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통신] 뉴질랜드 편. 봄호. 2019.1.16
실버펀(Silver Fern)
-뉴질랜드 국민 가슴속에 살아있는 고사리
뉴질랜드 백동흠 francisb@hanmail.net
남태평양 섬나라, 뉴질랜드에 이민 와 살면서 고사리를 만나게 되어 기뻤다. 200여 종의 고사리가 자라고 있는 뉴질랜드는
그야말로 고사리 천국이다. 실버펀(Silver Fern)이라 부르는 고사리는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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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오클랜드 노스쇼 오쿠라 해변가 숲을 아내와
트램핑하다가 귀한 손을 만났다.
“아니, 저거 고사리 아냐!”
산길을 오르다
아내의 시선이 길가 숲에 사로잡혔다. 가시덤불 속에 꽤 굵고 튼실한 녀석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외국에 나와 살면서 낯익은 모습을 보니 고향 정취가 물씬 느껴졌다. 고국과 계절이 반대인 뉴질랜드의 늦은
봄 11월부터 햇고사리들이 제철을 만난 모양이었다.
봄에 반짝 나물로는
햇고사리만 한 게 없다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아내의 마음에 수긍이 갔다. 금세 아내가 비닐봉지 하나를 챙겨 들고 고사리 꺾기에 나선 상태였다.
가시나무 사이로 머리를 디밀고 손을 뻗어 고사리를 하나씩 꺾었다. 가시덤불 아래, 우후죽순처럼 고사리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풋풋하고 실했다.
자연이 준 선물이라도 받는 양 아내 목소리에 흥이 묻어났다.
“당신이
좋아하는 육개장에 넣어 먹으면 봄맛이 물씬 나겠네.”
먹음직스러운 육개장
한 대접이 눈앞에 선했다.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얼큰한 국물과 고사리 건더기가 일품 아닌가? 벌써 내 빈속이 꽉 찼다. 땀을 훔쳐
가며 훌훌 불어먹는 육개장 맛이라니…. 생각만 해도 배가 불렀다.
*
뉴질랜드를 여행하다 보면 실버펀(Silver Fern) 이야기는
단골 메뉴가 된다. 그만큼 뉴질랜드에 넓게 펼쳐있고 생활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실버펀은
고사리와 같은 양치류 식물이다. 잎사귀 앞쪽은 짙은 녹색인데 뒤쪽은 은색이다.
"Silver Fern"으로 불리면서 일찍부터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마크가 되었다. 실버펀은
잎만 해도 최대 4m에서 7m까지 자란다.
나무 크기가 무려 10m에서 20m 높이까지 정도로 자라는
큰 것도 있다. 나무 고사리는 고생대부터 가계가 이어져왔다고 한다. 뉴질랜드
깊은 산속, 고사리 나무가 우거진 덤불을 보면 태고시대로 들어선 느낌이 든다. 뉴질랜드
남섬이 반지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 등 영화 촬영지로 자리매김한 데도 일조를 하고있다.
뉴질랜드의 럭비 국가대표팀인 올블랙스(ALL BLACKS)는
실버펀을 공식 마크로 사용하고 있다. 뉴질랜드인들이 최고로 열광하는 국민 스포츠는 단연 럭비경기다. 초 중고등학교부터 대학 청년 실업팀까지 럭비팀의 활동이 왕성하다. 올블랙스는
1987년 1회 럭비 월드컵 대회와
2011년 뉴질랜드 대회에 이어 2015년 영국 대회까지 우승했다.
유일하게 2연패에 성공한 팀이 되었다. 뉴질랜드는 세계에
명실상부한 럭비 최강국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실버펀 올블랙스 깃발을 들고 응원한 열성이 실버펀을 가슴에
각인시켰다.
2011년 뉴질랜드 이든 파크 럭비구장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올블랙스가
우승컵을 거머쥔 날은 뉴질랜드 국민의 일원으로서 평생 잊지 못할 최고의 순간이었다. 한국 교민들도 함께 실버펀
올블랙스 깃발을 휘저으며 힘찬 응원을 벌였다. 감격의 눈물이 핑 돌았다. 2002년
한 일 월드컵, 이탈리아와 16강전을 교민들 끼리 모여 열심히 응원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2011년 뉴질랜드의 올블랙스 우승을 함께 지켜본 감동도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오클랜드 이든 파크에서 국제적 럭비경기가 열리는 날엔 올블랙스를 응원하는 실버펀 깃발로 넘쳐난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 로고가 새겨진 올블랙스 옷과 깃발이 천지다.
기록에 의하면, 뉴질랜드는 2차 보어전쟁(1899.
영국-남아공 보어인)에서 뉴질랜드 군인들이 실버펀을 사용하였다. 1, 2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뉴질랜드 참전군인들의 묘비에도 실버펀이 새겨졌다. 해외
평화유지군으로 파병된 뉴질랜드 군인들과 다른 나라 군인들을 식별하는 표식으로 실버펀을 썼다.
고사리 싹은 갓난아이가 손을 오므린 모습과 같이 동그랗게
말린 모양으로 자란다. 뉴질랜드 마오리 원주민들은 이것을 코루(Koru)라 부르는데, 움터나는 생명과 새로운 시작이란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그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소라껍데기의 선처럼 나선 형태를
닮은 게 특징이다. 온 국민에게 친숙한 이 고사리 문양은 그들의 문화와 전통에 깊이 배어있다. 뉴질랜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형태 문양이다. 초봄에 나는 고사리 나무의 새 줄기 잎이 돌돌 말려진 모양이다. 마오리 말로
새로운 생명, 새로운 시작, 성장과 기동성 등을 상징한다. 기념품 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옥돌, 전복껍데기 조각 등 마오리 공예품에
많이 이용된다. 뉴질랜드 항공사, 에어 뉴질랜드(Air Newzealand)의 로고도 코루를 형상화한 것이다.
뉴질랜드 정부에서 국민들에게 국기디자인을 2015년 공모한 적이
있었다. 현재 국기가 영국기와 호주 국기와 비슷해서 뉴질랜드 특성을 살릴 필요가 있다는 국민 여론을
반영한 일이었다. 총 1만 개의 국기 디자인을 공모받은 후 40개를 후보작으로 선정했다. 대부분이 실버펀, 코루, 남십자성을 포함해서 흥미로웠다. 결국 국민투표로 가는 최종 후보작은 현재 국기와 실버펀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2016년 국민투표 결과 현재 국기를 고수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런 일련의 일만보아도
고사리 나무에서 비롯되는 실버펀과 코루에 대한 국민 정서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직업으로 운전을 오래 하다 보니 하체가 약해져서 주말엔 등산길에 오르곤 한다. 등산로를 따라 걷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 있다. 실버펀, 나무고사리
숲이다. 잠깐 쉬면서 우두커니 실버펀을 바라보곤 한다. 내 키를 훌쩍 넘은 진한 녹색의 나무고사리에서 태곳적 기운이 느껴진다. 실버펀은 온 산을
뒤덮어 원시림을 이루고 있다. 동그랗게 말아 올린 고사리 싹에서 대자연 생태계의 순환고리가 연상된다. 시작은 미미해도 끝은 대단하다.
인생 여든 살이라 할 때, 가운데 분기점인 마흔 살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아 뉴질랜드로 이민을 왔다. 이민 와서 숱한 어려움과 갈등을 겪었다. 택시 운전을 하던 중, 큰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였다. 어쩔
수 없이 한동안 통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른 부위는 회복이 괜찮게
됐는데 유독 손가락 마디가 마비되어 잘 펴지질 않았다. 손 신경 부위를 치료하는 전문 치료 센터에 다니며 손 근육 운동을 했다.
그때 치료받던 침실 벽에 그림 액자가 걸려있었다. 누워서
손 근육을 단련하는 운동을 하며 무심히 액자 그림을 들여다봤다. 갓난아이가 주먹을 쥔 듯한 그림이었다. 한참 응시를 하다 보니 마음에 평화가 느껴졌다.
회진하던 간호사에게 무슨 그림이냐고 물었다.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고사리 문양, 코루라고 했다. 원주민, 마오리족들은 이 코루를 중요하게 여겼다.
탄생과 재성장 그리고 지속성의 기운이 있음을 믿고 있었다. 새 생명 잉태와 치유에 좋다는 몸소 느꼈다.
마비된 손바닥 마디가 제대로 펴지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간호사 병상 일지에 손 근육 치료 진척이 꺾은선 그래프로 촘촘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손가락 끝 펴지는 변화는 하루에 고작 1~2mm 정도였다.
어느 세월에 다 펴지나? 하는 조급증이 마음 한구석에 일었다.
간호사가 알려준 근육운동과 마사지를 꾸준하게 해나갔다.
간호사의 병상 일지에 나타난 내 손가락 마디 그림이 서서히 열려가고 있었다. 동그랗게 말린 고사리 싹이 서서히 커지며 벌어졌다. 벽에 걸린 고사리를
응시하며 갓난아기가 쥐엄쥐엄 하듯 손가락을 움직여보며 마음을 주고받았다. 한 달 뒤쯤에 손바닥을 오므렸다 폈다 하는 게 가능해졌다. 다친 몸만
회복된 게 아니었다. 움츠러든 마음도 펴졌다.
뉴질랜드에서 인생의 후반전을 살아가며 마오리의 코루
문화에 익숙해지고 있다. 코루는 양치식물의 잎이 빛을 향해 뻗어 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민 생활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적응력을 키워가는 여정이다. 나선형 모양을 한 고사리 싹을 보면 이민
생활의 시작이 생각난다. 시작은 새로웠지만 예기치 않게 당황하고 힘든 경우도 많았다.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자기 역량을 조금씩 펼쳐 가는 이민
생활은 고사리가 자라나는 모습과 흡사하다. 고사리에서 과거를 느끼며 현재와 내일을 본다. 나선형의 부드러움 속에서 기다림의 미학과 겸허한 마음을
배운다.
하루 일을 마칠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차 핸들이 가벼웠다.
동네 어귀에 다다르자 도로 가운데 한 줄로 서 있는 야자나무에서 남국의 정취가 느껴졌다. 석양빛을 받아 평화스러웠다. 저녁상을 물린 후 밖으로
나가 마루 데크에 서서 실버펀이 우거진 곳을 내려다봤다. 실버펀 위에 새 한 마리가 먼저 와서 쉬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실버펀 뒤 멀리서 붉게
물들어갔다. *
백동흠
2015년<에세이문학> 등단
2017년<재외동포 문학상> 수필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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