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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 청소부 예찬
찰스램(1775~ 1834)
「1775년 런던에서 출생. 7세가 되던 해 크라이스츠 호스피틀 학교에 입학했고, 평생의 친구 될 S.T 콜리지를 만났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1789년 학교를 자퇴하고 남양상사라는 곳에서 잠시 근무했다. 그 후 1792년부터 동인도회사 회계원으로 취직하여 1825년 은퇴할 때까지 근속했다.
1795년 정신 착란 증으로 6주간 입원했는데. 이 증상은 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듬해 누이 메리가 심한 발작을 일으켜 모친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램은 누이의 후견인이 되어 평생 독신으로 누이를 돌보며 살았다.
램은 콜리지를 가까이 하면서 문학적으로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96년 콜리지가 낸 시집에 네 편의 소네트를 발표해 등단했고. 이미 이름을 떨치고 있던 워즈워즈 남매, P.B셀리, 윌리엄 헤즐릿, 리 헌트 같은 문사들과도 교우했다.
1798년에는 첫사랑 앤 시먼즈와의 관계를 넌 지지 비치는 <로사먼드 그레이>를 써서 호평을 받았다.
1820년부터는 ‘엘리아’라는 필명으로 월간지 <런던 매거진>에 에세이들을 기고했는데, 이것들을 모아 1823년에 <엘리아의 수필>과 1833년에<마지막 엘리아의 수필>을 출간했다. 자전적 소재에 절묘한 유머와 페이소스를 섞어 우아한 문체로 써 내려간 이 에세이들은 영국 산문문학의 전범으로 평가 받고 있다.
1834년 산책 중에 입은 낙상으로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에드먼턴의 올세인츠 교회 묘역에 묻혔다.」
■나 그리고 가족에 대한 글
[꿈에 본 아이들-하나의 환상]
아이들은 어른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어할 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펼쳐서 자기네가 본 적이 없고 이야기로만 들어오던 증조부니 증조모니 하는 분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어한다. 며칠 전 저녁에 어린것들이 내게 기어와서 필드라는 성씨를 가졌던 증조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 것도 바로 그런 마음에서였다. 필드 할머니는 노포크에 있는 큰 저택에 살았는데 그 집은 아이들과 그들의 아빠가 살고 있는 집보다 100배나 더 컸으며, 아이들이 최근에 <숲 속의 어린이들>이란 담시(譚詩)를 통해 알게 된 어떤 비극적 사건들의 무대이기도 했다는데, 적어도 그 지방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아이들과 그 잔인한 외숙부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방울새가 나오는 대목★(그 담시에 의하면 유산을 탐낸 외숙부가 숲 속에 내다버린 아이들이 죽자 방울새가 잎으로 시신을 덮어주었다고 한다)까지가 그 저택의 넓은 홀에 있는 벽난로의 목조 장식에 곱게 새겨져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나의 필드 증조모님께서는 몹시 경건하고 착한 분이셨으며 모든 사람이 그분을 좋아하고 존경했다는 이야기며, 그 할머니가 그 큰 저택의 마나님은 아니었고 집주인이 맡긴 일을 돌보고 계셨을 뿐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할머니가 그 저택의 마나님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위치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나는 또 아이들에게 필드 증조모께서 한때는 키가 무척 크고 몸이 곧고 우아하게 생긴 분이셨으며, 젊을 때는 가장 훌륭한 무용가로 존경 받기도 했다는 말을 해주었다.
나는 할머니가 그 크고도 외로운 저택의 호젓한 방에서 혼자 잠을 잤다든지, 한 밤에 자기 침실 근처에 있는 커다란 계단에 두 명의 아이 유령이 미끄러지듯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도 “그 철부지들이 날 해치기야 하겠니”라고 말하던 일도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회복기의 환자]
지난 몇 주 동안 신경열이라는 꽤 고약한 병이 나를 꼼짝 못하게 붙잡고 있었다. 이제 그 병은 서서히 떠나고 있지만 그간 병치레를 하느라 나는 그 병과 관계없는 화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성찰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약한 맥박을 느끼는 일 말고는 모든 삶의 지행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 아닐까? 세상에 제왕다운 고독이 있다면 그것은 병상에 누워 있는 일이다.
환자는 정치인들보다도 더 자주 편을 바꾼다. 그는 몸을 쭉 펴고 누웠다가 웅크리기도 하고, 비스듬히 누웠다가 가로누워 머리와 다리를 침대 옆으로 걸치기도 하지만, 누구 하나 그가 등 돌리는 일을 나무라지 않는다.
병에 걸리면 인간은 스스로 자아의 차원을 높이지 않는가! 그는 자기 자신의 전유물이 된다. 그는 극단적 이기심이 유일한 임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친구니 파멸이니 하는 말도 지금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 그를 심란하게 하지는 못한다. 그는 병이 나을 생각 말고는 다른 어떤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
그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으면 그것과 상관없는 많은 걱정거리들은 그 생각 속에 파묻히고 만다. 그는 질병이라는 튼튼한 갑옷을 입고, 고통이라는 냉담한 가죽을 뒤집어쓴 채 자신의 동정심을 마치 희귀하고 오래된 포도주처럼 단단한 자물쇠를 채워서 보관하며 혼자서만 애용하려 한다.
그는 누워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혼자 서러워하고 신음하면서 자기연민에 휩싸인다. 자기가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면 그의 애간장이 녹는다. 그는 자기 처지를 생각하고 울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그는 자기자신의 동정자이며, 어느 누구도 그 역할을 자기만큼 잘 해낼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는 자기의 비극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별로 원하지 않는다. 수프나 강장제를 들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며 들어오는 늙은 간병인의 얼굴만이 반가울 뿐이다. 그가 그 얼굴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런 감정의 기색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요, 그 옆에서는 마치 침대 기둥을 상대하듯 거리낌도 없이 열에 들뜬 비명을 지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집안에 나도는 소문 따위는 그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사람들이 주고 받는 조용한 속삭임은 집 안에서 삶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므로 그의 마음을 달래주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그는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는 무엇이건 알아서도 안 되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하인들이 마치 벨벳 위를 걷듯이 멀리 떨어진 계단을 살금살금 오르내릴 때 그는 조용히 귀를 기울이지만, 그들의 용무를 희미하게 짐작해볼 뿐 그 이상 마음을 쓰지 않는다. 더 정확히 알아 보았자 그에게는 부담이 될 뿐이므로 그는 그저 추측이 주는 압박감을 견딜 뿐이다. 천을 씌운 노커를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그는 살며시 눈을 뜨지만 “누구냐?” 고 묻지도 않고 감아버린다. 그의 병세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묻는다는 생각을 하면 그는 기분이 좋아지지만 문병자들의 이름을 알고 싶지는 않다. 온 집안이 온통 조용하고 쥐 죽은 듯한 적막에 쌓여 있는 가운데 그는 당당하게 누워서 마치 왕이 된 듯한 기분을 즐긴다.
병에 걸린다는 것은 군주의 특권을 누리는 것과 같다. 주위 사람들이 살금살금 걸어 다니며 환자가 눈짓만 해도 조용히 보살펴주는 것과 병이 좀 낫는 기색이 보이면 같은 하인들이 다시 부주의하게 처신하며 문을 꽝 닫는다든가 열어놓는 등 무례하게 출입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비교해보시라.
[귀에 대한 장章] 내게는 귀가 없다. 하지만 독자 여러분, 오해하지는 마시라. 내가 태어날 때부터 그 한쌍의 외면적 돌기랄까, 늘어진 장식품이랄까, 아니 건축 용어를 빌려, 인체의 기둥머리에 달린 그 의젓한 소용돌이 꼴을 가지지 못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런 꼴을 하고 있으려면 어머니가 나를 낳지 않은 편이 나았을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이 음향 유도 장치들은 큼지막하기보다 오히려 예쁘장한 편이다. 정교하고 미궁 같은 입구랄까 필수불가결한 인지 보조장치로서 내 귀가 비록 당나귀의 귀처럼 크지 못하고 두더지의 귀처럼 예민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당나귀나 두더지를 부러워할 생각이 없다. 디포 같은 사람이야 끔찍한 신체 훼손을 당하고 나서도 건방진 짓을 하며 “전적으로 태연했고” 귀 따위야 있거나 없거나 편히 지냈겠지만, 나는 그런 훼손을 당한 적이 없고 또 당할 짓도 하지 않았다. 나는 칼을 쓰는 형을 당해본 적이 없으며 내 운명을 똑바로 읽었다면, 앞으로도 그런 일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정녕 내 운명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귀가 없다는 말은 다름 아니라 음악을 듣는 귀가 없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소리들의 조화를 듣고도 내 마음이 결코 감동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물론 내 스스로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될 것이다. ★ 다니엘 디포(1660~1731)는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교회와 성직자들을 풍자하는 팸플릿 때문에 필화를 입고 길거리에서 칼을 쓰고, 벌금을 물고, 옥살이를 하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 알렉산더 포프는 장편 풍자시<던시아드>에서 디포를 풍자하며 “귀도 없이 높다란 곳에 서서도 태연했던 디포”라고 읊은 바 있으나 실제로 디포가 귀를 잘리는 벌을 받은 적은 없다.
나에게는 원래 음악에 대한 소질이 있지만 미처 계발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약간의 노력을 들여보긴 했으나 나는 악보가 무엇인지 혹은 한 악보가 다른 악보와 어떻게 다른지를 이론적으로 도저히 구별할 수 없다. 더더구나 불가능한 것은 소프라노와 테너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일이다. 다만 아주 낮은 베이스 음은 지독히 거칠고 귀에 거슬리기 때문에 내가 이럭저럭 짐작해낼 때도 있다.
[퇴직자] 만약에 독자 여러분께서 일생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빛나는 젊은 시절을 사무실에 갇혀 지겹게 허비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면, 그리고 그런 감옥 생활의 나날이 중년기를 거쳐 백발의 노년기에 이르도록 연장되는데도 해방이나 유예의 희망이 없다면, 그 결과 휴가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거나 휴가를 어린 시절의 특권으로만 기억하며 살아왔다면 오직 그런 경우에만 여러분은 내가 얻은 구원의 값어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민싱 레인에 있는 그 회사의 의자에 앉기 시작한 지도 어언 36년이나 된다. 세월은 부분적으로 우리를 그 어떤 것과도 화해하게 해준다. 나는 점차로 만족하게 되었다. 마치 우리 속에 갇힌 야수처럼 체념하듯 만족하며 살았다는 뜻이다.
끊임없이 울리는 교회의 종소리는 나를 우울하게 한다. 가게 문이 닫힌 것을 보면 짜증이 난다.
이따금 외출 허가를 받고 나온 하녀가 보이지만, 그녀는 한 주일 내내 노예처럼 일하는 버릇에 잦은 나머지 그만 자유시간을 즐길 능력을 거의 상실한 채 하루의 즐김이 공허했다는 표정만 생생하게 드러낼 뿐이다.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며 나는 행복하다고 여겼지만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바스티유 감옥의 수인으로 40년간 갇혀 있다가 갑자기 석방된 느낌이었다. 나 자신을 스스로 떠맡을 힘이 내게는 없었다. 현세의 시간에서 벗어나 영원 속으로 옮겨가는 기분이었다.
내 힘으로 관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내 손안에 있는 듯했다. 나는 늘 시간적으로 빈한하던 가난뱅이에서 갑자기 광대한 시간을 쓸 수 있는 위치로 올라섰던 것이다. 나는 내가 소유한 시간이 한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나 대신에 시간이라는 재산을 관리해줄 집사라든지 영리한 마름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나는 활발한 업무에 종사하다가 노년에 이르게 된 분들에게 주의를 주고 싶다.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헤아려보지 않고 경솔하게 자기의 일상 업무를 갑자기 그만두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으므로 절대로 그러지 말라는 주의 말이다.
이전에는 건듯 지나가버리는 휴일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하루에 30마일씩이나 걸어 다니곤 했지만 지금은 하루 종일 걷는 일이 없다. 시간이 귀찮을 정도로 많다고 느낄 때는 책을 읽으며 그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지난날 나에게는 촛불을 켜야 하는 시간밖에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나긴 겨울 밤이면 내 머리와 눈이 지칠 정도로 미친 듯이 책을 읽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읽지 않는다. 나는 산책을 하고 독서도 하고 발작적 욕구에 사로잡히면 지금처럼 글을 쓰기도 한다.
참으로 나는 명목상으로만 50년을 살아온 셈이다.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았던 시간을 그 50년에서 빼낸다면 여러분은 내가 아직도 젊은 녀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교회에 가면서도 휴일에서 커다란 토막이 잘려나가는 듯한 아까움을 느끼지 않는다. 나에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있다.
이제 나는 모 회사의 서기 모 씨가 아니다. 나는 은퇴한 레저 씨이다.나를 만나려면 이제 멋진 정원으로 와야 한다. 어느새 아무 정해진 목표 없이 자유로운 페이스로 산책하고 있는 나의 느긋한 얼굴과 태평스러운 몸짓을 보고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를 알아보게 되었다. 나는 일정한 곳을 오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나의 다른 장점들과 함께 묻혀 있던 한 존엄한 모습 이 내 몸에서 싹트기 시작했다고 나에게 일러준다. 나는 점점 눈에 띄게 신사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내가 신문을 펼쳐 든다면 오페라계의 현황을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나의 일은 끝났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하게 되어 있던 일을 모두 마쳤다는 뜻이다. 나는 내게 할당된 과업을 수행했고 이제 여생은 내 차지다.
[나의 친척들]
내게는 고모가 한 분 계셨는데 정답고 착한 분이었다. 그분은 일생 동안 독신으로 사시느라 세상을 보는 눈이 비딱해져 있었다. 그분은 나야말로 자기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유일한 존재이므로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는 생각을 하면 자기는 어머니처럼 눈물이 나며 슬퍼진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내게는 형제나 자매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누이가 있었지만 어린 시절에 죽었다. 그 애가 살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위안이 되었을 것이고 또 얼마나 걱정거리가 많았을 것인가. 하지만 나에게는 하포드셔 여기저기에 흩어져 사는 종형제들이 있다. 내가 일생 동안 절친하게 지내고 있으며 참으로 종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두 사람 말고도 여럿이 있다는 뜻이다. 그 두 사람은 제임스 엘리아와 브리짓 엘리아이다. ★(램은 친형 제임스와 누이 메리를 사촌이라면서 가명으로 부르고 있다) 그들은 나보다 각각 나이가 열두 살 및 열 살씩 더 많다. 그리고 두 사람 중 어느 한 쪽도 충고와 지도를 할 때 연장자에게 허용되는 특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듯하다.
제임스는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종형이다. 자연 속에는 여러 가지 개체들이 있어서 모든 비평가들이 그것을 꿰뚫을 수는 없으며, 설사 느끼기는 하더라도 모두 해명할 수는 없다. 요리크의 펜이 그 못진 샌디풍의 명암으로 이야기를 구성해 낸다면 모를까 훗날 그 어느 누구의 펜으로도 제임스 엘리아의 사람됨을 온전하게 그려낼 수 없을 것이다.
제임스 엘리아라는 사람은 여러 가지 상호 모순되는 원칙이 혼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충동에 휘둘리는 진짜 아이 같으면서도 신중하고 냉정한 철학자였던 내 종형의 이론은 고도로 다혈질적인 그의 성품과 어김없이 갈등했다.
[하포드셔의 매커리 엔드]
브리짓 엘리아★(램의 누이 메리의 가면)는 여러 해 동안 내 가정부 노릇을 해왔다. 나는 기억이 나지도 않을 만큼 오랫동안 브리짓에게 신세를 졌다. 노총각과 노처녀가 한집에 살고 있으니 말하자면 겹으로 독신생활을 하는 셈이다.
나는 대체로 이만하면 괜찮다 할 정도로 안락하게 생활하고 있으므로, 어느 성급한 왕의 자식이 그랬던 것처럼, 내 독신 신세를 한탄하기 위해 산으로 갈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우리 사이의 공감은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암묵적으로 이해되는 편이다. 그러므로 언젠가 한번 내가 보통 때보다 더 다정하게 어조를 바꾸는 척하자 내 사촌은 눈물을 쏟으며 내가 변했다고 불평했다.
브리짓은 남이 자기 결점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나는 그녀의 약점에 대해서 부드럽게 언급해야겠다.
그녀에게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책을 읽는 난처한 버릇이 있다. 그럴 때 그녀에게 무엇을 물으면 그녀는 물음의 요지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응 또는 아니야 라고 만 대답하는데, 물음을 던진 사람에게는 이런 대답이 도발적이고 또 체면을 극도로 손상시킨다.
브리짓은 나보다 열 살쯤 나이가 많다.
[H 셔의 블레익스무어]
[크라이스츠호스피틀 학교 - 35년 전 이야기]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지방 덩어리를 먹는 놈이라는 말은 묻혀 있는 시신을 파먹는 놈 과 동의어로 이해되었고 똑같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따라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는 수상쩍은 고기를 먹었대.
식사가 끝난 후에 그런 아이 하나가 자기 식탁에서 아이들이 먹다 남긴 음식물을 조심스럽게 모으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물론 남긴 음식이 많지는 않았고 맛이 좋은 부위는 별로 남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특히 그는 이 평판 나쁜 지방 덩어리를 가져가서 자기 침대 옆에 놓인 의자 겸용 사물함 속에 몰래 저장해두곤 했다. 그가 언제 그것을 먹는지 아무도 본 사람은 없다. 밤에 혼자서 그것을 먹는다는 소문이 돌았을 뿐이다. 아이들은 그를 감시했지만 한밤중에 그런 짓을 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몇몇 아이들은 휴일에 그가 커다란 청색 체크 무늬 보자기에 무언가를 가득히 담아 들고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그 지방 덩어리 아니겠냐고 도 했다. 그러고 나면 그가 그것을 어떻게 처분했을 것인가를 놓고 추측들을 했다. 더러는 그가 그것을 거지들에게 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생각이 대체로 우세했다. 그 아이는 우울하게 지내고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와 함께 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파문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학교생활의 경계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는 힘이 너무 세서 구타를 당할 아이는 아니었지만, 많은 매를 맞는 것보다도 더 속이 상할 온갖 고약한 벌을 받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잘 견뎌내고 있었다. 드디어 두 명의 학우들이 그의 비밀을 캐내기로 작정하고 어느 휴일에 그의 뒤를 쫓았고 그가 한 허름한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챈서리 레인에 있는 그 건물은 여러 층의 빈한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임대되어 있었고 출입문이 열려 있는가 하면 계단도 공용이었다. 두 학우는 말없이 그를 따라 슬며시 들어가서 몰래 5층까지 올라갔다. 어느 초라한 쪽문에서 그가 노크를 하자 변변찮은 차림의 한 노파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 동안 반신반의하던 것이 이제는 확실해졌다. 정탐꾼들은 자기네 희생자를 꼼짝 못하게 붙잡아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그를 그물 속에 가두고 있었던 셈이다. 공식적인 기소가 있기를 바랐고 가장 뚜렷한 응징을 찾고 있었다. 이 일은 내가 학교를 떠난 뒤에 있었는데, 자기의 모든 행위를 조율하는 참을성이 T는 슬기로움을 갖추고 있던 그 당신의 집사 해더웨이 씨는 판결을 내리기 전에 그 문제를 조사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 결과, 그 신비에 싸여 있던 음식물을 얻어먹거나 아니면 사서 먹었으리라 여겨지던 걸인들이 실은 그의 부모이며, 정직하게 살다가 몰락하게 된 그 내외가 구걸을 면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때맞춰 공급되던 그 음식물 덕분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 어린 황새는 자기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감수하면서 그 동안 사뭇 그 늙은 새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자 감독자들은, 참으로 훌륭하게도 그의 가족을 위한 즉각적인 구호를 의결했고, 소년에게는 은메달을 수여했다.
■가난 혹은 사회문제
[굴뚝 청소부 예찬]
나는 굴뚝 청소부를 만나면 즐겁다. 혹시 오해는 마시라. 내가 말하는 청소부는 어른들이 아니다. 나이든 청소부들이란 어떻게 보아도 매력이 없다. 어머니가 씻겨준 흔적이 아직 지워지지도 않은 채 처음 묻은 검댕 사이로 꽃이 피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런 풋내기 청소부들을 나는 만나고 싶은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이 아이들이 작업하는 광경을 쳐다본다든지, 우리보다 몸집이 더 크지 않은 작은 아이가 어떤 알 수 없는 절차를 거쳐 ‘지옥의 아가리’처럼 보이는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다든지, 그 많은 어둡고 질식할 듯한 동굴과 무시무시한 어둠 속을 그 애가 무서운 허깨비처럼 더듬고 다닐 것을 마음속으로 그려본다든지, “저러다 저 애가 영영 나오지 못하고 말 것”같은 생각이 들어 몸서리를 친다든지,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음을 알리는 그 가냘픈 목소리를 듣고는 생기를 되찾게 된다든지, 넘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문밖으로 뛰어나가서는 그 유령 같은 검둥이가 멀쩡하게 나타나 정복한 성채 위에 깃발을 휘날리듯 의기양양하게 솔을 휘두르고 있는 광경을 때맞춰 본다든지 하는 것이 참으로 신비한 즐거움이 아니었던가!
나의 천성은 길거리에서 당하는 모욕, 이를테면, 사람들의 야유나 조소라든가, 어떤 신사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광경이나 스타킹에 진흙이 튄 것을 보고 교양 없는 인간들이 기고 만장해 하는 것을 보면 참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어린 굴뚝 청소부가 즐겁게 떠들고 있는 광경만은 용서하는 마음 이상과 아량으로 참을 수 있다.
[오래된 도자기]
나는 오래된 도자기에 대해 거의 여성적이라 할 정도의 애착을 가지고 있다. 큰 저택을 구경하러 갈 때에도 꼭 도자기를 보관하는 진열장부터 찾아간 후에야 화랑을 찾는다.
사촌누이★(실제로는 램의 친 누이)와 나는 오후에 아무것도 섞지 않은 회춘차를 마실 정도로 구식인물이거니와, 간밤에 나는 그 차를 마시며 최근에 사와서 처음으로 쓰게 된 희귀한 청색 도자기 잔의 경이로움을 누이에게 지적해 보이고 있었다. 내가 이런 사소한 것들을 가지고서나마 이따금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할 여유가 되었으니 근년에는 우리 형편도 무척 좋아진 셈이 아니냐는 말을 하고 있는대, 그때 모종의 건듯 지나는 감정이 내 사촌의 미간을 어둡게 하는 듯했다. 나는 브리짓의 얼굴에 비치는 그런 우울함을 대번에 간파할 수 있다.
“형편이 전혀 넉넉하지 못했지만 그런 대로 좋았던 옛날이 그리워지는구나” 누이가 말했다. “다시 가난해지고 싶다는 뜻은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일종의 중류 수준 생활은 하고 있었고 그때가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고 확신해.” 누이는 유쾌하게 마구 지껄이고 있었다. “이제는 너에게 생활비의 여유가 있으니 물건 구입도 단순한 지출에 불과해. 이전에는 물건을 하나 산다는 것이 싸워서 이기는 것 같은 기쁨을 주었어. 그 당시 우리가 싸구려 사치품 하나를 탐내게 되면, 나는 너의 동의를 얻어내느라 엄청난 소동을 벌여야 했고, 우리는 사나흘씩 토론하며 사느냐 마느냐를 놓고 그 경중을 따져보았고, 그만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떤 명목의 생활비에서 각출해야 할 것인지 또는 어떤 식의 절약을 해야 할 것인지 궁리하곤 했지. 그러고 나면 어떤 물건이건 구입할 가치가 있게 되지만, 그 값을 치른 만큼은 쪼들려야 했어.
[잭슨 대위]
부자들은 자기네 가구 쪽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고 가난뱅이들은 자기네 가구를 보지 못하게 한다.
한 인간이 자신을 속인다든가, 가정에서 보다딜 처럼 처신한다든가, 빈곤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늘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공상을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체질적 철학이요, 운명을 극복하는 길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특성은 내 옛 친구 잭슨 대위를 위해 마련되어 있었다.
[가난한 친척들]
가난한 친척이 있다는 것은 그 성격상 극히 거북한 일이다. 그것은 반갑지 않은 관계요, 가까이 접하기가 역겨운 것이요, 양심에 거리끼는 존재요, 우리의 번영이 절정에 있을 때 엉뚱하게 드리워지는 기다란 그림자요, 잊고 싶은 옛일을 들추는가 하면 부단히 나타나서 괴롭히고, 우리의 주머니를 축내는가 하면 우리의 자존심을 견딜 수 없게 건드리고, 성공을 저해하며, 승진을 헐뜯고, 혈통을 더럽히는가 하면 가문의 불명예이기도 해서, 옷이 찢어진 흠집 같고, 잔칫상에 놓인 두개골 같다. 또 가난한 친척은 아가토클레스의 항아리처럼 천한 근본이 드러나게 하고, 모르드개 처럼 경의를 표하기를 거역하고, 나사로처럼 거지꼴로 문간에 나타나므로, 길목을 위협하는 사자요, 방에 들어온 개구리이며, 고약을 더럽히는 파리요, 눈에 든 티이며, 적군에게 바친 승리이고, 친구들에게 해야 하는 사죄요, 없어도 아쉽지 않을 것이며, 수확의 계절에 내리는 우박이니, 실로 한 파운드의 단맛 속에 섞인 한 온스의 신맛 같은 것이다.
가난한 친척이 문을 두드리면 우리는 그 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알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저건 L 씨다”라고 말해 준다. 친근함이나 존경심 중 어느 쪽도 아닌 그 마음 내키지 않는 노크 소리는 환대를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환대 받을 생각을 포기한 것처럼 들린다. 그는 들어오면서 미소를 짓지만 실은 곤혹스러워한다. 그는 우연히 들렸다고 하지만 으레 정찬 시간에 식탁을 차려놓으면 나타난다. 식탁에 손님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그냥 돌아가겠다고 하지만, 괜찮으니 않으시라고 하면 못이기는 척하고 앉는다. 그가 의자를 하나 차지하는 통에 손님이 데리고 온 두 아이는 곁 식탁을 마련해서 앉혀야 한다. 약속된 방문객이 없는 날이면 주부가 조금은 흐뭇해 하면서 “여보, 오늘 혹시 L씨가 들를지도 모르겠네요”라고 말하겠지만, 그는 이런 날에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생일날들을 기억해두었다가, 어쩌다 운이 좋게 생일날 찾아와서 잘 얻어먹게 되었다고 말한다. 작은 가자미 요리가 놓인 것을 보면 그는 생선은 먹지 않겠다고 사양하지만, 한 조각만 드시라고 질기게 권하면 당초의 마음을 바꾸고 슬그머니 얻어먹는다. 그는 또 포트와인만 들겠다고 고집하지만, 처음 만난 사람이 자꾸 권하면 병에 남은 마지막 한 잔의 보르도 포도주를 마시기도 할 것이다. 그의 정체를 모르는 하인들은 자기네가 혹시 그에게 너무 굽실거리는 것이나 아닌지 혹은 충분한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몰라 걱정한다. 누구나 그의 신분에 대해서 추측해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세관의 물품 검사관쯤 되리라고 여긴다. 그는 우리를 세례명으로 부르는데 이는 그의 성이 우리의 성과 같다는 것을 넌지시 비치기 위해서이다. 그는 너무 친근하게 굴지만 우리는 더없이 우울해질 뿐이다. 그가 좀 덜 친근하게 군다면 어쩌다 들른 피부양자로 통했을 것이고, 조금만 더 당당해진다면 가난한 친척으로 여겨지는 위험에 처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친구가 되기에는 너무 겸손하지만, 손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위엄을 부린다. 토지 임대료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므로 그는 시골 소작인만도 못한 손님이지만, 그의 차림새와 거동을 본 다른 손님들은 그를 소작인으로 여길 공산이 높다. 함께 카드놀이를 하자는 제안을 했으면 그는 돈이 없기 때문에 사절하지만 제외된 데 대해서는 속상해 한다. 손님들이 헤어질 시간이 되면 그는 마차를 불러 오겠다고 나서지만 실은 하인을 보낸다. 그는 우리 조부모 이야기를 곧잘 들추는가 하면, 시시하고 전혀 중요치 않은 집안 일화를 불쑥 끄집어내기도 한다. 그는 “지금은 집안이 흥한 것을 보니 다행 이지만” 전혀 그렇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면서, 유리하게 비교한답시고 어려웠던 지난날의 형편을 회고하기도 한다. 과거를 돌이키며 축하라도 해야겠다는 듯이 그는 가구의 값을 물을 것이고, 창문 커튼에 대해 특별히 찬사를 늘어놓음으로써 우리를 무안하게 한다. 그는 꼭지 달린 주전자를 보고 예전에 쓰던 찻주전자보다 더 우아하게 생겼지만 편하게 쓰는 데에는 옛 것만 못할 테니 그 점에 유의하라는 의견을 늘어 놓기도 한다. 그는 또 개인 소유의 마차를 가진다면 아주 편리할 거라면서 우리의 안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느냐고 하소연하듯이 묻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가 근년에야 가계 문장원에서 가문을 취득하지 않았느냐면서, 우리 집안의 문장이 여사여사한 줄을 최근까지도 모르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기억은 때와 장소에 맞지 않고, 찬사도 조리가 없으며, 말썽거리나 이야기하면서도 그는 고집스럽게 자리에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가 가버리면 우리는 그가 앉았던 의자를 재깍 구석으로 밀쳐버리고는 불쾌한 것 두 가지를 제거할 수 있어서 시원하다고 느낀다.
세상에는 더 고약한 것도 있으니 그것은 가난한 여성 친척이다.
옷차림을 봐서는 그녀가 숙녀도 아니고 거지도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히 숙녀 쪽에 가깝다. 그녀는 상대를 거북하게 할 정도로 겸손하지만 자기의 열등함에 대해서는 숨김없는 민감성을 보인다.
가난한 남자 친척의 경우는 더러 말을 못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가난한 여자 친척의 경우에는 말을 부추길 도리가 없다. 식탁에서 수프가 담긴 그릇을 그녀 쪽으로 보내면 자기는 남자 손님들이 다 드시고 난 후에 들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혹시 한 남자 손님이s 그녀에게 포도주를 권하면서 함께 드시지 않겠느냐고 하면 그녀는 포트와인과 마테이라 포도주 중에서 어느 쪽을 고를까 망설이다가 남자 쪽에서 포트와인을 드는 것을 보고는 같은 것을 고른다. 그녀는 하인들을 부를 때도 경칭을 쓰고 자기 접시를 받쳐 드는 수고를 그들에게 끼치지 않겠다고 우긴다. 그래서 안주인이 나서서 그 가난한 여자 친척을 돌봐주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피아노를 하프시코드라고 잘못 말할 때는 아이들의 가정교사가 나서서 고쳐준다.
[수도에서 거지들이 쇠퇴하는 데 대한 불평]
거지들은 빈곤의 형태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가장 명예로운 것이다. 거지들은 우리에게 공통되는 천성에 호소하므로, 솔직 담백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떤 교구나 협회에 속하는 동료 개인 또는 집단의 특정한 기질이나 일시적 기분에 호소하는 자들에 비해 거부감을 덜 자아낸다. 그들이 거두는 돈이야말로 징수당해도 불쾌하지 않고 부과되어도 아깝지 않은 유일한 세금이다.
그들이 사는 황량한 삶의 심연에서는 일종의 존엄함이 솟아오른다. 벌거벗고 지내는 것이 하인 제복을 걸치고 사는 것보다도 인간다워지는 데에 훨씬 더 가깝기 때문이다.
가난, 가난뱅이, 빈민 같은 말은 모두 연민을 표하지만 그 연민에는 경멸이 섞여 있다. 그러나 거지를 당당하게 멸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난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각 단계의 가난은 그 이웃 단계의 가난에 의해 조롱된다.
가난한 자들이 재산이 있다고 뽐내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저축을 하겠다고 가련하게 덤비는 것은 웃음이나 유발한다. 그것을 보고 경멸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별로 나을 것도 없는 자기 주머니를 그것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가난뱅이가 다른 가난뱅이를 길거리에서 만나면 무례하게도 상대방은 가난하지만 자기는 그래도 조금은 낫다는 것을 들먹이면서 상대를 괄시하는데, 지나가던 부자들은 이 두 가난뱅이를 모두 조롱한다. 하지만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악한도 자기에게 모욕을 주거나 거지의 주머니를 자기 주머니와 비교해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거지는 비교의 잣대에 오르지 않는다. 그는 재산 평가를 받지도 않는다. 그는 고백대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것은 개나 양에게 가진 것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지가 가진 것 이상으로 으스댄다고 꼬집는 사람은 없다. 거지가 잘난척한다고 비난하거나 거짓 겸손을 보인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다. 안전한 벽 쪽으로 걷겠다거나 먼저 지나가겠다며 거지와 몸싸움을 하는 사람도 없다. 아무도 그에게 소송을 걸지 않는다. 아무도 그를 데리고 법정에 가지도 않는다. 내가 자립해서 살 수 있는 사람이나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한 명문의 가신이나 충복이나 가난한 친척이 되느니 차라리 내 정신의 고백함이나 진정한 위대함을 고려해서 거지의 길을 택하겠다. 누더기가 가난한 자들에게는 치욕이 되겠지만, 거지들에게 는 의상이요, 우아한 직업 표시요, 거지 노릇을 할 권리의 증표요, 정장이며, 공석에 나타날 때 으레 입고 나올 것이라고 기대되는 복장이다. 거지는 옷의 유행을 따르지 못하거나 유행에 뒤처진 채 어색하게 뒤뚱거리는 일도 없다. 그는 궁중 상복을 입을 일도 없다. 특별히 꺼리는 생기 없기 때문에 그는 모든 색의 옷을 입을 수 있다. 그의 의상은 퀘이커 교도들의 의상만큼도 변하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에서 외모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사람이다.
누구든 거지에게는 보석보증이나 신원보증을 서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아무도 그에게 종교나 정치적 견해를 물으며 귀찮게 굴지 않는다. 거지야말로 이 우주에서 유일한 자유인이다.
■ 세월 그리고 오래된 풍습
[돼지구이를 논함]
새끼 돼지는 진미 중에서도 최고 진미다. 파인애플도 맛은 기막히다. 그 맛은 너무 뛰어나서 그것을 먹는 즐거움이 죄를 짓는 일은 아니라 해도 거의 죄를 짓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이기 때문에 양심이 고운 사람은 먹기를 주저할 지경이다. 또 그것은 인간의 미각을 너무 황홀하게 하기 때문에 먹으려고 다가오는 입술을 해치거나 따끔하게 할 정도이고, 애인들의 키스처럼 물기도 한다. 그것을 즐기는 일은 너무 치열해서 사람들을 미치게 하기 때문에 그 즐거움은 거의 고통에 이를 지경이다. 하지만 파인애플의 맛이야 어디까지나 입에서 그칠 뿐 결코 식욕을 좌우하지는 못하며 심하게 배가 고픈 사람이라면 언제나 파인애플을 양고기 토막과 바꾸려고 할 것이다.
이제 새끼 돼지를 찬양해보자. 돼지는 비판적인 미각을 가진 이들의 까다로움을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식욕을 자극하기도 한다. 힘에 센 사람은 그를 양껏 먹을 것이고, 약한 사람도 그 부드러운 육즙은 사양치 않는다. 인간의 성품에서는 미덕과 죄악이 섞여 한 덩이로 복잡하게 엉켜있기 때문에 그것을 푸는 데 으레 위험이 따르지만, 새끼돼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으로 일관한다. 새끼 돼지는 어느 한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맛이 더 낫거나 못하지 않기 때문에, 그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이 미치는 한,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고루 맛 좋은 부분을 먹을 수 있게 하며 결코 손님들의 불평을 사는 일이 없다. 실로 돼지 새끼는 이웃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먹을 거리이다.
이 세상에 살다가 운이 좋아서 맛있는 것을 얻게 되면 아끼지 않고 친구에게 거침없이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있거니와, 나는 그런 행운을 거의 누리지 못하면서도 그런 사람들 축에는 들어간다. 장담하거니와, 나는 친구의 즐거움이나 기호나 마땅히 누려야 할 만족에 대해 마치 내 자신의 일인 양 큰 관심을 가진다. 나는 선물을 하면 눈앞에 없는 사람들과도 정다워진다는 말을 자주 쓴다. 그래서 토끼니 꿩이니 자고니 도요새니 길든 농가의 새라고 일컬어지는 닭이니 거세한 수탉이니 물때새니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니 여러 통의 굴 같은 것들이 생기면 나는 거침없이 나누어 먹는다. 말하자면 나는 내 친구의 혀를 통해 그런 것들을 맛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런 선심 쓰기도 어느 정도에 이르면 중단해야 한다. 우리는 리어왕 처럼 주어버리려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새끼 돼지 앞에서는 내 선심 쓰기에도 단호한 선을 그어야겠다. 내 개인적인 입맛에 맞추어서 각별히 정해서 보내온 반가운 선물에다 우정이니 뭐니 하는 구실을 붙여 집 밖으로 내보낸다는 것은 모든 진미들을 보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배은망덕이라고 여긴다. 그러다가는 내가 무정한 사람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될 것이다.
학창시절에 그런 일로 내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일이 생각났다. 나이가 지긋하고 인자한 숙모님께서는 휴일이 끝나 내가 떠날 때가 되면 어김없이 내 주머니에 사탕과자라든가 뭐 그런 맛 좋은 것을 가득 넣어주곤 했는데, 어느 날 저녁에는 오븐에서 갓 나와서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건포도 과자를 나에게 주면서 잘 가라고 하셨다. 런던 브리지 건너편에 있던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백발이 성성한 늙은 거지 한 사람이 내게 절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거짓으로 거지 행세를 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마침 그를 위로해줄 만한 잔돈이 내게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답게 극기라는 허영심과 자선을 베풀겠다는 허세로 그만 그에게 과자를 몽땅 주고 말았다. 그런 경우에 누구나 느끼겠지만 나는 흐뭇한 자기만족으로 들뜬 채 얼마 동안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미쳐 다리를 다 건너기도 전에 나는 제정신을 차렸고 착한 숙모님께 내가 배은망덕했다는 생각을 하며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맛 좋은 선물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낯선 사람에게 주어버리다니! 게다가 혹시 악한일 수도 있지 않은가!
[식전기도]
가난뱅이는 밥상에 앉아 축복을 실감할 수 있지만, 부자들은 어떤 극단의 이론에 의하지 않고는 한 끼라도 밥을 먹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축복을 받고 잇는 척하기가 쉽지 않다. 부자들은 동물적 생명 유지라고 하는 음식물 고유의 목적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가난뱅이의 양식은 일용할 양식이요 문자 그대로 그날 먹을 양식이다. 반면에 부자가 절차를 갖추어 먹는 음식은 영원히 보장되어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가장 순수한 음식이 식전기도에 가장 적합해 보인다. 입맛을 가장 덜 자극하는 음식이야말로 먹는 이로 하여금 가장 자유롭게 엉뚱한 생각을 할 수 있게 한다. 한 접시의 맛없는 양고기에 무를 곁들여 먹고 있을 때에나 인간은 진심으로 감사히 여길 수 있으며 식사라는 의식 및 제도에 대해서도 성찰해볼 여유를 가지게 된다. 그러다가 사슴고기나 자라 요리를 앞에 두게 되면 그는 식전기도의 목적과는 부합되지 않는 마음의 동요를 느낀다는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탐식의 욕구 때문에 흥분하고 있는 사람을 종교적인 감정으로 방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군침이 도는 입으로 신을 찬미하는 말을 중얼거린다면 그것은 찬미의 목적을 어지럽히는 일이다. 미식의 열기는 경배라고 하는 조용한 불꽃을 끄고 만다. 식탁에 감도는 향내는 이단적이므로 우리의 배를 지배하는 신이 그것을 가로채어 자기 것으로 삼는다. 필요 이상으로 제공되어 남아도는 음식물 자체는 그 목표와 수단 간의 균형감각을 모조리 앗아가 버린다. 음식을 주시는 하나님은 그 음식물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우리만 지나치게 많이 먹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겪이 되므로 그런 감사 드리기의 부당함 앞에서 우리는 경악한다. 신을 그런 식으로 찬미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누군가가 “그렇다면 당신은 기독교도들이 양식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여물통으로 몰려든 돼지들처럼 식탁에 앉아 있기를 바란단 말이오? 그건 안 되지요! 나는 기독교도들이 돼지들과는 달리 식탁에 앉아서 하나님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라고 소리치는 것이 들리는 듯하다. 또 만약에 식욕이 광분하고 그래서 사방을 뒤져서 구해온 산해진미를 실컷 먹어야 할 경우에는, 더 적절한 시기가 될 때까지 그들이 축복의 기도를 연기하기를 나는 바란다. 이를테면 식욕이 진정되고, 절제된 음식과 한정된 가짓수의 요리만 차린 식탁에서 하나님의 “나직하고 여린 목소리”가 들리고 식전기도를 드려야 할 이유가 되살아날 때까지 연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다. 대식과 포식은 감사드릴 핑계로 적절하지 못하다. 여수룬도 살이 찌게 되자 신을 버렸다고 한다.(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신 32:15)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음식이 다른 음식보다 더 맛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감사히 여길 수 있지만, 그런 감사는 상대적으로 야비하고 열등하다. 식전기도의 원래 목적은 맛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연명이고, 진미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이며, 시신을 배불리는 수단이 아니라 생명의 수단이다.
그들은 결코 많이 먹지도 많이 마시지도 않는 백성이다. 그들은 말이 잘게 쓴 건초를 먹을 때처럼 냉담하고 조용히 그리고 주위를 깨끗이 하고 먹는다. 그들은 기름기나 물로 옷을 더럽히는 일도 없다. 식탁에서 턱받이를 하고 있는 사람을 볼 때면 나는 그것을 성직자의 법의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음식물 앞에서 퀘이커 교도가 될 수는 없다. 나는 음식의 종류에 대해서 냉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저 기름진 사슴고기 조각들을 무덤덤하게 받아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사슴고기를 삼키면서 자기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모르는 척하는 사람을 증오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식사보다도 더 고귀한 일들에서 그들이 드러내 보일 취향마저 의심스럽다.
우리는 식탁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음식을 들여다보며 너무 신기해하거나, 너무 어지럽게 식사를 하거나, 별 것이 아닌데도 진미라며 혼자 너무 많이 차지하려 하기 때문에, 식전기도를 우아하게 드릴 수조차 없게 된다.
우리에게 배당될 몫을 초과하도록 차지하고는 감사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옳지 못한 짓
에다 위선까지 추가하는 꼴이다.
[밸런타인데이]
[만우절]
[혼례식]
[현대의 여성존중 풍습]
[책과 독서에 대한 초연한 생각]
어떤 책의 내용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두뇌가 인위적으로 빚어낸 산물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는 행위이다.
나는 산책할 때를 제외하고는 책을 읽는다. 나는 그냥 앉아서 사색만 할 수 없다. 책이 내 대신 생각을 해준다.
나는 내가 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읽을 수 있다.
그런 사기꾼 같은 서적을 볼 때마다 나는 그 껍질을 벗겨서 남루해진 나의 노병들에게 따뜻하게 입혀주고 싶다.
■개인, 집단 그리고 인간관계
[두 부류의 인간] 내가 인간에 대해 도출할 수 있는 최선의 이론에 따르면, 인류는 빌리는 자들과 빌려주는 자들로 뚜렸이 구분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고트족, 캘트족, 백인색종, 흑색인종, 적색인종 등의 부적절한 분류법이 있지만 이 모든 종족들도 이 두 가지 근본적 부류로 압축될 수 있다. 바르티아 사람, 메데 사람, 엘람 사람이니 하는 이 지상의 모든 거주자들은 무리를 지어 자연스럽게 이런 기초적 분류의 어느 한쪽에 들게 된다. 내가 위대한 부류라고 부르고자 하는 전자의 무한한 우월성은 그 모습이며 거동이며 특정한 본능적 지배력을 통해 분간될 수 있다. 반면에 후자는 천하게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자기 형제를 받드는 종이 될지어다.”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의 풍모에는 어딘지 빈약하고 수상쩍은 데가 있으며, 이는 전자의 개방적이고 믿음직하고 관대한 태도와 대조를 이룬다.
돈을 빌려가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나 걱정 없고 침착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턱 아래로 불그레하게 살이 쳐져 있구나! 하늘의 뜻에 대한 아름다운 신임을 드러내는 그가 어쩌면 백합꽃만큼도 생각이 없을까! ★(마태복음 6:28.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 보아라…) 돈을 경멸하고 특히 그대의 돈과 내 돈을 쇠똥처럼 여기지 않는가! 학자들이 구분해서 가르치는 내 것(meum)과 네 것(tuum)이란 말을 마음대로 혼동해서 쓰는가 하면, 일찍이 투크가 증명한 것 이상으로 언어를 고귀하게 단순화 함으로써 그 두 가지 상반되는 것들을 섞어서 하나의 분명하고 알기 쉬운 ‘내 것’이라는 형용어를 만들어버리다니! 어쩌면 그토록 원시공동체에 근접하면서도 그 원리의 반만 지킬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우리의 지갑에 즐거운 표정의 온화한 자극을 가한다. 그러면 그 점잖은 따뜻함에 반응해서, 마치 태양과 바람이 나그네의 외투를 다투어 벗기려 했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그 비단 지갑은 펼쳐지게 된다. 그는 썰물을 모르는 진짜 프로폰티스 해★(마르모라 해. 흑해의 물은 이 간만의 차가 별로 없는 바다를 거쳐 지중해로 흘러 든다) 같아서 모든 사람의 손에서 듬뿍 돈을 취해갈 뿐이다. 그가 기꺼이 영예롭게 해주려는 그 희생자는 자기 운명을 상대로 싸우지만 헛될 뿐이다. 그는 그물에 걸려버린 것이다. 그러니, 빌려줄 운명에 처한 자여, 기꺼이 빌려주도록 하시라. 그래야만 현세의 돈 이외에 내세에 기약 된 보답까지 앓지 않으리라. 내가 위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내 옛 친구 랠프 비고드가 죽었기 때문이다. 수요일 저녁에 이 세상을 떠난 그는 일생을 그렇게 살았듯이 죽을 때도 별 고통을 겪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도 이 땅에서 귀족적 위엄을 지켜온 세도 당당한 비고드 가문의 후예임을 자랑했다. 젊은 시절에 그에게는 많은 수입이 있었다. 위대한 부류의 인간들에게는 돈에 대한 그 고귀한 무관심이 내재해 있음을 나는 눈여겨보곤 했거니와, 바로 그 무관심 때문에 그는 얼마 되지 않아 그 많은 돈을 탕진해버릴 짓들을 하고 말았다. 왕이 사사로이 지갑을 가진다는 생각에는 무언가 역겨운 데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비고드의 생각들은 온통 제왕다웠다. 그는 이렇게 자기 재산은 없애버리고 빌려서 쓸 준비를 한 채, 그리고 누군가가 노래한대로,
덕을 부추겨 찬양 받을 일을 하게 하지는 않고 오히려 덕을 느슨하게 해서 그 예리함을 무디게 하는★(밀턴의 복락원)
거추장스러운 재산을 없애버리고, 예전의 알렉산더처럼 “빌리고 또 빌리기 위한” 위대한 사업에 착수하지 않았던가!
그가 이 섬나라를 노닐다가 개선장군처럼 나돌아 다닐 때, 주민들 열 사람 중 한 사람 꼴로 그에게 돈을 빌려준 것으로 계산되고 있다.
그는 이따금 돈을 빌려 쓰며 신세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수가 많은데 대해 그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수를 자랑스럽게 세고 있었으며, 코머스처럼 그 많은 양떼를 거느리고 있어서 즐거운 듯했다.
나는 내 친구에게 한 가지 것은 인정해주어야겠다. 이따금 그가 바닷물처럼 내 귀중 본을 휩쓸어가지만, 어떤 때는 그 책에 비견될 만한 귀중 본을 바닷물처럼 던져놓고 가기도 한다. 나에게는 규모는 작으나 이런 성격의 보조 장서가 있다. 그것은 그 친구가 여러 곳을 찾아 다니며 모은 것인데 각각 어디서 집어 든 것인지를 잊어버린 채 내 집에 갖다 둔 후 역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책들이다. 나는 부모로부터 두 번이나 버림받은 이 고아 같은 책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 집에서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신세가 된 이 책들이 진정한 히브리 사람처럼 환대 받는다.
[엘리스턴의 망령에게]
[퀘이커교도들의 집회]
[진정한 천재의 정신적 건강]
[기혼자들의 행위에 대한 미혼자의 불평]
[먼 곳에 있는 친지에게]
-시드니의 뉴 사우스 웨일스에 거주하는 B.F 님에게 보낸 편지-
[섣달 그믐날 저녁]
[Review]
찰스 램(1775~ 1834) 은 영국의 수필가, 시인으로 ‘엘리아’라는 필명으로 월간지<런던 메거진>에 에세이들을 기고했는데 이것들을 모아, 1823년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엘리아의 수필>을 발표했다. 자전적 소재에 해학적 유머를 섞은 이 글들은 영국 산문문학의 모범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 책에 실린 27편의 글은 엘리아의 수필집에 실린 총 52편중 옮긴이가 선별하여 <굴뚝 청소부의 예찬>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것이다.
가정 형편이 그다지 부유하지 못했던 그는 전문 작가이기 이전에 회사원으로 30년 이상 보내며 틈틈이 글을 썼다. 본인 스스로 유전적인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으며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열 한 살 위 누이와 함께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다. 그러한 때문인지 글의 내용은 대부분 가난, 욕심, 연민을 떠올리는 어두운 내용으로, 약간 해학적이며 풍자적이라고 할 만큼 짓 굿은 표현이 많다. 이러한 내용들은 자신의 현실적 삶을 반영한 것이지만 한발 뒤로 물러서서 관조하는 형식으로 보고 비판을 가한다.
때로는 집요하다고 할 정도로 하고싶은 말을 다 풀어내는 것 같아서 독자의 몫이 없는 것 같지만, 그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에 새로운 소재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호스피톨 학교시절 추억에서 한 친구가 학교에서 학생들이 먹고 남긴 음식을 몰래 싸가지고 집으로 가서 부모를 부양하는 친구의 슬픈 이야기를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 어린 황새는 자기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감수하면서 그 동안 사뭇 그 늙은 새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던 것이다.”<35년 전 이야기>. 꾸어간 돈을 갚지 않고 뻔뻔한 자들을 재미있게 비꼬았다.“돈을 빌려가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나 걱정 없고 침착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턱 아래로 불그레하게 살이 쳐져 있구나! 하늘의 뜻에 대한 아름다운 신임을 드러내는 그가 어쩌면 백합꽃만큼도 생각이 없을까! ~~~그는 우리의 지갑에 즐거운 표정의 온화한 자극을 가한다. 그러면 그 점잖은 따뜻함에 반응해서, 마치 태양과 바람이 나그네의 외투를 다투어 벗기려 했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그 비단 지갑은 펼쳐지게 된다.” <두 부류의 인간>
누이의 정신 발작이 모친을 살해하게 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는 자신에게도 똑 같은 정신 발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좌절했다. 그리고 평생 누이와 함께 지내며 돌보아야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 무렵 약혼녀와의 파혼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세상의 눈을 피하며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용기를 잃지 않고 작품활동에 열중하다가. 1834년 산책 중에 입은 낙상으로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램’보다 열 한 살 위인 누이는 ‘램’이 죽은 지 10년 후에 세상을 떠났고 ‘에드먼턴의 올세인츠 교회묘역’에 나란히 묻혔다고 한다. ■
-본문-
“환자는 정치인들보다도 더 자주 편을 바꾼다. 그는 몸을 쭉 펴고 누웠다가 웅크리기도 하고, 비스듬히 누웠다가 가로누워 머리와 다리를 침대 옆으로 걸치기도 하지만, 누구 하나 그가 등 돌리는 일을 나무라지 않는다.”<회복기의 환자>
“나는 내가 소유한 시간이 한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나 대신에 시간이라는 재산을 관리해줄 집사라든지 영리한 마름이 필요했다.”<퇴직자>
“나는 대체로 이만하면 괜찮다 할 정도로 안락하게 생활하고 있으므로, 어느 성급한 왕의 자식이 그랬던 것처럼, 내 독신 신세를 한탄하기 위해 산으로 갈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포드셔의 매커리 엔드>
“나의 천성은 길거리에서 당하는 모욕, 이를테면, 사람들의 야유나 조소라든가, 어떤 신사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광경이나 스타킹에 진흙이 튄 것을 보고 교양 없는 인간들이 기고 만장해 하는 것을 보면 참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어린 굴뚝 청소부가 즐겁게 떠들고 있는 광경만은 용서하는 마음 이상과 아량으로 참을 수 있다.”<굴뚝 청소부 예찬>
“가난한 친척이 있다는 것은 그 성격상 극히 거북한 일이다. 그것은 반갑지 않은 관계요, 가까이 접하기가 역겨운 것이요, 양심에 거리끼는 존재요, 우리의 번영이 절정에 있을 때 엉뚱하게 드리워지는 기다란 그림자요, 잊고 싶은 옛일을 들추는가 하면 부단히 나타나서 괴롭히고, 우리의 주머니를 축내는가 하면 우리의 자존심을 견딜 수 없게 건드리고, 성공을 저해하며, 승진을 헐뜯고, 혈통을 더럽히는가 하면 가문의 불명예이기도 해서, 옷이 찢어진 흠집 같고, 잔칫상에 놓인 두개골 같다.”<가난한 친척들>
“가난뱅이가 다른 가난뱅이를 길거리에서 만나면 무례하게도 상대방은 가난하지만 자기는 그래도 조금은 낫다는 것을 들먹이면서 상대를 괄시하는데, 지나가던 부자들은 이 두 가난뱅이를 모두 조롱한다.”< 수도에서 거지들이 쇠퇴하는 데 대한 불평>
“돼지는 비판적인 미각을 가진 이들의 까다로움을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식욕을 자극하기도 한다. 힘에 센 사람은 그를 양껏 먹을 것이고, 약한 사람도 그 부드러운 육즙은 사양치 않는다.”<돼지구이를 논함>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음식이 다른 음식보다 더 맛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감사히 여길 수 있지만, 그런 감사는 상대적으로 야비하고 열등하다. 식전기도의 원래 목적은 맛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연명이고, 진미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이며, 시신을 배불리는 수단이 아니라 생명의 수단이다.”<식전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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