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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호 목사
요즈음 우리의 성도들 가운데 죽음을 앞에 둔 가족들을 대하면서 큰 충격 가운데 있는 분들이 몇분 있다. 죽음은 우리가 잊고 살고 있기 때문에 별로 우리에게 두려움도 충격도 주지 않지만 막상 직면하게 되면 우리가 감당키 어려운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아무리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고자 해도 죽음은 우리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무서운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죽음의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 직면해서 해결해야한다.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대면해서 해결할 것인가? 본문에서 우리는 그 지혜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1. 사람의 생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1-2).
a. 죽음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9:1).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 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9:1)
이 말씀의 의미는 의인과 지혜자의 행한 일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에 그의 살고 죽는 것도 그의 손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미래가 행복한 삶이 될지 불행한 삶이 될지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운명론적인 말은 아니다.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점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불확실함 때문에 낙심할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감추어둔 불확실한 미래를 억지로 알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이 너무 많아서 심지어 기독교인 점쟁이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다.
b. 선인과 죄인이 일반이다(9:2)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알반이로다”(9:2)
이 말씀은 선인이나 죄인이나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일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그 최후가 지배당한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영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동일한 결국을 맞이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은 정직하게 '죽음이란 최후의 적'(고전 15:26)을 직면해서,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결정해야한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왔다면 그러한 최후의 적을 물리칠 것이다. 로마서 6:23, 요11:25,26, 살전 4:13-18, 고전 15:51-58을 참조하라. 불신앙인은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죽음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않다.
c. 그러므로 죽음을 회피하지 말고 정직하게 대면해야한다(9: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9:3)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죽음에 직면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결국 죄악의 낙을 누리다가 비참한 죽음에 지배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들은 죽음의 고통과 비극을 피하기 위하여 술마시고, 싸우고, 난폭한 운전을 하고, 필요 없는 돈을 허비하고 향락에 빠져 들어간다. 그러나 그런 것은 죽음을 이기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결코 피하여 가지 않기 때문이다.
조셉 베일리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위대한 탐험이다. 그에 비하면 달 착륙이나 우주 여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인간의 위대한 연구의 업적도 죽음의 대해 탐험하고 죽음을 정복하는 것 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죽음이라는 실제로부터 도피할 때는 이런 확신이 생겨날 수 없다. "최후의 적을 정직하게 마주 함으로써, 죄로부터 정직하게 돌아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함으로써 이러한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확신이 생기는 것이다.
2. 이 땅에서의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한다(3-10).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실제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삶이라는 실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a. 삶의 가치를 최대화 해야한다(9:4-6).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돠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9:4-6)
이 부분 말씀은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올바로 살아볼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산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낫다" 함은(4절 하반), 더러운 개와 같이 아무리 죄 많은 인간도 아직 살아 있는 동안은 회개할 기회가 있고 바로 될 소망이 있지만, 사자 같은 영웅도 일단 죽은 다음에는 회개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산자의 소망이란 무엇인가? 회개할 수 있고, 영원을 위해서 준비할 수 있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일 할 수 있다. 아직 낮이니 우리가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많은 사람에게 전도할 수 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영원히 누릴 상급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주님을 기쁘시게 한 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살아 있을 때 이런 일을 하지 못하고 죽음이 오게 되면 그 인생은 어떻겠는가?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돠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이와 같은 의미는 5절이 잘 밝혀준다. 곧, 산 자는 죽을 줄을 알기 때문에 경성하여 새로운 각오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와 반면에 죽은 자는 상급을 바라보고 행동할 만한 깨달음도 없다.
죽을 줄을 안다는 것은 이 땅에 남아 있을 일이 얼마남지 않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살게 될뿐 아니라,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죽음은 곧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벧전 1:3-5, 딤후 1:10을 참조하라. 죽음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는 희망은 잘못된 희망이며, 폐기되어야한다.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삶을 준비하기 위한 희망이다. 아직은 나는 죽어서는 안된다. 아직 남아 있는 이 삶이 너무나 귀하다는 삶의 가치를 느끼는 자는 얼마나 희망찬 인생을 사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참으로 어떤 어려움도 견디어 내고자 하는 자세가 되어 있다.
산자는 상을 바라고 산다. 영원한 분복을 기대하며 산다. 그러나 죽은 자는 그런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살아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삶을 귀하게 여기는 인생이 되자. 이것은 영생이 있다는 소망에서만 이런 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b.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즐겨야한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찌니라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죽음은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리도록 좋은 선물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누려야하는 것이다.
기쁨으로 식물을 섭취하며, 포도주를 마시며, 옷을 깨끗이 하며,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 단정하게 하고, 또한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라고 한다. 즐거운 식생활(7), 즐거운 가족간의 나눔(8), 충실하고 사랑이 가득한 결혼 생활(9), 최선의 노동(10)이 그것이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행복의 양식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현대 사회는 페스트푸드, 바쁜 스케줄, 새로운 모든 것에 대한 중독적 집착, 동거 생활, 노동없이 부자가되는 지름길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다.
c. 음식을 즐긴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9:7)
음식의 맛은 음식의 질이 아니라 가족 간의 사랑이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 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 17). '마른 떡 한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사랑은 보통의 음식도 진수 성찬으로 바꾸어 놓는다.
d. 모든 경우를 즐김(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찌니라"(9:8)
유대인들은 특별한 날에 기쁨을 상징하는 흰 예복을 입고, 올리브 기름 대신에 비싼 향유를 뿌렸다. 그러므로 흰 옷을 입고 향유를 뿌리라는 말은 항상 특별한 날처럼 기쁘게 보내라는 것이다. 빌립보 4:4
e.결혼 생활을 즐김(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9:9)
아내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결혼을 전 인생에 걸쳐 지속되는 사랑의 약속으로서 생각했다. 아무리 생활이 어려울지라도, 남녀가 같이 하는 가정에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고 결혼 서약에 항상 충실하면 집안에 언제나 큰 기쁨이 함께한다. 이 세상에서 아내를 사랑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러나 아내를 사랑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죄 때문이다. 얼마나 세상은 죄를 부추기고 있는가? 언젠가 TV프로에 애인이란 드라마가 방영된 일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 드라마가 불륜을 조장한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시청율을 얻게 되었다고한다. 요즈음 아주 정신 나간 젊은이가 '놀이'라는 음반을 냈는데 그 내용은 성에 대한 노골적인 상왕을 묘사한 노래라고 한다.
그는 겁 없이도 자기는 24시간 성에 대한 생각만을 하게 되는데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이 아니냐고 이성 없는 짐승처럼 겁 없이 말한다. 요즈음 인기를 얻고 있는 TV강사인 모 정신과 의사는 노골적으로 이혼이 자유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떳떳이 결혼식이 있듯이 이혼 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이혼식을 한다면 결혼식에 참여 했던 사람을 불러다가 부조금을 돌려 주어야하는가 하고 어떤 분이 비아냥 거리는 말을 했다.
이런 시대에 아내와 더불어 즐겁게 살라는 말은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모른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찌어다라는 말로 책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f.노동을 즐김(10)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9:10)
'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라는 말은 두가지를 의미한다. 최선을 다하라는 것과 힘이 남아 있는 한 일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는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 없을 때가 있을 것이다. 살아 있는 자만 일할 수 있으니 무덤 안에 있는 자에게는 아무 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 언젠가 우리의 수고는 판단 받을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 대가로 유업을 받을 것이다(고전 3:10하반절, 골 3:23-25).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으로 그분을 따른다면, 우리는 삶을 단순히 회피하거나 참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삶을 주님이 주신 선물로 기쁘게 받아 들이고 그것을 누려야할 것이다.
3. 하나님이 주신 삶을 겸손하게 받아 들여야한다(11-18).
우리의 능력이 성공을 보장 할 수 없다는 사실과 기회가 우리의 성공을 보장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겸손히 받아 들여야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a. 우리의 능력이 성공을 보장 할 수 없다.(9:11,12)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힘하면 거기 걸리느리라."(9:11,12)
여기서는 인간이 자기의 노력에 의하여 반드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함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이 그렇게 되는 원인은 "시기"와 "우연"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11절 끝). 여기 이른바 "시기"란 것은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때를 말함이고, "우연" 이란 말은 히브리어적인 의미는 사건이란 뜻이다. 한역이 이것을 "우연"이라고 한 것은 오역(誤譯)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간섭으로 발생하는 사건으로서 사람이 설명할 수 없는 사태를 가리킨다(12절 상반). 기대하지 못하고 있던 때에 물고기는 그물에 걸리고 새는 올무에 걸린다. 그처럼 사람들도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갑작스런 사건, 즉 재앙의 날이 임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거기 필요한 조건을 구비했다 할지라도 자력(自力)으로 성공을 가져올 듯이 교만하면 안된다. 그는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아야 된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말하기를"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할 것이라"라고 하였다(약 4:13-16). 잠 16:1-3,27:1 참조
b 기회가 성공을 보장한 것이 아니다(9:13-18).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종용히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궤케 하느니라"(9:13-18)
여기서는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구약에서 지혜란 말은 주로 신령한 지혜를 가리킨다. 곧, 하나님을 아는 지혜든지, 혹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옳게 행한 행동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종교 윤리적 성격을 띤다. 지혜자는 큰 권세를 가진 임금보다 낫다는 것이 이 부분 교훈이다. "가난한 지혜자"란 말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고 아무 세력도 없지만 하나님을 아는 신령한 지혜의 소유자를 가리킨다.
지혜자는 성읍을 구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해야만 했는데 무시되었다. 작은 성읍이 포위 되었을 때 지혜자는 그것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그 사람을 주목하지 않았다. 17절에서는 호령하는 통치자가 모든 주의를 끌었으나, 사람들을 패배로 이끌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지혜자는 위대하게 될 수 있는 지혜를 가졌으나, 어떤 호령하는 우매자 때문에 기회가 무산 되었다.
18절의 '한 죄인이(호령하는 통치자) 많은 선을 패궤케 하느니라'는 이 구절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예증되고 있는 사실이다. 아담의 불순종, 아간의 범죄, 다윗의 죄(삼하15장이하)등이 그것이다.
죽음은 피할 수가 없고 삶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야할 완전한 길은 하나님의 손안에 우리를 맡기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 갈 때 우리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우리 에수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이다. 계1:17.18을 보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