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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인생의 향기입니다. 용기입니다. 희망입니다. 빛입니다. 기쁨입니다. 보람입니다. 의미입니다. 가치입니다. 누군가는 “사랑하려면 믿으십시오. 믿음을 가지려면 사랑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기초 위에 사랑을 덮으라고 말씀합니다. 참된 사랑은 믿음을 기초로 하고,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믿음과 사랑은 같이 존재할 때 진정한 가치와 빛을 발합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통해 각종 환난과 시험을 참고 견디며 이겨낼 수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이길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노여움을 산 샤르니(Charney)는 토굴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갔습니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렀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던 친구들과 바깥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잊혀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깊은 고독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독방 벽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라고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토굴 바닥에 깔려 있던 돌들 틈에서 파란 새싹이 돋아났습니다. 벽 위에 뚫린 작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향해 뻗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간수가 매일 넣어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 파란 잎에 부어 주었습니다. 파랗던 새싹은 마침내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그의 마음에도 희망이라는 꽃을 피어났습니다. 전에 벽에 새겼던 글을 지우고 다시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라고 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갇혀 있던 독방 옆에는 또 한 사람의 죄수가 갇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면회가 허락된 어린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를 면회 왔던 소녀는 우연히 그가 갇혀 있던 방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운 나무를 보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사실을 전해들은 조세핀(Josephine) 왕비는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사람은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그를 풀어주라고 설득했습니다. 석방되던 날, 그는 꽃나무를 집으로 옮겨왔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소중하게 돌봐 주었습니다. 꽃나무를 보며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순간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외면하고 떠나 있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느낄 수 없다고 아우성을 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십니다.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사도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서 먼저 믿으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참된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게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갈5:6)라고 외쳤습니다. 사랑이 참된 믿음의 증거라고 외쳤습니다. 사랑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참된 믿음은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은 변함없이 기다립니다. 내면에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기다림과 믿음 없는 사랑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실체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믿음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사랑이 곧 믿음이고, 믿음이 곧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믿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돌보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만큼은 절대로 놓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눅7:6a)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실로 매우 짧은 문장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충만하게 함축되어 있습니다. 평행본문에 따르면, 예수께 나아온 백부장은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마8:6)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내가 가서 고쳐 주마.”(마8:7b)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원문에는 “내가”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을 고쳐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치유 사역은 주로 환자들이 직접 찾아오거나, 주님의 메시지를 전달받았을 때 나타나곤 했었습니다.
이번 경우처럼 예수께서 직접 환자를 찾아가신 경우는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특정 지역을 방문하여 고쳐주신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부탁을 받고 찾아가신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백부장은 헤롯의 용병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기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로마의 하수인이었습니다. 피지배자인 유대인들은 착취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을 편협하고 위험한 종교와 사상을 가진 피지배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멸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대로 그들을 경멸했습니다.
둘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상대적인 편견과 증오라는 벽이 놓여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심장을 감찰하고, 각 사람의 행실과 행동에 따라 보상해 주시는 주(主)”(렘17:10)이십니다. 나다나엘이 당신께 나아오기 전에 이미 그의 거짓이 없는 깨끗한 성품을 파악하시고 제자로 점찍어 놓으셨던 것처럼, 사랑과 섬김으로 대변될 수 있는 백부장이 가지고 있던 성품의 진면목까지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칭찬하실 정도로 충분히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감동하셨습니다. 그런 백부장이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당신 안에 충만한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이 보낸 장로들로부터 긴박하고 간절한 부탁을 받으셨을 때 냉정하게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조건을 요구하지도, 이유를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긴박하게 해결되어야할 문제라고 한다면 왜 좀 더 일찍 찾아오지 않았느냐?”라고 나무라지도 않으셨습니다. “유대인이 아닌데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압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백부장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외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유대의 장로들아! 너희들은 백부장에게서 받은 은혜와 사랑을 되갚아야 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를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야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셨던 것처럼, 즉시 그렇게 하시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백부장의 집을 향해 출발하셨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존재라고 멸시받던 이방인을 향한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두 민족 사이에 존재하는 편견과 증오의 벽을 허물어 버리려고 시도하셨습니다.
당신의 구원 사역이 유대 민족을 뛰어 넘어 세계 만민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구약 성경을 통해 반복해서 강조되었던 하나님의 세계주의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로서는 도무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높고 깊고 넓고 거룩하신 사랑과 무한한 자비와 경이로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정말로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던 종을 위하여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던, 그래서 낙심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백부장의 제한된 사랑에 당신의 불가능이 없는 사랑으로 화답해 주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사랑을 받으시고, 감당할 수 없는 사랑으로 갚아주셨습니다.
종에게 베푼 사랑을 마치 당신께서 받으신 것처럼 여겨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매사에 사랑을 행해야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지극히 작은 사랑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다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경은 또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눅7:6b-7a)라고 이어집니다. 이미 주님의 마음을 충분히 감동시킨 백부장은 예수께 “주여”라고 말합니다.
전체적인 문맥을 고려할 때, 이는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당신은 제 생각과 뜻과 목적과 비전을 얼마든지 마음대로 주관하실 수 있는 주인이십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어떻게 이방인의 입에서 이렇게 놀라운 신앙고백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그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당신 마음에 쏙 드는 그에게 선물로 주셨던 것일까요?
충분히 연구하고 다뤄야할 부분이기 때문에 일단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그는 주님을 자신의 주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 자신의 집을 향해 오고 계시다는 장로들의 말이 전해졌습니다. 순간, 그는 자신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니 압도되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합니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주님은 위엄과 권위와 사랑과 겸손한 인격을 완벽하게 갖추신 분이셨습니다. 인종과 민족과 계급과 문화의 장벽을 초월해 계신 분이셨습니다. 갈라져 있는 모든 간격에 화해의 다리를 놓아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그렇게 주장하시거나 행동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지만, 오히려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 가셨지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님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분인지에 대해서 너무 쉽게 간과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누구나 쉽게 범접(犯接)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가 순종해야할 절대 권위의 주인이셨습니다. 자신은 그런 주님과는 도무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의 그는, 어떻게 해서든 죽어가고 있던 사랑하는 종을 고쳐야한다는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앞뒤를 가릴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장로들에게 주님이 무조건 자신의 집을 방문하실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신이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할 수밖에 없는 절대 권위자에게 오라 가라했습니다. 너무 다급한 나머지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주님은 유대인이시고 자신은 이방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도무지 마음이 불편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죄송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급기야 본의 아니게 주님을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더 이상 주님이 오실 때까지 편히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주님을 맞으러 나가 모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그의 생각은 또 다시 바뀝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생각대로 절대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고 한다면, 굳이 자신의 집을 방문하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감히 만나러 나가는 것까지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15:18b-19a)라고 고백했습니다. 세리는 성전에 들어가거나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가슴을 치며 “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눅18:13b)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들의 고백과 기도에는 하나같이 회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부장의 고백 역시 회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있었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자신같이 미약한 존재가 감히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주님에 대한 경외에 사로잡혔습니다. 저는 이런 백부장의 마음을 100%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 25년 동안의 목회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교구장의 심방을 받기 위해 백부장과 같은 마음으로 준비합니다. 심지어 부들부들 떨며 교구장의 심방을 받기도합니다. 특히 저는 50대 후반의 권사와 60대 후반의 안수집사 부부가 20대 후반의 새파랗게 젊은 초짜 교구장의 심방을 무릎 꿇고 받았던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안수집사는 광주 지역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초등학교의 교장이었습니다. 유명대학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자녀들은 하나같이 성공적으로 사업을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 있어서 저는 막내아들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초도 심방을 위해 방문한 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극구 사양하는 제게 “저는 전도사님이 아니라, 전도사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 앞에 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반드시 이러한 자세를 갖추어야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어야합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릴 수 있어야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귀중한 보배다.”(사33:6b)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믿음의 고백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7:7b-8)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말씀만 하사”를 직역하면 “한 마디 말씀만 하시면”입니다.
그는 이미 군대 생활을 통해 상관의 말 한 마디에 담긴 권위가 어떤 것인지 충분히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백 명의 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습니다. 굳이 그가 움직이지 않아도 명령만 내리면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졌습니다. 휘하 군사들은 지극히 제한된 권위를 가지고 있고, 자신 역시 상관들에게 복종해야할 의무가 있는 백부장이 언제, 어디서, 어떤 명령을 내리든 전혀 개의치 않고 즉시 복종했습니다. 그가 원하는 바를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알고 있는 한 예수께서는 감히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자적인 권위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누구도 명령할 수 없는, 어느 누구의 명령에도 복종할 필요가 없는 절대 권위의 주인이셨습니다. 원하시는 모든 것을 명령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죽어 장사지내러 나가고 있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말씀 한 마디로 살리셨습니다. 각종 질병들과 귀신들은 물론 거세게 몰아치던 바람과 파도까지도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 한 마디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일들은 지체 없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주님이 오라고 하시면 오고, 가라고 하시면 갔습니다.
서라고 하시면 섰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그런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께서 권위 있는 말씀 한 마디로 자신이 사랑하는 종을 붙잡고 있는 병을 향해 떠나가라고 명령만 해주시면 즉시 떠나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라고 명령하시면 건강이 오고, 종의 몸을 향해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시면 그대로 복종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권위 있는 주님의 말씀 한 마디가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과는 다르게, 만물이 듣고 즉시 복종하는 권위 있는 말씀 한 마디만 해 주시면 충분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눅7:9-10)라고 마무리 됩니다. 백부장의 사랑과 믿음은 예수께서 기이히 여기시며 칭찬하실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랑하는 종을 병으로부터 구원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사랑과 믿음이 종을 병으로부터 구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믿음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의 사랑과 믿음도 그랬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완전하지 않은, 불가항력적인 한계를 가진 그의 사랑과 믿음을 기뻐해 주셨습니다. 축복해 주셨습니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마8:13)라고, 그가 간절히 원하던 권위 있는 말씀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던 종을 즉시, 완전하게 고쳐주셨습니다.
당신이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드러내셨습니다. 당신의 사역이 유대인 중심에서 벗어나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당신이 병들어 사경을 헤매고 있던 백부장의 종을 치료해 주신 이유가 영혼들을 향한 한없는 사랑과 긍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백부장의 사랑과 믿음이 크고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불렀던 것입니다. 육신을 파괴하고, 심령을 파괴하고, 영혼까지 파괴하는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주님의 사랑을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랑하십니까? 그는 일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인격적으로나 능력 면에서도 존경받는 학자였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였습니다. 동시에 영향력 있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속된 말로 그야말로 잘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 모든 것들을 접었습니다. 정신 장애를 가진 이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공동체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아담이라는 한 형제를 깨우고, 씻기고, 옷을 입히고, 먹였습니다. 한 순간도 빠짐없이 언제나 붙어 다니며 수족처럼 그를 섬겼습니다. 평생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를 아끼던 옛 동료들은, 그런 그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당신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 당신은 대학에서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가르치고, 좋은 책도 쓰고, 더 많은 돈으로 어려운 이들을 도울 수 있지 않느냐? 당신이 가진 훌륭한 재능을 전적으로 그런 정신 지체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은 비생산적인 낭비가 아니냐? 당신의 재능을 좀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랬습니다.
그때, 헨리 나우엔(Henri Nouwen)은 “사랑은 낭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낭비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는 지나친 낭비였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본질적으로 죽어 마땅한, 가치도 의미도 없는 우리를 위하여 아들을 주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낭비를 하셨습니다. 죄 곧 나, 나 곧 죄인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 주셨습니다.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영원한 죽음과 저주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 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22:37-40)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의지 전체를 다 동원하여, 생명을 걸고, 분명한 이해와 통찰력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전 인격을 다하여, 존재의 전 기능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말고 전 생애를 다 투자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때로 사랑은 엄청난 희생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동시에 반드시 답을 부릅니다. 치유를 일으킵니다.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만듭니다. 회복시킵니다. 무엇보다 지극히 작은 우리의 사랑이 형용 자체가 불가능한 크고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부릅니다. 그런데 주님이 곧 사랑이요, 사랑이 곧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문제들을 완벽하게 해결하실 수 있는 능력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십니다. 죽은 사람까지도 살리십니다.
무엇이 되었든 예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오라고 하시면 오고, 서라고 하시면 섭니다. 떠나가라고 하시면 떠나갑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주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해결하실 수 없는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사랑만큼은 포기하지 마십시오. 죽을 때까지 사랑하십시오. 원수까지 사랑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회복시켜 주실 뿐 아니라, 모든 문제를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까지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