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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발의 향기 제 4 집”을 앞두고
진 해 룡
2013년도 은발의 향기 제4집에 출판할 원고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부부간에 또 한 번의 심한 갈등이 생겼다.
빛 고을 노인건강 “타운”에 자서전 회고록반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서 이곳에 들어와 어언 3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짓는다,” 라는 속담을 생각해 본다,
이 명란 교수는 서당 개로써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글을 쓰는 요령과 방법 기타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하게 가르쳐 줌으로써 희망과 행복과 자신감을 얻게 함으로써 나의 황혼의 인생에 자부심을 갖게 해 주었다.
이곳 자서전 문학반에 와서 말로 하기가 너무나도 벅찬 나의 심정을 글로 써서 다툼이 없는 조용한 심중의 표현이야 말로 얼마나 평화로운 삶의 과정이라 하겠는가,
그동안 아내와의 갈등도 가급적 물리적 충돌 없이 각박한 심정을 표현한 글들을 써서 컴퓨터에 많이 저장해 놓았었다.
그런데 이번 은발의 향기 제 4 집 출판 원고에 “노후의 인생”이라는 제목을 제출 하려고 했다.
그 내용은 노후 부부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아빠에 대한 딸로 부터의 심각한 장문의 편지, 그리고 황혼에 접어든 자신의 삶에 대한 가치관을 세워 아무에게나 부담주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리라는 내용으로써 오늘날 아버지의 외롭고 쓸쓸한 과정을 쓴 글 이였다.
아내는 남이 글을 읽을 때 좋은 인상을 받을 글을 쓸 것이지 하필이면 가정에 치부가 들어나는 글을 써서 좋을 리가 있겠느냐며 한사코 반대를 하고, 나는 내 답답한 이 심정을 원고로 제출하여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 이라며 서로 우겨대는 심각한 상태에서 반목하고 있었다.
아내는 얼마나 다급 했는지 둘째 아들에게 이러한 과정을 실토함으로써 아빠의 원고 제출을 못 하도록 이 명란 교수에게 “스마트폰”으로 다음과 같은 장문의 문자를 보내다.
“스마트폰”의 문자 (2013.10.28.월)
안녕 하세요.저는 진 해룡씨 아들 진 주식이라고 합니다. 저의 아버지 일 때문에 어머니 랑도 몇 번 통화 하셨을 텐데요.
좀 특이하신 아버지 때문에 선생님도 신경이 많이 쓰시겠네요.
자식인 제가 봐도 종잡을 수 없고 이해가 안가는 분이시니.
얼마 전에 보니까 글을 쓰셨더라고요, 자서전이라는.
내용도 문맥도 글의 취지도 말도 되지 않는... 읽고 나서는 과연 이분이 우리 아버지가 맞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그 일로 속상해 하는 건 당연하고요...
무엇보다 빛 고을 학교에서 책으로 낸다면서 가족사진까지 가져갔다더군요. 선생님, 선생님은 이글을 다른 글들과 같이 취급하고 계신다더군요, 편집주인 선생님은 이런 글을 안된다하고 아버지께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그게 선생님의 의무인거죠. 누군가가 포르노 소설을 써온다면 그것도 실으실 건 아니잖아요? 아버지의 글이 발행된 후의 일은 생각보다 심각 합니다.
아버지에게 그나마 이어지고 노려하던 가족이라는 끈은 이제 완전히 끊어질 꺼고, 우리 가족은 해체될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선생님이 아무 책임이 없다고 말 할 순 없을 겁니다.
아버지 글은 글이 아닙니다.
온갖 궤변과 허구와 원망과 증오만 담긴 자서전도 소설도 아닌 그런 글을 방치하여 실명까지 인용해 책으로 까지 발행되고 그로인해 가족이 고통 받는다면 재고 하셔야지요. 아니면 선생님도 가족의 해체에 대해 같이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선생님 부디 저를 분노케 하지 말아주세요..
이 명란교수는 아들로부터 받은 장문의 메일을 복사해서 나에게 보내면서, 이런 글을 받고 보니 편집회의가 필요 할 것 같네요.
하고 즉시 답서가 왔다. 그리고 또 도현 선생님- 가정의 화목이 건강을 지키는 비결입니다-금요일 복사해 오시면 편집인들과 상의 합시다.* 문학반(10.29)라고 문자가 왔다.
아들의 장문의 “스마트폰” 문자를 읽고 문맥이 정연하고, 폰에 문자치고는 아주 뛰어난 글에 감탄 했다. 하지만 문장 속에 두 가지 허점으로 다소 흠집이 있었다.
그것은 (온갖 궤변과 허구와 원망과 증오만 담긴 자서전도 소설도 아닌 그런 글) 이라는 구절 이였다.
소설은 허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자서전은 소설과는 다르다. 자서전은 진실하여야 한다. 온갖 궤변이라고 했는데 궤변 (詭辯)이라는 뜻은 (도리가 아닌 말을 도리에 맞는 것처럼 억지로 변론하는 것이다) 과연 내가 온갖 궤변과 허구로 글을 썼다는 말인가,
한번쯤 생각해 볼일이다. 원망과 증오만 담긴 글 이라했는데, 이것은 상대성이 있어서 쌍방 간에 검토 해 보아야 할 문제이지 일방적으로 원망과 증오로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 명란 교수에게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냈다.
교수님 너무나도 죄송합니다. 해마다 은발의 향기 편집시기만 되면 불초 이 사람으로 인하여 심정을 괴롭혀 들여서 무어라 여쭐 말 못 하겠습니다. 제자가 많다 보면 별에 별 사람들이 많이 있겠지 하고 널리 헤아려 주세요, 물론 가정도 중요하지요 모르는 베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없는 가정은 너무나도 삭막하기 때문에 누구한테 호소하고 싶은데 아내는 나와 대화가 안 되니까, 교수님에 무례한 짓 뿐 아니라 아들놈까지 끌어들여 나의 체면에 손상을 주고 있음을 사죄합니다. 금요일 만나서 상세한 말씀 들이고 우선 폰으로 사과드립니다. 너무나 죄송합니다. 10.29.
동산문학 편집국장으로 부터 전화를 받고 해동 물산에 갔다.
나는 벌써 만나자는 뜻을 이미 짐작 했다.
노후의 인생 제목의 원고를 제외시키고 나머지 4 편 (신혼생활, 목포 문학기행, 황혼잔치, 까치가 울면,)등으로 교체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는 함께 한우 생고기집에 와서 생고기에 소주 2병을 치웠다.
최 국장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자기 아내는 어찌나 억세던지 꼼짝도 못하며 살아가고 있어 가정이 편안하다고 하면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남자가 고개 숙여 참아 주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면서 서로 맞상대 하다 보면 가정에는 항상 먹구름이 끼고, 상호 불행의 연속이라고 자신의 삶을 실토 했다.
나 역시도 가장으로써 남자의 권위와 자존심 때문에 아내와 오랜 세월 동안 냉전 상태 하에서 살다 보니 상호 이익 될게 아무것도 없는 허송세월만 살아오고 있었음을 못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노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 가야만이 정답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소신 것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삶을 아무도 관여 할 수는 없다고 본다. 혼자 왔다 혼자 가는 세상,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에 앞서 자신의 인생관을 확고히 정립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주지 않고, 즐겁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노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이 바라는 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은발의 향기 제 4 집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의 뜻에 따라 소신을 버리고 말았지 마는 언제인가는 나의 말 못할 깊은 심정을 글로 써서 모아 두었다가 한권의 자서전을 발간해 보려는 마음만은 간절 할뿐이다.
노후 행복
진 해 룡
대성 직업전문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생활비를 가지고 속을 쑤셔댔다. 어찌나 충격을 받았던지 소지하고 있던 안경까지 잊어 버렸다. 핸드폰에다 문자로 쏘아 댔다.
“도대체 너는 나에게 무슨 존재가치가 있는 자야”
밖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까지 충격을 주어 안경까지 어디다 둔지도 모르게 속을 쑤셔놓고“
열이 올라 정신이 아찔했다.
당초 아내는 생활비를 가지고 오래 전부터 계속 나와 시비를 버려 왔다. 생각 할수록 앞날이 아득하다.
당초 가족이 함께한 자리에서 아들 딸(3명)각자 20만원씩 60만원 내가 60만원 도합 120만원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로 합의가 되었었다.
하지만 10만원을 더해서 매월 70만원씩 주고 있는데 컴퓨터 학원에서 15만원을 받으면서 그 많은 돈을 혼자 쓰면서 생활비를 더 많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날 같으면 아내 하자는 대로 해왔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내를 믿을 수가 없다. 내 마음 확고히 정립되어 있기 때문에 아내가 하자는 대로 할 것 같으면 내 노후의 삶이 흔들리게 된다. 가정이라는 올가미로 나를 꽁꽁 묶어 자기 뜻대로 영위 하려하지만 이미 내 자신을 발견하였고 아내를 알게 되었으며 인생관이 정립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도 나의 생존권에 대해서 관여 할 수가 없다, 라고 각성한바가 이미 오래되었다.
이러한 나의 신념을 알고나 있는지 한심한 인간이라고 생각된다.
옛날 같았으면 아내 하자는 대로 하며 가정을 이끌어 왔겠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다. 남편의 속도 모르고 옛날처럼 생각하고 있는 아내가 한심스럽게만 생각 되었다.
아내로서 남편한테 베풀어준 것이 무엇이 있는가,
존경심도 사라지고 사랑보다도 미움만이 남아 정마저 삼천리나 떨어진 처지에 그나마 서로 간에 믿음마저 깨진 상태 하에서 무엇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가장이라고 남편이라고 아내로서 권리를 주장 하는 꼴이 한심하기 이를 때가 없다.
그나마 20년분 연금이라도 나오니까 내 생명 유지하고 있지 전액 일시금으로 퇴직금을 수령 했더라면 나는 이미 이세상사람이 아닐 거라고 이미 각성한바 오래 되었다.
정년 당시 자가용(포니 2)를 뽑아 잠간 타고 다니다가 장남한테 넘겨주고 차남한테도 차 한대 뽑아주고 농토 팔아 딸 시집보내고 작은아들 빗 내서 장가보내고 나는 연금 아니면 우렁 껍데기를 면치 못할 신세가 되어 버렸다.
영광에 있는 농토나 살고 있는 아파트나 모두가 아내 명의로 되어 있다. 죽을 때까지 일심동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그렇게 한 것인데 살다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다.
영광에 있는 농지 내에 포장도로가 개설되면서 그 부지 내에 편입된 면적에서 나온 현금 2천만 원도 나한테 일언반구도 없이 사용하고 사용 출처를 물어보니 그동안의 생활비 채무에 전액 사용했다는데 무어라 말할 것인가,
이 세상에서 믿음이 사라진다면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
존경과 사랑과 믿음은 가정을 구성하는 3대 요건이라고 하는데 그중에 한 가지도 찾아 볼 수 없으니 누구를 원망하여야 할 것인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자식들은 엄마 편이다.
하기야 모든 안살림을 아내가 좌지우지하고 살아 왔으니 아빠에 대한 공덕을 알 리가 있겠는가?
나 역시도 살아오면서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더 컸으니까, 하지만 오랜 후에야 아버지에 대한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에 와서 무어라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 된다.
지금 아내와 나는 돈 때문에 갈등하고 지켜야할 덕목을 상실 한 체 십여 년간의 장기냉전이 전개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아내도 불상하다. 나 같은 생활력 없는 사람 만나 마음대로 호화스럽게 살지도 못하고 고생만하고 살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만 볼 수도 없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알고 보니 생활능력이 강한 여자들도 많고 못난 남자들도 많고 세상은 다 자기 뜻대로 되지는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오로지 쥐꼬리만 한 연금 때문에 갈등과 반목으로 장기 냉전을 전개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흘러간 지난날이 생각난다.
불상한 내 동생 돈 때문에 죽어 갔다. 돈이 있었더라면 아파트 하나 전세 내어 내가 어떻게든 봉사 해왔을 터인데 돈이 없어 병원에서 한 많은 인생, 결국은 죽고 말았다.
작은형이 지옥문의 열쇠를 쥐고 있으니 제발 정신병원의 지옥에서 나올 수 있도록 애원하던 불상한동생, 내 생각 같아서라면 내 부동산이라도 팔아서 동생을 퇴원시켜 줄 것을 그 원을 풀어주지 못하고 한 많은 일생을 내 앞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돈 때문이다. 내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난 불상한 동생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아프다.
나 또한 아내 하자는 대로 할 것 같으면 노후의 건강 보장 못하고 올가미에 묶여 꼼짝도 못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생각 되었다.
나 자신을 발견 하였고 나의 인생관이 정립되었기 어떠한 사람도 나의 생존권에 대하여 관여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아내는 나더러 자주 정신병원에 가서 나의 정신검증을 해보자고 한다. 옛날 에는 가정 바께 모르고 착실하게 살아온 남편인데 정신 구조가 변했다는 것이다. 아내의 생각은 그렇게도 느꼈을 태이지만 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남편을 두고 말끝마다 입에 오르내리고 해서 한번은 매디필쎄터 병원 정신과 의사한테 갔었다. 전후 사실을 조리 있게 말하고 나의 소신과 삶의 계획을 말했고, 의사는 나의 말을 조용히 듣고 나더니 아내더러 말해보라는 것이다. 양쪽 말을 다 듣고 나더니 조용히 말했다.
“제가 처리할 사항이 아니니 집에 가셔서 두 분이 알아서 처리하세요,” 하고는 일어서 자리를 떠났다.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
그래도 자기 말이 옳다고 주장하며 나의 생존권에 대해서 제동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병원에 가자는 말 함부로 하는 것 아니야 무서운 존재 함께 있는 심정 알까?” 아내한테 쏘아댔다.
만약에 내가 노후의 건강 잃고 아내 곁에 있게 되는 날 나는 이미 죽은 몸이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는데 아내의 하는 말은 늙어서 보자는 것이다. 나이 들면 여자 말대로 따라야 만이 신새가 편하다는 것이다.
물론 가정마다 사정이 다르다. 어떤 남자는 마마보이가 되어 아내의 뜻대로 따르며 고개 숙인 남자들도 많이 있다.
나름대로 인생관이 있기에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자기인생은 오로지 자신이다. 아내와 아들딸들이 내 인생 살아 줄 수는 없다.
아내의 말대로 따라 주었더라면 나는 오늘의 현 위치를 유지하지 못하고 이미 딴 세상으로 떠나갔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프고 심적인 고충을 어느 누가 알아 줄 것인가?
남들은 내 자신과 다른 어떤 가치 있는 삶이되기를 원하지만 그러한 삶이되기 이전에 나로서의 중요한 삶을 의식하고 나의 본연의 자세로 존재할 때 비로소 만족하고 행복할 수가 있다.
남을 원망하지도 않을 것이며 누가 뭐라 해도 개의치 않고 내 자신을 사랑하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소일거리 찾아 즐겁고 건강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나의 보람이다.
처와 자식들은 아직도 가정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어 나에게 가장으로서 의무를 강요하고 있지만, 이제는 의무 보다는 권리를 찾아야할 시기에 있다고 보며, 노후 들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만이라도 행복으로 알고 축복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 황혼에 접어들어 소일거리 찾아 열심히 살아가는 아빠의 인생에 더 이상의 상처를 주어서는 아니 될 것이며, 먼 훗날 나의 삶에 대해서 이해 할 날이 올 것이다.
상처의 흔적
진 해 룡
사람이 살다보면 무심코 던진 말이든 고의로 말 하든 간에 그 말의 상처는 흔적을 남기고 상처의 흔적이 크면 클수록 그에 따른 고충은 증폭되기 때문에 함부로 알지도 못하는 사실을 발설한다는 것은 삼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지금까지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피해를 주지 않고 시비하거나 다투는 일 없이 살아 왔다.
그러나 어느 날 아내로 부터의 던진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아 그 만큼이나 큰 상처의 흔적을 가슴에 쌓이게 되었다.
충격은 눈에도 보이지 않고 말로도 표현 할 수 없이 전체의 신경계통을 교란시켜 가슴에 멍을 들게 만들며 신체적 건강에 적신호를 보내게 되었다. 알지도 못하는 말을 함부로 지껄이는 자야 말로 지탄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사료된다.
나의 형제간은 5 남매이다. 현제 장형은 고향에서 본가를 지키며 살고 있고, 바로 밑에 남동생이 있는데 성장 과정에서 부터 어느 형제간들 보다 다정다감하게 사이좋게 지내 왔었다.
한국 전쟁이 지나고 생활이 어려운 시절에 가정에는 우환이 끊이지 안했다. 그중에서도 바로 밑에 동생이 신경성질환으로 잠을 못 이루고 밤낮으로 울며 소동을 피워 집안이 편안 할 날이 없었다.
다행이 1964년도 12월 공직 시험에 합격 하여 전남 순천에 첫 발령을 받아 근무했고 신혼생활도 그 곳에서 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생 생각만 하며는 마음이 편안치 않고 괴롭기만 하였다.
고향에서는 도저히 살수가 없으니 작은형 근처에서 하숙이라도 하고 살겠다고 애원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항상 마음이 괴로울 뿐 이였다. 그러한 괴로움이 무려 반세기 동안 세월이 흘러갔다. 하지만 직장에 매인 몸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가정과 직장에 충실하여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정년퇴임을 하였고 이제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
가정과 직장생활로 인하여 부보님께 따뜻한 밥상 한번 못 차려 드리고 살아온 죄의식 때문에 언제나 마음이 괴로웠고, 불효한 심정 불상한 동생한테나 베풀겠다는 심정은 오래 되었다.
그동안 일어난 일들은 이루 말 할 수없이 많지마는 ,,,
부모님 돌아가시고 난 후 장형 밑에서는 불안하여 함께 살 수가 없다며 자살 소동까지 버러진 가여운 동생을 위해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 고심 중이였다.
1998년도 가을 마침 쌍촌동 주공아파트에 전세방이 있다 하기에 모든 세간 장만하여 동생을 그 곳에 와서 살게 했다.
아내의 의견도 듣지 않고 내 뜻대로 광주에 와서 살도록 했으니 아내인들 좋아 할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의 혈육이요 그토록 나를 따르는 동생을 버릴 수 없는 고아 같은 불쌍한 인생이기에 내가 보살펴 주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내와 더욱 사이가 버러진 것도 역시 부인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년퇴임 후 아내와의 갈등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동생한테 온 정성을 쏟아 부었다. 그러던 중 이듬해 부동산은 오르고 증권시장도 활성화 되어 가면서 삶이 흥청거리고 있던 시절 이였다.
아세아나 항공 주식이 처음으로 개설 되었는데 주당 만원을 호가 했지만 앞으로 더 상승할 거라는 막내아들 말을 듣고는 동생한테 이러한 사실을 말하고 주식을 사라고 9.18 자로 아들 통장으로 송금 해주었다. 그런데 다음날 동생의 마음이 변하여 주식을 사지 않겠다며 송금한 금액을 도로 회수 하라는 것이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아내와 함께 자가용을 운전하며 집으로 들어오는 차 안에서“ 삼촌이 그 주식 사지 말라고 한다,”라며
내 통장으로 자금을 도로 회수해 달라고 하자 막내아들 하는 말이 ”어찌 그 양반 이랬다 저랬다 한다요,“하면서 반납할 의향을 보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주당 만원 씩 계산하여 1 천주를 사버린 것이다. 무슨 속셈으로 사지 말라는 것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한 건지,
혹시 무슨“코미숀”이라도 있는 것일까? 하고도 당시 생각 해 봤다.
그 당시 나는 주식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주식의 동향을 알아 보기위해서 송원마트 2층 현대 증권 사무실로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차 모씨와 함께 매일 출근 하다시피 증권에 몰두 하게 되었다.
그러한 세월이 무려 3년이 지나도록 다니다가 아세아나 증권은 오를 기미 없이 계속 하락 하자 어쩔 수없이 5천원도 못 받고 매도하고 다른 증권을 사서 활용하다가 결국은 “엘지”에서 750만원 삼성에서 350만원 외환에서 250만원 이곳저곳에서 대출 받아 메꿔 가며 주식을 사고팔다가 마침내 신용 불량자로 더 이상 주식을 할 수가 없어서 하남 부도난 공장 감시원을 하면서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머지 부동산 경매처리 문제를 아내가 고생하며 마무리 지어갔다. 연금에 금액을 압수 할까 봐 이곳저곳 통장을 옮기면서 고생했던 것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친한 동려에게 동생 돈 1 천만 원을 증권하면서 다 없애고 가구에 차압 부치는 등 소동을 부리게 하여 자기를 고생시켰다는 말을 듣고는 잊었던 상처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나의 심정을 할퀴는 것 같았다.
나는 증권이라는 것은 아무 경험도 없고 전혀 모르고 있던 상태에서 아세아나 항공 주식 돈 찾으려고 갔던 것이 영원한 신용불량자가 되어 지금도 사회생활에 제한을 받고 살아오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있는데, 똑바로 알지도 못하면서 지난날의 남의 상처를 건들어서야 되겠는가,
아내한테 가서 따졌다. “그렇지 않아도 동생 일만 생각 하며는 가슴이 아픈데 내가 동생 돈 천만 원을 증권에 투자해서 사용해 ?
똑바로 알고나 남한테 말을 해야지“
당시 일기장과 송금통장을 보이면서 따지자 그때서야 동생 돈을 증권에 투자하여 사용 한줄 알았다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 했다.
그 돈 천만 원만 있었다면 작은 방하나 얻어서 얼마큼 내가 동생위해 봉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돈이 없어 이곳저곳 요양병원에 입원 헤매다가 마지막 한진 노불병원에서 나를 붙들고“이 지옥문의 열쇠를 작은형이 쥐고 있으니 제발 이 지옥에서 나오게 해 달라”고 나를 붙잡고 애원하던 동생 생각만 하며는 피눈물이 나는데 내가 동생 돈 천만을 사용했다고 하니 마음의 상처가 다시금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던진 말에 상대방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준다는 것,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는 생명을 잃게 된다는 속담 알고나 있는지, 매사가 이렇다. 자기가 하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고 남이 하는 짓은 온당치 않다는 성격 결함이 있는 자와 하루인들 편안한 마음을 갖고 지내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속담에 엄청난 충격이나 괴로움이 뭉칠 때 하는 말이 사람 피 토할 일이라고, 또한 답답하고 심히 마음이 괴로울 때 가슴 아프다, 라고 말 하는데 이러한 경지를 당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요즈음 양 가슴 젖꼭지가 아파서 오치동 현대병원에 가서 외과 최 명숙 과장의 초음파 검사를 받아 보았다.
혹시나 하고 긴장이 되었는데 별첨과 같은 진료 결과가 나왔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노후가 되면 그럴 수도 있으니 그런대로 살아가라 하면서 굳이 원하신다면 수술해도 좋다고 말한다.
다행이다 지금 수술 할 돈이 어디가 있는가, 처음으로 노인이라는 슬픔을 느껴 봤다. 할 일도 많아 외롭지도 않고 즐거운데 몸이 아프고 그에 따른 약값이 없다 보니 노인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건강한 정신과 신체는 자신의 결단력과 의지에 달려있다.
세삼 느껴 보면서=== 상처의 흔적을 교훈 삼아 남은 인생 즐겁고 편안한 마음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내가 가야할 길이 아닐까 생각 해 본다.
별첨 “ 초음파 검사 원본 첨부.
추 석
진 해 룡
예로부터 팔월 보름은 추석 이라고 하여 정월 초하루와 같이 우리 민족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대 명절이다.
이날은 먼 객지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 고향을 찾아와 서로 만나 옛정을 나누고 조상을 찾아뵙는 성묘하는 날이다.
인천에 살고 있는 장녀는 추석 전날 두 외손자 손녀를 대리고 이곳 친정을 찾아 왔다. 왜 친가에서 추석을 지내지 않고 왔는지 궁금해서 물어 봤더니 사전에 친가에 와서 성묘 마치고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아마도 제 엄마하고 어디를 갈려고 계획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늘 장남 더러 성묘하러 고향에 함께 가자고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나 혼자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갔다.
고향에 찾아 왔건만 낯설기만 할 뿐, 형수는 아파 누워 있었던 상태가 호전 되었는지 앉아 있고 장조카는 먼저 성묘 하고는 처갓집인 경남 서창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전화 통화를 해 봤다.
형은 식사중 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앉아 있어도 나와서 마중하지도 않기에 이곳 앞마루에 오래 앉아 있는 것보다 차라리 정문에 가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뒷길로 해서 현지를 가보았다.
아 !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 전통을 자랑했던 그 정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자리에는 채소를 갈아 놓은 밭이 되어 버렸다. 가슴이 철렁하고 싸늘한 냉기가 스며들며 멍청하게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나는 정문을 자랑삼아 수필로 써서 은발의 향기 제 3집에도 올려놓았고 이제 고향에 와서 사진을 찍어 보존하려던 생각이었는데, 이 무슨 변고일까 어떻게 표현해야 할 찌 아찔했다.
하기야 부모님 제사도 정월 초하루로 모신다며 일방적으로 결정하고서 부모님 제사 날 고향에 가야 할 기회마저 상실 되었으며 그로 인해 형제간의 만남의 기회도 거리가 멀어져 갔는데,
또 다시 안타까움에 처참한 생각 뿐 이였다.
그렇다면 고종황제로 부터 하사받은 교지는 어디 있는지 물어 봤더니 그것도 어디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전통을 자랑하던 우리 조부모와 부모의 도덕관이 우리 세대에 와서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앞으로 내 후손들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사라져 갈 거라는 한심한 심정을 한탄 할 수밖에 없었다.
산소에 가봤다. 선산 주변을 개간해서 밭으로 경작하도록 차지 해 준 모양인데 그 개간지에 키가 넘도록 우거진 수숫대가 경작되어 있어서 부모님의 묘를 찾으려고 해치면서 찾아가는 심정,
차라리 나 혼자 왔으니 다행이지 내 가족이 함께 오지 않기를 잘 했다 싶었다.
추석 대 명절의 전통은 이제 나의 세대가 지나며는 아마도 성묘 제도가 점차 사라져 갈 것이라 생각이 들고 나의 후 세대에서는 화장하여 간편하게 처리하는 문화가 점차 확대 될 것이라고 생각해 봤다.
그래도 고향산천만은 어릴 때 옛 모습 그대로 내 마음을 달래준다.
“고향에 찾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더라,”가곡의 노래의 가사내용이 자꾸만 멤 돈다.
나 떠나고 나면 내 후손들이 어디라고 낯 설은 이곳을 찾아 올 것인가, 전통이 살아져 가고 있는 것이 가슴 아플 뿐이다.
그렇게 자리 잡았던 정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부모님 제사도 정월 초하루 합동으로 모시고 있으니 점점 형제간의 사이도 멀어져가고 있는 것을 어찌 하랴,
세상 모두가 변천 되어 가는데 변하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어쩔 수없이 순응해야지 다만 울고 싶은 심정 일 뿐이다.
이사 하던 날
진 해 룡
2015년 2월 5일자 노대동 빛고을 건강타운 부근 채움“빌라”에 보증금 300만원 매월 38만원 씩 지불하면서 살아 온지도 벌써 1년 기한이 닥아 왔기에 2016년 1월 7일 자 쌍촌동 전철부근에 위치한 남양“그린빌라”에 보증금 300만원에 매월 25만원을 지불하기로 계약 당일 25만원을 선불하고, 8 일자 이사하기로 날을 잡았다.
밤새 이사 짐을 쌓다보니 새벽 4시가 되었다.
혼자 살아도 살림을 하다 보니 가출 것은 다 가추야 하기 때문에 이사 짐이 이만 저만이 아니게 많이 쌓여 있다.
다음날 아침 춘초 선생의 자가용으로 1차 이사 짐을 옮기고 오후에는 이 명란 교수와 오 정실 회장 그리고 청강 선생이 와서 자가용에 짐을 함께 옮겨 주었다.
모두가 고마운 사람들이다. 주변에 이러한 고마운 분들이 있다는 것은 나의 복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춘초 선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사하는데 나의 분신 역할을 해 주어 더 없이 고마운 마음으로 오직 행복 할뿐이다.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내 곁에 계신다.
84 세가 된 이 나이에 혼자 이사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지만 내 곁에는 항상 어머니가 돌보고 계시기 때문에 역경을 이겨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곤 한다.
춘초선생은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나의 둘도 없는 분신 역을 해주는 고마운 친구요 보배로운 은인이라고 느껴 보곤 한다.
이러한 친구가 생긴 것은 은발의 향기에서 “그리운 어머니”의 수필 에 나오는 쓰르라미소리의 시를 읽고 문자로 격려하면서 만남의 인연이 되어 이렇게 오랜 기간 변함없는 친한 동료로 지내오고 있다.
즐겁고 건강해 야만이 노후의 인생을 보장할 수가 있는데 마음이 무겁고 힘이 겹치면 건강에 적신호가 오기 마련이다.
요즈음 기침이 심하고 몸의 “콘디숀”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춘초선생과 화순 건강원에 함께 가서 개고를 내서 분배를 했다.
몸을 보 해 주어야만이 노후의 건강을 유지 할 수 있는 거지 혹시라도 몸이 아프면 생각만 해도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마운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 것인지,
노후 혼자 살아가는 생활이란 어려운 일이란 것을 느낄 것 같고
이번 기회에 고마운 주변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볼 기회가 있게 되었다.
인간미가 있는 사람-
서로 만남의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사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사람-
다정하고 따뜻한 인정이 넘치는 사람-
관심과 배려가 있는 사람-
이번 기회에 내 주변 사람들을 더욱 더 실감 해 보았다.
내가 괴롭고 어려울 때에 느껴보고 고마운 사람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나의 삶의 지표로 산다는 것은 희망이요 행복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내 곁에 있어 더욱 활기찬 노후의 인생 여정에 보람을 느껴 본다.
한해를 보내면서
진 해 룡
제야의 밤 8시, 이제 4시간 후 면 좋든 싫든 간에 나이 한 살을 더 먹게 된다. 82세 ! 꿈같은 흘러간 세월. 허무한 인생이 너무나도 아쉽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친구와 함께 장기도 두고 화투도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집에서 아이들이 다 모였으니 함께 저녁을 먹자고 빨리 들어오라는 것이다. 같이 놀다가 내년에 만나자고 하면서 해어졌다.
집에 들어와 보니 설날 장만을 하느라 전을 부치고 제법 설 기분이 난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왜 이토록 가슴이 서러워,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까 서럽기만 하다.
나는 지금 “메디필쎈터”병원에서 처방한 심장 약을 복용하고 있다. 화요일의 악몽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심장은 제 기능을 못하며 멋대로 쿵쾅 소리가 나면서 불안하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나만의 고충 ! 어디다 이 심중을 실토 할 것인가.
명절이고 신년 세배고 모두가 다 즐겁고 건강한 사람들의 절차일 뿐!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라고 생각이 든다.
새해 아침 아내는 나더러 아들들의 세배를 받겠냐고 내 방문을 열고는 물어 본다. 나는 세배를 받지 않겠다, 하고는 진종일 방에 들어 박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마음의 공허함을 혼자 위로 하면서 정월 초하루를 지냈다.
설날 오후에 장녀가 두 외손자 손녀를 대리고 찬정에 왔다.
내 친손자나 외손자들한테 까지 얼어붙은 마음을 보일수가 없어 일단 세배를 받고는 세배 돈도 주지 않고 덕담 한마디도 없이 일어선 나의 소행이 손자들에게는 어떻게 생각 되었을까,
최소한 15만 원정도가 있어야 하는데 마음이 개운치 못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최소한의 경제적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절실히 느껴진다.
하지만 그래도 적은 연금이라도 나오니까 살아가지 자식들한테서 지금까지 용돈 받은 사실도 없으니 그러려니 하고 살아 갈뿐이다. 남들은 명절에 자식들로부터 용돈 많이 받았냐고 더러 물어 본다. 하지만 난 그저 함구하고 만다. 한해가 닥아 올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니 남들처럼 즐겁고 행복함을 느낄 수가 없다.
세월이 거꾸로 흘러갔으면 할뿐, 마음이 서럽기 만하다.
주어진 인생 그냥 그런대로 살다 보면 언제인가는 종착역이 닥아 오겠지, 살다 보면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운명과 행복은 자신이 창조 한다는 것을 이미 각성한바 있기에 내 인생 나름대로 청산유수처럼 거리낌 없이 살아가리라.
노후 들어 일 꺼리 있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제 아무에게나 부담주지 않고 남은 노후의 삶, 오직 즐겁고 마음 편히 건강하게 살아가리라. 다행히 빛고을 건강타운 자서전 문학반에 다니면서 말로 하기 어려운 심정을 글로 써서 조용히 나의 길을 가고 있다는 보람과 행복감으로 오늘도 감사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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