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1835년 청도군 매전면 북지리에서 발견된 송은 선생의 진영(眞影)
북지리의 포은(圃隱)과 송은(松隱) 후손
고려말(高麗末) 공민왕조(恭愍王朝, 1330~1374)에는 성리학(性理學)을 바탕으로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의 폐단을 억제하고 불교 배척(佛敎排斥)의 기운을 조성하여 새로운 정치개혁(政治改革)을 시도하면서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들이 중앙정치에 등장하며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왜구(倭寇)와 홍건적(紅巾賊)의 토벌에 참여하면서부터 개혁을 꿈꾸는 많은 젊은 인재들이 있었다.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정치적 반대세력을 축출하고 정권(政權)과 군권(軍權)을 장악한 이성계는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을 신 씨(辛氏)로 몰아 내쫓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였다. 그리고 사전개혁(私田改革)을 단행하여 경제적인 실권까지 포함 전권(全權)을 장악한 후 고려를 타도하고 새로운 이씨왕조(李氏王朝) 건설에 착수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성계와 함께 정치개혁에 뜻을 같이해 온 신진사대부 중에 새 왕조의 건설에는 단호히 반대하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세력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유력한 사람으로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선생과 송은 박익(松隱 朴翊) 선생이 있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선생은 경북 영일인(迎日人) 이다. 영천군(永川郡) 동우항리(東愚巷里)에서 출생하여 삼장(三場)에 연달아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벼슬이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과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으며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지나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성절사(聖節使)로 명(明)과의 국교회복(國交回復)에 공헌(貢獻)하였고 유학(儒學)을 진흥(振興)하며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나 동방 이학지조(東方 理學之祖)로 추앙(推仰)받는 인물이다.
송은(松隱) 박익(朴翊. 1332-1398) 선생은 경남 밀주인(密陽人) 이다. 경남 밀양군(密陽郡) 송계리(松溪里, 현 부북면 제대리)에서 출생하여 공민왕(恭愍王) 때 등제(登第)하고 벼슬이 동경판관 겸 권농방어사(東京判官兼勸農防禦使), 사재소감(司宰少監), 예부시랑(禮部侍郞),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오른 인물이다. 왜구(倭寇)와 여진(女眞)을 토벌한 공적이 있다.
이 두 분은 모두 고려 충신 팔은(八隱) 가운데 한 사람이며 연령의 차이가 있음에도 학문과 사상을 같이하는 벗으로 조정(朝廷)과 전장(戰場)에서 오랜 우정을 나눈 사이이다. 박익 선생이 예조판서를 지내기 전에 고향인 밀양 땅 송계(松溪) 마을에 은둔(隱遁)해 있을 때 정몽주 선생이 찾아온 적이 있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염려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나누었다.
贈 圃隱 포은에게 드림
來訪松溪隱士家 송계의 은사 집을 찾아오시나
夕陽門掩落花多 문은 닫혀있고 꽃은 지는데
樽前問我幽閑意 그윽한 내 심정 물어보는가
簾外靑山半面斜 발 밖으로 청산이 반쯤 보이네
附次 圃隱 포은이 화답하다
東風歇馬問山家 봄바람에 말 멈추고 산 집 물을 제,
花落鳥啼夕照多 꽃 지고 새 울고 석양 빗겻네.
吾友平生同契厚 평생을 같이 사귄 정든 벗이라.
淸談不覺月西斜 이야기하다 달 지는 걸 미쳐 몰랐네.
정몽주 선생은 끝내 이씨왕조(李氏王朝) 건국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다가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李芳遠)의 가솔(家率) 조영규(趙英珪) 등에 의해 참살(慘殺)당하고, 박익 선생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밀주(現 密陽) 송계(松溪)로 낙향(落鄕)하여 문을 닫아걸고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였다(杜門不出).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가 다섯 번이나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끝까지 나아가지 않았으며(五徵不就) 죽을 때까지 고려에 대한 충절(忠節)을 지켰다.
그런데 이 일이 있고 난 뒤 400여 년 훨씬 지난 후 우리 고장 청도군 매전면 북지리에서 두 가문(家門)의 후손(後孫)들이 함께 산 기록이 있다.
송은집(松隱集) 및 송은선생문집(松隱先生文集) 개요에 의하면, 1835년(憲宗 1년)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북지(淸道郡 梅田面 北旨)에 사는 후손 박이홍(朴履洪)의 집, 불탄 잿더미 속에서 송은 선생의 진영(眞影)과 교지(敎旨), 시첩(詩帖), 비표(碑表) 등의 유품이 발견되어 이제까지 미궁에 쌓였던 송은 선생의 면모(面貌)를 찾아 1837년에야 후손들이 이를 모아 송은 선생 문집이 발간됨과 아울러 사림(士林)들의 발의에 따라 입향(入享)할 서원(書院)이 조성(造成)되고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게 되었다.
북지리(北旨里)의 영일(烏川)정씨 입향조(入鄕祖)인 경모 정원교 공(敬慕 鄭元僑公)은 포은 정몽주 선생의 12세손이며 설곡 정보 공(雪谷 鄭保公)의 3남 윤관 공(允寬公)의 후예로 300여 년 전 이곳에 자리 잡았다. 정원교 공은 애초에는 설곡 공의 배소(配所)인 단성 문태촌(丹城 文泰村)을 떠나지 않다가 일부 후손들이 합천, 청송, 또 일부는 경주 기계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가문의 온갖 풍파를 겪어 가며 살아오다가 이곳 북지리에 들려 산세와 지세가 좋음을 알고 전거(奠居) 하였다고 전한다.
북지리에는 영일정씨 30여 호가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박익 선생의 후손인 밀성박씨(松隱公派)는 한 집도 살지 않으나 지금으로부터 170여 년 전후(前後)에는 두 가문이 한 마을을 이루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송은 선생의 후손인 박이행이 어떤 연유로 북지리에 살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고 선대(先代)의 우의(友誼)가 후대(後代)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져 예사롭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