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242편
*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및
선시(禪詩)
오도송(悟道頌)이란 무엇인가 ?
불교(佛敎)를
공부(功夫)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가운데(中) 하나를
오도송(悟道頌)
이라고 한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頌)은
게송(偈頌)의 하나로써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고승(高僧)이
자신만의 깨달음(覺)을
노래(歌, 句)한 것이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며
고승(高僧)이
자신의 임종(臨終)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歌, 句)를
열반송(涅槃頌)이라고
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가르침(敎義)을
함축(含縮 집약)하여
표현(表現)하는
운문체(韻文體)의
짧은 시구(詩句 문자)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 내지
또는 선어(禪語 문장)를
이르는 말이다.
본래(本來)
게(偈)와 송(頌)은
같은 의미로
《게(偈)》
라는 글자(字)는
산스크리트어(梵語)
《가타(gatha)》의
음을 빌려와(音借) 따서
만든 말이고
《송(頌)》
이라는 글자(字)는
《가타(gatha)》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깨달음(正等覺)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게송(偈頌)
즉,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頌)은
오랫동안
수련과정(修練過程)을
통해 함축된 의미로
세속(사바세계)의
사람(大衆)들에게
무엇인가를 전(傳)하고
말(說法 이야기)하고저
하는 것이며
후세(후학)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歷史的)
문헌 기록상(文獻記錄上)
오도송(悟道頌)을
가장 먼저 남긴 이(僧侶)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禪師)
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구분이 부질없는 일임에야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헤어짐은 슬퍼한다.
오랜 세월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선사(禪師) 스님들의
깨달음의 길(佛道行)이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지난(至難)하듯이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頌)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깨달음의 노래는
다시 한번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여기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頌)을
올려놓으니
행간(行間)의
곳곳(處處)에 숨겨져 있는
깊고 깊은 심오(深奧)한 뜻을
함께 발견(發見)하고
공부(功夫)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를
찾아보시기 바램해 본다.
본론(本論)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 祖師)
선시(禪詩)와
임종게(臨終偈) 및
오도송(悟道頌) 설해(說解)
"
임종게(臨終偈)
석창 법공(石窓法恭) 선사
當陽一句 당양일구
更無回互 편무회호
月落寒潭 월낙한택
烟迷古渡 연미고도
햇살같이 뚜렷한 이 한 마디에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다네
달은 차가운 연못에 떨어지고
옛 나루터는 안개 속 가리워진다
"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를
지은 사람(作者)은
석창 법공(石窓法恭)
선사 스님(僧 沙門)이다.
당(唐) 나라의
승려(僧侶 사문)로서
석법공(石窓 法恭) 선사는
수(隋) 나라 말엽
안문(雁門) 휘하(彙下)의
낭장(朗將)이었다.
그는(석창 법공)
가정(家庭)을 버리고
청량산(淸凉山)
깊은 골짜기에 이르러
“
오직 마음이 부처를 만든다.
”
라고 하는
『화엄경(華嚴經)』
게송을 항상 염송(念頌)하였다.
그러다 후(後日)에
기이한 스님(奇僧)을 만나
반야(槃若智)의
현묘한 종지(賢妙宗旨)를
전수(傳受)받고
활연히 마음이 공(空)해졌고
임종(臨終) 때도
앉아서(坐佛) 서거(입적)
하였다.
당(唐) 나라의
승가미다라(僧伽彌多羅)는
사자국(師子國) 사람이다.
제3과(第三果)를
얻어서 증득(增得)하고
인덕(麟德) 초(664)에
진단(震旦)으로 오게되자
고종(高宗)이
극진히 받들어 공경(恭敬)하고
예(禮)를 갖췄다.
뒤에
문수보살(文殊菩薩)을
공경(恭敬)하고
예배(禮拜)하고자
청량산으로 찾아갔고
이로 인해
서태원사(西太原寺)에
이르게 되었다.
※
문수보살(文殊菩薩)은
문수(文殊)
문수사리(文殊師利)
또는 문수시리(文殊尸利)의
준말이고
문수사리는
범어(梵語)로는
만주슈리(Manjushri)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만주》는
달다(甘), 묘하다,
훌륭하다는 뜻이고
《슈리》는
복덕(福德)이 많다
길상(吉祥)하다는
뜻이다.
합하여
《훌륭한 복덕을 지녔다》
라는 명칭이 된다.
※
당시
그 곳 스님들이
모두 『화엄경(華嚴經)』을
염송(念頌)하자
스님(석창 법공)이 물었다.
“ 그건 무슨 경(經典)입니까 ? ”
“『화엄경』입니다.”
스님(석창 법공)은
숙연히 태도를 고치고
말하였다.
“
이 땅에도
이 경(華嚴經)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
오래도록
합장(合掌) 찬탄하고는
말하였다.
“
이러한
대방광불(大方光佛)의
공덕(供德 복덕)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저 서쪽 나라에서는
"
이 경(화엄경)을
읽은 사람이 손을 물로 씻고
그 물(水)을 벌레나
개미에게 흩뿌리면
그 것들 가운데
목숨(生命)을 버리는 것들이
모두 천상(天上 극락정토)에
태어난다.
"
전해 오고 있습니다.
하물며
수지 독송(受持讀頌)하고
정진(修行精進)하며
사유(思惟)하는
자(修行精進者)들이야
어떻겠습니까.
”
이렇듯
석창 법공(石窓法恭
1102~1181) 선사는
총림(叢林)을
두루 참방(參房)하고
오랫동안
황룡 법충(黃龍法忠
1084~1149) 선사에게
의지(依支)하다가
뒷 날(後日)
굉지 정각(宏智正覺) 스님에게
귀의(歸依)하였다.
법공(石窓法恭) 스님은
월주(越州)
보은사(報恩寺)의 주지가 되어
세상에 나갔다가
뒤에
서암사(瑞巖寺)로 옮겨와서
스님(石窓法恭)의 도(佛道)를
크게 펼쳤다.
스님(석창 법공)은
괴로움(苦難)을 이겨가며
학인(學人)을 가르쳤고
베옷과 나물밥으로
추위와 더위를 견디면서
작고 큰 일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몸소 실천행하여
총림(叢林)의 질서(秩序)를
갖추시니
납승(納僧)들은
그(법공)의 덕망(德望)을 우러러
마음 깊이 굴복하였다.
예전에
철백두(徹白頭, 예당사철,
了堂思徹)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삼구(三衢)사람이며
법공(石窓法恭) 스님과 함께
굉지(굉지 정각)스님 문하로서
절개있고 결백하여
세속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徹白頭, 예당사철)가
한번은
태백사(太白寺)를
찾아갔는데
묘희(妙喜 종고) 스님은
그(徹白頭, 예당사철)를 보고
매우 준수한 인물(人)이라 하여
마음 속으로 기뻐한 나머지
꾀를 써서
옥궤산(玉山)을 지나도록
유도하였지만
그(철백두, 了堂思徹)는
자기 소신(所信)을 바꾸지 않고
마침내
천동사(天童寺, 천동정각)
노스님에게 귀의하였다.
건도(乾道,
1165~1173) 연간 초에
법공(石窓法恭) 스님이
철백두(了堂思徹) 스님을
자기의 제자(弟子)로 생각하여
몸소
명주(明州)
보은사(報恩寺)의 주지에서
물러나면서
그(철백두, 了堂思徹)에게
넘겨주었다.
주지된 지 2년만에
사방의 훌륭한 스님들이
모두 귀의하였으나
그(철백두,了堂思徹)는
끝까지
굉지(宏智正覺,
1091~115) 스님의
법통(法統)을 이었다.
이 때문에
법공(石窓法恭) 스님은
그(徹白頭, 了堂思徹)를
불쾌하게 생각하였지만
철백두(徹白頭,
예당사철, 了堂思徹) 스님도
또한 이를 개의치 않았다.
그 후
무주(?州)
화장사(華藏寺)의 주지로
자리를 옮겨가게
되었으나
길을 떠나려는 즈음에
입적(入寂 열반 해탈)하였다.
※
ㅡㅡㅡㅡㅡㅡㅡㅡ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분명하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후배(先後輩)
제현(諸賢)님들 께서는
언제든지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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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