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이원론적 기독교의 부적절함
범신론이 환경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적절한 틀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원론적인 기독교도 적합한 틀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원론적인 기독교는 생태환경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충분히 배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비잔틴의 기독교는 참되고 진정한 가치를 지닌 것은 오직 천상의 일들뿐이라고 보았다. 천상의 일은 너무나 높고 거룩한 것들이기 때문에 자연에 있는 사물들을 이용해서 표현해서는 안 되고, 다만 자연물의 상징을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비잔틴 기독교 사상의 이면에는 하늘의 것들은 선하고 땅의 것들은 악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기독교 안에 존재하는 플라톤적인 이원론은 더더욱 생태 문제를 다룰 수 있는 틀로는 적합하지 않다. 이 사상은 몸을 적절하게 즐긴다든지, 지성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자연물은 다만 하나님의 존재를 고전적으로 변증하는 방편으로만 이용될 뿐이다. 이 사상은 자연 그 자체에 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자연의 실질적인 가치에 대하여도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동물들에게는 영혼이 없고 따라서 하늘나라에 가지도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서 동물들을 잔인하게 학대하는 네덜란드의 검은 스타킹 칼빈주의자들은 이원론의 극단적인 한 형태다.
c. 역사적 기독교의 대응
자연에 대한 역사적 기독교의 태도는 창조의 개념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시공간적 연속체가 시작되기 이전에 객관적으로 실재하셨으며, 무로부터 만물을 창조하셨다. 이 선언은 세계가 본질의 외연이라고 주장하는 범신론을 거부한다. 자연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 만물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동등하다.'
이와 같은 자연관은 하나님의 본성에 기초하고 있다. 역사적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이다. 동방의 신들은 그 정의상 무한하지만, 인격적인 신은 아니다. 반면에 서방의 신들은 인격적이긴 하지만 제한적이고 유한하다. 따라서 역사적 기독교가 말하는 신은 독특하다. 하나님이 무한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뜻이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별된다.
인간은 유한한 피조물이라는 의미에서 무한한 창조주와 구별되는 동시에 동물, 식물, 기계와 하향적 연속성을 갖는다. 하나님이 인격적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성의 특징인 인격적 존재로 창조된 인간과 하나님이 상향적 연속성을 갖는다는 것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의사소통과 사랑의 교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비인격적 존재들인 동물, 식물, 기계와 구별되는 독특한 존재다.
~ 이상원, 《프란시스 쉐퍼의 기독교 변증》, p.17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