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 중에서 눈에 띄는 서평이 있어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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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하기 직전 막간에 지난주 한겨레21(설 합본 특대호)에서 '신형철의 문학사용법'을 읽었다(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895.html). '정확하게 사랑하기 위하여'는 그 연재에 붙은 제목이다. 장승리 시인의 시집 <무표정>(문예중앙, 2012)에 실린 시 '말'에 대해 적으면서 동시에 어떤 비평가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물음에 답하고 있다. "정확하게 칭찬하는 비평가"가 그가 내세운 모토다.
첫째, 왜 칭찬인가. 어떤 텍스트건 칭찬만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칭찬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에 대해서만 쓰겠다는 뜻이다. 그런 글을 쓰고 나면 내 삶이 조금은 더 가치 있어졌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 노트북에는 쓰고 싶은 글의 제목과 개요만 적어놓은 파일이 수두룩한데 이 파일의 수는 자꾸만 늘어난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도대체가 시간이 너무 없다. 이것은 인생의 근본 문제다. 비판이 비평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판은, 비판을 할 때 만족감을 느끼는 비평가들의, 사명이다.
둘째, 왜 정확한 칭찬인가. 비판이 다 무익한 것이 아니듯 칭찬이 늘 값있는 것은 아니다. 부정확한 비판은 분노를 낳지만 부정확한 칭찬은 조롱을 산다. 어설픈 예술가만이 정확하지 않은 칭찬에도 웃는다. 진지한 예술가들은 정확하지 않은 칭찬을 받는 순간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낄 것이다. 정확한 칭찬은 자신이 칭찬한 작품과 한 몸이 되어 함께 세월의 풍파를 뚫고 나아간다. 그런 칭찬은 작품의 육체에 가장 깊숙이 새겨지는 문신이 된다. 지워지지도 않고 지울 필요도 없다.
이러한 비평관에 잘 부합하는 시를 그는 장승리의 시집에서 발견한다. 이런 시다.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어
했던 말을 또 했어
채찍질
채찍질
꿈쩍 않는 말
말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니체는 울었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두 개의 혓바닥
하나는 울며
하나는 내리치며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부족한 알몸이 부끄러웠어
안을까 봐
안길까 봐
했던 말을 또 했어
꿈쩍 않는 말발굽 소리
정확한 죽음은
불가능한 선물 같았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잘못했어
잘못했어
두 개의 혓바닥을 비벼가며
누구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나
-「말」 전문
이 시에 대해 평론가는 정확한 설명을 붙인다, 이렇게.
화자는 세 개의 소망을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고 싶고,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고, 정확하게 죽고 싶다는 것. 이 모든 것의 출발은 우선 말이다. 그녀는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으나 말을 하고 나면 그것은 늘 부정확한 것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했던 말을 또 해야만 했다. 니체는 채찍질당하는 말(馬)을 끌어안고 울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말(言)이 정확해지길 바라며 채찍질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것이 고통스러워 우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두 개의 혓바닥”이 있다.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운다.
정확하게 말하고 싶다는 욕망은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과 연결돼 있다. 나는 “부족한 알몸”이 부끄럽다. 그런데 네가 나를 안으려 들까봐, 혹은 내가 너에게 안기고 말까봐,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면서 딴청을 부려야 했다. 내 알몸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도록, 네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면 좋겠다. 그때 나는 ‘정확하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겠지. 어쩌면 그것은 정확한 죽음만큼이나 “불가능한 선물”일까. 비평가인 나는 세상의 모든 훌륭한 작가와 시인들에게 바로 그 ‘불가능한 선물’을 주고 싶은 것이다. 정확한 칭찬이라는 정확한 사랑을.
더는 보탤 것도 없어서, 나는 시인의 시집 두 권을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신형철 평론가에 대해서 섬세하다거나 명민하다거나 하는 인상을 갖고 있었는데, 부정확했다. 그는 '정확한 비평가'다. '정확한 비평가'이고자 한다... 음, 외출시간이 다 됐다. 시간 맞춰서 나가봐야겠다...
13. 02. 12.
첫댓글 비판은 해체에서 비롯된다.비평가들의 혀끝에서 혹은 손끝에서 무수한 작가들이 글들이 명멸한다. 비평에의해 키워지는것들은 거의 수세기를 기록으로 회자되에 칭송되고 수많은 후세들이 그 글들을 꼴라쥬 또는페러디하며 스스로의 상상력에 옷을 입히기도 한다. 문학을 가까이 접해본 사람은 비평의 세치혀끝에서 살아남기가 얼마나 고된일인지 잘 안다.그러나 비평과 비판의 날선 저울을 무사히 통과한 후 영원으로 남은 작가가 수없이 많은데, 개인적으론 기형도를 발굴한 김현을 꼽고싶다.솔직히 문학을 비평하는데있어서 정확 부정확은 동의할수 없다. 그 누구도 작가가 의도한 마지막 문 까지 열지 못하리라는걸 믿기 때문이다.
위대한작가 제임스조이스는 율리시즈 안에 100명의 석학이나 비평가들이 100년동안 풀어도 다 풀수없는 수수께끼가 있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떤의도에 있어 객관이든 주관이든 작가 자신외에 접근할수없는 미로 하나쯤을 심어두지 못한 작품이라면 독자들은 금세 식상해 질 것이다. 그래서 문학이나 예술작품을 해체하는데 있어서 완벽 또는 정확이란 말을 빌어오는건 동의하기 힘들다는 것이다.다만, 평론의 의무는 교묘한 지적 감성석 기술을 적절히 응용하여 대중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해체가 완벽이라는 함정을 유쾌히 비켜가는 일일 것이다.그후 여운처럼
살아움직이는 생명체로의 작품을 독자의 판단으로 남겨둘 수 있을테니까 위 시에서 평론가는 세개의 소망을 말했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앞에 정확히! 라는 언어의 명징성에 회의하는것이다. 시를 읽고 금세 알수있는 또다른 욕망의 실타래에 얽혀있는 화자의 흐트러진 모습을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예로 정확하게 말하고 싶고,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고, 정확하게 죽고 싶다는 것외에 <완벽히 겹쳐서 숨기고 싶음>이 번들거리고 있음을 알수 있다.
넘 어렵당~~~
으와~가난한 지적감성으로 마구 적어올려서리 꼬릿글이 완전 모호하지요? 남는 군자란 얼굴에 던져 혼내 주세욧!!!
카페지기는 조중동 그리고 ... 를 잘해아리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