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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두의 기원
파두는 프랑스의 샹송이나 이탈리아의 칸소네 같은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월드뮤직의 한 장르이다. 파두는 라틴어 파툼(Fatum)에서 나온 말로 운명,
숙명이라는 뜻으로 신의 명령에 의해 이미 예정된 인생은 변경할 수 없다는 의
미를 지니고 있는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전통음악이다. 브라질의 음악가 빌라-
로보스(Villa-Lobos)의 말에 의하면 "음악은 다른 어떤 예술영역보다 지역
이나 토양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반영 한다" 고 했듯이, 파두는 포르투갈의 고
단한 역사와 더불어 민족의 애환을 담아 즉석에서 읊는 노래이다.
현재 파두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은데, 이에 대해 선원의 노래, 죄수의 노래,
민요로부터 온 것, 브라질 또는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것 등의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1492년부터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러 떠난 수많은 포르투갈인들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라는 입장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불안정한 삶이 그들을
이상주의자로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은 자연히 시를 짓는 재능을 갖게 되
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읊는 시는 주로 운문조 이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즉석에
서 쉽게 시를 지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다에 나가 자신들의 조국을 그리며 파
두의 리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던 뱃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리스본(Lisbon-포르투갈 사람들은 리스본을 ‘리스보아
(Lisboa)’라 부른다.-이하 '리스본'으로 표기함.)을 드나들던 선원들에 의해 19
세기 브라질에서 유래하여 리스본의 부랑자계층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고 하나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편, 또 다른 유력한 기원은 음악을 들어보면 불란서 남부 프로방스 지방
의 음유서정시와 포르투갈의 토속적인 음악, 그리고 아랍인의 음악기법이 어우
러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파두의 기원이 아랍인들이 이
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중세에까지 거슬러간다고 여기고 있는 기원설이
다. 12세기의 음유시의 영향을 받은 파두는 해양개척시대를 맞이하여 많은 대
륙의 문화를 접하게 된다. 아프리카와 브라질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거기에 아
랍 쪽의 리듬감이 포함되었다. 파두가 본격화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구전
으로 이어지다가 본격적인 음악의 장르로 정착하게 되었다. 음악학적,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그 확립 시기는 1800년 전이다. 포르투갈 혹은 브라질에서 왕
성하게 노래된 도회풍의 감상적인 가요 모딩냐(modinha)와, 경쾌한 춤을 위한
노래 룬둠(lundum)가 이 장르의 형성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
으로 파두는 세가지 문화권의 음악적 산물이 뒤섞인 예술양식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우선 리듬은 아프리카로부터 수여받고, 감수성과 시적 노랫말
은 포르투갈 전통 시인들로부터, 그리고 악곡형식은 브라질 음악으로부터 습득
한 형태라고 보는 게 오늘날의 일반적 이해이다. 실제 19세기 이전까지의 파두
는 리스본 항구 선창가의 하층민을 중심으로 유행하였으나, 19세기 초부터 점
차 시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고 귀족계층이 참여하게 되면서 현재의 파두로 정
착하게 되었다. 19세기 이전까지 서민층에서 즐겨 부른 노래인 파두가 세인
들의 관심을 끌게된 것은 한 파디스따(Fadista)가 귀족과 사랑을 하면서부터
다. 그녀가 바로 19세기 초 집시계의 매력적인 파두가수인 마리아 쎄베라
(Maria Severa)로 당시 리스본에서 가장 유명한 파두가수였었다. 그러던 어
느날 비미오주(O Conde de Vimioso) 공작이 그녀가 부르던 파두에 매료된 후
부터 그녀 옆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그녀를 따랐었고 그녀는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사랑은 서민층뿐만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관심거리가 되어 이를
계기로 파두는 귀족계급에게까지 파급된다. 한편 마리아 쎄베라는 사랑을 이루
지 못하고 2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게 되고, 그녀가 죽은 후, 그는 귀족들의
무도회장에서 그녀대신 파두를 부르기 시작했다. 검은 숄을 어깨에 걸치고, 술
취한 듯한 무대 매너로 노래를 부른 쎄베라는 많은 남자들을 사로잡았으며,
1836년 그녀가 발표한 파두는 리스본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격렬한 애정행각을
노래한 그녀의 파두는 악보로 출간되어 신문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
으켰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리스본에서 파두가 처음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져 온다. 후에 그녀를 아꼈던 동료 가수들은 그녀
의 명복을 비는 뜻에서 검은 숄을 두르고 노래하게 되었고 이것이 현재 검은
의상에 역시 검은 숄을 두르고 때로는 와인(Wine)이나 꼬냑(Cognac)을 담은 유
리잔을 손에 들고 노래 부르는 것에 대한 유래를 추측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파
두가수들의 전통복장이 되었다. 쎄베라가 파두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면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는 파두가 국민들 속에 하나의 국민문화로서 완전히 정착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사건은 마치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 보카 지구에서 탱고(Tango)가 탄생했을 때 탱고를 퇴폐적이고 음탕한 것
으로 묘사하여 불붙었던 사건과 유사한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역설적으
로 파두가 포르투갈 전역으로 대중화되게 만들어 주었다.
각기 다른 환경을 거쳐 이렇게 알려지게 된 파두는 오늘날 대부분 희미한
불빛아래, 슬픔에 잠겨 있는 듯 고요한 분위기의 파두 가게에서 불리어지고
있다. 파두는 포르투갈의 전통 악기 기타(Guitarra)와 비올라(Viola)만으로
연주되어지는데 파디스따의 감미로우면서도 애절한 멜리스마 창법과 함께 그
분위기를 한층 돋우게 한다. 또한 파두는 항상 사우다드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곧 포르투갈의 민중 감정을 대변하는 것이기에 파두에서 이 사우다드를
어떻게 창조하느냐에 따라 명가수의 칭호를 얻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파디스따의 목소리는 감미로운 전통 악기의 선율과 함께, 감상에 젖어 파두에취한
청중들을 한층 더 고요하게 만드는 마력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포르투갈은 수 세기동안 포르투갈 국민들은 파두를 통해 하나가
되기도 하였고, 서로 싸우기도 하였다. 이렇게 포르투갈 국민의 한탄과 슬픔과
이별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담고 있는 파두는 포르투갈 국민들의 꿈과
희망과 고통을 껴안으며 그 애환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기에 포르투갈의
다양한 기원을 떠나 현재까지도 국민적 노래로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2.포르투갈 역사와 파두
세계 지도를 펼쳐보면 유럽의 남서쪽 끄트머리에 황소의 머리를 닮은 반도
하나를 발견 할 수 있다. 북쪽으로는 피레네(Pyrénées Mts.)산맥에 의해
프랑스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지브롤터 해협(Gibraltar)을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 땅과 경계를 이루는 것이 이베리아 반도이다. 바로 이 반도의 한쪽
모서리에 포르투갈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은 포르투갈을 가리켜 "유럽의 가장
서쪽 끝에 있는 나라"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끝은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곳 포르투갈이 대륙의 입장에서 보면 끝부분이지만 바다의
입장에서 보면 대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을
갖고 있는 포르투갈은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 관습, 등을 갖춘 전통이 깃든
나라이다. 외관상으로는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는 스페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지만 이슬람계통이나 켈트계통의 피는 섞여 있어도 스페인 계통의 피는
거의 섞여 있지 않을 정도로 스페인과 차별성을 추구하는 독자적인 성향이
강하며, 비교되는 것을 아주 기분 나쁘게 생각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나라이다. 이와 같은 민족적 성향은 파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파두에는
포르투갈 국민들만의 독자적인 사우다드라는 정체성이 내재되어있으며,
그러한배경은 포르투갈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때문에 파두의 내재된 사우다드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포르투갈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포르투갈은 유럽대륙의 변방국가에 불과하지만 15세기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함께 세계의 정복자였다.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더불어 15, 16세기의 대항해
시대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나라이다. 비록 유럽의 서단, 더 정확히 말해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마한 나라이지만 대서양과
지중해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였기에 일찍부터 해양진출에 대한 관심을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Portugal)이란 이름 자체가 라틴어의
Portu(항구)와 Cale(서쪽)가 합쳐진 Portus Cale, 즉 서쪽의 항구라는
이름에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포르투갈 민족이 해양민족으로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5세기 포르투갈은 이 전통과
더불어 모험심과 도전의식을 바탕으로 거의 전무에 가까운 빈약한 정보만을
의지하여 새로운 세계를 하나씩 발견해 나감으로써 자신이 속한 유럽에
신세계를 소개하기 시작하였으며 기존의 세계관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1497년 7월 8일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리스본 항구를 출발하여
희망봉을 돌아 일년 간 항해한 끝에 1498년 5월 21일 인도의
캘커타(Calcutta)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류역사의 큰 전환점이
되는 인도항로의 개척인 것이다. 포르투갈은 이 인도항로의 발견을 기점으로
발견의 시대 또는 대항해의 시대라 지칭되는 15-16, 두 세기에 걸쳐
유럽세계의 정신적, 문화적, 공간적 개방 운동을 선도하며 자신이 속한 유럽
세계가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만나도록 하여 인류역사의 새로운 지평선을
그었다. 또한 포르투갈 선단은 아프리카, 인도, 중국, 일본,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누비고 돌아다니며 방대한 식민지를 구축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이처럼 화려한 외면과 달리 그 이면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식민지로부터 유입된 부는 왕실, 귀족 등 특권층을 살찌웠을뿐
일반 서민들은 항상 가난했다. 가난은 1950년대 절정에 달해 이때
한꺼번에 수십만 명이 생계를 위해 고국을 떠났다. 때문에 현재 유럽 대도시들
가운데는 포르투갈인이 집단 거주하는 지역이 여러 곳 있다. 한편,
정치적으로도 혼란이 계속되었다. 1910년 공화정이 들어섰으나 그 후 16년
동안 정권교체 45회, 군사쿠데타 15회를 겪었다. 이어서 1932년부터 36년
동안 계속된 안또니우 살라자르(António Salazar)의 철권통치 하에서
국민들은 기본권을 박탈당하고 비밀경찰의 공포 속에서 살았다. 1932년부터
1968년까지 36년 간 포르투갈을 통치했던 살라자르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교육과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절대군주제의 사상을 교육받으며 자라왔다.
그래서 대부분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포르투갈인들은 포르투갈을 “ 성모
마리아의 딸 ” 혹은 “ 교회의 딸 ”로 생각하였으며 군주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더불어 신의 은총으로 국가가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살라자르는 대학생활에 민주기독학회26)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포르투갈의 위대한 민족시인 까몽이스 가 쓴 대서사시
루지아다스를 탐독하고 그 영향으로 그에게는 강한 만족주의가 싹트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성장과정을 통하여 그는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하여
위대한 포르투갈을 건설하기 위한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을 꿈꾸었다. 이로
인해 36년 동안 포르투갈 정치는 그의 통치체제로 인하여 권위주의가
발현되었고, 살라자르주의가 형성되었다.
살라자르주의는 포르투갈 민족 통합주의의 사상을 따른 것으로 민족주의에바탕을
두고서 포르투갈 민족이 세계사의 흐름 가운데 잠에서 깨어나 그들의
선조들이 남긴 훌륭한 역사의 전통을 시급히 재창조하자는 이데올로기이다.
나아가 인류보편의 정치사상인 국민 주권주의 등 자유민주주의이념에 입각하여
근대화를 추진하기보다는 엘리트적 자질과 사상을 가진 사람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위대한 조국건설에 박차를 가하자는 사상이다. 또, 살라자르주의는
카톨릭주의도 포함하고 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함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은 신의
피조물인지라 신은 인간 위에 존재하고, 인간은 창조주인 신에게 절대
복종하여야 한다는 사상으로 살라자르의 정치행보에 이 사상은 신의 위임을
받아 국가를 다스리는 통치자에게도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시키고 그 권위에
대한 복종은 그 통치자 개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복종하는 것이
되며 국가의 목적을 신의 뜻과 동일시하는 신정정치의 사상에로까지
발현시켰다. 결론적으로 살라자르주의는 민족주의, 카톨릭주의가 결합된
것으로 그 바탕은 강력한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우주관에 입각한 정교한 이데올로기는 아니지만 비교적 일관성 있게
조직된 논리체계라 할 수 있기에 그는 살라자르주의를 통하여 신국가
정치체제를 구축하였고 이러한 강력한 권한을 바탕으로 그가 기용되던 첫해에
15년 간 누적되어오던 적자재정을 흑자재정으로 전환시켰다. 여기서부터
명성을 얻은 살라자르는 군사정부이 신임을 얻고 뒤이어 1932년에 수상에
취임하게 되었다. 곧이어 신국가 정치체제의 유일정당인 국민연합을
결성하여 총재가 되는 등 서서히 군사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힘입어 그는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위대한 포르투갈을 재건하려는
신념으로 개혁을 뒷받침할 강력한 행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제도적으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신국가 정치체제라는 것을 구상하였다. 이 구상에의하여
헌법초안이 작성되고 1933년에 이것이 국민투표에 부의되었다. 그
결과 과반수의 지지를 획득하여 신헌법은 확정되고 이에 따라 신국가
정치체제가 탄생하였다. 신국가 정치체제는 권위이자 체제이고 나아가 그
본질에 있어 반민주적 독재체제였기 때문에 체제의 성립부터 그 유지과정에
이르기까지 민주적 정당성은 상실되었다. 따라서 다른 체제에 있어서는
정치과정 또는 통치구조 등이 국민적 저항의 대상이 되는 경우와는 달리
체제자체에 대한 국내외적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국민들 특히
지식인들의 거센 도전이 있었고 국외적으로는 식민지에서의 독립운동이
거세지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전체주의 세력의 패퇴를
가져오는데 이에 따라 포르투갈에서도 체제에 대한 도전의 양상은 사뭇
달라졌고 여기에 포르투갈정부는 탄압 일변도로 맞서게 되었다. 이와 같은
불안한 상황 속에서 포르투갈인들에게 사우다드는 더욱더 강력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사우다드는 포르투갈 민족에게 바다의 부름과 조국에 대한 집착
사이의 괴로움으로 인한 격렬한 향수의 감정이며, 괴롭고 한숨 어린 삶,
고난에 찬 현실에 대한 애수와 절망이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이다. 이러한
사우다드가 파두의 음악으로 발전하여 포르투갈이 가지고 있는 슬픈 역사가
표현되고 있다.
한편, 흔히 사람들은 운명을 이야기할 때 비관적인 체념의 정서를 떠올리게
되지만, 파두가 말하는 운명은 이러한 비관적인 체념에만 머물러 있는 정서는
아니며, 이러한 부분이 파두가 지니고 있는 큰 의의이다. 즉, 포르투갈의 문화
속에는 켈트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영향 속에 체화되어온 켈트족의 윤회적인
인생관31)과 "모든 것은 신의 뜻" 이며,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식하는
이슬람적인 철학이 내재되어 있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 사람들이 운명을 얘기할
때에는 체념과 비관을 넘어서 삶의 질서에 순응하려는 태도를 표명하고 있다.
그래서 파두는 청중으로부터 숙연함과 기품이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파두가 켈트문명과 이슬람문명에 영향을 받은 이유는 포르투갈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베리아 반도에 사람이 거주한 것은 적어도 50만 년 전의
일이지만 포르투갈에서 발견된 독특한 최초의 문화는 약 B.C 5500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B.C 1000년에 켈트족이 이베리아반도에 정착하여 원주민과 빈번하게
혼인을 맺음으로써 켈트-이베리아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반면, 루지타니아(Lusitania)인이라 불리는 포르투갈의 켈트족은 이와 같은
통혼을 전혀 하지 않았었다. 그들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B.C 140년 경
로마인들이 이들을 정복하였고, 5세기가 시작되면서 로마 제국은 기울기
시작했고 게르만민족인 수에비(Suevo)인이 이베리아 반도의 많은 지역을
침략했다. 469년 로마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서고트(Visigothic)족을 보냈고
수에비 군주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서고트족은 약 100년 후에 어느 정도
자치권을 되찾았으나 711년의 이슬람교도의 침공으로 그리스도 교도들은
포르투갈의 북부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지역은
포르투갈의 주(州)로 불렸으며, 오늘날 포르투갈을 이루고 있는 지역을
재정복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었다. 117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포르투갈 주는
아폰수 엔리케(Afonso Henriques)의 통치 하에 왕국을 이룩하였다. 뒤를
이은 왕들도 재정복 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1270년 아폰수3세 때 지금과 같은
포르투갈의 경계선이 확정 된 것이다. 파두는 이러한 역사에 의해 이슬람 문화와
켈트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이에
포르투갈은 유럽 본토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고대로부터
이베리아 반도는 켈트족과 페니키아인들이 정복했고, 로마와 게르만족의 지배
이후에는 무어인이 이룩한 고도의 이슬람 문명이 포르투갈에서는 500여년,
스페인에서는 800여년 가까이 존재했다. 아프리카는 피레네 산맥 너머에서
시작된다는 말은 이베리아 반도의 지형도를 잘 설명해주는 말인 셈이다.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지금도 여전히 유럽의
중심문화와는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이 존재한다. 같은 이베리아 반도에
속해있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각기 다르다. 포르투갈 사람들의 민족성에는
우울과 고독, 향수와 같은 정서가 내면에 깊이 존재하고 있는 반면, 스페인
사람들의 정서 속에는 억제할 수 없는 뜨거운 본능이 흐르고 있다. 양국이
켈트족의 정착부터 중세 시대에 일어난 재탈환에 이르는 초기 역사는 같지만,
오늘날 두 국가는 분명히 다른 문화를 가진 다른 국가이다. 포르투갈이 약
900년 전 독립한 이래, 양 국가는 독립된 정체성을 가지고 독특한 언어와
전통을 발전시켜왔다. 때문에 양국의 관계는 동맹보다는 경쟁에 가깝다. 모든
포르투갈인들은 스페인이 1580년부터 1640년까지 포르투갈을 통치하면서,
그들의 황금시대가 종식되었고 그 후 이와 같은 태평성대가 다시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오랜 숙적 관계는 서로 국경선을 개방하고 시장과
통화를 공유하는 오랜 평화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까지 일정 부분 계속되고
있다.
3.파두의 종류와 특징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해양대국으로 성장했던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브라질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두었던 초강대국이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이들 나라가 점차 독립함에 따라 화려한 식민지 경영의 역사를 마감했지만 지
금도 대서양의 아조레스(Azores)제도와 마데이라(Madeira) 제도를 자국의 영
토로 삼고 있다. 이러한 포르투갈은 크게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인 수도 리스보
아, 항구의 도시 포르투(O Porto), 경제의 중심지인 브라가(Braga)와 대학의
도시 꼬임브라(Coimbra)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네 개의 도시 중 수도인 리스보
아와 대학의 도시 꼬임브라가 파두로 유명한 도시이다. 이리하여 파두는 지
역과 형태에 따라 리스본의 뒷골목에서 서민들이 부르는 리스본 파두(Lisbon
Fado)와 남성보컬들이 부르는 달콤한 사랑의 세레나데인 꼬임브라 파두
(Coimbra Fado) 두 가지가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파두의 기원을 말하
기란 그리 쉽지 않지만, 리스본 파두를 통해 정설로 여겨지는 기원은 본 항에
서 배를 타고 바다로 향했던 뱃사람들이 다른 민족과 접촉하면서 서서히 그리
고 자연스럽게 룬둠과 파두를 전했다는 것이다. 한편, 리스본 파두는 인간의
희로애락의 감정을 노래하며 민족의 염원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형태로 여성중
심의 파두가 대부분인데 비해, 꼬임브라 파두는 대학도시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철학적인 주제와 플라토닉(Platonic)한 사랑을 담은 다소 밝고 편안한 분위기
의 파두로 리스본 파두와 달리 오직 남자들만 부른 다는 것에 큰 차이점과 특
징을 갖는다. 이와 같이 포르투갈을 대표한 민속음악일 지라도 문화와 지리상
의 영향으로 각각 상이한 특징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관련하여
본 논문은 조금 더 상세히 각각의 파두와 발생지역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리스본과 리스본 파두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가는 테주(Tejo)강가에 발달한 오래된 도시리스보아는
유럽 대륙 최서단의 수도이다. 기원전부터 최적의 천연 항구로서
해로와 육로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로마처럼 일곱 개의 언덕위에 세워졌다.
고작 120m 정도의 언덕들이지만 그 위에 우뚝 솟은 탑, 교회, 수도원 그리고
테주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고성이 예스러운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다.
1147년 아랍 무어인 세력으로부터 탈환하여 1307년 포르투갈의 수도가 된
리스본은 기원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지배 속에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도시로 성장해 왔다. 또 한 때는 세계 제일의
무역항으로서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엄청난 대지진으로도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는 쓰라린 경험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리스본의
변천사는 포르투갈 역사의 진화과정을 설명해주는 실증적 예가 되고 있다.
리스본의 구시가지는 크게 네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바다와 강 앞으로 자리한
바이샤(Baixa)를 중심에 두고 동편에는 고풍스러운 알파마 서쪽에는 음악과
낭만이 깃든 바이루 알뚜(Bairro Alto), 서쪽에 뚝 떨어진 벨렝(Belém)은
해양제국의 성격을 가장 강하게 지니고 있다. 리스보아는 지역마다 개성이
뚜렷해서 도시의 멋을 자아내고 있다. 실제로 언덕이 올라간 곳인 바이루
알뚜는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지역으로 길은 복잡하게 얽히고 경사진
언덕배기로 올라가기도 하는데 힘들기보다 오히려 이 지역의 분위기가 잘
어울리는 느낌을 준다. 이곳에는 낡은 건물들이 밀집해 있어서 분위기는 조금
어둡고 바이루 알뚜에서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언덕길의 길목에는 파두를
들려주는 곳이 밀집해 있다. 그리고 바이루 알뚜 서쪽 끝에 위치해 있는
벨렝지역은 해양제국으로서의 포르투갈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다.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항해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즈(Bartolomeu Dias) 인도까지
이른 바스코 다 가마의 행보 등 15세기~16세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양제국으로 군림하던 당시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 바다를 향해
당당히 서있는 신대륙 발견의 기념탑은 해양왕자 엔리케(D. Henrique)와 그를
따르는 탐험가들이 생생하게 부조되어 있다. 바다와 모험을 좋아하는 포르투갈
민족의 단면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언덕의 지구는 알파마 지역이다. 리스본 앞을 흐르는 커다란
물줄기는 바다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테주 강의 하구로 강과 바다가 뒤섞여
있다. 따라서 하류로 배를 타고 얼마 가지 않아 대서양이 시작된다. 알파마의
매력은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길과 성 조르즈 성(Castelo São Jorge)이다.
골목길에서 올려다보면 주위는 서민들의 공동주택이며 붉은 기와를 올린 지붕
아래 하얀 벽을 가진 3~5층 정도의 건물들이 즐비하게 붙어있다. 미로를
빠져나와 언덕을 올라가면 정상에 성 조르즈 성이 버티고 있다.37) 돌로 쌓은
이 성은 12세기 초반에 지어진 것인데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일부는 부서져 내리기도 하고 이끼로 덮이기도 하는
등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이러한 지역적 특색을 갖고 있는 리스본은 무려
4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1755년의 대지진에도 살아남은 지역으로 포르투갈의
민속음악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비록 가난한 마을과
어두운 분위기가 공존하지만 이러한 후미진 곳에서도 파디스타가 어둠 속에
붉은 램프가 희미하게 켜져 있는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파두를 노래하는
것이다.38) 파두는 많은 청중을 상대하지 않고 주로 살롱(Salon)에서 소규모의
관중과 일체가 되는 음악이다. 일반적으로 위아래로 검은색 의상에 검은 숄을두른
노년의 파디스따가 나와 자신의 모든 희로애락의 감정을 밑바닥에서부터
끌어 올려 노래한다. 그들의 성량은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압도적이며, 비록
가사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청중은 모두 그 음색에 압도되어 파두의 정서에
동화되고 만다. 즉, 우리의 판소리나 산조의 판과 비슷하여 연주자가 따로
노래하고 관중은 앉아서 점잖게 박수를 치는 그런 음악이 아닌 것이다. 듣는
이도 연주자와 같이 같은 느낌을 갖고 그와 일체가 되어 파두 음악의 성립을
이루는 것이다.
민족음악 중에서 가장 어둡고 내면 깊이 들어가는 것이 리스본 파두이다.
리스본 파두는 포르투갈 서민들의 소박한 생활이 투영되어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하며, 바다와의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고독과 회환, 희망, 갈망,
원망 등의 모든 희로애락의 감정을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려 노래하며 그
내면에는 오랫동안 그들을 지배하였던 무어인(아랍인)의 강력한 내세관을 엿볼
수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리스본 파두에서는 파디스따는 절대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으며, 청중 또한 노래 도중에는 결코 잡담을 해서는 안 되는 기본
예의가 있다. 주된 가사의 배경은 바다이며, 이로 인해 빚어진 파멸된 인생,
지난날의 추억, 먼 고향에 대한 향수, 사랑의 슬픔 등의 어두운 주제가 많이
쓰인다. 요컨데, 포르투갈인의 고독, 고향에 대한 그리움, 아랍적 숙명관을
소박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리스본 파두이다.
리스본 파두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Amália da
Piedade Rebordo Rodrigues)39)로 최고의 파디스따이자 국민적인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포르투갈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불리어졌던 로드리게스는
흔한사랑타령에 목말라 하지 않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중의 애환을 노래했던
그녀를 통해 포르투갈 국민들은 파두를 접하게 되었고, 파두의 속내 깊은
사연에 세계인들이 동요되고 있다. 1999년 10월, 79살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
전설속의 인물이 되어버린 로드리게스는 1954년 프랑스 영화 『Les Amants
du Tage』에 삽입된 검은 돛배(Barco Negro)라는 곡으로부터 전
세계적으로 파두를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가 79세의 나이로
타계했을 때, 그녀의 죽음이 확인되자마자 포르투갈 정부는 즉시 3일 동안의
국가 애도기간을 공포하였으며, 장례식이 3일간의 국장으로 치러졌을 정도로
포르투갈의 대중은 파두를 세계적으로 알린 그녀를 사랑했고, 파두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아낌없이 바쳤다. 이렇듯 파두라는 그들의 민속음악을
세계적인 음악으로 끌어올린 로드리게스를 포르투갈 국민들은 단순히 스타나
가수라 여기지 않고, 파두의 대사 혹은 20세기가 낳은 포르투갈 최고의
영웅으로 불렀고, 그녀는 그 정도로 포르투갈 국민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은
여성이었다.
한편, 로드리게스의 입지전적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1920년 알파마의 빈민촌에서 10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고, 1살
때 집을 나간 어머니를 대신하여 할머니 밑에서 자라났고, 10대 시절에는
행상과 제봉사와 탱고 댄서를 전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밤무대에 직업
가수로 데뷔하여 1년이 지나지 않아 스타가 되어 그녀가 나오는 날이면
매진을 기록하기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녀가 데뷔한
클럽의 이름은 레티로 다 세베라(Retiro da Severa)였다고 한다. 로드리게스는
유럽이 2차 대전의 참화에 휩싸였던 1944년 브라질로 가서 파두를 국제적으로
전파시켰다. 코파카바나 카지노(Copacabana Casino)를 비롯한 남아메리카각지의
바(Bar)와 클럽(Club)에서 선풍을 일으킨 뒤, 브라질 히우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에서 최초의 스튜디오 녹음을 진행했다. 그녀는 정작
포르투갈에서는 1951년 까지 녹음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매니저를 맡은
조제 드 멜로(José de Melo)가 음반을 판매하면 청중들이 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라고 한다. 한편, 1955년 <꼬임브라(Coimbra)>는
국제적 히트곡이 되었고, 그 무렵 파리의 올렝피아 극장에서 가진 공연실황
음반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음반이 되었다. 우리나라 국민에게도 친숙할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라그리마(Lagrima)>와 <바르쿠
네그루(Barco Negro)>도 이 무렵에 녹음 된 버전이다. 이러한 파두는
1950년~1960년 라틴(Latin)음악이 유행하던 시절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1980년에는 MBC 주말 드라마 <사랑과 야망> 에 그녀가 1954년에
부른 대표작 검은 돛배가 삽입되어 다시금 음악 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42) 그녀의 노래 특징은 2박과 4박의 단순한 형식이며 대부분의
음악은 단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코드 또한 결코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미묘한 싱커페이션에 가락은 섬세하여 가수의 노래솜씨에 따라 풍부한 정취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부분이 바로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업적이다. 그녀가
성공한 비결은 도회적 분위기의 알파마 의 리스본 파두와 농촌 분위기의
꼬임브라 파두를 결합하면서, 단지 실패한 사랑에 대한 비가를 넘어서
아메리칸 소울(American Soul)처럼 영혼으로부터의 절규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 비틀스(Beatles)와 로큰롤(RocknRoll) 선풍이 불어
닥치면서 파두 역시 유럽의 다른 나라의 국민적 중적 대중음악 (예를 들어
샹송이나 칸초네)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파두는 청년들의
새로운 범세계적인 취향과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가면서 인기도 시들어 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드리게스만은 비교적 건재했다. 무려 170종의 앨범을각지의
바(Bar)와 클럽(Club)에서 선풍을 일으킨 뒤, 브라질 히우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에서 최초의 스튜디오 녹음을 진행했다. 그녀는 정작
포르투갈에서는 1951년 까지 녹음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매니저를 맡은
조제 드 멜로(José de Melo)가 음반을 판매하면 청중들이 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라고 한다. 한편, 1955년 <꼬임브라(Coimbra)>는
국제적 히트곡이 되었고, 그 무렵 파리의 올렝피아 극장에서 가진 공연실황
음반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음반이 되었다. 우리나라 국민에게도 친숙할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라그리마(Lagrima)>와 <바르쿠
네그루(Barco Negro)>도 이 무렵에 녹음 된 버전이다. 이러한 파두는
1950년~1960년 라틴(Latin)음악이 유행하던 시절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1980년에는 MBC 주말 드라마 <사랑과 야망> 에 그녀가 1954년에
부른 대표작 검은 돛배가 삽입되어 다시금 음악 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42) 그녀의 노래 특징은 2박과 4박의 단순한 형식이며 대부분의
음악은 단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코드 또한 결코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미묘한 싱커페이션에 가락은 섬세하여 가수의 노래솜씨에 따라 풍부한 정취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부분이 바로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업적이다. 그녀가
성공한 비결은 도회적 분위기의 알파마 의 리스본 파두와 농촌 분위기의
꼬임브라 파두를 결합하면서, 단지 실패한 사랑에 대한 비가를 넘어서
아메리칸 소울(American Soul)처럼 영혼으로부터의 절규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 비틀스(Beatles)와 로큰롤(RocknRoll) 선풍이 불어
닥치면서 파두 역시 유럽의 다른 나라의 국민적 중적 대중음악 (예를 들어
샹송이나 칸초네)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파두는 청년들의
새로운 범세계적인 취향과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가면서 인기도 시들어 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드리게스만은 비교적 건재했다. 무려 170종의 앨범을베빈다의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포르투갈에 있어 리스본은 지리적 위치나 온화한 기후조건 그리고 테주 강
하구에 깊숙이 자리 잡은 천연 항으로서의 이점 때문에 리스본은
페니키아인들의 정착 이후,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인들의 지배를 받았고,
게르만 민족의 침략과 이슬람 이교 세력의 지배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나
리스보아는 외세의 지배와 이질 문화의 침투 속에서도 포르투갈 민족의 역사적
전통과 독창적 문화를 꾸준히 간직해 왔다. 이것은 시대가 바뀌고 지배세력이
변하여도 그곳에 거주한 모든 사람들이 리스보아는 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리스본의 역사는 그곳에 거주한 사람들, 그곳을 다스렸던
군주들이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들어 보려는 의도로 수 없이 허물고, 다시
세우고, 외각으로 뻗어 나가는 가운데 이룩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끈질긴
인내심의 소유자임을 확인시켜준 포르투갈인의 민족성과 스페인과의 갈등
속에서 싹튼 애국주의 성향 그리고 이질 문화의 유입에도 유지된 기독교
정신은 오늘날의 리스본을 존재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이다. 또한 이러한
리스보아에는 그리움으로 가득 찬 서정적인 파두 음악의 주인지대라고
여겨지며, 유명 신부인 안또니오 비에이라(Antonio Vieira)는 신께서는
포르투갈인에게 요람으로는 작은 땅을 주셨지만 그들의 무덤으로는 전 세계를
던져 주셨다고 말할 정도로 파두에 대한 깊은 명성을 자부하고 있다. 오늘날
작은 국가에 아담한 도시 리스보아는 포르투갈 국민들의 자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2. 꼬임브라와 꼬임브라 파두
꼬임브라(Coimbra)는 몬데구(Mondego)강 하구에서 약 50km 상류에 있는
구릉에 있으며 농업지역의 중심지이다. 꼬임브라 도시를 흐르는 몬데구강은
에스로레라(Esrorera)산맥에서 발원(發源)한 아름다운 강으로 <포르투갈의
빨래하는 여자>라는 노래로도 유명하다. 또한. 이곳은 이네스 드
카스트로(Inés de Castro)와 페드로(Pedro) 왕자의 슬픈 사랑이야기의 무대가
된 곳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도시는 모든 포르투갈인(人)들의 마음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장소이다. 그 이유는 디니스(Dinis)왕에 의해 1290년에
설립된 대학을 가진 포르투갈의 교육의 산실이라고 말한다. 포르투갈의 왕 중
6명은 꼬임브라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139년에 선발된 수도였으며 로마시대
이 도시의 최초의 이름은 아에미니움(Aeminium) 이었다. 로마시대에는
아에미니움이라고 하였으며, 9세기 말 코님브리가(Conimbriga)의 주 교좌를
이곳에 옮기면서 이곳에 옮기면서 꼬임브라가 되었다. 9세기 말부터
이슬람교도에게 정복되었으나 1064년 카스티야의 페르난도1세 에게
빼앗겼으며, 1260년 까지 새로운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가 되었던 곳으로
포르투갈의 학술과 예술의 중심지로 여겨지고 있다. 꼬임브라는 포르투갈의
3대 도시-리스보아, 포르토, 꼬임브라- 중 하나로서 대학의 도시인 동시에
문화의 도시로 언덕위에 대학을 중심으로 인구 8만 정도의 이 작은 도시는
독일의 하이델베르그(Heidelberg)를 연상시킨다. 꼬임브라는 포르투갈의
학술과 예술의 중심지로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꼬임브라 대학은 1290년
리스본에 창건되어 1537년 꼬임브라로 옮겨졌다. 유럽에서도 볼로냐(Bologna)
프랑스 파리 대학과 함께 오랜 역사 깊은 대학으로 인정받고 있고, 리스본에
1911년에 대학이 세워지기 전까지 포르투갈의 유일한 대학이었다. 특히
꼬임브라 대학은 많은 정치가, 문화인, 의사 등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
유명인물로는 시인 까몽이스이다. 이와 같은 배경을 지니고 있는 꼬임브라는꼬임브라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꼬임브라의 파두가 알파마의 리스보아
파두와 함께 파두의 또 다른 갈래로 나뉘게 된다.
꼬임브라 파두는 고도로 숙달되고 양식화 (Highly Rehearsed and
Stylized) 된 형식이라고 표현된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 그것도
의과대학 중심으로 보존하고 목적의식적으로 재해석한 음악이므로 형식이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사도 지성적이다. 수세기에 걸쳐 연인에게 바치는
사랑의 고백이며, 사랑을 찬미하는 세레나데(Serenade)를 불러왔던 대학사회에서
불러진 파두인 만큼 리스보아 파두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굴절된 체념의 표현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사랑의 세레나데가 중점을 이룬다. 반면, 멜로디, 리듬,
가사, 발성법에서 리스보아 파두와는 상이하다. 처연한 리스보아 파두는
여가수들이 득세한 반면, 상대적으로 평온하고 밝은 감을 띠는 꼬임브라
파두는 꼬임브라 대학에서 학생들이 직접 반주하고 노래한다는 것과 반드시
망토를 걸친 남자만이 부르는 전통을 보유하는 양식에 큰 차이가 존재한다.
즉, 꼬임브라 파두는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파두가 현대적
대중음악으로 진행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을 취하면서도 민중 예술의 양식으로
다듬은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꼬임브라 파두는 리스보아 파두로부터
암울한 색깔을 지양하여 로맨틱하고 밝은 것이 특징이다. 꼬임브라 파두에
담겨있는 로맨티시즘(Romanticism)과 포르투갈 기타의
아라베스크(Arabesque)적 색체는 파두를 술집의 독백으로부터 만인이 사랑할
수 있는 노래로 발전시켰고 이러한 꼬임브라 파두는 오늘날 전 세계의
파두음악을 알리는데 일조하였다. 대표적인 가수로 포르투갈 온 국민이
제까(Zeca)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주제 아폰수(José Afonso)를 들 수 있다.
그는 특히 꼬잉브라 파두를 살라자르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저항음악 다시말해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 독재자에 대한 비판과 억압에 대한 저항 그리고 민중의
고통을 서정적이면서도 저항적인 발라드 형식의 파두로 발전시켰다. 그는
아말리아 호드리게스와 더불어 민중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하는 국민적영웅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1974년 4월 25일 군사혁명이 발발했을 때
그의 노래가 맨 처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기도 했다.
앞서 포르투갈 파두의 종류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자국민이 아니라면
파두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21세기의 음악
팬들에게 파두는 그저 오래된 음악일 뿐일지도 모른다. 월드뮤직에서 국제
시장에 등장하고 있는 파두는 리듬감이 없고 기타가 낑낑거리고 바이브레이션
강한 목소리로 부르는 청승맞은 노래라는 인상을 준다. 어쩌면 악기 편성이나
편곡방법이 고루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현재의 파디스타 베빈다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그들의 음반이 파두의 고전적 편곡을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역설적 설명도 가능하다. 국지적 민중음악(Local Folk
Music)으로서 파두의 가치는 중요하더라도 현대적 대중음악으로서 파두의
가치는 많이 절하되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대중음악으로서의 파두는
팝 파두(Pop Fado) 혹은 투어리스트 파두(Tourist Fado)로 변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전자의 용어는 영미 팝의 형식이나 편곡과 결합되어 현대화된
스타일이라는 점을 지칭하고, 후자는 관광객용 음악으로 외국인이 들르는 고급
호텔이나 바(Bar)에서 연주되고 있다는 점을 각각 지칭하고 있다. 미샤 같이
국제적 명성을 가진 파디스따들의 음악은 이렇게 상업화 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파두가 하나의 역사가 되었고 앞으로 포르투갈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들은 이런 역사 위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점이다. 전통과 현대를
잇는 아름다운 신세대 파디스따들 덕분에 영어권의 팝음악이 전 세계
음악시장을 주도해 나가고 있는 지금 빠르게 변화해가고 있는 문화 환경
속에서도 자신들 고유의 향기를 잃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흡수하려는 노력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음악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파두는 포르투갈이 전통을 현대화 하려는 노력으로써자신만의
음악적 멋과 독특함이 세상에 오래 머물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