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주변의 여러 나라와 빈번하게 항쟁과 교역을 벌여 왔다. 원래 한반도의 역사는 중국대륙의 정치형세와 밀접히 관련돼 있었다. 중국의 역사는 남방의 농경민족인 한족과 북방 유목민족과의 끊임없는 통일과 분열, 나아가 대립과 투쟁으로 한국의 역사에 파장을 미쳤다. 이것은 동아 국제정세의 삼각관계에 기인하는 결과지만, 때로는 우리 역사에 유리하게 전개되곤 했다. 이 때문에 북방민족들은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고려를 위협하기 위해 침략하곤 했던 것이다.
고려의 천리장성. 서쪽으로는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인 함흥의 도련포(都連浦)까지 이르는 1000여 리였다. 7.5m 높이로 쌓은 이 장성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고려의 북방 방어선이었으며, 그 유적은 지금도 의주 등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발해 멸망시킨 거란 배척
고려가 건국된 10세기 초에는 대륙에서도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중국대륙에서는 5대 10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송이 일어났다(960). 여기에서 고려가 수립한 대외정책은 북진·친송정책이었다. 당시 거란에 대해 배척 정책을 쓴 것은 거란이 중국 5대의 혼란기에 장성을 넘어 연운(燕雲) 16주를 침략했고, 또 동족 의식을 가진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에도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태조의 거란에 대한 대응은 강경책이었다. 942년 거란이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바치자, 태조는 “거란은 발해와의 구맹(舊盟)을 저버리고 하루아침에 공멸한 무도의 나라이므로 교빙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사신은 섬으로 유배하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밑에 매어 둬 굶어죽게까지 했다.
태조 고구려 옛 수도 서경 중시
태조는 고구려의 옛 수도 서경(평양)을 군사력으로 통제하지 못해 북방민족이 고려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종종 있어 그 해로움이 크다고 지적하고, 백성을 그곳으로 옮기면 변경이 튼튼해져 후세에 큰 이로움이 된다고 역설했다.
태조의 서경 중시는 고구려의 계승의식, 고구려계 유민의 위무, 발해·여진족의 포섭과 거란의 남진 방어태세 등 다양한 목적을 포함한다.
태조는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진 정책을 강행해 청천강까지 국경을 확장시켰다. 또 후당(後唐)과 후진(後晋)의 힘을 이용해 거란을 공격하려고 했다. 거란을 적대시했기 때문에 태조 왕건의 북방정책은 서북면에 집중됐다. 청천강변의 요새지인 안북(安北)에 부(府)를 설치하고, 대동강과 청천강 사이에 패서 13진을 설치, 거란의 침입에 대비했다. 서북면 방어가 어느정도 강화되자 여진족의 침략이 빈번한 동북면 방어를 서둘렀다. 태조는 즉위 3년 (920) 유금필(庾黔弼)을 함경도로 파견, 여진족을 군사력으로 통제하게 했다.
이러한 태조의 서경 중시와 북진 정책, 반거란 정책은 역대 왕에게도 계승됐다. 정종은 북방 개척을 위해 서경 천도를 계획하는 동시에,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고 30만 명의 광군을 조직해 거란 침입에 대비했다.
개성 공민왕릉의 무인석. 태조 왕건은 무인으로서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를 세운 인물이다. 통일 후 국가의 수성을 위해 무보다는 문을 앞세우며 통치기반을 불교 로 삼았다. 그러나 개국세력과 각 처의 호족 세력을 견제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3차에 걸친 거란 침입 막아내
또 정종·광종은 청천강 너머 압록강 사이에 여러 성진을 쌓아 북방 경계를 엄히 했다. 그런데 광종 때 발해 유민들이 일찍이 고구려가 흥기했던 압록강 중류 지역에 정안국(定安國)을 세워 송나라·고려와 통교하면서 거란에 적대하므로, 거란은 이를 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고려를 침입했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은 고려가 내치를 다지던 성종 12년(993)에 있었다. 거란은 986년 먼저 압록강 중류의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또 압록강 하류의 여진족을 경략해 991년 내원성(遠城)을 쌓은 뒤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그때 거란은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이끌고 고려의 서북면으로 쳐들어왔는데, 고려군 중군사(中軍使)로 출정한 서희(徐熙)가 그와 담판을 벌여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거란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거란군을 철수하게 하는 한편 압록강 동쪽의 여진의 옛땅을 소유하는 권리를 얻게 됐다.
거란군이 철수하자 고려는 압록강 이동의 여진을 토벌하고 거기에 여러 성을 쌓아, 이른바 ‘강동(江東) 6주’를 소유하게 됐다. 이로써 고려의 국경은 압록강에 이르게 됐다. 거란은 고려가 강동 6주를 점령하고 군사적 거점으로 삼은 데 불만을 갖고 그의 할양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드디어 1010년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제2차 침입을 해 왔다.
그때 서북면 도순검사(西面都巡檢使) 강조는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致陽)이 불륜 관계를 맺고 왕위까지 엿보자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와 함께 목종까지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했는데, 거란족은 정복왕조 요(遼)를 성립시킨 후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핑계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양규(楊規)가 흥화진(興化鎭)에서 거란군을 맞아 잘 싸웠으나, 강조가 통주(通州)에서 패해 포로가 되고 개경까지 함락됐다. 이때 고려 최초로 국왕이 수도를 버리고 피란하는 일이 발생했다. 막 왕위에 오른 현종은 지방민의 수모를 겪어가며 나주로의 피란을 결행한다. 그러나 요나라는 다만 고려왕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별다른 소득 없이 철군했다. 그것은 그때까지도 항복하지 않은 북계의 서경·흥화진 등 여러 성의 군사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약속한 국왕의 입조를 지키지 않았고, 요가 이를 독촉했으나 현종은 병을 칭해 회피했다. 그러자 거란은 본래의 목적인 강동 6주 반환을 강요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국경선에 천리장성 쌓아
이에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입을 강행했다. 그러나 상원수 강감찬(姜邯贊)이 흥화진에서 거란군을 맞아 크게 무찌르고 퇴각하는 적군을 구주에서 섬멸해 거란의 침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침략은 이렇듯 참패만 당하고 그들의 목적인 강동 6주의 쟁탈에 실패하자, 1019년 고려와 화약을 체결해 평화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그러나 고려는 북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필요를 느끼고 전란이 끝나자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1029년부터 개경에 나성(城) 을 축조했다. 그 뒤 1033년(덕종 2)부터 국경선에 장성을 쌓기 시작해 1044년(정종 10)에 완공했다. 바로 ‘천리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