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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여름 특강 2 강 아산UBF 메시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말씀: 빌립보서 2:1-11
요절: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사도 바울은 2장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하나 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실제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본을 보여주셨는지 소개하고 있으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셨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과 인격을 우리가 잘 배워서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맛보고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이 말씀은 빌립보 성도들의 정체성과 삶의 본질을 아주 깊이 있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이전에는 마음의 원하는대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이전에는 세상 풍조를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 예수님께 붙어 있는 지체가 되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모든 존재요소, 삶의 요소들이 모두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비롯되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것은 이론적이지 않습니다. 권면, 사랑, 위로, 교제, 긍휼, 자비 1절 말씀에 기록한 덕목들은 모두 공동체적인 것들입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각 지체들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훌륭한 덕목들입니다. 전에는 마음에 일어나는 욕심과 감정대로 말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이생의 자랑과 더 많은 소유를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며 생활하였습니다. 감정과 욕심과 세속적인 것이 관계의 바탕이었다면 이제는 성령께서 이루시는 거룩한 연합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름다운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권면과 사랑과 위로와 교제와 긍휼과 자비는 세상사람들이 따라하기 어려운 것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의 관계가 얼마나 수준높은 거룩함 가득한 것인지 드러내었습니다. 이런 권면과 사랑과 위로와 교제와 긍휼과 자비를 행하며 각 사람은 미리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예수님 믿고서 맛 본 이러한 신비하고 은혜롭고 차원높은 예수님 공동체와 공동체내에서의 교제를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신령한 교제를 해 보았다면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합니다. 한 마음을 품기 위하여 마음을 같이 하는 것, 같은 사랑을 가지는 것, 뜻을 합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하나됨을 권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였습니다.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이 외부로부터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고난의 강을 건너가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능력있는 자매님들이 있었는데, 이 중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인간적인 갈등은 서로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며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교회에 큰 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갈등을 속히 해소하도록 한 마음이 되라고 사도 바울은 권면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은 생각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같은 사랑을 가지는 것은 열정과 감성의 일치입니다. 뜻을 합하는 것은 추구하는 목적의 일치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권면과 사랑과 위로와 교제와 긍휼과 자비를 체험한 사람들 답게 계속하여 한 마음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한 마음, 한 뜻이 되는데 가장 거침돌이 되는 것은 다툼과 허영입니다. 다툼은 영어성경에는 selfish ambition(NIV, ESV)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이익, 개인의 명예를 추구하여 소모적 경쟁이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허영은 영어성경에는 empty glory(ESV), vain glory(KJV)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직역하면 헛된 영광인데, 실체가 없는 자기 과시를 말합니다.
UBF에서 캠퍼스 선교를 하고 세계선교 위하여 선교사를 파송하는 단계는 다섯 단계가 있습니다. 1단계는 Fishing과 Regeneration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 초청하고 그 사람이 말씀을 통하여 거듭나는 것입니다. 2단계는 Growing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도록 환영하고 섬겨주고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3단계는 Training입니다. 믿음이 자라났으면 연단을 통하여 그동안의 인간적인 요소, 세속적인 습관, 육적인 소원을 버리고 죽이는 연습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4단계는 Discipline입니다. 죄악된 요소를 상당히 털어냈으면 능히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도록 어디가서 혼자 있어도 스스로 말씀의 샘을 파고 능력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영적인 역량을 갖는 단계입니다. 5단계는 Apostle입니다. 주 예수께서 가라고 하는 곳으로 순종하여 나가는 단계입니다. 1단계, 목자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성경공부를 통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격적으로 영접한 후 2단계, 목자님들의 사랑과 교회의 전인격적인 보살핌과 관심속에서 믿음이 자라납니다. 여기서 멈추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모임 자체가 들어주고 섬겨주는 일만 열심히 하다보니 그럴 수도 있습니다. 모임에 연단 프로그램이 있고 본인들도 ‘저 주님의 연단 받고싶어요’ 말은 하지만, 막상 ‘연단’-Training이 시작되면 정도 차이만 있을 뿐 극렬하게 반발합니다. 일단 반발이 일어나면 Training은 중단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임이 군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연단이 있습니다. 교회에 마련된 연단프로그램을 통하여 연단받는 경우가 있고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하나님께 직접 연단받는 것입니다. 연단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사울왕과 다윗왕의 차이를 낳았습니다. 노예로 팔려가기, 억울한 누명 쓰기, 은혜 준 사람에게 잊혀서 오래 기다리기 이런 연단이 위대한 애굽총리 요셉으로 이끌었습니다.
어쨌든 대부분 신자들은 Training 받지 않고 계속 Growing 단계에서 받던 것들이 지속되기 원합니다. 교회 형제들이 나의 말을 계속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동안 그래 왔습니다. 교회 어른들이 계속 나에게 관심을 갖고 대단하다, 훌륭하다, 멋지다 인정과 칭찬을 지속해주기 원합니다. 원래 귀하게 자란 사람은 교회 오기 전에도 나는 그랬고, 교회와서도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렇기를 원합니다. 관심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교회에 와서 처음 맛본 ‘사람들의 환영과 칭찬과 관심’이 줄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나를 들어주고 나에게 관심가져주는 정도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인정받고 관심받고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은 과정에 불과합니다. 관심받고 인정받고 영향력을 가진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내 뜻대로 통제하고 내 논리대로 따르게 하고 나의 옳다하는 방향으로 나가게하기를 강렬히 원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망,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고 간섭하려는 욕망이 Selfish Ambition입니다. 이곳에 반드시 다툼이 일어납니다. 관심 받으려고 열매 없는데도 열매 있는 척, 위로부터 주신 구체적 은혜가 없어도 있는 척 교회 안에서 사람들 앞에서 삐에로같은 행동을 합니다. 이것을 ‘허영’이라 합니다.
이것을 속히 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각별히 힘써야 것이 있습니다. ‘겸손’입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체험하는 가장 확실한 루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있고 관계에서의 겸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은 주의 말씀에 절대 복종, 순종합니다. 관계에서의 겸손은 항상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비난 당하는 대표적인 이슈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니 나보다 못하다고 여깁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으니 나보다 못하다는 인식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나보다 예수 늦게 믿었다고 나보다 못하다고 여깁니다. 나보다 못하게 여길 이유가 없어도 이 사람 저 사람 마음대로 함부로 점수 매기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점수 매기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라는 말씀이 성경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겸손한 마음을 가졌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 다른 형제들을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 여겨야 한다고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로마시대 사람들은 개인의 명예와 이익에 집중하였습니다. 오늘날도 개인주의는 강한 트렌드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보라는 것은 개인주의 개인의 명예를 중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고 문제제기 하며 통제하려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형제애를 위한 배려, 연약한 사람들에 대한 보호와 섬김을 조용하고 성실하게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상의 권면들은 교회를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되는데 도움이 되는 주옥같은 교훈입니다. 문제는 교훈대로 잘 안 되는 것입니다. 100-1=0 이라는 법칙이 있습니다. 100번 착하게 행하였어도 한 번 사람들 앞에서 내 자랑하는 것이 노출되면 사람들은 100번 착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한 번 자랑한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내 생각입니다. 사실은 10번 중에서 5번은 내 자랑을 일삼았는데 내가 기억하는 것이 100의 1일 뿐입니다. 또한, 내가 틀린 말을 하지 않는데 왜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사실 내가 하는 말대로 생활하지 않고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나 자신인 것을 나만 모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해법이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는 겸손해지는 것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안 됩니다. 헛된 자랑을 버리는 것이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배운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안에 품는다면 우리도 오만하지 않고 좋은 관계를 맺는 성숙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뜻은 높은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도 하나님의 영광, 하늘 높은 곳이 나의 있어야 할 곳이라 자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이 땅에 오셨으며, 이 땅에 오실 때는 마굿간에 나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나사렛 사람이라 일컬음 받았으며, 죄인들, 버림 받은 사람들, 고난에 처한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처럼 높은 곳에 마음 두지 않으신 것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라 부르는 사람들이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마음을 높은 곳에 두려는 것을 자제하고 버리고자 애써야 합니다. 마음을 높은 곳에 두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성전 높은 곳, 가장 높은 곳에 데리고 올라가는 것은 마귀가 한 일입니다.
7,8 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는 마음만 낮은 곳에 두신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낮아짐을 철저하게 행하셨습니다. 어디까지 낮아지심을 행하셨냐 하면,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낮아지심을 행하고자 목숨을 다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모욕받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음을 낮은 데 두시고 그 지극한 겸손의 마음을 따라 낮아짐을 죽기까지 행하셨을 때 어떻게 되셨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9~1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나님께 높임 받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세상 원리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으시고 예수님께 가장 높은 영광 가장 위대한 영광을 주십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란 예수님께 주신 최고의 권위와 영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존재의 본질과 권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우주적인 주권을 예수님께 주시고 모든 창조물들이 완전한 복종과 경배를 예수님께 드리게 하십니다.
사람이 낮은 데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것은 낮아지는 것으로 끝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낮아지고 겸손하다가 사람들이 만만하게 보거나 무시당하면 그대로 비천하게 된다고 여깁니다. 이런 개념이 로마시대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스스로 낮아져봐야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 지금 세상 사람들, 믿음없는 사람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겸손을 생각하다가도 겸손이 당장 손해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감지하고는 겸손을 포기합니다. 당장 자기 유익을 위하여 이기적인 야망과 헛된 자랑을 일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라 겸손을 행하는 사람을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높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을 본받을 때, 교회는 하나가 되고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을 본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체험합니다.
지금의 세상은 끊임없이 자기 알릴 것을 강조합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SNS는 마음껏 자기 자랑을 하라는 온라인 공간입니다. 진정한 자아실현의 길은 겸손의 주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는 데에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친히 높여주시고 영광을 덧입혀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겸손할 때, 그 사람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와 사회가 반드시 알아주는 날이 옵니다. UBF에서도 유명한 선교사님들은 대단히 겸손하십니다. 이 분들이 겸손하다고 해서 무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존경하고 좋아하고 서로 모시고 싶어합니다. 이런 겸손의 사람들 덕분에 공동체가 굳게 서고 우리 모임은 더욱 격조높은 곳이 됩니다.
겸손을 실천해 나갈 때, 각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분명한 Identity가 세워집니다. 겸손을 행하면 예수님을 깊이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에게 그리스도 교회의 진정한 리더십을 주십니다. 겸손한 사람이 있을 때, 그 공동체나 모임은 일어나는 여러 갈등을 해소하고 조정해 나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하여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이고 공동체를 하나가 되게 한 사람을
크게 축복하여 주십니다. 겸손을 행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여 주십니다. 낮아짐으로써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높임받는 사람은 세상과 다른 방식을 보여주고 하늘로부터 받은 초월적인 절대 가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이려 하다가 열매도 없고 관계는 파괴되고 하나님의 능력은 체험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까? 아니면 스스로를 낮추어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낫게 여김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맺고 공동체를 화목하게 하며 개인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함께 하심을 체험해 나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까?
우리가 요즘 낮아짐, 겸손의 말씀을 반복해서 공부하는 것은 우리 모임에 다툼이 있거나 관계의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알고 느끼다시피 우리 모임에는 서로 갈등하거나 반목하는 문제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은 각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함을 맛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은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각 개인들이 맛보기를 원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높여주심을 체험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해주시는 믿음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 주님 다시 뵐 때까지 확신 있게 주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눈이 고정되어 사람의 상 받는 것을 원하는 습관을 가지면 비참합니다.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면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관심을 원하지만 오히려 사람들이 떠나고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어갑니다. 속히 시정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은 인생의 상이 될 수 없습니다. 불완전한 사람의 영광을 바라다가 삶을 의미없이 허비합니다. 조변석개 하는 사람의 상은 평안을 빼앗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오직 우리의 창조주요 참 아버지인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는 것이 복입니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라 겸손을 배우고 사람들 앞에 낮아지는 연습과 훈련에 참여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사람들 속에서 내가 낮아질 때, 높여주시는 하나님, 사람들 가운데에서 내가 비천할 때 나를 영광스럽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면 내면에 평안이 오래 지속됩니다. 언제나 여유가 있고 무엇이든지 확신을 가지고 모든 일에서 인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아름답고 위대한 삶을 힘차게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해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열매를 맺어 더욱 그리스도를 믿는 확신 가운데 거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앞서 가시며 보여주신 십자가와 부활의 본을 깊이 배우고 따르시기를 기도합니다. 요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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