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45〉대혜종고 유배되자 수많은 스님들 슬퍼해
신의와 신뢰
주전파로 몰려 세간의 반감불구
스님들은 “진심은 방해 못할 것”
간화선의 제창자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가 활동하던 시기는 송나라 때이다. 송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침략으로 천도해 남송(南宋, 1127∼1187)을 세웠고, 송나라 조정은 금과 ‘화친하자’는 주화파와 ‘싸워야한다’는 주전파로 나누어 대립하였다.
이때 종고는 주전파 장준(張俊)의 청으로 항주 경산사(徑山寺)에서 간화선을 보급하며 사대부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종고를 따르는 사대부들은 주전파 인물이 대분이었고, 문하에 1000여명의 승려가 모였다고 한다. 이 무렵 조정은 금나라와 화해하자는 주화파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53세 무렵, 종고는 주전파의 일파로 지목받아 승복과 도첩을 박탈당하고 호남성 형주(현재 衡陽)에서 10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 후 종고가 62세 때 다시 광동성 매주(현재 梅縣)로 옮겨가 6년간을 귀양살이하였다.
종고가 처음 호남성 형주로 유배 갔을 때이다. 종고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사찰 입구에 대자보를 붙이고 공공연히 비난할 정도였다. 반면 종고를 따르는 수많은 승려들은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였다. 어느 날, 종고를 따르는 승려들이 모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모았다.
“사람이 살면서 신념 때문에 겪어야 할 불행이라면 구차하게 면하려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다. 만약 선사께서 평생을 아녀자처럼 아랫목에 앉아서 입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선사께서는 옛 성인이 가신 길을 간 것 뿐이다. 그대들은 무엇을 그리 슬퍼하는가. 옛날 자명·낭야·대우 세 스님이 분양선소(汾陽善昭, 947~1024)를 친견하기 위해 길을 떠난 적이 있다. 그때 마침 서북 지역에서 전쟁으로 길이 막히자, 스님들은 군복으로 갈아입고 병사들 대열에 끼여 분양선소를 친견하러 갔다. 그런데 이곳 경산에서 형주까지 길도 멀지 않고, 산천도 험하지 않다. 진심으로 우리들이 선사를 뵙고자 한다면 어떤 난관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음날 종고를 따르는 대중들은 종고의 유배지로 향했다. 또 <운와기담>에는 수앙서기(脩仰書記)에 관한 내용이 전한다. 수앙서기는 종고의 귀양지까지 찾아가 가르침을 받은 인물이다. 수앙서기는 종고가 호남성 형주에서 광동성 매주로 유배지를 옮기자, 수앙은 매주 지역으로 종고를 따라갔다.
그곳의 군수 사조의는 관료들에게 종고에 대해 ‘조정에서 발령한 승려 가운데 장로될 만한 사람은 종고 한 사람뿐이다.’라고 하였다. 군수는 종고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공터를 정해주고 집을 짓도록 도와주었다. 승려들은 집터를 고르고 대나무를 옮겨와 집을 지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게으름 피우지 않았고, 모두들 진지하였다.
하루는 군수가 수앙에게 물었다.
“승려 일행 중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자가 있습니까?”
“경론에 정통한 자, 서사(書史)에 정통한 자, 시사(詩詞)에 재능이 있는 자, 서예에 뛰어난 자 등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불조(佛祖)의 생사인연(生死因緣)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종고 선사를 모시고 수행하는 일입니다.”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이다. 관우가 지닌 의리 때문인데, 관우 상에 얼굴을 붉은 색으로 표현하는 것도 바로 이 의리를 상징한다. 관우는 중국 남방지방 사찰에서는 신장으로 모셔놓는 곳도 많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화장을 한다’는 말이 있다. 여성을 비하한 내용이지만, 그만큼 신의를 중시한다는 뜻이다. 소납이 과연 종고와 같은 경우에 처해진다면 진정 나를 따를 자, 아니 알아주는 벗이 몇이나 될까? 이런 생각을 하니 괜히 외로워진다.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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