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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왜 빈 암자를 가시려고 합니까.”
일타는 봉화읍에 도착하자마자 멍석에 약초를 펴놓고 파는 허름한 약초가게에 들러 도솔암 가는 길을 물었다. 마침 약초가게 주인은 봉화군 소천면 홍점골 출신이었다. 가게 주인 역시 6.25 전쟁 중에 홍점골에서 읍으로 이사한 약초꾼이었다.
“홍제사 밑 홍점골에서 살았지요. 스님, 도솔암은 홍제사에서도 10리 계곡을 올라가야 합니다. 가파른 계곡에는 길이 없습니다. 바윗돌에 난 희미한 발자국을 따라 올라가야 도솔암에 이릅니다.” 약초꾼인 가게주인은 홍제사와 도솔암의 소식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지금도 약초를 캐러 그곳을 자주 드나드는 모양이었다.
“비구니스님들도 떠나는 마당에 스님은 왜 빈 암자를 가시려고 합니까.” 약초꾼이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스님, 가지 마십시오. 우리 같은 속인도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나오는 판에 어찌 사시려고 들어가십니까.” 도솔암이라고 합니다. 도솔암에서 수행하시는 분들 모두가 도인이 됐다고 합니다.”
일타도 은사 고경에게 도솔암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도솔암은 띳집암자로 이어져오다가 허술한 띳집마저 무너져 1893년 암자를 중창할 때 통도사 환담(幻潭)이 20냥을 시주한 바 있는데, 일타에게는 그 환담이 절집 촌수로 따지자면 증조(曾祖)가 되었다. “스님께서는 오늘 꼭 그곳으로 가셔야만 합니까.” 그러자 약초꾼이 홍제사까지만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제가 지름길을 압니다. 마침 저도 묵은 밭에 심어놓은 더덕을 캐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일타는 합장하며 말했다.
“초행길어서 고생길이 될 뻔했는데 함께 가주신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다 그냥 놔두고 태백산 밖으로 나왔지요.” 일타는 약초꾼을 길동무 삼아 길을 나섰다. 약초꾼은 망태 속에 호미와 낫 등을 챙겨 넣고 일타보다 반걸음 앞서 걸었다. 억새꽃은 울퉁불퉁한 산길 가에 무더기로 피어나 한낮의 햇살을 머금고 있었다. 일타는 개울을 가로지는 첫 번째 돌다리를 건넌 뒤 물었다. “도솔암에는 어떤 도인들이 계셨습니까.” 큰스님도 도솔암에 계셨다고 합니다.”
일타가 통도사에서 들었던 만공에 대한 얘기는 이러했다. 만공도 도솔암을 찾아 홀로 정진한 적이 있었다. 도솔암은 그때나 지금이나 선객들 사이에 참선과 기도가 잘 되는 암자로 소문이 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예부터 선객들은 금강산의 마하연과 오대산의 적멸보궁과 태백산의 도솔암을 들러 한 철이라도 참선 정진하기 위해 원을 세우고 만행했다.
그런데 세 곳 중에서 태백산 도솔암이 가장 찾아가기가 어렵고 험한 까닭에 암자는 빌 때가 많았다. 만공이 갔을 때도 도솔암은 비어 있었다. 무쇠 솥이 하나 걸린 부엌에 땔감은 조금 있었으나 단지에는 쌀이 한 톨도 없었다. 만공은 암자 오른쪽에 있는 샘으로 가 찬물을 마시고 나서 탁발한 쌀 한 되박을 걸망 속에서 꺼내 밥을 지었다.
밥을 다 짓고 나서였다. 김치를 꺼내려고 김칫독을 보았으나 텅 비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반찬거리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암자 뒤에 빈 소금가마니 하나뿐이었다. 소금가마니 속에는 소금이 한 줌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만공은 소금가마니 겉에 쌓인 먼저를 털어내고 칼로 가마니 밑을 베어내 물에 담갔다. 그러자 짠맛이 우러나왔다. 그 물을 밥에 뿌리어 간을 맞추니 밥이 꿀맛으로 변했다. 그러나 쌀 한 되로 지은 무쇠 솥 속의 밥은 3일 만에 떨어졌다.
밤낮 없이 참선 정진을 하다가 허기지면 떠먹곤 하던 밥이 누룽지까지 동이 났던 것이다. 밥 대신 물을 마시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빈속으로 참선하다 보니 정신이 흐려지고 화두가 달아났다. 별 수 없이 만공은 도솔암을 내려와 탁발을 나섰다. 화전민이 사는 농가는 도솔암에서 10리 터울로 드문드문 한 채씩밖에 없었다. 만공은 한 화전민 농가의 사립문 밖에서 목탁을 쳤다. “지나가는 중 밥 좀 주시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마침 농가 마루에는 중년 부부와 네댓 살로 보이는 아들이 시래기국에 조밥을 말아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모른 체하던 중년 부부가 목탁을 쳐대는 만공을 흘깃 쳐다보더니 아이에게 시래기국밥을 한 그릇 보내왔다. 아이는 밑이 터진 핫바지를 입고 있었다. 작은 고추가 어정어정 걸을 때마다 달랑거렸다. 그런데 마당을 내려서는 아이의 달랑거리는 고추가 시래기국밥에 담가졌다. 아이는 그것도 모르고 오다가 수염이 덥수룩하고 키가 큰 만공을 보더니 무서워서 그릇을 마당에 놓고 달아났다. 시장했던 만공은 아이의 고추가 담가졌던 시래기국밥을 단숨에 비웠다. 다 먹고 나서는 합장하며 한 마디 했다.
“고추 담근 좁쌀 시래기국밥! 천하의 진미로다. 이보다 맛있는 공양을 어디서 또 먹어볼까. 과연 도솔암 정진의 영험이 크긴 크구나.” 일타는 약초꾼에게 만공의 일화를 얘기해 주고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아기 고추가 담긴 좁쌀 국밥을 맛있게 드신 만공스님의 도력이 어떻습니까. 마음을 자재하게 굴리신 도인 중에 도인이십니다.”
약일뿐입니다. 만공스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맛있게 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만공스님에게는 먹는 밥이 그대로 법이 되는 것입니다.” 약초꾼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우리 중들은 진리를 법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수행자가 밥을 먹는 것은 단순히 시장기를 해결하고자 먹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구하기 위해 먹는다는 것입니다.”
일타와 약초꾼은 오후 늦게 홍제사에 도착했다. 약초꾼의 말대로 홍제사는 텅 비어 있었다. 마당에는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마루에는 먼지가 허옇게 쌓여 있었다. 스님이 떠난 빈 절을 보면서 일타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비구니스님들마저 정화를 한다고 절을 비워 놓고 없으니 부처님이 뭐라고 하실까. 무엇이 참 정화인가. 빼앗긴 절 찾아오는 것보다 마음 깨치는 것이 참 정화가 아닐 것인가.’ 일타가 망연히 서 있자, 약초꾼이 말했다.
“스님, 오늘은 여기서 머물지요. 아마 도솔암도 사정은 이럴 것입니다.” 그러자 약초꾼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보나마나 도솔암에는 식량도 반찬도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 저의 옛집에 숨겨둔 쌀과 반찬이 있으니 오늘은 여기서 공양하시지요.” 그래도 약초꾼은 자신이 살던 옛집에 쌀과 반찬거리를 숨겨두었으니 일타더러 양식을 마련해 올라가라고 말했다. “양식을 조금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내일 올라가시지요.”
약초꾼이 홍제사 왼쪽으로 난 산길을 앞서 걸었다. 배추와 무가 심어진 밭뙈기를 지나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하나 나타났다. 홍제사 뒤쪽 태백산에서 소천면으로 흘러가는 계곡물이었다. 그 계곡물에 또 하나의 작은 계곡물이 만나고 있었는데, 바로 그 합수되는 지점이 바로 도솔암 가는 입구였다.
“스님, 저 계곡을 타고 올라가야 합니다. 갈 수 있겠습니까.” 계곡을 몇 번 이 쪽 저 쪽으로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사람 발자국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약초꾼은 바로 돌아가지 않고 한 동안 계곡을 오르며 길을 안내해 주었다. 초행자로서는 어두워지면 갈 수 없는 길이었다. 약초꾼 말대로 도솔암 가는 길은 ‘길 없는 길’이었다. 물이 흐르는 계곡이 바로 산길이었다. “스님, 도솔암에 양식이 하나도 없으면 바로 저의 옛집으로 내려오셔야 합니다.” 지금 캐지 않으면 멧돼지가 다 파먹고 맙니다.” 약초꾼은 계곡이 끝난 지점에서 돌아섰다.
“스님, 여기서부터는 길을 잃을 위험이 없습니다. 저 산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시면 도솔암에 이릅니다.” 일타는 약초꾼과 헤어져 편한 마음으로 산길로 들어섰다. 산길은 계곡과 달리 가파르지 않고 완만했다. 청랭한 공기가 콧속을 상쾌하게 했다. 해발 1천 미터쯤 다다른 느낌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전망이 트여 갑갑하지도 않았다. 구름이 걸린 산 정상으로 오를수록 봉화 쪽으로 뻗어나간 산들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일타는 도솔암이라고 쓴 판자간판 아래서 걸음을 멈추었다. 도솔암은 흰 구름 한 자락이 덮인 산중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과연 원효대사가 낮에는 호랑이와 표범 같은 맹수들들과 밤에는 둥그런 밝은 달과 이웃해서 살았음직한 암자 같았다. 도솔암에 사는 것만으로도 도가 닦이고 번뇌가 사라져 마음은 차디찬 재와 다름없어질 것 같았다.
일타는 첫눈에 반했다. 적어도 십년은 도솔암에서 두문불출하며 살 것 같았다. 암자 마당에 올라 주변의 산봉우리들을 둘러보니 더욱 마음에 들었다. 왠지 전생에도 수행을 했던 암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약초꾼 말대로 도솔암도 홍제사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당장 먹을 양식과 반찬이 있었다. 부엌의 쌀단지에는 쌀이 서너 되쯤 남아 있었고, 고추장단지 속에도 맛있게 삭은 고추장이 들어 있었다. 또한 신장단 탁자 밑에는 귀한 설탕도 한 봉지 있었다. ‘부엌살림이 이 정도면 수지맞은 것 아닌가. 게다가 허공에 펼쳐진 산봉우리들이 내 기분에 딱 맞으니 이보다 좋은 인연이 어디 있을까. 한 십년은 뭉개고 정진해야지.’
일타는 오대산 서대 염불암에서 했던 것처럼 도솔암과 빈 홍제사를 오르내리며 오후불식에다 장좌불와를 하기로 스스로 정했다. 겨울을 무사히 난 다음해 봄 일타는 문득 시정(詩情)이 일어 이른바 입산시를 흥얼거렸다.
높은 산과 넓은 물길 피하지 아니하고
1955년 일타의 나이 27세 때의 일이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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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청산에 꽃이 피었다 졌다 하는 것을 보았느냐
봄이 아니면 꽃이 피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고개를 한번 돌아보니 천지가 눈꽃으로 희어버렸더라.”
1957년.
석남사 주지를 맡게 된 인홍은 홍제사를 떠났다. 홍제사 비구니 대중도 뿔뿔이 흩어졌다. 대중 중에 현각과 불필 등은 인홍을 따라 석남사로 갔고, 나머지 비구니는 각자 인연 따라 다른 절을 찾아 갔다.
홍제사는 잠시 비었지만 곧 태백산 기운과 산세를 좋아하는 비구들이 대여섯 명 들어와서 대중을 이루었다. 법전이 ‘따로 살지 말고 모여 살자’고 제의하여 서암, 지유, 석주 등이 흩어져 수행하다가 홍제사로 들어왔던 것이다.
일타는 도솔암에 그대로 있으려고 했지만 법전이 도솔암까지 올라와 홍제사로 내려오기를 간청하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법전은 일타보다 세속의 나이로는 서너 살 위였지만 출가한 연도가 같은, 즉 승랍(僧臘)이 같았으므로 서로 아끼고 존중하는 도반이었던 것이다.
“일타스님, 우리 홍제사에서 신심 나게 정진 한 번 해보십시다.”
“도솔암을 비우란 말입니까.”
“우리가 어느 시절에 함께 만나 대중생활을 수 있겠소. 그러니 이번 기회에 맑은 스님들과 정진해보자는 것이지요.”
일타는 끝내 법전의 제의를 거절하지 못했다. 성철을 만나러 통영의 천제굴에 갔다가 도반이 된 법전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저는 한두 철만 나고 도솔암으로 다시 올라오겠습니다.”
일타는 도솔암이나 홍제사나 태백산 홍점골 안에 있는 절이므로 동구불출의 원칙에 위배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인홍이 머물 때도 양식을 조달하러 홍제사까지 자주 오르내렸던 것이다. 더구나 홍제사에 모인 비구 대중들 모두 언젠가 한국불교를 이끌어갈 대들보 같은 소중한 선지식들이라고 생각했다.
“홍제사에 오신 스님들과 함께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법전스님, 감사합니다.”
“일타스님, 참으로 잘 결정하셨습니다.”
도솔암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직도 인홍이 있는 줄 알고 홍제사를 찾아온 비구니들이 도솔암으로 올라가면 되기 때문이었다.
“마침 비구니 두 사람이 도솔암을 지킨다고 하니 잘 됐지 뭡니까.”
다음날 일타는 걸망에 승복과 발우만 넣고 홍제사로 내려갔다. 서암이 망태에 무언가를 뜯어 담고 있다가 일타를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일타수좌, 어서 와요.”
“스님, 오랜 만에 뵙습니다. 약초를 뜯고 계십니까.”
“약초가 아니에요. 산토끼가 먹는 풀인데 사람에게는 나물이 돼요. 스님들에게 맛있는 반찬 해주려고 뜯고 있어요.”
그러면서 서암이 밭둑에 난 풀을 한두 잎 뜯더니 씹어 먹었다.
“스님, 독풀도 있잖습니까.”
“독풀도 작게 먹으면 오히려 약이 돼요. 산짐승들은 우리 인간처럼 절대로 욕심을 부려 많이 먹지 않습니다. 약이 될 만큼만 조금 먹으니 독풀들하고 공생 공존하는 것이지요.”
일타가 우두커니 서 있자, 서암이 자신보다 12살 아래인 일타에게 우스갯소리를 했다. 서암은 다른 스님들에게도 농담을 잘했다.
“일타수좌, 혼 빠진 할미가 딸네집 건네 보듯 하고 있지 말고 어서 절로 갑시다. 하하하.”
“네, 서암스님.”
“스님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요. 절은 절하는 곳이 아닙니까. 하하하.”
그날 밤 큰방에 모여 소임을 짰다. 가장 연장자인 서암에게는 소임을 맡기지 않았다. 선방으로 치자면 특별한 소임 없이 대중과 함께 정진하는 한주(閑主)인 셈이었다. 누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각자 자신이 정했다. 법전이 먼저 자신이 맡고자 하는 소임을 말했다.
“저는 부목을 맡겠습니다. 산비탈에 넘어진 썩은 나무둥치를 줍고 톱질해서 울타리 밑에 장작 쌓는 실력이야 저를 따를 분이 있겠습니까.”
지유도 나서 말했다.
“저는 공양주 소임을 맡겠습니다. 양식을 잘 마련하여 여러분께 부처님 마지 올리듯 따뜻한 밥을 해 올리겠습니다.”
석주도 조용히 말했다.
“제가 할 일은 채공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태백산 약초와 나물을 캐다가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법전이 일타를 지목하여 말했다.
“일타스님은 이야기를 잘하니 신도를 맞이하는 지객을 맡으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자 다른 스님이 말했다.
“일타스님은 염불이 최고라고 금오스님께서 칭찬하시더이다. 그러니 부전을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타가 진주 응석사에서 부전 소임을 볼 때 염불기도를 7일 동안 밤낮으로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응석사 조실인 금오가 일타를 불러 크게 칭찬했던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지객과 부전을 동시에 맡아달라고 하자 일타는 부담스럽기도 하여 대답을 못했다.
“일타스님, 두 가지 소임을 맡게 된 거 축하드립니다. 그만큼 능력이 있으니 맡기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일타는 지객과 부전 소임을 함께 맡기로 하고 안거에 들어갔다.
안거는 선방 청규에 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로웠다. 좁은 선방에는 돌아가면서 한 사람만 들어가기로 하고, 나머지는 각자 소임대로 나무를 하거나 반찬거리를 구하거나 멀리서 온 신도를 맞이하여 설법을 했다.
대중은 서로 이야기하면서 신심을 돋우기도 했다. 서암이 한 얘기도 대중에게 울림이 컸다. 서암이 탁발을 다니면서 경험한 얘기였다.
서암이 탁발하려고 한 곳은 마을의 부잣집이 아니었다. 마을 입구의 후미진 산모퉁이에 움막을 만들어 사는 거지촌으로 가 목탁을 치며 염불을 했다. 목탁 소리가 시끄러웠던지, 한 사내거지가 움막의 거적때기를 들추고 나와 서암을 쳐다보았다. 서암은 염불을 끝내고 나서 한 마디 했다.
“적선(積善)하시오.”
적선이란 선을 쌓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거지는 보시하라는 말로 알아듣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얻어먹는 거지가 스님께 줄 것이 어디 있겠소. 동냥해온 식은 밥이 조금 있을 뿐이니 저 마을의 부잣집으로 가보시오.”
“먹다 남은 밥이라도 좋으니 적선하시오.”
순간, 거지가 ‘내가 스님에게 밥을 줄 때도 있네’ 하고 중얼거리면서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피식 웃으며 나왔다. 그때 서암은 거지의 얼굴을 보고 ‘탁발 한번 잘했다’는 만족감이 들었다. 식은 밥 한 덩이보다 거지의 행복해하는 표정을 탁발한 것 같았던 것이다.
서암의 얘기를 듣고 있던 일타가 말했다.
“가섭존자도 부처님 살아계실 때 스님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나는 그 거지처럼 만족해하고 행복해하는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일타수좌, 가섭존자도 탁발하면서 나와 같은 경험을 했단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