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사람들은 모인다. 혹은 망년회 혹은 동창회, 동호회의 이름으로 모인다. 저마다 명분과 의미가 있는 모임들. 문제는 모인 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먼저 취기가 돌 정도. 반가움과 스트레스를 안주삼아 연거푸 부어라마셔라 하다 어느새 노래방. 죄 없는 마이크의 멱살을 움켜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일쑤. 속은 쓰라리고 정신은 혼미하고 몸은 비틀비틀 휘청휘청.
개중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모임이 있으니, 이름 하여 ‘홈커밍데이’. 오랜만에 변두리 학교 앞에서 후배들과 어울리는 일은 그 자체로 흐뭇한 일. 부러 도착 시간 늦추며 캠퍼스 이곳저곳을 거닐다보면 절로 청춘의 추억과 향수에 젖고. 문득 센티한 기분에 시 한 수 소리 내 읊어보는 호기도 부려보고. 후배들 앞에서 짐짓 무게를 잡아보기도 하고. 신입생들의 재롱(?)에 박장대소하며 부박한 현실의 짐을 덜어보기도.
지난 주 학회 홈커밍데이에 다녀왔다. 해마다 모이는 숫자가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터. 그나마 아예 명맥이 끊겨 버린 이웃 동아리에 비하면 여남은 명의 재학생들이 버티고 있는 우리 학회는 행복한 편. 어느덧 사회과학 혹은 철학이라는 인기 없는 상품을 깔아놓은 구닥다리 (학회)좌판은 21세기 캠퍼스 상가에서 철시해야 할 판. 아, 참을 수 없는 대학사회의 가벼움. 그러나 엄연한 현실. 누굴 탓하고 누굴 원망하겠어. 그나마 버티고 있는 후배들이 있어 기특하고, 해마다 꾸역꾸역 찾아주는 선배들이 있어 고마울 뿐.
선술집 귀퉁이에 모여 앉아 연신 담배 빨아대는 무리들. 개중 누군가 소주병에 숟가락 꽂고 일어나 음정 박자 무시한 채 노래 한가락 뽑으면 저절로 흥취가 돋고.
“선배님, 요즘은 무슨 책 읽으세요?” (어라! 날 알아주는 녀석이 있으렸다?) “뭐, 그냥 대충대충 닥치는 대로지.”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뭘 읽어야 할지 도통 모르겠어요.”
회상 좀 하자면 10여 년 전, 그땐 대학 후배들 만나기가 겁이 났을 정도였다. 녀석들, 워낙 드세게 질문 공세를 펴는데다 아는 건 또 뭐가 그리 많은지. 무식했던 나는 도무지 녀석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거라. 그래 슬슬 피해 다니거나 혹 부딪칠 일이 있거든 되도록 철학 얘기는 꺼내지 말자고 암묵적으로 협정을 맺어야 했을 판. 그땐 소위 ‘철학과잉의 시대’라 불릴 만했다. 소위 68세대의 망령들이 대학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때였다.
“1990년대 한국에서는 프랑스 철학이 활발히 소개되고 프랑스 철학자들의 저작물이 널리 읽혔다.(푸꼬와 알뛰세, 데리다와 부르디외와 라깡, 그리고 들뢰즈까지. 이른바 ‘철학의 세대’의 저작들. 그런데 이러한 ‘철학의 세대’의 철학을 그 철학의 역사성까지 모두 읽어 내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게 된다(후략)”(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타리크 알리·수잔 왓킨스 지음/ 안찬수·강정수 옮김/ 삼인 간) 서문 중에서)
10년이 지난 지금 책께나 읽으며 산다는 헛소문이 나돌았던 모양. 만나는 후배들마다 책 좀 추천해 달라고 아우성. 여전히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나로선 난감할 밖에. 그러나 얼마나 고마운가. 보잘것없는 나를 인정해주고 관심 가져주는 후배가 있고, 버거운 학과공부에 치일만도 하건만 그 와중에도 세상을 좀더 자세히 알고 싶다고 질문하고 나서는 후배가 있으니. 그나저나 요즘 대학생들 도대체 안 읽어도 너무 안 읽는 게 아닌가, 책을.
그럴 만도 하다 싶은 게 우리 대학사회를 한번쯤 훑어볼라치면 그야말로 맷돌 돌리는 손잡이가 없으니 특히 어학을 전공하는 우리 후배들은 불쌍하기 그지없는 거라. 몇 십 년 교수 자리 차지하고 뭉개면서 변변한 전공 관련 저서 한권 없는 교수들. 앵무새 기능만 낼름낼름 받아먹으며 똑똑한 머리 엉망으로 망가뜨린 채 바보 돼서 사회에 나서는 후배들. 아뿔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학사회의 풍경들.
해서 넌지시 한번 물어 보았겠다? 아, 참담한 결과. 도대체 해마다 발표되는 모 신문사 ‘대학(학과)평가’ 전국 1위를 고수한다는 유수 대학의 우수한 학생들이 저 대단한 박홍규 교수, 최재천 교수, 정민 교수, 리영희 선생님, 박상익, 임지현 교수의 이름조차 들어본 바 없고, 설령 들어봤던들 그들의 그 많은 책들이 금시초문이라니.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건가. 참나, 아직도 신영복 선생님 하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정도가 떠오른다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래도 사회과학 ‘스터디’한다는 후배들이기에 큰 맘 먹고 한 권 추천한 게 『지식의 발견(한국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읽기)』(고명섭 지음/그린비 간)이렸다. 설명을 좀 그럴싸하게 했더니, 일순 후배들의 시선이 쏠리고 귀가 쫑긋하더이다.
“개인적으로 도통 헷갈리기만 했던 ‘민족주의’에 대해 명확하게 알게 해준 책이다. 서중석 교수의 책(『배반당한 한국민족주의』)에 대한 서평을 통해서였는데, 저자의 풍부한 인문적 소양에다 기자생활을 통해 터득한 정확하고 간결한 문체 덕분에 어려운 주제임에도 비교적 쉽게 읽힌다. 그 외 부르디외, 한나 아렌트 등에 관한 쉽고 핵심을 찌르는 설명이나 ‘리영희 vs 강준만’의 구도를 설정하며 문제제기한 ‘지식인이란 어떤 존재인가?’가 매우 인상적이거든.”
그 날은 말하지 못했지만 내친 김에 몇 권 더 소개하자면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1, 2』(최성일 지음/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간), 『세계 지식인 지도』(김상환·김성기 등 기획/정재왈 진행/정운영 등 저/산처럼 간), 『2020 미래한국』이주헌 외 지음/ 한길사 간)등도 읽어둘 필요가 있어. 이런 류의 미덕은 특정한 분야에 치우치거나 특정 시각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객관적으로 지식계의 동향이나 지식인들의 활동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지.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에 덧붙여 하고 싶은 말. ‘책이 책을 낳고, 그 책이 또 책을 낳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독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독서라고 할 수 있거든. 외부의 어떤 강요에 의한 독서, 강박증에 시달리며 쫓기듯 후다닥 읽어치우는 건 바람직한 독서라고 하기 힘들지.
특히 오늘 소개한 책들은 그 자체로 완전하달 순 없고, 단지 책의 세계, 지식의 세계에 들어서도록 유도해주는 안내장치에 불과하지. 그런데 그게 어디야. 불모의 땅에 충실한 안내자가 있어 길을 가르쳐준다는 거, 얼마나 반가운 일이냐구. 우선 나부터 혜택을 보고 있거든. 벌써 몇 권 째인지 몰라. 오늘 소개한 책을 통해 접하게 된 훌륭한 책들이.
그러고 보니까, 오늘 꽤 횡설수설했군. 쓰다보니 후배들 생각도 나고, 그래 편안하게 말하려고 한 게, 결국은 문체도 내용도 오락가락. “그나저나 친절한 책안내자 씨, 후배들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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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블로그 보기- "시라노의 주책잡기")는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지만 아직 작가라는 이름을 갖기엔 부족한 게 많다고 판단, 현재 책읽기와 습작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경기방송(FM99.9Mhz)에서 책소개 코너를 진행하는가 하면, 각종 월간지에 서평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현재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한 ‘성 프란시스 대학’에서 작문강좌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시라노의 주책잡기>는 책(冊)과 술(酒)을 좋아하는, 그러니까 ‘고즈넉함’과 ‘질펀함’을 동시에 담고 있는 ‘시라노의 인생이야기’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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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es24.com/home/chyes/07_ReaderColumn_Review.asp?class=yiyagy&serial=26&varPage=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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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수 대학의 우수한 학생들이 저 대단한 박홍규 교수, 최재천 교수, 정민 교수, 리영희 선생님, 박상익, 임지현 교수의 이름조차 들어본 바 없고..." ==> 난 다 알겠는데...^^;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