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교신은 “학문과 신앙의 완전한 합금”을 강조했다. 그래야만 앞으로 닥쳐올 시련과 순교의 시대를 온전히 견뎌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사용한 어순 또한 주목할 만하다. ‘신앙과 학문’이 아니라 ‘학문과 신앙’이며, 여기에 ‘완전한 합금’이라는 표현을 더했다. 김교신이 학문을 신앙보다 앞세운 것은, 맹목적인 열광이나 감정적 도취를 경계하고 엄밀한 지성적 훈련을 신앙의 단단한 기초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수사의 차이를 넘어, 이성적 성찰과 학문적 엄밀성 없이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없다는 그의 확신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1935년 12월 4일 자 〈일기〉에서 함석헌의 역사 서술을 염두에 두고 “금후에는 학문과 신앙을 완전히 합금한 건실한 학자 출신의 시대로다”라고 선언했다.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지적 열매를 바탕으로 한 통찰이었다.
김교신은 겸양으로 자신을 앞세우지 않았으나, 정작 그 자신이 《성서조선》에 기고했던 〈조선지리소고朝鮮地理小考〉야말로 함석헌의 역사 서술에 못지않은 ‘학문과 신앙의 완전한 합금’이었다.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연마한 엄밀한 지질학·지리학적 실증 연구로 한반도의 자연과 인문을 치밀하게 분석해 내면서도, 그 산천의 굴곡 속에서 조국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길어 올렸기 때문이다. 함석헌이 ‘시간(역사)’ 속에서 합금을 이루어 냈다면, 김교신은 ‘공간(지리)’ 속에서 학문과 신앙의 온전한 일치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입장은 평생 흔들리지 않았다. 《성서조선》 폐간 직전인 1942년 1월 〈이성 존중〉에서도 그는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감정에 호소하는 종교는 전파가 빠르나 얕고, 이성을 깨우려는 종교는 전파가 더디나 깊은 품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무당류 같은 무리가 횡행하는 시대에 김교신은 “이성 존중으로 치우치겠노라”고 선언했다. “기독 신자 되기 전에 우선 이성의 정상과 교양에 힘쓸 것”을 주문하며, 이성이 왜곡된 곳에는 신앙도 구원도 없다고 단언한 그의 목소리는 무교회주의적 지성의 정점을 보여준다. 김교신의 제자 노평구도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젊은이들을 향해 외쳤다. “인간도 모르고서 어떻게 신을 알려 하는가.”
김교신이 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와 교계를 향해 던진 “학문과 신앙의 합금”이라는 요청은 언제나 두 개의 위태로운 암초 사이를 통과해야 했다. 한쪽에는 지적 분별을 불신앙으로 몰아붙이는 종교적 맹신과 반지성주의가 도사리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지식을 무기로 삼아 절대자의 자리에 올라앉으려는 지식인들의 메마른 인본주의적 오만이 버티고 있었다.
기성 교계 일각에서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고린도전서 1:19)나 “철학과 헛된 속임수”(골로새서 2:8) 같은 성경 구절을 들어 학문과 지성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반지성주의적 맹신을 정당화하곤 했다. 그러나 이는 텍스트의 본뜻을 심각하게 왜곡한 결과였다. 바울이 경계한 것은 인간의 이성과 배움 그 자체가 아니라, 십자가의 신비를 한낱 사변적 지혜의 유희로 전락시키려 했던 헬라 철학의 궤변과 ‘인간적 교만’이었다. 성서 전체가 이성과 분별력을 창조주의 거룩한 은총으로 긍정하고 있듯이, 지성을 팽개친 열정은 신앙이 아니라 맹목적 미신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성경이 폐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창조주가 주신 인간의 이성과 배움’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와 철학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교만’이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 무지 위에서 꽃핀 적이 없으며, 루터와 밀턴, 청교도 과학자들, 그리고 김교신에 이르기까지 참된 프로테스탄트는 언제나 학문적 정직성과 엄밀한 지성 위에서 절대자의 진리를 살아냈다. 지성을 거부하는 신앙은 영성이 아니라 미신이자 게으름일 뿐이다.
물론 김교신이 요청한 지성은 인간의 의식을 신격화하여 절대자의 자리에 올려놓는 세속적 인본주의나 영지주의적 영성, 혹은 현대의 신유물론적 오만이 결코 아니었다. 인간의 생각 자체가 곧 신이라거나 지성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은, 신과 피조물의 질적 심연을 망각한 또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고린도전서 1:25)라는 역설은, 바로 이처럼 스스로 절대화된 인간의 사변적 오만을 부수고 신의 초월적 섭리 앞에 무릎 꿇게 하는 엄중한 경고였다. 김교신이 역설한 이성은 자기충족적 목적이 아니라, 절대자의 말씀 앞에서 거짓된 미혹과 무속적 열광을 걸러내고 진리의 본질을 겸허하게 대면하기 위한 ‘피조물적 분별의 도구’였다.
이처럼 ‘반지성적 나태’와 ‘지적 교만’이라는 두 함정을 신앙 안에서 치열하게 통과해 낸 전형을 우리는 청교도 시인 존 밀턴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밀턴의 유명한 소네트 〈실명에 대하여On His Blindness〉는 한국 기독교 신자들, 특히 고학력 지식인들에게 성찰의 거울이 된다.
내 빛이 어떻게 다해 버렸는가를 헤아릴 때,
이 어둡고 넓은 세상에서 내 생애의 반도 채우기 전에,
숨겨두면 죽음과 다름없는 그 하나의 달란트가
쓸모없이 내 안에 묵혀 있음을 볼 때,
비록 내 영혼은 그것으로 창조주를 섬기고
주께서 돌아오실 때 꾸지람을 듣지 않도록
정직한 셈을 바치려는 열망으로 더욱 불타오르건만,
“빛을 앗아가시고도 낮 동안의 노동을 요구하시는가?”
내 어리석게 물었노라. 그러나 ‘인내’가
그 불평을 가로막으려 곧 대답하길,
“하나님은 사람의 일도, 친히 주신 은사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온유한 멍에를 가장 잘 짊어지는 자가
그분을 가장 참되게 섬기는 이니라. 그분의 나라는
제왕처럼 장엄하여, 수천의 천사가 그분의 명을 받들어
땅과 바다 위를 쉼 없이 내달리나니,
그저 서서 묵묵히 기다리는 자들 또한 그분을 섬기는 것이니라.”
밀턴은 시에서 시력을 잃은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숨겨두면 죽음과 같은 그 하나의 재능(that one talent which is death to hide)”을 탄식한다. 이는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인용한 것이다. 창조주가 부여한 재능을 땅에 묻어두는 것은 소박함이 아니라 게으름이며, 절대자에 대한 엄연한 불순종이다. 한 달란트를 묻어둔 종을 향해 주인이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마태복음 25:30)고 심판했듯, 밀턴에게 지적 역량과 학문적 재능을 방치하는 것은 영적 파멸이자 직무 유기였다. 그는 빛을 잃은 절망 속에서도 “빛을 앗아가 놓고도 낮 동안의 노동을 요구하시는가(Doth God exact day-labour, light denied)?”라고 신 앞에 탄식하면서도, 결코 지적 소명을 포기하지 않고 구술을 통해 서사시 《실낙원》을 완성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 내의 반지성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매서운 비판에 직면한다. 한국 교회는 지적 탐구를 흔히 ‘교만’으로 매도하며 맹목적 감정과 기복적 열광만을 순수한 믿음으로 포장해 왔다. 고학력 신자들조차 이에 편승하여 이른바 ‘할머니 신앙’의 소박함 뒤로 숨어버리며, 창조주가 허락한 학문과 전문 지식이라는 달란트를 ‘쓸모없이 묻어두는’ 안일함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잠언 4:7)라는 말씀처럼, 지성을 팽개친 채 단순함으로 도피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달란트를 사장시킨 게으름일 뿐이다.
동시에 밀턴의 시는 고학력 엘리트 신자들의 ‘지적 교만과 기능적 성취주의’를 향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지식인들이 빠지기 쉬운 또 다른 함정은 자신의 학벌과 지적 성과로 하나님을 ‘도와드린다’고 착각하는 엘리트주의적 우월감이다. 시 속에서 의인화된 ‘인내(Patience)’가 응답하듯, 하나님은 인간의 학위나 탁월한 지적 업적에 빚지는 분이 아니다. 지성은 청지기로서 피조 세계를 바르게 분별하고 섬기는 도구일 뿐, 결코 구원의 훈장이 될 수 없다. 밀턴은 시의 결구에서 “오직 서서 기다리는 자들도 섬기는 것이다(They also serve who only stand and wait)”라고 노래하며, 자기 뜻대로 재능을 휘두르지 못하는 한계 상황 앞에서도 인간적 성취욕을 내려놓고 절대자의 주권적 섭리를 겸허히 수용할 것을 촉구한다.
결국 밀턴이 보여준 지성의 길은, 달란트를 묻어두는 ‘반지성적 게으름’을 매섭게 질타하는 동시에, 지성을 자기 의義로 삼으려는 ‘엘리트주의적 오만’을 십자가 앞에 복종시키는 치열한 ‘청지기적 균형’이었다. 김교신이 일제의 폭압과 조선 교회의 무속적 열병 속에서 붙들었던 “학문과 신앙의 합금” 역시 바로 이 지점에 서 있었다. 김교신에게 지성은 신비주의적 광신을 쳐내는 ‘냉수’이자 시대의 거짓을 분별하는 엄밀한 ‘도구’였으나, 그 지성은 결코 십자가의 복음 위에 군림하지 않았다. 그는 지성을 통해 신앙을 박제화하지 않았고, 신앙을 핑계로 지적 연마를 게을리하지도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