역이다.
2) T. Klauser, La liturgia nella chiesa occidentale, Ldc, Torino-Leumann 1971; B. Neunheuser, Storia della liturgia attraverso le epoche culturali, Edizioni Liturgiche, Roma 1977; Aa.vv., Anamnesis - La liturgia, panorama storico generale, Marietti, Casale Monteferrato 1978; E. Cattaneo, Il culto cristiano in Occidente, Note storiche, Edizioni Liturgiche, Roma 19842; B. Neunheuser, Storia della liturgia, in: NDL, pp. 1450-1478; X. Basurko - J. A. Goenaga, La vida lit rgico-sacramental de la iglesia en su evoluci n hist rica, in: Aa.vv., La celebraci n en la iglesia, a cura di D. Borobio, vol, 1, S gueme, Salamanca 1985, pp. 49-203; I. H. Dalmais - P. M Gy - P. Jounel, Storia della liturgia: riti e famiglie liturgiche, in: Aa.vv., La chiesa in preghiera. Introduzione alla liturgia, a cura di A. G. Martimort, vol. 1, Queriniana, Brescia 1987, pp. 37-103; A. Adam, Corso di liturgia, Queriniana, Brescia 1988, pp. 20-59.
3) 유대 예배와 그리스도교 예배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보려면, Ch. Perrot, Il culto della Chiesa primitiva, in: Concilium, 19(1983), pp. 183-194. 보다 넓은 안목에서 살펴보기를 원한다면 다음 책을 보라: D. Syme Russell, Dal prima giudaismo alla chiesa delle origini, Paideia, Brescia 1991.
4) F. Hahn, Il servizio liturgico nel cristianesimo primitivo, pp. 40-41 참조.
5) P. Salmon, tude sur les insignes du pontife dans le rite romain. Histoire et liturgie, Officium Libri Catholici, Roma 1955.
6) Il martirio di Policarpo, 18, in: I Padri Apostolici, 위의 책, p. 170. 참조.
7) 보다 광범위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다음 책들을 참고하라: T. Federici, Le liturgie dell area orientale, in: Aa.vv., Anamnesis - La liturgia. Panorama storico generale, 위의 책., pp. 110-128; D. Gelsi, Orientali. Liturgie, in: NDL, pp. 983-1007.
8) 역주. 두 단어 모두 통상적으로 '전례'로 번역되었고, 리뚜스ritus는 몇몇 경우에 '예배, 예절'로 번역되었다.
9) [성사집]은, 카롤링 왕조와 그 이후에까지, 주교나 사제가 미사 혹은 다른 전례를 집전할 때에 필요한 모든 기도문들을 찾아볼 수 있는 전례서이다.
10) 역주. 예를 들어, 사도축일(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6월 29일) 후 1, 2, 3... 주일, 성 라우렌시오 축일(8월 10일) 후 1, 2, 3... 주일, 천사축일(가브리엘, 라파엘, 미카엘, 9월 29일) 후 1, 2, 3... 주일 등.
11) 역주. 여기에서 발음상의 문제를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학자들마다 공부한 언어권에 따라 인명과 지명의 발음이 달라진다. '샤를르' 대제의 이름은 언어권별로 '챨스', '까를로'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12) 로마 전례의 성사집과 다른 전례서들 그리고 그 편집들에 대해서 다음 책을 보라: I. Scicolone, Libri liturgici, in: NDL, pp. 701-713; 역주. 최근의 다음 연구들도 또한 참고하여야 한다: C. Vogel, Medieval liturgy - An introduction to the sources, The Pastoral Press, Washington, D.C. 1986; C. Folsom, I libri liturgici romani, in: direzine di A. J. Chupungco, Scientia liturgica - Manuale di liturgia, Pm, 1998, pp. 263-330.
13) F. Cabrol, Afrique (Liturgie ant nic enne de l ), in: DACL 1, pp. 501-619; 같은 저자, Afrique (Liturgie post-nic enne de l ), in: 같은 책, pp. 620-657 참조.
14) 더 많은 정보는 다음 책들을 참조하라: J. Pinell, La liturgia gallicana, in: Aa.vv. Anamnesis - La liturgia. Panorama storico generale, 위의 책, pp. 62-67; 같은 저자, Libri liturgici gallicani, in: 같은 책, pp. 185-190.
15) 더 많은 정보는 다음 책들을 참고하라: J. Pinell, La liturgia ispanica, in: Aa.vv., Anamnesis - La liturgia. Panorama storico generale, 위의 책, pp. 70-88; 같은 저자, Libri liturgici ispanici, in: 같은 책, pp. 190-201.
16) 교령은 Notitiae, 24(1988), pp. 671-672 참조.
17) 암브로시오 전례에 대해서 다음 책들을 참고하라: A. M. Triacca, Ambrosiana, Liturgia, in: NDL, pp. 16-52; A. Paredi, Storia del rito ambrosiano, Edizioni O.R., Milano 1990.
18) F. Dell Oro, Il nuovo Messale della chiesa ambrosiana, in: RL, 64(1977), pp. 524-623; 같은 저자, La "Diurna laus" ambrosiana, in: RL 70(1983), pp. 223-256 참조.
19) 로마 전례와 갈리아 전례 사이의 관계와 교환에 대해서는: C. Vogel, Les changes liturgiques entre Rome et les pays francs jusqu l poque de Charlemagne, in: Settimane di studio del Centro italiano di studi sull Alto Medioevo, vol. 7, Spoleto 1960, pp. 185-295.
20) M. Andrieu, Missale curiae romanae seu Ordo missalis secundum consuetudinem romanae curiae du XIIIe si cle, in: Miscellanea F. Ehrle, 2, Roma 1924, pp. 348-376.
21) P. Salmon, L office divin au moyen ge. Histoire de la formation du br viaire du IXe au XVIe si cle, Cerf, Paris 1967 참조.
22) 트렌트 공의회의 전례개혁에 대해서, 다음의 책에서 그 주요 내용을 뽑아 요약하였다: G. Colombo, Introduzione allo studio della liturgia, Ldc, Torino-Leumann 1988.
23) 본문을 보려면: COeD, 732-741.
24) H. Jedin, Il concilio di Trento e la riforma dei libri liturgici, in: 같은 저자, Chiesa della fede, chiesa della storia, Morcelliana, Brescia 1972, pp. 391-425.
25) 참고: J. Aumann, Sommario di storia della spiritualit , Dehoniane, Napoli 1986, pp. 325ss.
26) 참고: R. Pilkington, La liturgia nel Sinodo Ricciano di Pistoia, in EL 43(1929), pp. 410-424.
27) 19세기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 참고: O. Rousseau, Storia del movimento liturgico. Lineamenti storici dagli inizi del sec. XIX fino ad oggi, Edizioni Paoline, Roma 1961. 부록에 있는 다음의 글들도 함께 참고하라: S. Marsili, Storia del movimento liturgico italiano dalle origini all Enciclica "Mediator Dei"; E. Moneta Caglio, Movimento liturgico ambrosiano.
28) 참고: B. Neunheuser, Movimento liturgico, in: NDL, pp. 904-918; F. Brovelli (a cura di), Liturgia: temi e autori. Saggio di studio sul movimento liturgico, Edizioni Liturgiche, Roma 1990.
제 3 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전례
이 장은, 어떤 의미로, 전례의 본성에 대한 첫째 장과 전례의 역사에 대한 둘째 장을 완성한다. 사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서들과 - 그 중에 특히 [전례에 관한 교의헌장Sacrosanctum concilium; 이하 전례헌장]- 공의회에 따른 후속 개혁들은, 전례의 역사의 마지막 단계일 뿐만 아니라 또한 교의적으로도 중요한 동시에 교회적인 순간이다. 전례헌장은 신학적 바탕 위에 스스로를 확립한다. 이 문서의 관심은 전례 그 자체가 아니라, 전례가 표현해야 하는 신앙내용에 집중하고 있다. 전례헌장은 최초로 어떤 공의회가 전례를 신학적 전망에서 다룬 것이고, 통속적이고 희생을 요하는 예식주의ritualismo로부터 전례를 구해낸 것이다. 전례헌장의 목적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전체의 목적과 똑같이 탁월하게 사목적이다. 만약 목적이 실천적이라면, 이론이 그것을 특징짓고 정당화한다.
3.1. 거룩한 전례에 관한 교의헌장
전례헌장은 1963년 12월 4일 공의회에서 인준되었는데, 그것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공포한 첫 번째 문서였다. 서문과 제 1장에서 (구체적으로 [전례] 5-13항) 전례신학의 진정한 개론을 찾아볼 수 있는 데, 이것은 전례운동으로부터 유래한 열매를 종합한 것이다.
3.1.1. 전례헌장의 신학적 해석의 열쇠
이 책의 앞선 두 장에서 전례는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접촉을 이룩하는 것이며, 거룩한 전통의 요소로 인정되는, 불변의 부분을 포함한다는 것을 보았다. 또한 전례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덧붙여진 요소들, 즉 수많은 전통들로부터 유래하는 변화에 민감한 부분들도 포함한다. 그러나 이런 전통들조차 변함없이 보존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전례의 발전을 막았으니, 그것은 가끔씩 개별 전통traditiones들을 과대평가 하여 '단 하나인 거룩한 전통Traditio'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고찰에서, 오랫동안 특히 트렌트와 그 이후에 '고정적이고 법률적인 전례에 대한 전망'이 우세하였다는 것을 보았다. 이 시기는 홍주rubrica의 규범에 따라 외적으로 수행된 전례에 집중되었다.
전례에 대한 이런 두 개의 전망('거룩한 전통'이 아닌 '전통들'에 충실함, 법률적이고 외형적인 전례의 가치)은 지나치게 소극적이기 때문에 비오 12세의 회칙 [하느님의 중개자Mediator Dei]로부터 거부된 다음의 두 개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 '외적 개념'은 전례를 예배의 감각적이고 외적인 형태, 즉 교회의 예절과 예식들의 총합으로 생각한다. 2. '법률적 개념'은 전례를 대중적 예배로 제한하여, 교회의 권위로부터 조절된 것으로서의 전례를 생각한다.3)
전례헌장은 전례에 대한 설명을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펼친다. 그것의 전례적 설명은 일반 종교학적 관점에서 살펴본 예배의 본성이나, 예배의 거행 형태에 대한 고찰의 결론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공통적으로 따르던 이런 사고방식을 버리고, 전례헌장은 전례를 '구세사'와 같은 계시의 흐름 속에 배치한다. 구원업적은 교회에 의해 계속되고, 전례에서 실현된다(전례헌장 6 참조). 이런 방식으로 전례의 참된 '거룩한 전통'은 시간의 흐름과 장소의 변화에 따라 항상 새롭게 항상 적응하는 방식의 예절(전통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전해주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전례 개혁(발전)의 필요성과 합법성이 유래한다. 만약 교회가 모든 시대의 인류를 구원으로 이끌 임무를 가진다면, 그 자체로 역사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적응할 권한이 교회에 부여된 것이다.
'고정적이고 법률적인 전망'은 전례를 '역동적이고 신학적인 전망'에 배치함으로써 극복되었다: 전례는 우선 자신의 신비체인 교회에서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행위로 새롭게 이해되었다(전례헌장 7 참조). 바로 그리스도께서 전례와 함께 활동하시는 전례의 주인공이다. 이렇게 해서 '제의적 신비의 형태로 그리스도의 신비가 계속된다'는 전례의 고유한 성사적 노선으로 다시 돌아간다.4)
사실, 계속해서 살펴보겠지만, 그리스도의 신비와 구세사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실재가 아니라, 단 하나의 실재이다. 구세사 전체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집중되고, 이 신비는 구세사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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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전례의 본성에 대한 교의적 암시
전례의 정의, 개요가 발견되는 전례헌장의 한 문장으로 출발한다: "전례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수행으로 간주된다. 전례 안에서 인간의 성화는 감각할 수 있는 표징으로 드러나고, 그것은 각각 고유한 방법으로 실현되며, 또한 그리스도의 신비체 (전체) 즉 머리와 지체에 의하여 완전히 공식 흠숭이 수행되는 것이다"(전례헌장 7).
전례의 이러한 개념은 같은 전례 헌장의 보다 넓은 배경에서, 또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다른 문서들, 특히 [교회에 대한 교의헌장lumen gentium; 이하 교회헌장]의 기여로 완전해진 교의적 배경에서 읽혀야 한다. 전례적 신비에 대한 완전하고 상세한 묘사를 여기에서 제공하려고 감히 시도하지 않겠지만, 전례헌장이 강조하는 교의적 차원에 대해 계속 살펴보도록 한다.
3.1.2.1. 전례와 구원의 성사적 경륜: 오리제네스(+253)는 그리스도교의 전망을 신비mysterion라는 중심개념을 토대로 체계화한다.5) 그에게 '신비'는 중개된 신적 실재, 즉 가시적 표지들을 통해 나타나고 통교된 신적 실재를 말한다. 근원적 신비는 그리스도이신데, 바로 그분의 인성이 신적 실재를 드러내고 통교하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비로부터 유래하여, 말씀의 강생인 성서의 신비가 있다. 또, 그리스도의 신비로부터 구원의 표지요 도구인 교회의 신비가 유래하고, 자신의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특권적 구원 활동의 형태로 표현되는 제의적 신비가 유래한다.
4-5 세기에, '신비mysterion'라는 용어는 (동방) 그리스 교회에서 교회의 모든 전례적 활동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고유한 성사예절(세례, 성체성사 등)과 그 밖의 예절 등. (서방) 라틴 교회도 처음에는 그런 것들을 희랍 용어 미스테리온mysterion을 사용해 표현하였으나, 그 후에는 사크라멘툼sacramentum으로 번역하였다. 라틴 교부들도 이 두 용어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동일한 사물에 적용하였다: 그리스도, 성서, 교회, 성사예절과 그 밖의 일반예절 등. 그러나 12 세기와 그 이후에는 단지 7 개의 성사적 표지들만이 '성사'의 품위로 인정되었다.
이미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신학에서 교부들의 넓은 안목을 새롭게 취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성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다양한 형태와 단계로 표현되는, 교회의 더욱 넓은 '성사성' 안에서 이해되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성사적 개념을 모아 전례헌장과 교회헌장의 기초로 삼는데, "왜냐하면 십자가상에 잠드신 그리스도의 옆 가슴에서 성교회의 모든 오묘한 신비가 흘러 나왔기 때문이다"(전례헌장 5; 참조 전례헌장 26; 교회헌장 9, 48, 59 등). 그리스도께서는 강생의 형상에 따라 교회를 신적이고도 인간적으로 창립하셨고, 또 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구원이 교회전례의 핵심이요 중심인 성사들을 통하여 (그러나 다른 전례들과 분리됨이 없이) 성취되도록 하셨다.6) 전례행위에 개입되는 모든 것들 - 시간, 공간, 사람, 사물, 언어, 몸짓 등 - 은 교회의 성사성에 연결되어 있다.
3.1.2.2. 전례와 파스카 신비: 구원의 성사적 경륜 속에 전례를 배치하는 것은, 다른 여러 결과들 중에서 특히 파스카 신비를 아주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스도교 예배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지상 생애에서 시작하셨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결정적인 단계로 옮겨졌으며, 그분이 머리가 되는 교회 안에서 지속된다. 이것은 모두 전례헌장 5-6장에 묘사되어 있다.
전례헌장 5장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역사 안에 계시된 여러 시기를 묘사하는데 그 묘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계획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음을 인정하면서 종결된다. 인간의 구원은 구약에서는 그림자에 불과했지만, 하느님의 아드님의 강생으로 시작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부활-승천의 순간에 성취되었다. 강생은 점진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단순히 성탄의 사건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성모의 태중에 잉태되심으로 시작되었고, 예수의 모든 지상 생활동안 또 그분의 십자가상의 죽음에서 계속되었으며, 그분의 부활에서 그 절정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성부의 창조와 구원의 모든 계획의 중심과 축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이다. 성부의 구원계획에 이어지는 단계들을 강조하면서, 전례헌장은 이 단계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또 그리스도로부터 실현되었고, "특히 파스카의 신비 곧 당신의 복된 수난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심과 영광스러운 승천으로 완성하셨다"(전례헌장 5)고 말한다. 이 본문과 함께 그리스도의 파스카 즉 그리스도로부터 이룩된 구원의 실재(인간과 하느님의 화해, 하느님께서 완전히 영광 받으심)는 구세사의 중심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전례의 중심에도 자리잡는다.
사실,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구체화된 구세사는 그 성취, 그 실현, 그 중심을, 그 자체로는 역사적 사건이며 또한 후대에는 제의적 기념으로 거행되는 파스카에서 발견한다. 전례헌장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가 제의적 표지들을 통해 오늘날에도 실현됨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로 실현된 구원을 현재화하는 전례에 대해 설명한다(전례헌장 6 참조).
3.1.2.3. 전례와 교회 - 전례는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비체인 교회의 행위"이다. 이미 고전적 전례운동은 전례를 '교회의 예절'로 정의하였다. 또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권위 있는 문서들 - 비오 12세의 [하느님의 중개자Mediator Dei], [그리스도의 신비체Mystici Corporis] 등 - 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전례와 교회론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러나 이 문서들의 교회론은 잘 다듬어져 있음에도 교회는 '완벽한 사회societas perfecta'라는 관점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은, 정면에 교회의 본성을 신적 생명의 존재론적, 성사적, 초자연적 통교communio로서 파악하여 내세우는, '통교의 교회론'이다. 그것은 전례헌장에 분명하게, 또한 공의회 문헌 중에서 교회헌장,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Presbyterorum Ordinis; 이하 사제교령], 그리고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Gaudem et Spes; 이하 사목헌장]에 특히 잘 나타나 있다.7)
전례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례 행위는 사적 행위가 아니라 '일치의 성사'인 성교회의 식전이다. 즉 성교회는 주교들 아래 일치 결합되고 조직된 거룩한 겨레이다"(전례헌장 26). 여기서 전례와 교회 사이에 부과된 관계는 그 당시까지 주도적이던 전례와 교계제도 사이의 관계를 넘어선다. 하느님의 백성 전체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장소이며, 또 하느님과 인간의 긴밀한 통교를 위한 효과적인 도구이다.
3.1.2.4. 전례와 종말론 -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행위는 종말론적 충만을 향하여 있다. 전례헌장은 전례의 본성에 대한 간단한 신학적 고찰을 마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이 지상의 전례에 참여할 때, 우리 순례의 목적지인 성도 예루살렘에서 거행되는 천상의 전례를 미리 맛보고 그것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성전과 참된 장막의 사제로서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우리는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으로서 나타나시고, 우리도 그이와 더불어 영광 중에 나타날 때까지, 그이를 기다리는 것이다"(전례헌장 8).
이 본문에 나타난 '현재와 영원의 동시성'이라는 생각과, '순례하는 교회와 천상교회의 통교'라는 생각은 탁월하다. 그러나, 그것은 늘 기다림의 차원에 있으며; 연결고리는 주님의 현존에 의해 주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교회 안에, 특별히 전례 행사 안에 항상 현존하신다"(전례헌장 7). 그러나 그분은 아직도 영광 중에 오셔야 한다.
교회헌장의 '순례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성격과 천상교회와의 일치'라는 장은 전례로부터 표현되는 교회의 생명과 계시의 원천에서 풍부하게 영향받았다. 여기에 이미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다는 통교의 차원 - 즉 지상에서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 천상 교회의 생명에 참여할 보증과 그 참여를 미리 맛본다는 차원 - 이 아주 강하게 강조되어 있다. 이 참여와 통교의 장소는 항상 전례, 특별히 성찬례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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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로부터 촉진된 전례개혁
전례의 일반적 개혁의 필요성은 교회적 양심 속에 천천히 성장하였다. 전례운동은 여러 번 이런 양심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비오 12세(1939-1958)의 임기 중에 전례개혁의 가능성에 대한 공식적 논의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례개혁이 교회 생활의 하나의 실재가 된 것은 다만 전례 헌장의 공포 이 후이다. 여기서는 이 개혁을 이끌어간 배후의 원칙들을 잠시 살펴보고, 그 적용단계들에 주목할 것이다.9)
3.2.1. 전례개혁의 기준
전례의 본성과 본질적인 특징들에 대해 살펴본 후, 전례헌장은 전례개혁의 문제를 다룬다(전례헌장 21-40 참조). 이 개혁의 기준들은, 예배 형태들의 역사적 변천에 대한 공부에서도 인정되었지만, 주요하게 신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한다: "왜냐하면, 전례는 신적 제정인 연고로 변경할 수 없는 부분과, 시대의 변천을 따라 변경할 수 있고, 또한 그 전례의 본질적인 내적 성질에 덜 부합하는 것이 삽입되었거나, 혹은 덜 적합하게 이루어진 것이 나타나면 변경하여야 하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전례헌장 21).
이런 원칙을 확립한 후에 전례헌장은 미사의 개혁을 이끌어갈 기준들을 열거한다.
3.2.1.1. 예절과 본문에 대한 신자들의 이해가능성 - 계시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전례 그 자체의 신비한 특성 때문에 (강생까지 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더욱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방어의 더욱 광범위한 사용, 성서의 더욱 풍부한 독서, 단순하고 일관된 전례거행의 염원, 전례행위가 펼쳐지는 환경의 역할, 전례적 표지에 대한 적합한 교육의 필요 등이 열거되었다.
3.2.1.2. 전통과 발전의 관계 - 전례와 전통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새로운 형식은 현행 형식에서 어느 정도 유기적으로 발전시키도록 유의"(전례헌장 23)할 것을 요구한다.
3.2.1.1. 전례거행의 교회적 차원 - "전례 행위는 사적 행위가 아니라 '일치의 성사'인 성교회의 식전이다. 즉 성교회는 주교들 아래 일치 결합되고 조직된 거룩한 겨레이다"(전례헌장 26). 전례의 공동체적이고 교계적인 이런 특징으로부터, 또한 전례는 항상 한 구체적인 지역 공동체에 의해 거행된다는 사실로부터, 개혁의 실천을 위한 여러 결과가 유래한다. 특히: 공동체적 전례거행의 우선권; 신자들의 능동적이고, 이해한, 완전한 참여의 요구; 다양한 민족의 전통과 성격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각 개별 전례회중의 상황에 따른 전례적 적응의 필요성 등의 결과이다.
3.2.1.4. 개혁에 대한 교계제도의 권한 - 전례헌장은, 전례의 본질적인 일치와 중앙집중화의 원칙을 재확인하면서도, 개별 국가나 교구들에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사안들에 대하여, 개별 주교회의나 주교들에게 전례적 영역의 다양한 권한을 넘겨줄 것을 규정하였다(전례헌장 22).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부분적으로나마, 전례거행과 그것을 정돈하고 활성화할 책임을 제한적으로 개별 주교들에게 맡겼던, 트렌트 공의회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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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전례개혁의 적용
전례개혁은 3개의 주요한 단계를 거치면서 적용되었다. 1. 전례헌장 36항에서 예견한 것보다 더 광범위하게 적용된, 라틴어로부터 생생한 지방어로의 점진적 이전(1965-1966); 2. 1969년 시작된 번역작업과 관련한 전례서의 개정과 새 전례서들의 점진적 출판; 3. 교황청의 주요 부서들의 지도아래 각 주교회의에 맡겨진 - 복잡하고 민감하여 조심스럽게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 전례의 토착화.
이런 공식적인 부분 이외에도, 교회 공동체들에게 전례개혁의 완전한 이해를 도모하고, 그 조심스러운 적용을 돕기 위해, 전문 전례 잡지, 전례의 활성화를 위한 신자단체, 전례 위원회, 전례 전공자들의 학회 등에 의해 이루어지는 숙고와 편찬의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10)
[이 글은 현재 로마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중인 대구대교구 장신호 요한보스코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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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주. 이 부분은 마티아스 아우제(Matias AUG )의 저서 Liturgia - Storia, Celebrazione, Teologia, Spiritualit , Edizoni Paoline, 1992 Milano, pp. 52-62 의 번역이다.
2) Aa.vv., La sacra liturgia rinnovata dal Concilio. Studi e commenti intorno alla costituzione liturgica del concilio ecumenico Vaticano II (a cura di G. Bara na), Ldc, Torino - Leumann 1964; H. Schmidt, La costituzione sulla sacra liturgia. Testo - genesi - commento - documentazione, Herder, Roma 1966; Aa.vv., La liturgie apr s Vatican II. Bilans, tudes, perspectives, Cerf, Paris 1967; Aa.vv., Liturgia opera divina e umana. Studi sulla riforma liturgica offerti a S. E. Mons. Annibale Bugnini in occasione del suo 70 compleanno, Edizioni Liturgiche, Roma 1983; Aa.vv., Costituzione liturgica "Sacrosanctum concilium". Studi (a cura della Congregazione per il culto divino), Edizioni Liturgiche, Roma 1986; Aa.vv., Il movimento liturgico tra riforma conciliare e attese del popolo di Dio (Assisi 1956-1986), Cittadella, Assisi 1987.
3) Pio XII, Mediator Dei, n. 25, in: A. Bugnini, Documenta Pontificia ad instaurationem liturgicam spectantia (1903-1953), Edizioni Liturgiche, Roma 1953, p. 106.
4) S. Marsili, La liturgia, momento nella storia della salvezza, in: Aa.vv., Anamnesis - La liturgia, momento nella storia della salvezza, 위의 책, pp. 87-88 참조.
5) H. U. von Balthasar, Le mysterion d Orig ne, in: Recherches de sciences religieuses, 26(1936), pp. 513-562; 27(1937), pp. 38-64 참조. 보다 광범위의 역사적 탐구는 다음을 보라: E. Ruffini - E. Lodi, "Mysterion" e "Sacramentum". La scramentalit negli scritti dei Padri e nei testi liturgici primitivi, Edb, Bologna 1987.
6) 참고. C. Vagaggini, in: Costituzione sulla Sacra Liturgia. Testo latino e litaliano, Ldc, Torino-Leumann 1964, pp. 12-16; G. Panteghini, Cristo centro della liturgia, Edizioni Messaggero, Padova 1971, pp. 18-21.
7) C. Vagaggini, La ecclesiologia di comunione come fondamento teologico principale della riforma liturgica, in: Aa.vv., Liturgia opera divina e umana, 위의 책, pp. 59-131; S. Dianich, La Chiesa mistero di comunione, Marietti, Genova 1987-5.
8) 참조: J. Castellano, Escatologia, in: NDL, pp. 448-462.
9) 참고: C. Oggioni, I criteri della riforma liturgica e loro traduzione nei libri rinnovati: valutazioni e prospettive, in: Aa.vv., Mysterion. Miscellanea liturgica in occasione dei 70 anni dell Abate S. Marsili, Ldc, Torino-Leumann 1981, pp. 193-231; G. Pasqualetti, Riforma liturgica, in: NDL, pp. 1188-1207; A. Donghi, Costituzione conciliare sulla sacra liturgia "Sacrosactum Concilium". Introduzione e commento, Piemme, Casale Monferrato 1986, pp. 48-58; L. Brandolini, Riforma liturgica, in: Enciclopedia pastorale, 3: Liturgia, Piemme, Casale Monferrato 1988, pp. 43-52.
10) 전례개혁의 평가와 미래를 위한 전망을 살펴보기 위한 참고: M. Aug , Movimento liturgico - Riforma liturgica - Rinnovamento liturgico, in: EO 6(1989), pp. 301-322.
제 4 장 전례거행의 주체
지금까지 세 개의 장에서 '전례의 본성'과 '시간 속에서 변해가는 전례의 형태들'을 자작의 시대까지 살펴보았고, 또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후속 개혁들'도 보았다. 그러나 앞선 장들에서 나타난 여러 요소들은 아직 더 심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지금부터 세 개의 장을 할애하여 '전례거행의 주체', '전례거행의 장소' 그리고 '전례행위'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직도 '역사의 표지 안에 숨어 계신다'. 그분이 부활한 모습으로 충만한 천상에서 계신다 해도 또한 실재로 교회에, 아니 모든 역사 안에 현존하신다. 이 사실은 아직도 구약성서를, 또 같은 방법으로 다른 모든 종교들을 돌아볼 필요성을 설명하며, 또한 모든 다른 '부분적 표지'들을 포함하는 '종합적 표지'로 드러나, 그리스도의 역할 안에서 '최상의 역사적 주체'를 확립하는 교회를 강조한다.3)
교회는 강생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사요, 정배이며, 신비체이다(교회헌장 7-8 참조). 이런 배경에서 전례헌장은 "모든 전례의식은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그이의 몸인 성교회의 행위"(전례헌장 7)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와 함께 하신다. 따라서 교회는 시나이 산의 경우보다 훨씬 더 왕다운 겨레요 사제적 백성이다(교회헌장 10-11 참조). 그 결과 교회는 전례행위의 주체이다. 교회 공동체는, 특히 성찬례를 거행할 때,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in persona Christi 행할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서 행해지는 최상의 '교회의 행위opus operantis ecclesiae'는 바로 그리스도의 행위를 표현하고 그리스도의 행위이기 때문에 (신학에서 성사의 사효성opus operatum이라 부르는 부분),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위격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고백하고 살아가는 유일한 사제적 중개는 바로 그리스도의 그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사제적 삶이 이해되고, 그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중개 안에서이다.
전례행위의 주체로서 교회를 이야기할 때, 교회의 어떤 개념을 언급하는지, 또 전례를 거행하고, 기도하고, 봉헌하고, 성화하는 교회에 대해 무엇을 알아들어야 하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지금 언급되고 있는 교회는 그저 '교계제도-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교회'의 총체를 말하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에 바탕을 두고 모인 백성"(교회헌장 4)인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전례행위의 주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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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전례행위의 주체인 교회
전례행위는 몇몇 특권을 가진 이들의 행위가 아니라 온 교회의 행위이다(전례헌장 26 참조). 비록 교회가 신품성사의 은총으로 사도들의 임무를 맡아 수행하기 위해, 교회 밖에서나 위에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감사제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행하는 사제들을 통하여 사제적 충만성에 도달하기는 하지만; 사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요 말씀의 정배라는 본성 때문에 사제적 인호를 가진 공동체이다. 성찬례 없이 교회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기념제를 거행하도록 맡긴 서품된 봉사자가 없어도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교회헌장 28 참조). 이처럼 사제들은 교회 즉 하느님의 백성 전체를 위한 봉사의 임무를 부여받는다. 사제직은 교회를, '그리스도 아래'에 있는 공동체와의 연대성을, 교회에 대한 신앙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사제 또한 그리스도의 이콘이 되는 데, 공동체 앞에서는 것은 공동체와 함께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 아래'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구체적으로 위계적 사제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그분의 협조자로 우리 모두를 부르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하고; 구체적인 장소에 위치하는 이 교회가 바로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는 것을 보증하며; 다른 교회들과의 통교 안에 그 교회가 머물러 있도록 감독한다. 직무 사제직과 신자들의 일반 사제직 - 둘 다 교회가 사제적이라는 표현이지만(1베드 2, 9 참조) - 참된 예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보충한다(참조: 교회헌장 10,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5).
요약하면, 전례행위의 완전한 주체는 항상 구별하지 않은 교회 전체, 즉,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지체로 결합된 교회이다. 다른 한편, 만약 전례와 각 개인들 사이의 관계에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는 한 쪽 사람들의 사제직과 다른 쪽 사람들의 비사제직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제직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계층에서 주어지는 차이이다. 또한 만약 수품된 봉사자가 홀로 전례를 거행한다고 할지라도 교회가 거행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 경우에도 그는 주님의 제정에 의해 교회의 봉사자이지, 공동체의 위임에 의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최종적이고 초월적인 주체는, 교회를 전례회중과 집전자, 공동체와 교계제도, 백성과 사목자 등이 함께 하는 유기체로 체계화하여 사제적 몸(그리스도의 신비체)으로 만든, 그리스도 그분이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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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전례회중은 교회를 드러낸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보편교회에 적용하면 틀림없이 맞다. 그러나 이 설명의 분명한 뜻은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지역교회의 단계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교회는 추상적 실재가 아니라, 사목자와 함께 하는 신자들의 합법적인 지역 공동체 안에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실재가 된다(교회헌장 26 참조). 신약성서로부터 '교회'라 불린 이 지역 공동체들은 특히 같은 성찬례에 참여하기 위해 모였을 때 그리스도의 교회의 주요한 표현이 된다(전례헌장 41 참조). 그러므로 지역교회는 그저 보편교회의 '대리점'처럼 단순하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보편교회와 동일한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의 교부들은 전례회중에 대해 그것이 모든 교회의 고유한 것이라 말하는 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교의를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한다(교회헌장 26 참조).
전례회중이나 예배를 위해 모인 공동체는 모든 인류를 위해 세상에서 그렇게 사제직을 수행하는 교회-구원의 성사의 진정한 현시이다(교회헌장 1. 8; 전례헌장 2. 5. 26; 사목헌장 40). 전례회중은, 그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현존과 행위를 드러내는 상징적 행위에 참여함으로써 교회를 인정하고, 교회를 건설하는 순간이 되기 때문에 교회의 필요조건이다. 특히 전례회중에서 교회는 자리매김의 구체적 형태를 발견하고, 이로써 그곳에 교회가 있고 선교와 증거의 사명을 가진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리스도교 회중은, 사막에서(출애 19, 24), 약속의 땅에서(여호 24), 유배 이후에(느헤 8; 9) 나타난 이스라엘의 제의적 회중 안에서 미리 예고되었고, 신약에서 예수의 영광받으심과 오순절의 성령강림 직후 확연히 드러났다(참고: 사도 2, 42-47; 4, 32-35; 5, 12-16 등). 그 초기 형성기에는 부활의 체험과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 대목에 반영된 성찬례가 중요하였으나(루가 24; 요한 20), 시간이 경과하면서 각 지역 고유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예루살렘(사도 1-6), 안티오키아(사도 13, 1-3), 트로아데(사도 20, 7-11), 고린토(1고린 11; 14) 등의 전례회중.
오늘날의 특징인 그리스도교 백성의 유동성과 특정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예배장소들의 존재는, 한 고정된 공동체와 관계없는 전례회중의 모임을 가능하게 했고, 그리스도인들이 여기 혹은 저기의 전례회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이 현상은 많이 실용적이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교회와 접촉하고 통교를 이루는 전례회중에 참여하기 때문에, 결국 교회에 대한 소속을 강화하는 것이다. 전례회중은 교회와도 공동체와도 서로 바뀌어지지 않는다. 왜냐면 전례회중은 전례거행의 순간에 존재하고 종료하면 사라져 버리고; 교회는 전례거행 밖에서도 유지되며; 공동체는 개별화되고 표현되는 데 다른 여러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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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전례회중의 특징
전례회중은 아주 독창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유의 모습에 적합한 자율성과 긴장성을 가진다.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는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었기에,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구원업적을 거행하기 위해 지정된 시간과 장소에 모인 전례회중은, 자신의 역할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효과적이고 창조적이게 해주는 일련의 긴장을 가진다. 이런 긴장들을 함께 살펴보자.5)
4.3.1. 전례회중은 통상적으로 예수의 하느님 안에 신자들을 모은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회개하고 다시 방향 잡을 필요가 있는 남녀로 남아있는다. 다시 말하면, 전례회중은 신앙의 힘으로 모였지만 항상 신앙을 바라본다(전례헌장 59 참조).
4.3.2. 긴장이 나타나는 두 번째 관점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거룩함(성성)의 신학적 실재이다. 이 관점에서 전례회중은 마치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가 거룩한 것처럼 거룩하다(참조: 골로 3, 12; 1고린 11, 28).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전례회중에 순수하고 완벽한 엘리트들만 모으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인 백성을 모은다(참조: 1고린 11, 30; 1요한 1,8-10). 따라서 전례회중의 모든 구성원은 참회와 속죄의 자세에 머물러야 한다.
4.3.3. 또 하나의 긴장은 전례회중의 단일성과 다원성 사이의 깊은 변증성에서 나타난다. 전례회중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받아들이는 단일성의 요인으로 있어야 하고 또 있다. 그리스도교 전례회중 안에서 성별, 출신 성분, 문화 등에 의한 구별이 없다(갈라 3, 28; 로마 10, 12-14 등). 비록 사람들 사이의 기호와 성향이 다를 수 있고(야고 2, 14)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에 관해서도 각 사람의 상황이 다를 - 예비자, 참회자, 어른, 아이 - 수 있다 할지라도 구별이 없다.
4.3.4. 전례회중은 은사적이고 동시에 교계제도적이다. 즉 그것은 개개인들의 어설픈 비인격적 결합이 아니라, 사랑과 직무(봉사)의 교계제도와 함께 하는 체계, 은총, 그리고 은사를 찾아볼 수 있는 공동체이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이것은, 전례거행에 있어서의 수많은 직무와 역할의 조화를 표현한다(전례헌장 28 참조). 다양한 직무 혹은 봉사는 전례회중에게 고행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활성화시키는 임무를 가진다. 그것은 특권이 아니라 임무(봉사)이다. 이런 이유로 전례거행은 본질적으로 대화적이고, 누군가가 모두를 위해 움직일 때, 반드시 거기에는 전례회중으로부터의 화답의 목소리가 있게 마련이다.
4.3.5. 전례회중은, 개인과 집합사이, 주관과 객관사이, 특별한 것과 공통적인 유산사이, 지역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사이 등에 존재하는 긴장들을 넘어서는 공동체이다. 전례회중은 사람을 지워버리지 않고 모으되, '나', '너' 그리고 '우리'의 단계(인격 상호간의 개방과 만남)가 아니라, 초월과 영원을 향해 가는 역사적이고 가변적인 단계에서,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만남을 이러한 공동체적 지평 안에서 이루어 주는 그리스도의 은총과 구원의 신비를 통해서 모은다.
4.3.6. 전례회중은 참여자들의 대조적인 감정을 전달하고, 표현하는 수단을 제공하고, 방향성을 준다. 전례회중은 구체적으로 종교적, 복음적인 가치에 대한 사람들의 모든 감정을 받아들일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도와 신앙의 같은 경험을 나누는 모든 구성원이 그에게 집중한다.
4.3.7. 단순한 사실에서 추출된 관점이 하나있다. 전례회중은 항상 지역적이고, 특별하고, 한정적인 실재라는 것이다. 지리적 제약을 가지고, 분명한 시간 할당을 가진다. 제한된 수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즉, 인간 조건의 모든 고유한 부분성parzialit 을 드러낸다.
4.3.8. 끝으로 전례회중과 선교 사이에 성립되는 긴장이 있다. 사도적 활동은 전례회중에 명령되었으니, 사실 "사도적 활동의 목표는 모든 이가 신앙과 성세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한데 모이고, 교회 가운데서 하느님을 찬미하여 거룩한 제사에 참여하고, 또한 주의 만찬을 먹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볼 때, "전례 특히 미사성제에서, 흡사 샘에서와 같이 우리에게 은총이 흐르고, 또한 여기서 성교회의 모든 활동의 목적인 성화와 하느님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전례헌장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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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전례회중의 능동적 역할
앞의 설명에서, 전례회중에 대한 좁은 신학적 전망은 그것의 몇몇 인간학적 관점에 대한 소개로,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전환되었다. 이런 인간학적 관점들이 '작용함'은 근원적인 행위자인 그리스도와 함께 전례행위의 통합된 주체로서 존재하는 전례회중의 '신비로운' 목적을 달성하는 보증이 된다.
'전례회중이 전례거행의 주체'라는 것은, 그 안에서 각각 서로 구별되고, 각자는 자신에게 속한 부분을 행하지만, 그 결과는 전체의 행위가 되는 '복수주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례거행의 순서는, 다양한 품계와 직무로 구성되는 교회를 드러내어야 하고, 하느님의 백성의 체계적이고 유기적인 구조를 분명하게 표현하여야 한다. 전례거행 장소의 일반적인 준비는 그곳에 모이는 전례회중의 형상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되어야 한다.
전례회중이 교회를 드러내는 표지이며, 전례거행의 드러나는 행위자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 전례회중이 모이고, 기도하고, 경청하고, 응답하고, 감사드리고, 봉헌하는 등은 바로 교회가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례회중이 전례를 거행한다. 아니 보다 더 정확한 표현으로, 전례회중은 근원적인 집전자이며, 최고의 그리고 유일한 중개자이며, 그의 실체(현존) 안에서 사제와 직무자들이 행동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전례를 거행한다.
전례헌장은 신자들이 전례에 "마치 국외자나 묵묵한 방관자인 양"(전례헌장 48)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능동적인 구성원으로 또 자각하는 참여자이기를 원하다. 전례회중 안에 구경꾼은 없으며, 다만 행위자만 있다; 전례회중은, 각 구성원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도하심에 의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한 마음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의 생생한 표현인 전례회중의 가치 - 전례의 능동적 주체 - 가 밝혀졌으니, 전례에 대한 능동적 참여뿐만 아니라, 의식적이고, 내적이고, 경건한 참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전례헌장 10. 11. 14. 21. 48. 50 참조). 결국 전례회중은 실천의 영역과 교의의 영역에서 함께 평가되고 인정되어야 한다.
전례는, 참례자로 하여금 기도와 예절들을 통하여 거행되는 신비로 몰입할 수 있도록 특별한 교육방법을 가진다. 그러나 이 교육법은, 전례거행에 투신하는 또 그리하여 함께 하는 참례자나 주인공들이 되는 방식으로 신자들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없다. 그러므로 본문과 예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거룩한 침묵은 내적심화와 경청의 요소로써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6)
오늘날 어떤 이들은 '전례거행에 참여'뿐만 아니라 '전례적 참여(참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7) 또 다른 이들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참여(참례)하다'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거행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목록을 작성해서 말한다.8) 그러나, 서로 다른 어감을 가지고서 표현하는 저자들의 염려는 항상 같은 것이다: 전례의 참여는 단순히 전례가 거행되는 순간에 국한된 하나의 활동으로 전락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존재 안에 광범위하게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전례영성'의 주제를 다룰 때 다시 살펴볼 것이다.
[이 글은 현재 로마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중인 대구대교구 장신호 요한보스코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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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주. 이 부분은 마티아스 아우제(Matias AUG )의 저서 Liturgia - Storia, Celebrazione, Teologia, Spiritualit , Edizoni Paoline, 1992 Milano, pp. 63-72 의 번역이다.
2) J. G lineau, Le caratteristiche dell assemblea cristiana, in: Aa.vv., Nelle vostre assemblee. Teologia pastorale delle celebrazioni liturgiche, Queriniana, Brescia 1970, pp. 69-85; S. Marsili, La Liturgia culto della Chiesa, in: Aa.vv., Anamnesis. Liturgia, momento nella storia della salvezza, pp. 107-113; Aa.vv., L assembl e liturgique et les diff rents r les dans l assembl e. Conf rence Saint Serge, XXIIIe Semaine d tudes liturgique, Edizioni Liturgiche, Roma 1977; B. Neunheuser, La liturgia della Chiesa come culto del corpo di Cristo, in: Aa.vv., Mysterion, 위의 책, pp. 25-47; A. Cuva, Assemblea, in: NDL, pp. 118-131; A. Pistoia, L assemblea come soggetto della celebrazione, in: RL 72(1985), pp. 428-435; A. G. Martimort, L assemblea, in: Aa.vv., La Chiesa in preghiera. Introduzione alla liturgia (a cura di A. G. Martimort), I, 위의 책, pp. 109-132; E. Costa, Assemblea liturgia, in: Enciclopedia di Pastorale, 3: Liturgia, 위의 책, pp. 10-24; L. Della Torre, Celebrare il Signore. Corso di Liturgia, Edizioni Paoline, Roma 1989, pp. 39-56; J. L pez Mart n, "In spirito e verit ". Introduzione alla liturgia, 위의 책, pp. 261-286; A. Donghi, Liturgia e vita ecclesiale, Edizioni O. R., Milano 1991, pp. 15-20. 44-83; G. Savornin, L assemblea dei cristiani, in: Aa.vv., Assemblea santa. Manuale di liturgia pastorale (opera diretta da J. G lineau), Edb, Bologna 1991, pp. 274-284.
3) 참고: L. Sartori, "In persona Christi", "In persona ecclesiae". Considerazione sulla mediazione ministeriale nella chiesa, in: Aa.vv., Sacerdozio e mediazione, 위의 책, pp. 83-84.
4) 참조: J. L pez Mart n, "In spirito e verit ", 위의 책, pp. 264-267.
5) 참조: G. Savornin, L assemblea dei cristiani, in: Aa.vv., Assemblea santa, 위의 책, pp. 277-279.
6) 참조: D. Sartore, Silenzio, in: NDL, pp. 1382-1390.
7) 참조: A. M. Triacca, Solo "partecipare alla celebrazione liturgica" o anche e soprattutto "partecipazione liturgica"?, in: Aa.vv., Assisi 1956-1986: Il movimento liturgico tra riforma conciliare e attese del popolo di Dio, Cittadella, Assisi 1987, pp. 331ss.
8) 참조: L. Maldonado Arenas, Verso il futuro: fedelt creativa nello Spirito, in: 위의 책, p. 177.
제 5 장 전례거행의 장소
앞에서 예배의 성서적 개념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거룩한 공간의 본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더욱 깊이 살펴보면서, 이 장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를 위한 건물이 이방 종교의 성전의 개념뿐만 아니라 유다 성전의 개념과도 얼마나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를 우선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전례 거행의 순서에 따라 그리스도교 예배를 위한 건물의 여러 공간들과 전례용구들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볼 것이다.
5.1. 그리스도교 예배를 위한 공간
5.1.1. 성서에 나타난 예배를 위한 건물
로마인들과 마치 한가지로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우선 신상으로 형상화 된 신이 머무는 집이었다. 작은 방이어도 충분했다. 힌두교 전통에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난다. 모일 필요가 없었으니: 신은 사제들에게 맡겨진 희생제사와 신도들의 개별적인 봉헌물들을 기다리고, 또한 그뿐이었다.
구약성서에서, 거룩한 장소는 다른 모든 종교에서와 동일하게 신의 현존과 행위의 눈에 보이는 경계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선택의 표지였다3): 즉 온 땅의 하느님께서 특별한 한 장소에 나타나시고, 특별한 한 백성을 선택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거룩한 장소는 성서적 종교를 특징 지우는 두 개의 커다란 긴장이 함께 하는 장소로 위치한다: 하느님의 불가시성과 가까운 현존, 보편성과 고유성.
다른 모든 거룩한 장소는 마지막에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과의 만남의 최상의 장소가 된 예루살렘 대성전의 중요성 앞에 그 기능이 약화된다. 성전을 봉헌하면서 솔로몬은 하느님의 가까운 현존과 동시에 그분의 초월성에 대한 인식을 갔고 있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 이 땅에 사람과 같이 자리잡으시기를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꼭대기 하늘도 주를 모시지 못할 터인데 소인이 지은 이 전이야말로 말해 무엇하겠습니까?"(1열왕 8, 27).
예언자들의 유명한 비판들은 성전을 능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계약의 생생한 내용 속에서 성전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성전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계약의 위대한 표지요, 계시의 역사성과 선택의 표지가 되었다.
모든 유다인처럼 예수께서도 성전에 다녔고 그것을 존경하셨다. 그러나, 복음사가들은 예수 또한 예언자들처럼 성전을 비판했음을 기억하는데 일치하고 있다(참조. 마태 21, 12-13; 마르 11, 15-19; 루가 19, 45-48, 요한 2, 14-16). 성전에 대한 예수의 비판은 의회 앞에서 열린 재판에서 그분에게 부과된 고발들 중의 하나였다(참조. 마르 14, 58). 또한 예루살렘의 첫 번째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평화롭게 성전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다닌다(참조. 사도 2, 46). 그러나, 그리스계 집단의 대변인인 스테파노는 더욱 비판적인 태도를 나타낸다(참조. 사도 7). 성전을 받아들이면서도 비판하는 이런 모순적인 태도는, 구약성서적 환경, 즉 예언자들의 노선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신약의 참신성은, 인간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참된 공간이 더 이상 예루살렘의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인식을 가진 것이다(참조. 요한 2, 21; 1, 14). 예루살렘 대성전은 미리 보여주는 표지(= 예표)였다(참조. 히브 9). 거기에 이어서 바오로는 약간 다른 관점을 가지고 말하기를, 그리스도교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결합된 공동체라고 말한다: "온 건물은 이 모퉁이돌(그리스도)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여러분도 이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에페 2, 21-22; 참조. 2고린 6, 16). 또한 공동체뿐만 아니라 신자 각자가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다(참조. 1고린 6,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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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예배를 위한 건물의 역사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서 건물들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이 건물들은 신을 위한 성전이나 기념물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기도를 위해 전례회중이 모이기 위해 마련된 '전례회중의 집'(= '교회의 집'domus ecclesiae, oikoi ekkles as)이다.4) 여기에서 유래한 '교회'라는 이름은 나중에 건물 자체에 주어진다. 결국 예배를 위한 건물은 지역교회가 공간 속에 드러나는 이콘이며, 생생하고 선택된 돌로 건설된 영적 건물을 위한 필수적인 은신처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이 교회는 여러분을 위해 건설되었지만, 여러분 자체가 교회입니다".5)
교회가 자유롭게 움직이고 수단들을 사용할 수 있을 때, '성전'을 건설하지 않고 대중집회를 위해 마련된 광대한 구조물들인 '바실리카basilica'들을 예배를 위한 건물로 변용한다. 그리스도교 바실리카들은 넓고 장엄하고 고상한 공간이며, 동시에 거리의 소음으로부터 분리되어, 회중이 모이기에 적합하게 되었다. 내부공간은 다른 모습으로 정돈되어; 전례거행의 각 행위자들과 모든 이들의 참여를 위해 각 부분들이 체계적으로 배치되었다. 4세기의 바실리카 양식은, 전례가 거행되는 제단presbyterium을 향해 모든 이의 시선을 끄는 '거룩한 길via sacra'과 함께 길이방향의 지평선을 강조한다. 반면에 비잔틴 양식의 교회는 원형의 돔cupola에 의한 중앙부의 강조를 선호하면서 보다 역동적인 건축을 이룬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전례의 영향에 따른 변천은, 옛 그리스도교 바실리카들과 이어지는 예배장소들의 개념과 배치를 아주 많이 변화시켰다. 역사적 양식들은 각 시대와 각 나라에 따른 참으로 다양한 영성을 표현한다. 서방에서 로마식 바실리카는 후대의 낭만파 양식을 발전시키게 되는 샤를르(카롤링) 왕조와 오토 제국의 양식으로 변천한다. 낭만파 양식은, 수평선과 수직선, 단순성과 장엄성, 로마식 고정성과 독일-프랑코 민족의 역동성 사이의 조화에 성공한 양식이다. 고딕양식은 12세기 전반부터 지배적인 건축양식이 된다: 그것은 극적이고 활동적인 것에 대한 강조와 함께 그리스도교 기질을 드러내는 유일한 표현이다. 이미 15세기에 고딕양식을 능가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그리고 옛날로 돌아가려는 르네상스 문예부흥 시대에 도달한다. 트렌트 공의회 이후에, 신앙의 승리와 성취의 열정을 강하게, 가끔씩 비이성적으로, 표현하는 바로크 양식이 발전한다. 이어서 계몽주의와 나란히 신고전주의가 나타난다. 이것은 항상 풍성했던 바로크 양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성적이고, 단순하고, 절제하는 양식으로 나타난다. 낭만주의 문화와 관련 속에 19세기 전반에는 중세와 그 예술적 취향에 대한 새로운 열정이 일어나 그것들을 모방하게 되는 데, 바로 '부흥restaurazione의 시대'6)이다.
근대 예술은 이전부터 제의적 공간의 새로운 표현들을 찾고 있었다. 전례헌장에서 바탕이 되는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 "성당들을 건축함에 있어서는 전례의 집전과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실현하기에 적합하도록 힘써 배려하여야 한다"(전례헌장 124). 오늘날 보다 현대적인 기준에 따라 건설되는 거룩한 건물들은, 공동체가 전례거행의 중심에 더욱 가깝게 위치하고 또 밝은 환경 속에서 느끼고 활동할 수 있게 배치된 공간을 추구한다. 교회 건축의 이상은 역할성, 단순성, 아름다움, 장식 등이지만, 예배장소의 상징적 가치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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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예배를 위한 건물의 공간배치
예배장소의 요소와 공간들의 배치는, 전례회중에게 정확한 장소를 제공하여 전례거행과 전례회중의 필요에 적합한 용도로 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 배치를 통해서 '전례회중의 신비' 자체를 표현하는 역할도 함께 맡아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의 이상적인 위치는 제단presbyterium과 본채navata 사이인데, 이것은 분리가 아니라 통교를 드러내는 표현이다.7) 제단presbyterium8)과 본채와 그 밖의 여러 구성 요소들의 그리스도교 건축의 역사는 예배를 위한 건물의 거룩한 공간 배치를 지배한 각 시대의 다양한 교회론을 비추어 준다. 환경의 통일성은 전례행위에 대한 체계적이고 공동체적인 참여를 위해 중요하다.
역사로 되돌아와서, 강한 벽과 세 개의 본채를 가진 로마식 바실리카와 로마네스크식 바실리카를 살펴보자. 바실리카는 모든 사람을 이미 내부 구조에 반영된 여러 계층의 교계제도로 조직하여, 말씀과 성체를 통해 신자들을 양육하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후진abside(後陣)으로 향하게 한다. 그와 반대로 단 하나의 본채를 가진 고딕식 건물은, 우선 말씀의 선포를 위한 하나의 거대한 공간이었는데, 설교에 전념한 탁발수도회로부터 선호되었다. 바로크 건축의 제의적 건물에서는 환경의 통일성이 사라져버린다. 여러 신심들이 각자의 환경을 조성하는 데 관심을 가져 무수한 작은 경당들과 제단들이 조성된다.
제단, 본채라는 두 이름을 통해 살펴본 전례거행공간의 정돈은 또한 제대altare, 사제석sedes, 독서대ambo 라는 세 이름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데, 이들은 감사제사(성찬례)eucharistia, 집전praesidentia, 말씀의 선포annuntiatio verbi Dei의 특징적인 장소들이다. 또한 여기에 감실tabernaculum, 세례대baptisterium를 추가할 수 있다.
거룩한 공간 속에 이런 다양한 장소들의 배치를 이끌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요소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특히 전례헌장과 교회헌장에서 나타나는 '통교communio의 교회론'이다. 구체적으로 "미사에 모여 온 하느님의 백성은 위계적 질서에 따라 미사의 각 부분에서 여러 직무와 여러 행동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당의 구조 자체가 집회의 본 모습을 드러내고 적당한 질서를 유지하며 각자의 직무를 적절히 수행할 수 있게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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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 제대
전례헌장 41항은 '단 하나의 제대unum altare'에 대해 언급한다. 또한 교회법도 더 이상 '중앙 제대'와 '측면 제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제대'라고만 표현한다.10) 제대의 단일성은 그 강한 상징적 힘을 되찾는다. "성사의 표지로 십자가상 제사가 재현되는 제대는 주님의 식탁이요, 이 식탁에 참석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백성이 미사에 모여 온다. 또 제대는 성체성사로 완성되는 감사의 중심이기도 하다".11)
제대는 성찬례의 희생적 가치와 통교적 가치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식탁일 뿐만 아니라 또한 희생제사의 제단이다. 역할이 분명하므로 그렇게 큰 제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제대는 "벽에서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쉽게 관심을 집중할 수 있도록 중심을 이루는 장소에 놓여야 한다".12) 그렇게 해서 사제와 신자들은 마치 옛 로마감사기도문의 표현처럼 제대 '주변에 둘러서게'circumstantes 된다. 그러나 제대의 중심성은 물리적 측면에서보다 영성적 측면에서 알아들어야 한다.
5.2.2. 사제석
"주례자의 좌석은 집회의 사회 직무와 기도를 인도하는 직무를 나타낼 수 있을 만한 자리라야 한다".13) '주례하다presiedere'라는 단어는 이미 3세기 중엽의 주일 성찬례에 대한 유스티노의 묘사에 언급되고 있다.14) 주례석의 우월한 위치는, 그리스도의 표지(참조. 전례헌장 7)요, 전례회중의 우두머리 격인 주례자에게 주어진 영예이며, 전례회중의 이름으로 또 전례회중을 위해서 활동하는 사제에 대한 가시적이고 실용적인 필요에 의해 배치되었다. 주례자가 주교일 때에는 '주교좌cathedra'를 사용한다.
5.2.3. 독서대
독서대는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장소이다. 독서대ambone의 그리스 어원 아나바이네인anabainein(오르다)은 몇 계단 위에 배치된 독서대의 전통적 위치를 기억한다. 시나고가(회당)의 영향을 보다 직접적으로 받은 시리아 전통의 교회에서 독서대는 전례회중의 한 가운데에 배치되었다. 그리스도교 바실리카는 전례에 도입되기 전 시민 바실리카에서 후진abside의 강단에 배치된 독서대의 위치를 그대로 보존한다. 독서대에 대한 현행 규정 중, "... 독서대는 원칙적으로 고정된 자리에 마련할 것이요, 이동식 가설물이 아니어야 한다. 독서대는 성당 구조에 따라, 거기서 말씀을 선포하는 주례자나 부제나 평신도를 교우들이 잘 바라볼 수 있고 그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자리에 마련되어야 한다..."15)는 부분은 유동적인 면이 없지 않다.
5.2.4. 감실
감실은 성체를 보존하는 장소이다. 16세기 이후 (벽에 붙은) 제대의 중앙에 위치한 감실에 성체를 보존하는 관습이 우세하였다.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한 훈령Eucharisticum mysterium]16)은 성체를 보존하는 목적들을 제시하고 (병자 영성체의 집전, 미사 밖에서의 영성체, 성체 공경 등), 성체 앞에서 기도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성체를 보존할 장소를 묘사한다. 같은 맥락에서 [로마 미사경본]은 "신자들이 사사로이 성체께 조배를 드리며 기도를 바치기에 알맞은 경당에 성체 모시는 자리가 마련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17)라고 말한다.
5.2.5. 세례대 혹은 성세의 샘
4세기 이후 주요한 성당 밖 가까이에 세례를 집전하기 위한 건물이 세워진다. 그러나 어른 세례자의 감소와 특히 침수예식의 소멸은, 크기를 축소시킨 세례대를 본당 입구 근처, 내부의 제한된 공간에 배치하게 만든다. 교회법에서는 '세례대baptisterium'라 표현하지 않고, 다만 '성세의 샘fons baptismalis'이라 표현한다.18) 1984년의 축복예식서 라틴 표준판De benedictionibus은 '새로운 세례대 혹은 성세의 샘의 축복'을 위한 기도양식을 제공하고, 일러두기praenotanda에서는 "성당의 주요 부분 중에서 성세대와 성세수를 보관하는 장소는 특히 중요하다... 성세성사가 신자 생활의 시작이므로, 모든 주교좌 성당과 본당들은 각기 성세대, 즉 성세의 샘이 흘러나오거나 보관되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19)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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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제의적 건물의 전례제구들
제의적 건물의 전례제구들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면서 이 장을 마치도록 한다. 전례용구들에는 전례용기, 전례복과 그밖에 직접적으로 전례적 용도를 위해 마련된 십자가(十字架), 성화상(聖畵像), 종 등이 있다. 이 영역에 필요한 기준들은 전례헌장의 제 7장 '성미술(聖美術)과 전례제구(典禮祭具)'에 제시되어 있고, 그에 이어 미사경본의 일러두기praenotanda에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20)
예배를 위한 건물에 배치된 성화상들은 특별한 중요성을 가진다. 이들은 그리스도교 신심의 역사에서 교리교육적이고 신비교육적인 역할을 뛰어나게 수행하였다. 어떤 면에서 성화상은 친밀감을 형성하고, 현존의 매개체가 되며, 통교로 이끌어 준다. 성화상의 숫자는 지나치게 많아서는 곤란할 것이며, 전례거행을 위해 적합한 공간을 방해하지 않도록 배치되어야 한다.21) 성화상은 결국 고립된 요소가 아니라, 성음악(聖音樂)과 성가의 언어와 함께, 성사적 행위와 함께, 기도와 함께, 선포되는 말씀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 중에 십자가는 특별한 중요성을 가진다. 그것은 성찬례 거행을 주도하기에, 꼭 제대 위는 아니라 할지라도 잘 보이는 장소에 배치해야 한다.
전례제구들과 같은 보다 덜 중요한 물건에서도 예술적 요구는 존중되어야 한다. 모든 물품은 정해진 용도에 따라 적응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영역에서 각 백성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에 따른 적응의 보다 광범위한 자유가 주어졌다.22)
성당과 제대의 봉헌, 그리고 주요 전례용품들의 축복은 그들이 의미하는 가치를 더욱 풍성하게 하려는 상징적 행위들이다. 성당의 봉헌예식은 아주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다.23) 성당 봉헌 축일들은 제 2천년기의 전례실천의 특징을 이루는데, 금세기의 전례개혁에서는 많이 간소화되었다. [성당과 제대 봉헌 예식서](1977년 5월 22일 공포)는 교회 공동체를 표현하는 다양한 문화적 상징들을 종합하고, 특히 '교회-성전'과 '교회-하느님의 백성'의 주제를 깊이 살펴봄으로써 모든 형태의 (외형적) 성역화sacralizzazione를 극복한다.24) 그리고 같은 동작과 표지의 반복을 제거함으로써 성찬례가 성당 봉헌 예식의 중심역할을 다시 맡도록 하였다. 예식서는 이런 식으로 '교회-건물'은, '교회-신자 공동체'가 가시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드러나는 형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글은 현재 로마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중인 대구대교구 장신호 요한보스코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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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주. 이 부분은 마티아스 아우제(Matias AUG )의 저서 Liturgia - Storia, Celebrazione, Teologia, Spiritualit , Edizoni Paoline, 1992 Milano, pp. 73-83 의 번역이다.
2) J. Dani lou, Il segno del tempio o della presenza di Dio, Morcelliana, Brescia 1960; Y.-M.-J. Congar, Il mistero del tempio. L'economia della presenza di Dio dalla Genesi all Apocalisse, Borla, Torino 1963; Aa.vv., La Chiesa: spazio liturgico della comunit cristiana, numero monografico di RL, 66(1979), fascicolo n. 4; P. Jounel, Luoghi della celebrazione, in: NDL, pp. 783-799; Aa.vv., Gli spazi della celebrazione rituale (a cura della Facolt teologica di Sicilia), Edizioni O.R., Milano 1984; A. Adam, Corso di liturgia, 위의 책, pp. 339-364; G. Grasso, Edificio sacro, in: Enciclopedia di pastorale, 3: Liturgia, 위의 책, pp. 91-96; J. venou, Celebrare nello spazio, in: Aa.vv., Assemblea santa, 위의 책, pp. 116-131.
3) 유다 성전은 자연적 성전에 대해 발전을 나타내지만, 그것을 없애지는 않는다. (참조. J. Dani lou, Il segno del tempio, 위의 책, pp. 22-23).
4) 참조. C. Mohrmann, Les d nominations de l'glise en tant qu'edifice en grec et ne latin au cours des premiers si cles chr tiens, in: RevSR 36(1962) 155-174.
5) "Facta est vobis haec ecclesia: sed vos magis estis Ecclesia"(Augustinus, Sermo 359, 9 in: PL 39, 1597).
6) 역주. 쇄신, 복원, 복고라도 번역할 수 있으며, 문예부흥과 구별하기 위해 '가톨릭 부흥'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7) 참조. C. Militello, Il popolo di Dio tra navata e santuario, in: Aa.vv., Gli spazi della celebrazione rituale, 위의 책, pp. 11-39.
8) Presbyterium은 사제들이 앉는 장소이다. 자주 이곳에 제대가 배치되기도 한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역주. 예를 들어, 성 베드로 대성당의 교황제대는 건물의 십자가형 평면이 서로 교차하는 곳(성 베드로의 무덤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다.
9) 미사경본 총지침, 257; PNTL, p. 182.
10) 참조. 교회법, 1235-1239.
11) 미사경본 총지침, 259; PNTL, p. 183.
12) 미사경본 총지침, 262; PNTL, p. 183.
13) 미사경본 총지침, 271; PNTL, p. 185
14) 참조. 유스티노, 호교론 I, 67, in: San Giustino, Le Apologie, Introduzione e traduzione di I. Giordani, Citt Nuova, Roma 1962, p. 125.
15) 미사경본 총지침, 272; PNTL, p. 185
16) 참조. EDIL I, nn. 899-965.
17) 미사경본 총지침, 276; PNTL, p. 186.
18) 참조. 교회법전, 858조. (역주. 한글판 교회법전에는 '세례소'라 번역되어 있다).
19) 축복예식서, 832-833.
20) 참조. 미사경본 총지침 287-312; PNTL, pp. 188-192.
21) 참조. 미사경본 총지침, 278; PNTL, p. 187.
22) 참조. 미사경본 총지침, 287; PNTL, pp. 188. 192.
23) 참조. P. Jounel, Dedicazione delle chiese e degli altari, in: NDL, pp. 352-367.
24) 교회법은 항상 예배를 위한 장소의 '봉헌dedicatio'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축성consacratio'라는 표현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제 6 장 전례행위: 예식, 표지, 상징
그리스도교 환경에서 '전례거행', '전례를 거행하다'라는 용어들은 참되고 고유한 전례행위만을 배타적으로 특징짓는다.2) 그러므로, '전례거행'이라 말할 때, 고유하게 전례행위로 이해된다. 전례거행은 함께 모인 전례회중의 행위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명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식의 광대한 다양성 속에 실현된 내용들을 비추어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행위이다. 전례를 거행하는 것은 예식의 형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전례거행은 결국 고유한 언어를 가진 개별 예식들로 구성되어있다.
6.1. 예식3)
전례거행을 신앙의 참된 체험의 순간으로 만들어보려는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들은 개별 예식들의 불분명성과 같은 것들이 아니라, 전례적 언어 그 자체에 대해 현 시대의 감수성이 느끼는 일반적인 소외 현상이다. 오늘날 전례적 경험을 어렵게 하는 태도들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개인주의, 영성주의, 세속주의 등이 있다.4) 그러므로 예식을 교육하고, 전례적 행동의 의미를 계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식에 대한 일의적(一意的)인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개념을 분석하는 것은, 종교적 경험의 일반적인 의미와 가치들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에, 예식에 대한 협의적 개념보다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초래한다. 예식은 결국, 인간적 의미를 갖는 행위와 전통적으로 고정된 양식에 따른 종교적 의미를 갖는 행위를 모두 포함하는 폭 넓은 용어이다. 문제의 용어 '예식'은, 우주질서와 그 질서에 따른 신들의 행위를 가리키는 인도-유럽어원 '르탐R tam'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 어원학으로부터 확인되었다. 예식은 질서에 순응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이요, 이미 제정된 구조에 따른 행위이다. 두르크하임E. Durkheim에 따르면, '집단의 소개(대표)'라는 사회학적인 전망 속에서, 예식은 한 공동체가 스스로를 소개하고, 고유한 확신, 가치, 믿음을 살아가고, 거울처럼 스스로를 비추어보고, 고유한 계획을 선포하고, 거행하고, 확인하는 순간이다.5) 예식의 형성은 쉽게 이해된다. 사람은 또한 그의 '세속적' 삶에서도 이미 정해진 예식의 형태에 따라, 인격 상호간의 통교와 의무를 확립하고, 돕고, 측정하고, 함께 한다. 예식성ritualitas은, 특정한 문화 체계 안에서 스스로를 자리 잡게 하고,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 자리잡게 하고, 관계를 확립하게 하고, 가치를 인정하게 해주는 '상징의 영역'을 이끌어 가는 일관된 모든 것을 말한다.
예식의 가장 큰 특징은 반복성이다.6) 예식은 반복 가능하게 계획된 행위이다. 이 관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식의 행위가 다른 사람들과 결합하기 위한 항구하고 반복 가능한 과정들의 총체라는 사회화의 넓은 배경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예식은, 특정 집단이 더욱 깊은 통합(결속) - 자기 구성원 사이나 다른 인간 집단과의 결속뿐만 아니라, 재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결코 완전하게 지배할 수 없는 실재들의 총체와의 결속 - 의 필요성을 느낄 때, 발생한다. 이것은 거룩함(성성) 혹은 초월자와 (결속을 이루는) 사회화의 한 형태이다.
그리스도교 예배의 반복성은 유다 예배의 경우와 동일하게 기념memoriale o commemoratio이다.7) 전례거행을 구성하는 예식화된 상징적 행위들을 통하여 교회는, '하느님이 전례행위 안에서 기념되는 역사적 과거의 행위의 (현재적) 구원 효과를 이루신다'고 선언한다. 당연히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기념예식의 중심은 그리스도라는 사건이다.
종교적 예식은 서로 구별되지만 상호 의존적인 두 가지 단계로 충만한 결합을 이룬다. 첫 번째 그리고 보다 깊은 단계는 거룩함(성성) 또는 초월자와 이루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이 속한 집단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종교가 예식의 주기와 의미를 잃어버린다면 도덕주의나 영지주의로 전락하거나 혹은 아예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종교적 예식이 우선 인간과 초월자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언어로 이해된다는 것은 근본적인 사실이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 하느님의 의미, 하느님에 대한 경청 그리고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 등은 참된 종교적 예식의 근원적 토대이다. 만약 하느님에 대한 이런 확신이 없거나, 예식을 통해 이룩하지 못한다면 이 예식은 형식주의로 전락한다. 신앙은 삶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만큼 (예식으로) 거행될 것을 요구한다. 신앙인이 하느님과 자신이 맺는 통교를 표현하는 언어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종교적 예식은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앞에서 말한 것을 요약하면, 예식은 반복과 공동 참여를 돕는 전통적 성격으로 이미 형성되고 조직된 체계에 의하여 말과 행위로 구성된 상징적 행위이다. 결국, 상징의 개념과 상징으로서 예식의 개념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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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표지와 상징8)
상징 그 자체를 분석하거나 그 본성에 대해 숙고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례 거행 행위의 영역에서 가지는 역할과 위치로부터 출발하여 상징에 접근할 것이다. 사실, 상징은 상징적 행위가 되지 않는다면 충만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물의 상징은 정화를 위한 씻음이 되고, 기름의 상징은 도유가 된다.
모든 전례적 상징의 핵심은 바로 성사들에 의해서 구성되었다. 오늘날 고전 신학teologia classica은 성사가 '의미하는 것의 효과적 표지significando causant'라고 정의한다. 이런 이유로 몇몇 저자는 성사를 '전례적 표지'라 말하기를 선호한다.9) 전례헌장은 전례를 설명하면서 '가시적 표지'라고 말한다(전례 7). 그러나 현직 저자들의 대다수는 표지의 개념이 아니라 상징의 개념이 보다 성사들에게 적합하다고 믿는다: 즉, 성사들은 은총을 의미하는 단순한 도구에 불과한 사물들이 아니라, 은총을 요청하고 실현하는 상징적 행위들이라는 것이다. 표지는, 그 자체로는, 자신밖에 존재하는 한 실재를 가리킨다: 연기는 불의 존재를 가리키고, 푸른 신호등은 진행을 가리킨다. 상징은 함축적 의미를 더욱 많이 가진 언어이다. 우리가 알도록 할뿐만 아니라, 그의 역동성에 우리가 개입되도록 한다. 상징이 역동적인 것은 관계를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다른 실재를 요청하면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일련의 관계를 촉발시키면서 활동한다. 전례거행은 다만 통교와 의사전달을 실행시키는 것으로만 이해되고 실행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예식은 이미 나타내는 것 그것이고, 예식이 속하는 존재의 등급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표지와 상징이 구체적으로는 항상 섞여 사용된다 할지라도, 현대 신학의 인간학적 사색은 표지에 부여된 관습적이고 자유의지적인 의미에 반대하여 '의미하는 실재res significans'가 자연적으로 가지는 요청하는 힘(능력)을 강조하려고 '상징'이란 용어를 선호한다. 그러나, "현재 상태에서, 상징주의의 재평가가 성사신학의 숙고에 얼마만큼 정보를 제공하였는지 결정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다".10)
6.2.1. 상징이란 무엇인가?
'상징'이란 용어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의미와 어감을 갖는다. 다의적(多義的)인 대지를 정리하기 위해 용어의 어원론을 다시 정립하는 것이 유용하다. 그리스 어근에서 이 말은 두 부분이 함께 놓여진 것을 말한다. 동사 심발레인symb llein은 '함께 두다'를 의미한다(이 뜻의 반대말은 디아볼로스di bolos, 분리하다). 고전적 의미에 따르면 명사 심볼론symbolon은, 계약체결자들이 한쪽씩 가지도록 둘로 잘라진 물건을 말한다. 그의 상징적인 가치는 다른 한 편과의 관계 속에서만 주어진다. 그러나 동사 심발레인은 '함께 두다'라는 뜻 이외에 '함께 재배열하다'라는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미 이전에 함께 있었고, 지금 그렇지 못한 것들을 함께 배치한다. 상징은 일치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일치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자신의 존재의 단일성으로 인해서 육체적인 것들(예를 들어서, 일, 활동 등)을 영성화 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같은 이유로 또한 사람은 영적인 것을 육체화할 필요가 있다. 상징을 통해서 사람은, 늘 함께 하면서도 그들의 다른 본성으로 인해서 사람과 분리되어 있는 그런 실재들을, 자신 안에 재통합한다. 상징이란 용어의 의미론적인 영역은, 한 집단 안에 수용되어 그렇게 각 개인에게 인정되고 인식되어지는 모든 요소들(즉 사물, 음성, 동작, 인격 등)로 확대된다. 각 집단과 동일하게 교회도, 신앙의 상징(즉 신경)이라 불려지는 신앙 고백문으로부터 시작하여 고유한 상징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식별한다. 그러므로 상징은 특정한 세계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상호 식별과 인정의 수단이다.
6.2.2. 상징의 역할
사람이 행하는 실재의 해석들은 상징적인 성질의 것이고, 사람이 자신의 해석을 표현하는 언어도 이미 상징적이다. 상징주의 속에서 실재와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실재들과 다른 양식으로도 의사를 전달할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상징적 능력은 말하거나 특정한 것을 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특정한 양식으로, 즉 사물들을 의미적으로 광범위하게 통합하는 양식으로 바라보는데 있다.
사람은 초월적인 지평을 향해 자신을 개방할 때만 실재에 대한 일관되고, 통일되고, 의미 있는 전망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상징적 인간'의 더욱 특징적인 관점은 그의 종교적 차원, 즉 거룩함과 하느님께 대한 그의 피할 수 없는 지향이다. 종교적 상징은, '나'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이성의 단계에서 체계화하기 어려운 새로운 경험으로 열리게 하는, 인간 존재의 더욱 내밀한 필요성의 표현이다. 사람은 이성적이고 개인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육체성과 사회적 성질에 따라 (또한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고 이를 통해서 실재를 이해하는 사회적이고 상징적인 존재이다.
자연과 초자연, 역사와 종말, 내재성과 초월성 사이에 존재하는 변증법적 긴장은 상징주의 속에서, 근본적인 대립으로부터 벗어나 상호 인정과 실천의 상황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발견한다.
6.2.3. 전례적 상징.
예식을 상징적 행위라고 위에서 언급한 것을 상기하면서, '모든 제의적 체계를 구성하는 상징적 구조에 대한 입문은 해당 공동체의 상징적 경험이 시작된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 성숙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교 전통과 성서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예배의 상징주의에 접근한다. 베르나C. Bernard가 강조하는 것처럼 "상징적 활동과 신앙 사이의 관계들은 우선적으로 성서적 계시의 구조 위에 세워진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교회적 표현과 더욱 조화되는 자신의 표현을 찾아낸 교회에 의해 선택되고 전해지고 해석되는 상징적 언어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11)
전례적 상징주의는,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고, 자신의 말씀과 이 세상의 사물인 표지들을 통하여 의사를 전달하고, 사람들을 신앙으로 초대하고, 계약을 통해 사람들을 자신과 결합시키는 구원의 역사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우선적으로 살펴야 한다. 지금, "이 계시의 경륜은 업적과 말씀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실현된다. 즉 구원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이 행하신 업적은 말씀으로 표시된 교훈과 사물을 밝혀 주며 확인하고, 말씀은 업적과 거기에 포함된 신비를 밝히 선포한다"(계시헌장 2).
그러므로 신적 계시에서 '역사적 사건'과 '해석하는 말씀'은, 다른 하나 없이는 그들의 계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상호간에 긴밀한 관계에 있다. 이와 유사하게 전례 안에서, '상징적 행위'와 '신앙의 말'은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고 서로 보충한다. 성서와 전례 사이에는 상징적 의사전달과 표현의 감동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12) 두 번째로, 전례적 상징주의는 근본적인 관점을 구성하는 교회적 전통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여러 요소들이, 교회의 삶과 신앙의 발전과의 조화 속에서 그리스도교 전례를 발전적으로 풍성하게 한다.13)
최소한 어원학적 관점에서 상징의 고유한 특징이 일치시키고 특정한 상황을 재정립하는 것이라면, 전례적 상징주의는 당연하게 사람과 구원의 신비 사이에, 이념적이거나 개념적인 것이 아닌 생생한 통교를 확립한다.
6.2.4. 상징적 창조성
앞에서 본 것처럼, 정확한 그리스도교 전례 안에 있는 상징들의 총체를 다시 세우거나 재정립하는 것보다, 몇몇 요소를 적응시키거나, 변형을 가하거나, 여기 저기의 잘못을 고치는 것이 훨씬 쉽다. 가변적인 요소와 불변적인 요소를 함께 가진 전례 개혁에 대한 문제를 전례적 상징주의에 대한 입문의 문제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사목적 관점에서, 전수된 상징적 유산의 현명한 사용에 대한 관심을 촉구해야 한다. 예식은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의사전달의 모든 가능성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예식 자체를 실행하여야 할 계획으로가 읽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수성으로 실현하여야할 제안이나 예시로써 다시 읽을 것을 요구한다.14) 예식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효과를 가진 소비 상품처럼 이해될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또 지혜롭게 연출을 통해 공연되어야 할 대본처럼 이해되어야 한다.
전례적 창조성의 주제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 37-40 항에서 다루어 졌는데, '다양한 백성의 전통과 성격에 적응하기 위한 규범'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적응의 일반 원칙들이 정립된 후에, 그 실천의 다양한 단계들이 지시되었다.15) 토착화와 적응으로 이해되는 창조성은 결코 '자발성improvvisazione'과 같은 것이 아니라, 전통적 재료로부터 출발하여, 심화하고 생활하고 나서, 다양한 백성의 문화적 요구를 향해 개방되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기도하고 전례를 거행하는 교회는, 현대 문화에 이룩된 인간학적 전환의 긍정적인 측면에 전례라는 총체를 잘 접목하는데 성공하는 만큼, 현대 인류에게 의미 있는 선포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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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신앙을 표현하고 양육하는 전례거행16)
계시헌장의 가르침을 상기하면서, '신적 계시는 신자 공동체의 품에서 활동적이고 생생한 전통을 통하여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의 보편적인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사실, 전통의 전달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말씀의 본성에 따르면 그것은 경청되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전통은 교회의 교의와 삶과 전례를 또한 포함한다: "교회는 교의와 생활과 전례에 있어서 교회 자신의 모든 것과 또한 교회가 믿는 모든 것을 영구히 보존하며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전한다"(계시헌장 8).
그러므로 교회에 맡겨진 '계시의 유산'의 전달과정 속에서, 신앙과 전례와 생활 사이에, 즉 믿는 법lex credendi과 기도하는 법lex orandi과 사는 법lex vivendi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전례는 교회의 교의와 삶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전례는 신비의 로고스logos(말씀, 즉 교의)도 신비의 에토스ethos(윤리)도 아니지만, 자신(전례)의 충만한 진실성을 유지하기 위해 함께 필요로 하는 교의와 윤리와 관계를 설정하고 동시에 그들을 함축하는, 신비의 심볼론symbolon(상징)이다.
전례헌장은 "성사들은 신앙을 전제로 할 뿐 아니라, 말과 사물로 신앙을 기르고, 굳세게 하고, 또한 드러낸다. 그래서 신앙의 성사들이라고 불린다"(전례헌장 59)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성사성은 '믿어진' 신앙과 또 '생활하는' 신앙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신앙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세상의 그리스도교적 변화를 향한 성소를 따라 고유한 삶을 정돈하는 모든 신자들의 방향잡기이다. 또한 신앙은 사람이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신앙의 복종]을 드러내고, 이로써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드러내고 하느님이 주신 계시에 자의로 찬동함으로써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자유로 의탁하는"(계시헌장 5) 태도이다.
사람은 생명을 그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함께 하느님의 선물로써 받아들인다. 매일의 존재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을 직면하고 확인하는 특별한 순간에도 생명을 받아들인다. 후자는 신앙인의 삶의 중요한 순간이라 불릴 수 있는 성사적 순간이다. 교회의 임무는 '시대의 표지(징표)'를 관찰하고 성서에 비추어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다(참조. 사목헌장 4). 그러므로 교회는 '시대의 표지'에 대해 예언자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신앙에 비추어 분명해진 이것들은 "하느님의 현존과 계획의 진정한 표지"(사목헌장 11)가 된다. 이 가르침은, 창조와 역사의 고유한 성사성에까지 확대하는 방향으로, 성사적 차원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를 새롭게 한다. 사실 성사들은, 하느님의 현존의 표지인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사람을 접촉하게 하는 그런 양식으로 구성되었고 진행되어진다. 특히, 성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사건들을 부르고 그것을 전례적으로 재생한다고 이해된다. 사람은 성사 안에 자신의 모든 삶을 투신하고 미래의 나라의 실현을 미리 맛본다.
이런 전망에서, 성사들은 또한 신앙을 증거하는 장소가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사들이란 신앙을 선언하는 방식이다quaedam fidei protestationes"라고 말한다.17) 그러므로 '성사적 삶은 신앙의 참된 고백이다'라고 확언할 수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전례 안에서 거행되는 신앙의 신비에 대한 숙고를 위해서도 또한 중요한 결과를 제시한다. 왜냐하면 전례는 신앙의 참된 고백이요, 전례가 "제의적 실천이라는 단계에서 바라본 신앙의 실재의 재성찰인 한"18) 신학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전례는 인간의 성화와 하느님 예배라는 우선적 관점에서 신학을 표현하며, 전례가 신학적이거나 사변적인 목적을 직접적으로 혹은 우선적으로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안드로니코프C. Andronikof는 전례를 "교회 안에 살아있는 신학"이라고 부른다.19)
이런 생각들은, 교회적 통교와 동조되어 또 전통에 대한 완전한 충실성으로 전례가 거행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로 하여금 알아듣게 해준다. 다만 이렇게 될 때, 전례는 신앙을 양육하고 동시에 신앙의 참된 증언이 될 것이다. 초세기의 교회는 전례적 영역에서 규율의 자유를 더욱 광범위하게 누렸지만, 사도전통을 충실하게 보존하고 표현하는 영역에 항상 주의를 기울였다. 사도전통은 교회적 통교의 보증으로 간주되었다.20)
'교회적 통교'에 대해 말할 때, 교회의 삶에 있어서 이차적인 체계의 관점에 우선적으로나 혹은 그것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 혹은 교회의 신비를 가리킨다. 교회헌장이 교회의 신비를 '통교의 신비'로, 보다 정확하게는 '모든 구원 역사의 종착점인 신적 생명과의 통교', 즉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역사 안에서 실현되었고, 성령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또 신자들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통교'로 묘사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느님과 또 자신에게 속한 백성들 사이에 일치와 통교가 되는 것은 오로지 성령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통교는 아래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요 선물이다. 즉 통교는 한 분이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아버지의 선물이 단일한 신앙과 단일한 세례를 통하여 주어지고, 단일한 성체성사로 의미를 찾고 실현되는 것이다. 성사적 표지는 완전한 차원에서 교회적 통교를 이룬다.
결론적으로 '전례는 교의와 윤리와 동시에 관계를 맺으며, 그들을 동시에 함축하는 상징적 중개이다'라고 우리는 확언할 수 있다. 다른 말로, 기도하는 법은 그 자신의 성질로 믿는 법과 생활하는 법과 완전한 동조를 이룬다. 예배에 관한 모든 것은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삶과 신앙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주교는 이런 동조의 봉사자이며 보증인이다. 그의 임무는 사도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충실히 보존하는데 있다. 전례서의 규정들은, 이런 원칙에 비추어, 예식주의의 장벽도 또 쉬운 자발성도 피하면서 해석되어져야 한다.
[이 글은 현재 로마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중인 대구대교구 장신호 요한보스코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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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주. 이 부분은 마티아스 아우제(Matias AUG )의 저서 Liturgia - Storia, Celebrazione, Teologia, Spiritualit , Edizoni Paoline, 1992 Milano, pp. 84-96 의 번역이다.
2) 참조. M. Sodi, Celebrazione, in: NDL, p. 233.
3) A. M. Di Nola, Rito, in: Enciclopedia delle religioni, 5, Vallecchi, Firenze 1973, pp. 428-440; G. Gevaert, La dimensione antropologica dei riti cristiani, in: Aa.vv., Fede e rito. La dimensione rituale nell'esperienza di vita cristiana, Edb, Bologna 1975, pp. 45-79; F. Isambert, Rite et efficacit simbolique, Cerf, Paris 1979; L. Bouyer, Il rito e l'uomo. Sacramentalit naturale e liturgia, Morcelliana, Brescia 1984; S. Maggiani, Rito/Riti, in: NDL, pp. 1223-1232; S. Rosso, Rito e celebrazione, in: Enciclopedia di pastorale, 3: Liturgia, 위의 책, pp. 25-37.
4) 이에 대한 더욱 광범위한 문제제기를 보려면, C. Di Sante, Il rinnovamento liturgico: problema cultuale, Edb, Bologna 1978, pp. 248-250.
5) 참조. E. Durkheim, Le forme elementari della vita religiosa, Edizioni di comunit , Milano 1963, pp. 38-44; 405-424.
6) 참조. Eliade, Il mito dell'eterno ritorno, Borla, Roma 1968; A. M. Di Nola, Ripetizione rituale, in: Enciclopedia delle religioni, 5, 위의 책, pp. 383-420.
7) 기념의 개념에 대해서, 제 1장을 보라.
8) A. Kirch ssner, La puissance des signes. Origines, formes et lois du culte, Mame, Paris 1962; A. M. Di Nola, Simbolismo, in: Enciclopedia delle religioni, 5, 위의 책, pp. 1064-1085; L.-M. Chauvet, Linguaggio e simbolo. Saggio sui sacramenti, Ldc, Torino-Leumann 1982; D. Sartore, Segno/simbolo, in: NDL, pp. 1370-1381; J. Aldazabal, Somboli e gesti. Significato antropologico biblico e liturgico, Ldc, Torino-Leumann 1988; L.-M.Chauvet, Simbolo e sacramento. Una rilettura sacramentale dell esistenza cristiana, 위의 책, 특히 p. 79이하.
9) 참조. A. G. Martimort, in: Aa.vv., La chiesa in preghiera. Introduzione alla liturgia, I, 위의 책, pp. 195이하.
10) E. Ruffini, Sacramentaria, in: Nuovo dizionario di teologia, Edizioni Paoline, Cinisello B. 19885, p. 1366; 또한 다음 책도 참조할 것. R. Gerardi, I sacramenti della fede cristiana, Istituto di Teologia "Ut Unum Sint", Pontificia Universit Lateranense, Roma 1985, pp. 42-45.
11) C. Bernard, La foncion symbolique en spiritualit , in: NRT 95(1973) 1119-1136.
12) 예를 들어 참조. E. Urech, Dictionnaire des symboles chr tiens, Delachaux et Niestl , Neuch tel 1972.
13) 참조. D. Sartore, I fondamenti della liturgia cristiana nella problematica contemporanea, in: Aa.vv., Fede e rito. La dimensione rituale nell'esperienza di vita cristiana, 위의 책, pp. 17-44. 성서적 상징에 대해서는 참조. R. Riva, Simbolo, in: Nuovo dizionario di teologia biblica, 위의 책, pp. 1472-1490.
14) 참조. A. Pistoia, Creativit , in: NDL, p. 330.
15) 이 부분에 대한 참조. A. J. Chupungco, L adattamento della liturgia tra culture e teologia, Piemme, Casale Monferrato 1985; Aa.vv., Liturgia e adattamento. Dimensioni culturali e teologico-pastorali. Atti della XVIII Settimana di studio dell associazione professori di liturgia, Edizioni Liturgiche, Roma 1990; A. J. Chupungco, Liturgie del futuro. Processo e metodi dell inculturazione, Marietti, Genova 1991.
16) C. Vagaggini, Il senso teologico della liturgia, Edizioni Paoline, Roma 19654, pp. 477-508, 819-829; D. Power, Due espressioni di fede: culto e teologia, in: Concilium 2(1973) 141-150; Aa.vv., La liturgie expression de la foi, Conf rances Saint-Serge, XXVe Semaine d'etudes liturgique, Edizioni Liturgiche, Roma 1979; A. Donghi, Nella lode la chiesa celebra la propria fede, in: Aa.vv., Mysterion, 위의 책, pp. 161-192; F. Brovelli, Fede e liturgia, in: NDL, pp. 543-555; Aa.vv., Fede e sacramenti, problema aperto, numero monografico di RL 76(1989) fascicolo n. 1; J. Lopez Mart n, In spirito e verita , 위의 책, pp. 385-422.
17) Summa teologia, III, q. 72, a. 5, ad 2.
18) S. Marsili, Liturgia e teologia. Proposta teoretica, in: RL 59(1972) 456.
19) C. Andronikof, Le sens de la liturgie. La relation entre Dieu et l homme, Cerf, Paris 1988, p. 15.
20) 참조. Ignazio di Antiochia, Agli Smirnesi, 8, in: I Padri Apostolici, 위의 책, p.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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