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해 평야 벼들은 구포 국수가 키웠다] ‘밤 한 시나 두 시가 되면 일꾼 우두머리가 석유 등잔을 켜고 돌아가며 깨웠다. 일방에서 불을 지필 동안 다른 사람들은 창고에서 밀가루 포대를 져내고 반죽을 하였다. 솥 물이 끓어오를 무렵이 되면 손기계를 돌려야 하는데, 그 손기계 돌리는 것이 내 몫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덜그럭덜그럭 돌림에 따라 반죽이 된 밀가루 덩이가 납작하게 정리가 되어 삐져나오고 그렇게 나오는 것이 둘둘 말아지고 하는 것이 여간 재미나는 것이 아니었으나 허구한 날 열 시간 남짓을 그러고 있자니 고역치고는 된 고역이고 부도 노동쯤은 문제도 안 되었다. 자연 뒷간으로 자주 가고 가서도 오래 앉는 버릇이 붙었다. 새벽 서너 시가 되면 벌써 허기가 졌다. 그럴 즈음이면 솥에서 국수 오라기가 끓고 김이 오르고 일판도 무르익기 시작한다. 일꾼 우두머리가 밥공기로 국수를 한줌씩 끊어서 상자에 차곡차곡 담는다. 날이 완전히 새고 건너편 집 점포 문이 열릴 즈음이 되면 자전거 꽁무니에 산처럼 실은 국수 상자가 내달린다. 이런 일이 두 시쯤까지 계속된다. 세 시쯤까지 다음 날 일의 단도리 같은 잡일이 있고, 다섯 시쯤이면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이호철의 소설 『소시민』 중에서) 원료 면에서는 해방 이후 일본인들의 제분 공장이 대거 철수하고 남한에 4개의 공장만 남게 되었고 그마저도 6·25 전쟁으로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된다. 그러나 낙동강 동쪽의 구포에 자리 잡은 영남제분 등은 건재했다. 그리고 1956년 미국의 PL480호에 따른 원소 소맥이 11만 4,000톤이나 무상으로 들어오고, 1960년대 중반 쌀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원조 밀가루를 이용한 분식 장려 운동에 힘입어 국수는 또 한 번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1960년대~1970년대까지 구포 시장은 공장에서 국수를 받아 부산 전역으로 팔러 나가는 아주머니들로 가득했다. 뿐만 아니라 구포 국수는 상행 열차를 타고 밀양·청도 등으로, 여름철이면 모내기로 숨 돌릴 틈 없는 김해와 인근 대동 땅 농사꾼들의 새참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옛날에는 대동, 김해, 삼랑진, 청도 사람들이 구포장에 와서 채소와 과일을 팔고 국수를 사가지고 갔어요. 그 당시에는 김해·대동 쪽에도 많이 나갔어요. 결혼식 할 때도 답례품으로 국수를 줬어요. 생각해 보니 국수가 물 건너 제주도까지 건너갔네요. 그리고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박통 시절에 청와대가 한철 먹을 국수를 구포에서 사갔다고 해요. 대저에는 4~5월 달에 한창 많이 나갔어요. 논 주인들이 국수를 새참으로 내갔거든요. 이때는 아주 굵은 중면을 많이 사갔어요. 퍼지지 말라고. 배달 간다고 구포 다리 건너가면 계란 장수들이 기다리다 국수를 받아가요. 이 사람들이 경상도 일대를 돌며 국수를 판 거죠. 계란은 국수 고명이고 옛날에는 라면 양을 늘리려고 국수도 같이 넣어 먹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어쨌든 이때가 참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구포연합식품 대표 곽조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