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나뭇가지의 법法 외 4편
김다솜
완두콩만한 푸른 눈동자가
굵어진다며 알 솎기 부탁을 받았다
매달린 송이들 중에서 두 송이만 남기란다
그리고 보랏빛 구슬들 중에서 큰 것 떼어내고
작은 것도 떼어내라며 부탁, 부탁을 한다
그게 알 솎기의 법法, 어느 로스쿨이며 법대에서
배운 형법이며 민법, 수사법, 은유법인지 몰라도
그 법에서 절대 벗어나면 안 된단다
고만고만한 것들 중에서 어느 것을 보내고, 남겨야 하는지
어떤 것이든 솎아 내야 하는 포도송이 앞에서
쪽가위를 들고 요리조리 곁눈질해 본다
비정규직, 명퇴, 실직의 쪽가위가 생각이 났다
잘리기 싫어도 잘리고 나면 바닥이지만
바닥에서 다시 뿌리 내리고 꽃을 피우고……
밤이슬 먹은 도토리가 바닥으로 떨어질 때
저 멀리 언덕에서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듣는
그들도 법, 법의 하루를 보내다 잠든 사람들처럼
주머니 없는 수의를 입은 채, 박스에서
박스로 달콤한 여정을 떠나리라.
거짓 없는 진실
빗살무늬토기가 태어났다
백일잔치를 하고 돌잔치도 했었다
레고 상자 속에서 레고놀이 하다가
또 다른 상자 속으로 맞벌이 하러 간다
공룡보고 일어나 공룡보고 잠드는 공룡 새끼들은
핑크퐁, 번개맨, 헬로카봇, 터닝 메카드를 보다가
도깨비 방망이 나오는 동화와 고래상어도 본다
온달장군하고 평강공주 사랑을 듣다가 잠든다
공룡들은 역사적 진실을 배우면서 꿈을 꾼다
나비야, 나비야, 어느 날 고려청자가 태어났다
독자적인 사랑을 받던 빗살무늬토기는
고려청자 항아리를 보고 시샘을 하기도 했다
노을 지면 엄마 오길 기다리면서, 할머니 좋아
외할머니 좋아, 좋다고 하다가 비밀번호 삐삐소리 나면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현관으로 달 려 간 다
빗살무늬와 고려청자가 영원히 빛나듯이
어느 그릇이든 모두 소중한 그릇 아닌 가
삶의 무거운 봇짐을 안고 들고 걷고 뛰는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들 마음속에는
정성을 담아주는 그릇그릇을 간직하리라.
호모 사피엔스의 잠
살포시 기억을 찾는 눈썹과 눈꺼풀이
깨어 보니 어제는 버스와 기차의 빈자리였고
오늘은 깨어보니 거실과 안방을 오가고 있었지
내일은 어쩌면 유람선, 비행기 좌석일 수도 있고
또 깨어 보니 쓰레기 가득한 창고 같기도 하네
깨어 보니 허공 침대에서 잠 잘 줄이야
스르륵 현실을 찾아오고 가다가
음악 감상이며 오락하다 잠들기도 했고
저 멀리 바다와 산, 강 바라보다 코골이를 했지
문득 깨어 보니 인연 잘못 맺어 감옥살이 하고 있네
순간 실수로 무덤에서 잠꼬대하면서 후회도 하네
허공 침대 찾아다니는 잠꼬대의 생
추억을 찾는 눈꺼풀과 눈썹은
시냇가에서 금돌은돌 찾아 서로 주고받았고
잠자리와 나비 잡으려고 뒤꿈치 들기도 했었지
소나무 아래 핀 맥문동, 구절초와 숨바꼭질도 했었고
그대와 나, 잠에서 깨어 보니 지금, 여기에서
허공 침대 누웠다 앉았다 일어났다 다시
2424에 실은 민속품
창고에서 창고로 운반하는
은하철도 구구 사다리차가 올라 간다
수 천 세대 있어도 내 집은 없고 그 집에 산다
조금만 빨리 여기로 왔더라면 부동산투기 했을까
융자 받아 전세 놓고 불꽃놀이 하면 금가루가 우수수
그 금가루로 여기저기 후원도 팍팍하게 하고
그곳은 어두운 우물가 이곳은 빛나는 별천지
젊은 나이 금덩어리 주고 살 수도 없고
지금부터 사놓으면 5년 후, 얼마나 뻥 튀기 될까
몇 채 씩 사놓고 월세 받아 노후 대책하는
그 집하고 저 집은 세상은 요지경~요지경 세상
민속촌 떠날 때는 문서 몇 장을 가지고 갈까
내린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늘 오르고 오른다
놀이터에서 만나 젊은 아내들 집 값 내리길 기도를 한다
내려가길 기다릴수록 올라가는 낙엽은 바람에 날아가고
녹슨 계단 분양 후 떠나지 못하는 터줏대감도 있다
비밀번호 있는 무덤 찾아 올라갔다 내려갔다가
그래도 운 좋은 물건들은 민속품 경매장에서
누군가의 지갑을 슬쩍 훔쳐보고 있으리라
비 오나 눈 오나 창고에서 창고로 운반하는
은하철도 구구 사다리차를 바라본다
신비스런 부동산아파트에서
천금채
잊고 지냈던 첫사랑을 만나듯
나는 너를 초안산 텃밭에서 만났지
달팽이와 지렁이, 굼뱅이가 너를 키웠지
이팝나무 꽃들이 눈보라처럼 날리는 봄,
그 봄이 지나니 둥지를 찾는 나비도 왔었지
하늘이 준 최고의 채소, 상추의 또 다른 이름
누군가 락투세린과 락투신이 있어 스트레스에 좋다고 했지
해등마을에서 효도 받느라 바쁜 날들 속에서
매일 매일 상추 너를 사랑하게 될 줄을 몰랐어
초안산 언덕 소나무향기와 하늬바람, 그리고
이슬 먹고 자란 너는 어쩜 만병통치약 같아
우울하고 속상한 불면증을 잠들게 해주는 너
소소한 염증이랑 독소를 해독해준다는 너를
만날 수 있게 또 당첨 되었으면 좋겠어
아마 지금까지 먹어 본 천금채 중에서는
새들이며 곤충들하고 자란 네가 최고!
나눔텃밭에서 만난 천금채 너를, 너를
나는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