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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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12 12:40
35집용-남금희-수정 7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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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식 외 6편
남금희
낡은 서랍장 밑바닥에서
아버지 사진을 발견했다
딸 곁에서 함박웃음 짓는 젊은 아버지
돋보기를 끼고 오래 들여다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밤낮으로 뛰놀던 시절
보이지 않는 듯
환히 보이는 듯
딸 주위를 지키던 아버지
조금씩 기울어가는 동안
어둠이 차올라
우주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텅 빈 자리에 고이던 달빛
돌아보니
아버지가 몰래 밀어올리고 있었다
아버지 얼굴에 얼굴을 포갠다
눈(目)
자식놈 후기졸업식 날이다
차에서 내려 두리번거리는데
기습 시위대를 만났다
맨살 주먹으로 구호를 외치는
선창은 여학생이 돋우고
들쭉날쭉한 팻말들이 끝말을 복창한다
살려 달라는 얘기다
살려 놔라는 얘기다
모래성같이 허물어지지는 말자고
그들 곁을 얼쩡대며
살려 달라, 나도 속으로 부르짖었다
발을 헛디디며
두고 온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는 사이
새 집 줄게 헌 집 다오,
되돌리고 싶은 나를
쳐다보는 커다란 눈을 보았다
줄장미 추신
강둑길 철조망을 비집고
줄장미가 피었다
핏덩이처럼 엉겨 주먹을 내밀고 있다
유리천장 같은
닿을 수 없는 거리였을까
그때 너를 놓친 적이 있다
철조망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강물이 흐르듯
너는 시간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오월이 오면
뭉터기로 피어 바람을 타고 오르는 몸부림
너의 울음에 걸리던 낮달처럼
그때 네게 닿았어야 했다
찔려야 했다
땅끝마을에서
바다 저편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다
파도는 망망히 밀려나가고
포구의 집들은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어두워진다
건너편 언덕 위에
허리를 구부린 누군가가
물을 길어 올리고 있다
목마르지 않게 생수를 마시라고
물지게 진 등허리 사이로
희고 푸른 뼈의 길 보이고
저녁별들 초롱을 켜 든다
내게 쓰기
옛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삽십 년도 더 지난 시간의 절벽을 단숨에
건너뛰는 마법이 출렁출렁 전송된다
흐린 유리창을 세제로 빡빡 닦는
현기증, 거품처럼 이는 보고 싶다는 말
연락 달라는 말
나는 문자 대신 메일을 열어
‘내게 쓰기’ 창을 클릭한다
오늘은 흐린 날이라고 썼다가, 고친다
소나기 때리고 그동안
전자레인지 속 팝콘처럼 마구 터졌다고
사막을 가야 하는 쌍봉낙타는
길에서 울지 않는다고
출생의 비밀
교과서는 말한다
일천칠백오십육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태어났고
일천팔백오십육년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태어났다고
백년 단위로 획을 긋는다면
줄잡아 일천구백쉰여섯 해를 넘기며 태어난
나는 아직 떠나지 않았으므로
누구도 입을 대지 않는다
희망이라는 고혹스런 꽃무릇을
먼발치에서 사양한 나는
지긋이 숨쉬기운동으로 하루를 펼친다
떠나고 돌아오는 겹겹 세월이
두루마리 문서처럼 말린다
지구 온난화에 기여하고 보니
계절도 이제는 두 계절로 졸아들었다
송년·2
이만큼 살아봤다고
사랑은 짧고 인생은 길다고 고백하려는데
스승은 담백하게 인생은 생략한 채
사랑은 길고 예술도 그러하다고 말씀을 맺으신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흉내 내고 나서
돌아오는 내내 안전밸트에 묶여
인생의 협곡에는 핸들이 없다고 중얼거렸다
문을 열고 닫으며 자리를 옮기며
택배 반송 사유를 변심이라고 적는다
밤하늘의 별빛처럼 아련한
사랑을 저울질하는 한 해가 또 간다
겨울이 길면 봄은 짧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