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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이 미혹을 뿌리고 목사가 미혹을 뿌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교단의 배도는 목사의 배도가 되고 목사의 배도는 교인들의 배도가 된다.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교단들의 배도는 교단과 목사를 신뢰했던 교인들의 배도를 낳았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의 짐승의 표에 대한 해석이 혹시라도 주 예수의 의도와 다르게 된다면 많은 교회와 교인들을 배도로 이끌 수 있다. 김양재 목사님의 설교 비평을 통해 마지막 때 그 흑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요한계시록의 짐승의 표에 대한 김양재 목사님의 설교 일부에 대한 비평이다. 김양재 목사님의 큐티 목회와 눈물의 사역을 존중하며 그분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할 자의 비평이지만 영향력 있는 목회자의 설교와 성서 해석의 파급력이 굉장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짐승의 표 관련해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료했다. 이하 존칭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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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재 목사:
지혜가 여기 있으니(계13:11-18)
(2018.3.18)
“666이 베리칩이다 뭐 이러면서 얘기했는데 제 의견이 아니고 합동 측의 베리칩의 정의를 좀 알려드리겠어요. 저를 하도 욕을 하니까. 어떤 새로운 기술 자체를, 마이크로칩, 베리칩을 장착을 하고 안 하고 막 이러잖아요, 요한계시록에 짐승의 표와 동일시하는 것은 완전히 빗나간 거라는 거예요. 베리칩을 비롯해서 바코드, 컴퓨터 옛날에는 유럽연합 뭐 별 게 많았어요. 컴퓨터 신용카드 등 모두 일반 은총 영역에 속해요. 기술 문명에 속한 그것들 자체는 선한 거라는 거죠.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도 아니고 믿음의 도에 어긋난 것도 아닌데 이런 기술 문명의 혜택을 입는 행위를 배교 행위로 단정한다면 이건 성경에서 더 나아가는 거지요 그죠? 우리를 구원에서 떨어지게 하는 유혹과 시험의 본질은 물질적 원리가 아닌 거예요.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라는 거예요. 베리칩을 짐승의 표로 간주하고 그것을 받는 자는 구원에서 끊어진다는 주장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허황된 주장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40:00~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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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학 기술은 일반 은총인가?
김 목사는 과학 기술이 일반 은총에 속하는 선이라는 관점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러한 관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가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재앙을 초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핵폭탄은 과학 기술의 어두운 면이다.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일반 은총에 속한 선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획기적인 과학 기술인 유전자 치료를 위한 주사 역시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 mRNA 백신이 하나님이 주신 고유 유전자를 변경한다면 이것을 어찌 일반 은총에 속한 선이라 부를 수 있을까. 뉴럴링크의 브레인 칩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고 통제하게 된다면 이 기술을 어찌 일반 은총에 속한 선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란 기본적으로 자연 그대로의 은총을 말하는 것이지 유전자 조작이나 인류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
2) 유혹과 시험의 본질은 물질적 원리가 아니다?
“우리를 구원에서 떨어지게 하는 유혹과 시험의 본질은 물질적 원리가 아닌 거예요.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라는 거예요.”(김양재)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6)
에덴에서 뱀의 유혹과 시험을 당한 하와의 생각에서 정신적이며 영적인 갈등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하와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갈등이 배도로 가는 과정일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배도가 확정되지는 않는다. 물론 여자를 보고 생각으로 하는 간음이 죄가 될 수 있겠으나 육체적 관계로 불륜이 정립되듯이 선악과를 생각으로 따 먹었다고 해서 배도가 확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와가 선악과라는 물질을 따 먹는 ‘물리적 행위’가 동반돼야 배도가 확정되는 것이다.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따서 먹는 물리적 행위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배도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과 정신적이며 영적인 단절에서 그치지 않고 육체의 죽음과 에덴에서의 추방이라는 물리적 단절로까지 확장됐다. 이처럼 배도의 주원인과 결과는 물질적, 물리적 원리와 관계된다.
김 목사의 말과는 달리 ‘물질적[물리적] 원리는 유혹과 시험의 본질’이었던 셈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3)
물리적 원리는 유혹과 시험의 본질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본질이기도 하다.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에 의해 예수를 믿는 것은 칭의를 주지만 입으로 시인하는 물리적 원리를 부정하면 시작된 구원은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 자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물리적 행위를 부정한다면 예수께서도 그를 부인하신다는 말씀에 따라 구원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작된 구원이 완성되지 못하는 것이다. 총칼 앞에서, 마음속으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는 것 아시지요? 그저 지금 죽으면 주의 일을 더 할 수 없어서 그래요, 와 같은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와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갈등만으로 죽음을 선언하시지는 않았다.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하려고 의도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 선악과를 따 먹는 물리적 원리가 배도 확정에 결정적이었다. 그래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에만 초점을 두는 김 목사의 말과는 달리, ‘유혹과 시험의 본질’은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에서 시작해 물질적 원리에서 비로소 끝을 맺는다.
3) 예수의 처음과 마지막도 물질적 원리였다.
‘물질(육체)로 성육신’하신 예수께서는 배고픈 자에게 실제로 먹을 ‘물질을 주는 것’과 같은 ‘물리적 사랑의 실천’으로 구약 율법의 정신을 완성하시고 십자가에서 ‘물질 육체의 죽임’을 당하신다. 예수의 물질적 역사성을 부정하면 영지주의의 오류에 빠진다. 이 세상에서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가 물질적 원리로 구현되며 완성된다. 또한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의 믿음이 물리적 행위로 구현’되는 것이 야고보서의 ‘믿음의 행위’이다.
신사참배 강요에 순간 흔들리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갈등이 있다 하여 배도로 확정되는 건 아니다. 절하여 예를 표하는 물리적 행위를 동반할 때 비로소 유혹과 시험은 절정을 이루며 배도가 완성되는 것이다. 광야에서 예수께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 뛰어내리라, 엎드려 경배하라는 마귀의 유혹과 시험의 본질은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원리였다.
유혹과 시험의 본질은 물질적 원리가 아니라는 김 목사의 말은 아주 그럴듯하지만, 자칫 영지주의의 색깔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 먹은 행위가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에서만 이루어졌는가? 선악과 이야기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만을 의미하는 설화인가? 다시 말해, 선악과는 물질적 실체가 아니라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를 교훈하는 비유일 뿐인가?
에덴의 선악과는 물질적 실체였고 예수의 삶도 물리적 실체였다. 만약 김 목사가 선악과를 물질적 실체로 봐 왔다면 그녀가 유혹과 시험의 본질이 아니라고 한 물질적 원리가 유혹과 시험의 본질이었음을 되짚어 봐야 한다. 김 목사는 자기모순에서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4) 요한계시록 짐승의 표는 물질[물리적 원리]이다.
요한계시록의 짐승의 표를 해석할 때도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와 물질적 원리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a. 선악과를 따 먹는 행위와 b. 매매를 위해 짐승의 표를 몸에 받는 행위는 모두 물리적 원리가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주 예수께서 요한계시록의 짐승의 표를 물질로 보시고 그것을 받고 그것으로 매매하는 것을 물리적 행위로 보신다면 김 목사는 본의 아니게 간사한 뱀의 족보를 따르게 된다.
① 모든 실과에 대해서, “먹어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로 변경했다. (뱀)
② “반드시 죽으리라”를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로 변경했다. (뱀)
③ “반드시 죽으리라”를 “하나님 같이 된다”로 변경했다. (뱀)
④ 짐승 표를 물질적 원리가 아닌 영적인 원리로 해석했다. (김양재 목사)
“그 당시 표라는 말은 로마 황제 이름을 명시한 공식 문서에 찍는 인장을 뜻해요. 로마 정부는 노예들에 손, 어깨, 이마에 노예의 낙인을 찍었어요. 로마에서 도망갈 수 없게 만들고 로마의 재산이라는 낙인이에요. 그러므로 짐승의 표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자 하는 악한 시도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짐승의 이름을 받는 것이에요.”
(김양재 목사 26:10~26:51)
첫째, 김 목사는 요한계시록의 짐승 표를 설명하기 위해 노예의 낙인이라는 역사적 근거를 대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짐승 표의 영적 의미를 찾아내기 위함이다. 문제는, 역사는 로마 노예의 ‘몸에 실제 찍는 표라는 물질’을 말하는데 김 목사는 요한계시록의 짐승의 표에서는 영적 의미만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짐승 표의 영적 의미만 강조하려고 부러 과거 역사의 물질적 증거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둘째, 김 목사는 ‘과거’ 역사 속 노예의 낙인이라는 짐승의 표가 가진 물질적 근거를 이해하면서도 ‘현재 또는 미래’의 짐승의 표가 가질 물질적 가능성은 철저히 배제한다. 그녀는 요한계시록을 미래의 실제 사건들에 대한 계시가 아닌 영적 교훈을 주는 책 정도로 이해하는 듯싶다. 다시 말해, 요한계시록은 실제 일어날 일이 아니라는 전제 위에서 짐승의 표가 물질로 해석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셋째, 김 목사가 짐승 표의 역사적 근거로 로마 노예에게 찍는 낙인을 언급하면서 그 물질을 하나님 영광을 가로채는 짐승의 이름이라고 한 것은, 유혹과 시험의 본질이 물질적인 원리라는 걸 시인하고 있는 셈이다. 유혹과 시험의 본질이 물질적인 원리가 아니라는 자신의 말에 어긋난다.
만약 예수께서 뜻하신 요한계시록의 짐승 표가 정신적이며 영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물질적 실체까지 가리킨다면 짐승 표의 물질적 원리는 배제하고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만 강조한 김 목사는 말씀을 변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김 목사는 유혹과 시험의 본질을 물질적 원리가 아닌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로 전제하고 이해하기에 짐승 표를 물질로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를 구원에서 떨어지게 하는 유혹과 시험의 본질은 물질적 원리가 아닌 거예요.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라는 거예요.”(김양재 목사)
5) 짐승의 표는 선악과처럼 하나님이 금하신 물질이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서 먹는 물리적 행위에 강조점을 두셨다.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되 선악과는 먹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금하시면 일반 은총 영역에 속한 듯 보여도 일반 은총의 혜택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알려준다. 김 목사는 기술 문명은 일반 은총에 속하고 선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금하신 것도 아니라고 했다.
“컴퓨터 신용카드 등 모두 일반 은총 영역에 속해요. 기술 문명에 속한 그것들 자체는 선한 거라는 거죠.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도 아니고 믿음의 도에 어긋난 것도 아닌데 이런 기술 문명의 혜택을 입는 행위를 배교 행위로 단정한다면 이건 성경에서 더 나아가는 거지요 그죠?”(김양재 목사)
선악과란, 다른 나무의 열매처럼 일반 은총으로 주어진 선한 것으로 속단해 먹어도 될 줄 알지만, 하나님이 금한 물질을 취하는 행위는 악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들이 선하다고 하여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취하는 건 도리어 악이 된다. 그것까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딤전 4.5) 하물며 짐승의 표는 하나님이 지으신 선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마지막 때 금하신 짐승의 물질로서 그것을 취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장성한 자가 선악을 분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을 행하고 불순종의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소화하기에는 단단한 식물이었다. 첫 아담과 달리 마지막 아담인 예수께서는 온전한 순종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장성한 분이셨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4)
주 예수처럼 하나님이 단단히 부탁하신 말씀에 죽기까지 복종할 때 장성한 자로서 선악을 분별하는 자가 된다. 아담은 불순종했을 때 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됨으로써 어린 아이로서 선악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뱀은 그 본성대로 하나님과 견주도록 유혹했지만, 사람의 본분은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며 그것이 장성한 자로서 진정 선악을 분별하는 일일 것이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말씀 순종 여부’가 선악임을 알려주는 동시에 ‘물리적으로 취해선 안 될’ 하나님이 ‘금하신 물질이 있다’는 걸 나타낸다.
6) 어떤 목회자들은 뱀의 후예가 된다.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마 23.33)
뱀은 초점을 흐리는 전략의 대가다. 뱀은 선악과 금지를 모든 나무의 열매 금지로 확대해 ‘일반화’하고 있다. 선악과만 너희에게 주신 일반 은총에서 예외일 리 없다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 기술 문명에 속한 것들은 모두 일반 은총 영역에 속한 선한 것이라고 ‘일반화’하는 김 목사의 주장은 뱀의 말과 유사하다. 마지막 때 이런 목회자들이 주류가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짐승 표가 물리적 매매를 허용하는 물질이라면 ‘구원에서 떨어지게 하는 유혹과 시험의 본질은 물질적 원리가 아니라는 김 목사의 말’은 에덴의 뱀의 혀와 닮았다.
(주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도 잠시 사탄이 된 적이 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 16,23) 짐승의 표와 관련해서는 김양재 목사님도 그럴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고 짐승 표는 짐승이 받게 하는 것이므로 ‘받지 말라’는 것이다. 물리적 매매를 제한하는 물질의 표가 예수를 대적하는 짐승의 등장과 함께 시행될 즈음 에덴의 뱀들은 다시 고개를 쳐들고 교회를 미혹할 것이다. 유혹과 시험의 본질은 물질적 원리가 아니기에 매매를 위한 표는 일반 은총이자 선이라고 하면서 교회(여자, 하와)를 유혹할 것이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 5.31-32)
짐승 앞에 정신적이며 영적으로 굴복하는 건 아니라면서 짐승이 주는 물질을 받도록 이끄는데 목사들이 앞장설 것이다. 신사참배를 단지 예를 표하는 것으로 포장했던 일제 치하 목사들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7) 하나님의 인이 짐승의 표 해석의 유일한 잣대는 아니다.
창세기의 ‘물질적’ 선악과와 요한계시록의 ‘영적’ 짐승 표는 다르다고 하면서 요한계시록의 영적 ‘하나님의 인’의 관점에서 짐승 표를 해석하려는 위험한 시도가 있다. 창세기 선악과의 물질적 원리를 요한계시록 짐승의 표에 적용할 게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함께 나타나는 하나님의 인의 영적 원리에 비추어 보면 짐승의 표도 영적 원리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신약 시대를 여신 예수께서 친히 ‘영이신 하나님’과 ‘물질인 재물’을 비교하셨다. 영이신 하나님과 영인 사탄을 비교하신 것이 아니다. 구원에서 떨어지게 하는 유혹과 시험의 본질은 물질적 원리가 아니라는 김양재 목사와는 다르게 예수께서 물질적 원리로서의 재물을 유혹과 시험의 본질로 삼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치기까지”(계 7.3)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계 9.4)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계 16.2)
요한계시록의 ‘하나님의 인’과 ‘짐승의 표’는 ‘영이신 하나님’과 ‘물질인 재물’을 비교하신 예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영적 하나님의 인’과 ‘물질인 짐승의 표’로 각각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물질인 재물(돈)이 매매의 수단으로서 영이신 하나님과 비교되었듯이 물질인 짐승의 표도 매매를 제한하는 물리적 수단이면서 영적 하나님의 인과 비교될 수 있다. 짐승의 표를 하나님의 인에만 맞춰 영적인 원리로 해석하려는 것은 고정관념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선택한 순간, 영이신 하나님보다 물질인 선악과를 더 사랑하고 더 섬기게 된 것이다. 재물이 그들의 주인이 되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는 뱀의 말은 실은 뱀과 같이 된다는 말이었다. 뱀은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eu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