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풀 꽃 등 땅의 온갖 생명들이 이슬에 젖어있는 촉촉한 오월의 이른 아침이다. 새들은 제 특유의 리드미컬한 음절로 짝을 향해 구애의 신호를 보내고 양자산 계곡에서 시작된 운무는 산을 에워싸고 능선까지 차올랐다가 아랫마을을 향해 느릿한 움직임을 시작하는 새벽. 뻐꾸기 울음이 옆쪽 숲에서 손에 잡힐 듯 우렁차게 들려온다.
산으로 둘러싸인 텃밭 한가운데 앉아 나는 열무를 뽑아내는 중이다. 남편의 지극한 손길로 먹기에 안성맞춤으로 부드럽게 자라나있기도 하지만, 이슬에 젖어있는 열무를 손에 잡을 때의 느낌은 나를 전율케 한다. 막 잡아 올린 싱싱한 물고기를 잡은 느낌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살아있는 생명체의 온기와 생기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사람의 살결과 닿은 듯 맥박소리 들리는 듯 하고 힘과 탄력이 느껴진다. 되도록 적게 잘라내고 열무 제 모양 그대로 다듬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마트나 상가에서 구입하는 야채들은 잡은 지 오래된 죽은 생선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생기나 온기 아니 힘이나 탄력과 향기는 이미 현저히 감소된 뒤가 아닌가. 그러니 밭에서 직접 채취한 상추나 고추가 더 맛있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싱싱함 그 자체가 제 맛인 것이다.
십여 년 넘게 텃밭을 가꾸면서 꽤 다양한 작물을 심어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였다. 열무는 벌레가 많이 생기고 물을 좋아해 주인의 세심한 관심이 없이는 실패하기 좋은 작물이다. 큰언니네 둘째 조카가 주말농장에 열무 씨앗을 뿌려두었다는데, 뽑아먹을 만큼 자라있을 거라는 야심찬 희망으로 2주 만에 농장으로 달려갔다는데, 벌레 이빨 자국만 남아있는 비쩍 마른 가늘고 질긴 열무 줄기만 가득하더라는, 웃을 수 밖에 없는 에피소드가 분명한 증거다. 자주 들여다봐주고 물을 충분히 뿌려주고 벌레가 생기기 전에 예방을 미리 해야 제대로 수확할 수 있는 것이다. 지대한 정성 바로 그것이다. 세상 대부분의 것들이 다 그러하듯 말이다.
어디 그뿐이랴. 아무 때나 열무 씨를 뿌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봄 씨앗을 뿌리는 시기에 열무 씨앗도 뿌리면 적격이다. 김장 배추나 무를 심는 9월 하순도 적격이다. 4월이나 9월의 기온이 열무가 자라나기에 가장 적당하다. 요즈음은 온도와 습도를 맞춘 비닐 하우스에서 사계절 튼실한 열무가 쏟아져 나오기는 하지만 바람과 햇살과 이슬을 먹고 자연스레 자라난 열무에 비교가 될 것인가. 이른 아침에 텃밭에서 바로 수확한 열무를 절여 김치를 담그면 그 맛은 시중의 무공해 열무라 해도 따라오지 못한다. 특유의 열무 향내와 함께 살아있는 아삭하게 씹히는 식감은 최상이다.
친정 어머니의 투박한 손으로 담근 열무김치. 바로 그 맛이다. 콩밭 사이 그늘이 반쯤 들어선 자리에 열무를 심으면 열무는 한껏 여리고 부드럽고 크지 않게 자라난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다듬어 풋내가 돌지 않게 조심스럽게 씻어서 또 살살 소금물에 절였다가 살살 씻었다. 가끔 열무를 씻는 어머니 옆에서 거드는 시늉을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누차 말씀하셨다. 살살 씻어라 살살. 슬쩍 양념에 버무려 통에 담은 다음 열무를 버무린 그릇에 묻어있는 양념조차도 물을 조금 넣어 깨끗하게 부셔서 김치통에 붓고는 하셨다. 그리고는 자작자작 눌러놓으셨다. 심술이 많고 괴팍한 나를 토닥토닥이셨던 것처럼 술주정뱅이 남편 때문에 눈물로 범벅인채 우리집 대문간들 들락거리던 앞집 새댁의 등을 쓰다듬으셨던 것처럼 어머니는 열무김치에도 마음을 얹어놓으셨다. 자식이건 열무건 글이건 그림이건 무엇이건 마음이 얹어있지 않은 것들은 제 맛을 품어내지 못한다. 향기도 없다. 쓰거나 무미건조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그 당시에는 냉장고가 없었으므로 동네사람 어느 집이나 김치통을 동네 가운데에 위치한 우물물에 담가놓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여름날이면 텃밭에서 풋고추를 따다가 풋고추 된장찌개를 끓이고 우물에 담가놓은 시원한 열무김치를 한 보시기 꺼내오면 그것으로 입맛을 되살리는 충분한 밥상이었다. 그래서였나보다. 지금도 여름이 되면 열무김치와 풋고추 된장찌개 아니면 늙은 오이생채와 된장찌개를 단골매뉴처럼 나는 밥상에 올린다. 언니오빠들이 오신다고 하면 나는 변함없이 이 음식을 내놓는다. 고향과 고향집을 공유한 형제들끼리 비밀이라도 된다는 듯 어머니의 손길 닮은 아련한 행복을 한 그릇씩 나눠 먹는다. 그 맛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며 위로며 그리움이다.
열무를 다듬는 동안 내 고향집을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 수건을 쓰시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짓는 어머니가 보이고 꼴을 가득 실은 소마차를 끌고 언덕을 내려오시는 아버지의 이랴이랴 소를 모는 목소리도 들린다. 마루를 말끔하게 걸레질하는 마르고 키가 큰 , 어머니와 아버지 곁에서 농사일과 주방일과 여기저기 심부름을 도맡아하셨던 둘째언니도 보인다. 우물물에 담가둔 김치통에서 막 꺼내온 열무김치와 풋고추 된장찌개로 밥상을 차려 마루에 모여 앉은 가족들이 보인다. 구수한 냄새가 폴폴 풍긴다. 웃음소리가 들린다.
열어놓은 뒷문으로 뒤뜰이 보이고 감나무에서 감꽃이 하나둘 바람에 떨어지는 게 보인다. 개복숭아 나무도 보인다. 하나 둘 셋....엄지손톱만한 푸른 복숭아가 열려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매부리코 호랑이 담임선생님은 집에 있는 무엇이든 소재로 삼아 동시를 써 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어찌할 바를 몰라 징징거리는 내가 안타까웠던지 둘째언니가 동시를 대신 써 주셨다. 다음날 동시를 써 오지를 않아 선생님의 회초리 앞에서 벌벌 떠는 친구들을 나는 은근히 신이 나서 바라볼 수 있었지만, 잠시였다. 소심하였던 나는 들킬까봐 수업이 끝나도록 두근거리는 새가슴을 억눌러야만 했다.
우리 집 뒤뜰에 개 복숭아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큰언니 큰오빠 둘째언니 작은오빠 셋째언니 네째언니... 그리고 나
일곱 형제자매
꼭 닮았네
석우리 옥골 고향집 뒤란에 개복숭아를 손짓하며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소리치던 둘째언니는 막 열매를 맺을 크기로 자라난 푸르고 싱싱한 개복숭아나무를 닮았다. 마루 쪽문을 열면 서늘한 바람결에 향기를 수줍게 내주던 진분홍 개복숭아꽃은 다섯 딸 중 가장 어여뻐서인지 스물에 시집간 대청마루 사진틀속 큰언니였다. 어서어서 주먹만해져서 발그스름하게 익기를 아무리 고대해도 매일매일 그날이 그날이고 솜털만 보송보송한 개복숭아는 심술이 나면 뽀루퉁 입술을 내밀던 풋내나는 막내딸 나였다.
이른 아침부터 넷째 언니와 싸우다가 어머니 부지깽이에 쫒겨 굴뚝 뒤에 마주서면 언제 싸웠냐 싶게 배시시 웃던 네째언니는 제법 굵어져 살결이 보드라워지던 복숭아였다. 남모르게 은근히 익어가던 개복숭아는 양반 안씨라는 자부심으로 꼿꼿하게 사셨던 어머니를 빼다 닮아 드러나지 않게 조신하고 반듯한 세째언니였다. 개복숭아나무를 올려다 볼 때마다 저건 큰언니 저건 작은언니 라며 가리켰는데 제일 끌밋한 복숭아는 작은오빠였다. 잘 익은 복숭아 하나 떨어져 강원도 연곡면 듬바우에 뿌리 내려 부처님 말씀으로 가지 늘어뜨린 복숭아나무는 큰오빠였다.
열무를 다듬는 동안 내 유년의 봄이 내게로 와서는 한편의 영화처럼 잔잔한 잔상을 남기며 사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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