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국내 대중은 가수의 노래가 들어있지 않은 연주 음반을 찬밥 취급 했다. 그런 점에서 단 한 장의 연주 음반으로 주목받고 있는 기타리스트 박주원은 특별한 존재다. 그동안 국내에도 기타 연주 음반은 무수하게 발표됐지만 고도의 테크닉이 요구되는 집시·스패니시 기타 연주 음반의 개체는 거의 전무했다.
2009년 데뷔앨범 ‘집시의 시간’으로 2010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재즈&크로스오버 음반’ 부문을 수상한 박주원이 2집 ‘슬픔의 피에스타’를 발표했다. 전작에서 볼레로, 삼바, 탱고 등 장르를 넘나들며 환상적인 기타 연주를 들려준 박주원은 이번에도 현란하고 정교한 핑거링과 놀라운 테크닉과 치밀하고 꼼꼼한 프로듀싱 능력으로 한국 연주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성공적 데뷔를 한 뮤지션들이 흔히 겪는 ‘소포모어 징크스’에 대한 질문에 그는 “1집은 그냥 알아서 내면 됐었는데 2집은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무얼 해야 될지 신경이 좀 쓰였다”고 말한다. 종합선물세트 같았던 1집과는 달리 2집은 듣기에 편하면서 지루함의 여지가 없는 다채로운 멜로디의 연주에다 가사가 들어간 보컬 곡까지 수록하며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확장시켰다.
박주원 음악은 청자의 마음을 격정적으로 몰아가는 마력이 있다. 그의 음악은 춤추고 싶은 댄스 본능과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집시 본능을 여지없이 유발시킨다. 지금은 쾌활한 성격이지만 내성적이고 숫기가 없었던 네살 때, 음악을 좋아했던 어머니의 권유로 피아노를 처음 배웠다.
그가 기타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좀 엉뚱하다. 초등학교 2학년 학예회 때 경쾌한 댄스 곡 ‘담다디’를 반장이 기타로 연주하는 모습에 반해 3학년 때부터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는 또래 친구가 아무도 없었기에 자부심을 가졌던 그는 처음으로 프로 기타리스트의 꿈을 품게 되었다.
청량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클래식 기타 반 서클에 가입했다. 교내에 밴드가 없어 모여든 로커 지망생들로 인해 일렉트릭 기타를 배우며 메탈 음악에 몰입했던 그는 대학생형들과 ‘no pattern die death’란 록 밴드를 결성해 자신의 창작 메탈 곡이 수록된 2장의 앨범을 발표한 적이 있다.
얼터너티브 록이 유행하던 대학시절, 기획사와 계약을 맺고 스피드 메탈을 구사한 록밴드 ‘시리우스’의 멤버로 활동했지만 큰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입대를 했다. 탄탄한 연주 기본기에 팝과 재즈의 감성을 겸비했던 그는 제대 후 지금까지 이소라, 윤상, 임재범, 조규찬, 성시경, 조성모, 아이유 등 유명 남녀 보컬리스트들의 라이브 세션 맨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여왔다.
세션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음악에 대한 갈증이 커져갔다. 베이시스트 모그의 소개로 여성 재즈 보컬 말로의 앨범에 참여한 것은 그의 음악 인생에 터닝 포인트였다. 대중가요 세션과는 사뭇 질감이 다른 재즈 연주에 충격을 받은 그는 자신의 연주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음악 장르에 혼돈을 일으켰던 그는 재즈 음반을 듣기 시작했고 라틴 음악인 집시 재즈와 플라맹고 음악에 매력을 느꼈다. 그 때 앞으로 자신의 해야 될 음악이 무엇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함께 작업하던 재즈 뮤지션 말로와 전재덕은 “너의 음악엔 사랑의 감정은 없지만 굉장히 슬픈 뭔가가 있다”며 가능성을 인정했다. 솔로 연주 음반을 내기에 앞서 프로젝트 밴드 ‘꼬레아노 집시’를 결성해 홍대 앞 라이브클럽에서 공연을 했다. 퓨전 재즈를 할 때와는 달리 흥겹고 화려한 라틴 집시풍의 연주를 하자 관객들의 눈빛이 달랐다.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주원은 자기 만족을 위한 음악에 매몰되는 외골수가 절대로 아니다.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공연 때 연주하는 곡마다 관객들의 분위기를 면밀하게 살피는 뮤지션이다. 집시 음악에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관객들의 반응에 고무된 그는 정리조차가 되지 않았던 음악에 완전 몰입해 1년 동안 라이브에 전념한 후 데뷔 연주 앨범 ‘집시의 시간’을 발표하며 불모지 같았던 국내 연주앨범 시장에 폭풍을 몰고 왔다.
박주원 2집 슬픔의 피에스타 2011년 JHN뮤직 (하편)
깊숙이 숨겨둔 일탈 본능을 사정없이 자극
심연 깊숙이 숨겨둔 대중의 일탈 본능을 사정없이 자극하는 집시 음악
올 해 한국대중음악상에서 다관왕의 영예 획득 가능성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잔잔하게 시작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박주원의 기타 연주에는 듣는 이의 마음을 휘젓는 마력이 있다. 환희와 슬픔, 낭만과 방랑이라는 이질적 정서가 공존하는 그의 집시 음악은 심연 깊숙이 숨겨둔 대중의 일탈 본능까지 사정없이 자극한다. 질주하는 그의 기타 선율에 슬픔이 느껴지는 것은 애잔한 삶의 굴곡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평단과 대중 모두가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탁월한 연주가이면서 좋은 곡을 쓰는 작곡가이고 앨범 프로듀싱 역량까지 겸비한 올라운드 플레이어이기 때문이다.
2집 재킷 사진은 방송을 위해 미국에 함께 간 임재범이 잠시 잠수를 탔을 때 길거리 버스킹을 했던 박주원의 연주 모습을 사진작가 크리스니타가 담았다. 2집에는 버릴 것 하나 없이 알찬 10곡이 수록되었다. 서정적 멜로디가 몽롱한 첫 트랙 ‘마이 리틀 브라더(My Little Brother)’는 유튜브에서 클래식 기타를 슬프게 연주하는 북한 병사의 영상을 보고 영감을 얻은 곡이다. 극한의 슬픈 정서를 유발시키는 집시 바이올린 연주자 콘(이일근)의 선율을 접목한 편곡은 진정 압권이다.
시작부터 경쾌하고 화려한 리듬이 귀를 파고드는 룸바 리듬의 열정적인 타이틀 곡 ‘슬픔의 피에스타’ 역시 몰아치는 속주의 경쾌함 속에 극한의 슬픈 정서가 공존한다. 방에 우두커니 앉아 계신 어머니를 보고 작곡한 ‘애인’, 자신이 축구광임을 고백하는 ‘엘 크라시코(el clasico)’, 지난 해 사망한 블루스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의 ‘원 데이(One Day)’, 심플한 구성과 탄탄한 밀도가 인상적인 ‘환상의 노래’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2집의 차별성은 가사가 들어간 노래를 수록했음에 있다. ‘낭만 전도사’ 최백호를 비롯해 감성적 음색의 정엽 같은 탁월한 보컬리스트들의 피처링 참여는 박주원 음악의 음악 영토 확대에 일조하고 있다. 절창의 보컬리스트 최백호가 노래한 ‘방랑자’는 쓸쓸한 감정을 끝까지 유지하며 억제한 보컬과 박주원의 기타가 기막히게 어우러진 ‘2011년 대중음악 최고의 명작’으로 손색이 없다.
박주원은 “최백호 선생님은 ‘착한 임재범’같은 이미지이지만 특유의 신비로움이 있어 ‘집시 최백호’라 해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박주원의 보사노바 노래를 부르고 나서 40년 노래 인생에서 노래를 다시 배웠다”고 말할 만큼 최백호는 절창을 구현했던 이전의 자기 보컬 스타일과는 차별적인 어법을 시도했다. 최백호가 다른 뮤지션의 음반에 피처링으로 참여한 것 또한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이 한 곡을 녹음하기 위해 4시간30분 동안 녹음실에서 단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최백호는 저음의 슬픈 음색으로 덤덤하게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 한다. 지쳐 보이지만 절제된 그의 어법은 전매특허인 클라이맥스 없이도 듣는 이를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전 곡에서 날라 다니던 박주원의 기타는 이 곡에서만큼은 차분하게 보컬의 차분한 결을 따르는 애잔한 연주로 기막힌 호흡을 이끌어냈다. 박주원은 “‘방랑자’는 오로지 최백호 선생님을 위해 만든 멜로디와 가사다. 사실 ‘방랑자’는 처음에 노래 대신 바이올린이 들어갔었는데, 선생님 목소리가 그 무엇보다 재즈나 보사노바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아 간절히 부탁했었다”고 말한다. 익살스러운 전통 가요를 집시 재즈 스타일로 재해석한 ‘빈대떡 신사’는 정엽의 목소리를 통해 현대적으로 재탄생되었다.
그의 향후 음악 인생에 히트 곡 탄생 여부는 중요하다. 하지만 처음으로 시도한 가사가 들어간 노래에 대한 우려 또한 적지 않았다. 연주곡으로 발표한 ‘환상의 노래’도 원래 그의 이야기를 담은 가사를 붙여 정엽이 부르려 했던 곡이다.
음악이 완성된 후에 음반을 내는 완벽 스타일을 추구하는 박주원은 요즘 동료 선후배 연주자를 만날 때 극도로 말조심을 한다. ‘앨범 성공 후 건방져 졌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주변의 연주가들에게 자신감과 더불어 연주 앨범 발표의 꿈을 안겨주는 긍정적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호평을 이끌어내고 있는 그의 2집이 올 한국대중음악상에서 다관왕의 영예를 획득할지 여부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