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내비게이션을 켜고
이복희
서류 가방을 든 남자가 PC방으로 들어간다
게임기 앞에서 혼잣말 퍼붓다가
문을 박차고 나온다
우산 받쳐 든 여자가
멀찍이서 남자를 지켜본다
남자와 여자 사이,
하늘 쓸던 버드나무가 쓰러져
가을비에 젖고 있다
햇살 아랫선 와불 같은 나무
어둠이 내리면 시커먼 미라가 된다
퍼석한 몸에 벌레 몇 마리 숨겨주느라
목이 마를 거라고 여자는 중얼거린다
빗줄기는
나무의 한 생을
시간의 태엽으로 한 겹씩 풀어내고
남자는 먼 하늘 비구름을 바라본다
일터에서 한순간에 내몰린 어처구니
눈앞의 길은 까마득하고
등 위에선 천둥이 운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
줄곧 내비게이션을 눌러대고
하릴없는 와이퍼만 무한 반복이다
고장 난 좌표 위에 서 있는 인간
― 이복희 〈고장 난 내비게이션을 켜고〉론
1. 좌표를 상실한 인간의 초상
이복희의 〈고장 난 내비게이션을 켜고〉는 ‘실직’이라는 사회적 사건을 넘어, 존재가 의존해 온 좌표 체계가 붕괴되는 순간의 인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여기서 고장 난 것은 기계가 아니라 삶을 인도해 왔던 질서, 즉 사회적 방향성그 자체이다. 시는 일터에서 밀려난 한 남자의 하루를 따라가면서, 개인의 파국을 사회 구조의 붕괴와 자연의 죽음이라는 장면들에 중첩시켜,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능 상태를 드러낸다.
2. PC방, 우산, 버드나무 ― 공간과 사물의 알레고리
서두의 PC방은 노동이 사라진 뒤 남은 ‘무용한 대기실’이다. 게임기 앞에서 혼잣말을 퍼붓다 문을 박차고 나오는 남자의 모습은, 노동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잃은 존재가 사회적 언어를 상실하는 장면이다. 이때 ‘우산 받쳐 든 여자’는 직접 개입하지 않는 관찰자이자, 인간의 파국을 외부에서 목도하는 양심의 시선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쓰러진 ‘버드나무’는 이 시의 가장 핵심적인 상징이다. 하늘을 쓸던 버드나무는 한때 사회의 질서를 떠받치던 노동자의 자화상이며, 가을비에 젖은 채 누운 나무는 이미 역할을 상실한 인간의 육체이다. 자연의 쓰러짐은 인간의 실직과 병치되며, 개인의 불행이 구조적 붕괴의 일부임을 환기한다.
3. “시간의 태엽” ― 노동의 축적과 그 붕괴
빗줄기는
나무의 한 생을
시간의 태엽으로 한 겹씩 풀어내고
이 구절은 이 시의 미학적 절정이다. ‘태엽’은 반복된 노동의 시간, 즉 감겨 있던 삶의 축적을 의미한다. 빗줄기가 그것을 풀어낸다는 표현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노동의 축적, 곧 평생의 노력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여기서 시간은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거꾸로 풀려 해체되는 힘으로 작동한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지를 은유적으로 증언한다.
4. 연민의 윤리 ― 여자 화자의 중얼거림
퍼석한 몸에 벌레 몇 마리 숨겨주느라
목이 마를 거라고 여자는 중얼거린다
이 장면에서 시는 파국의 윤리적 깊이를 획득한다. 쓰러진 나무는 자기보다 더 약한 생명들을 품고 있었고, 그것을 가능케 한 존재의 윤리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즉, 노동자는 사회에서 소모되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또 다른 생명들을 지탱해온 보이지 않는 지주였던 셈이다. 이 연민의 시선은 시를 단순한 사회 고발시가 아닌, 존재의 존엄을 복원하는 서정시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5. 와이퍼의 무한 반복 ― 습관만 남은 몸
마지막 연의 장면은 이 시의 가장 처절한 결말이다.
줄곧 내비게이션을 눌러대고
하릴없는 와이퍼만 무한 반복이다
내비게이션은 삶의 방향을 제시하던 사회적 장치이고, 와이퍼는 비를 닦는 반복 노동의 몸짓이다. 방향은 이미 고장 났지만, 몸은 여전히 일하던 습관을 멈추지 못한다. 이 장면은 존재는 멈췄는데, 노동의 몸만 자동으로 작동하는 인간이라는 현대인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무한 반복되는 와이퍼는 목적을 상실한 노동의 잔여, 즉 ‘고장 난 인간성의 리듬’이다.
6. 결론
〈고장 난 내비게이션을 켜고〉는 한 개인의 실직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의존해 온 삶의 좌표 체계가 얼마나 쉽게 붕괴되는지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 시는 사회적 고발과 존재론적 성찰, 그리고 연민의 윤리를 균형 있게 결합하며, ‘길을 잃은 인간’이라는 현대적 인간형을 정밀하게 형상화한다. 고장 난 내비게이션을 습관처럼 켜는 마지막 몸짓은, 이미 무너진 삶 위에서도 방향을 묻고자 하는 인간의 마지막 존엄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