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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 삿 16:23-31
송구영신예배에 참석한 어떤 아이가 아빠에게 넌지시 물었습니다. “아빠 그런데 송구가 뭐야?” 아직 신앙생활을 오래 하지 못하고 그저 아내만 따라 교회 다니는 아빠는 순간 당혹스러웠습니다. “아, 송구란 지난 일년 동안을 반성해 보니 하나님께 송구스럽다는 뜻이야.” “아, 그렇구나, 그럼 영신은 또 뭔데?”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넌 그런 것도 모르니?” 괜히 할 말이 없으니 아들에게 핀잔만 줍니다. “그건… 그건… 새해에는 신나게 살자는 뜻이란 말이야.” 어쨌든 좋습니다. 일 년을 뒤돌아보며, 하나님께 송구스럽다고 고백하고, 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2024년을, 주님 안에서 신나게 살아보기 바랍니다. 2023년 마지막 날과 마지막 주일을 동시에 맞았습니다. 올해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예배만큼은 빠지지 않겠다던 다짐이 지켜졌습니까?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십일조만큼은 드리겠다는 결심을 실천에 옮겼습니까? 올 1년 동안 맡았던 책임을, 중간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감당했습니까? 시작이 아름다우면 끝도 아름다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삶일 수 있습니다. 혹 마무리가 시원하지 않아, 마음속에 아쉬움이 남지는 않았습니까? 2023년은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많았는데, 마지막 주일을 맞아서, 차라리 속이 후련하다고 생각합니까? 생각해 보면, 2023년은 다사다난의 수준을 넘어 격동의 해였습니다. 어떻게든 2023년 마지막 주일까지 왔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마지막이 있다는 게, 다행인지 모릅니다. 새로 시작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축복입니다.
올해의 마지막 날이자 주일인 오늘, 한 해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삼손이라는 인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삼손은 어떤 사람입니까?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삿 13:3-5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나실인’의 뜻은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된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받은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힘을 주셨습니다. 아무도 삼손의 힘을 당해낼 자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힘이 센지, 사자를 잡아 찢는 것을 염소 새끼를 잡아 찢는 것처럼 했습니다. 나귀의 턱뼈를 들고 나가서, 블레셋 사람 천명을 죽였습니다. 삼손은 그 시대의 그야말로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만나보는 삼손에게서는, 과거의 영웅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16:25절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너무나 초라한 모습입니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두 눈이 뽑혀서 앞을 보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보다 비참한 신세도 없습니다. 한 시대의 영웅이 그토록 몰락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때론 주위에 몰락해버린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는 굉장히 많은 능력을 주셨구나.’ ‘저 사람은 장차 큰 인물이 될 거야.’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기둥 같은 존재가 될 거야.’ 사뭇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엉뚱하게 몰락해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여러 좋은 계획들을 가지고 출발을 합니다. 그러나 한 해를 보내는 시간이 되면, 내 모습이 초라해져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한 해를 출발할 때와 달리 볼품없는 결과를 가져올까요?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오늘 삼손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왜 삼손은 몰락했을까요? 무엇이 삼손으로 하여금, 인생을 그처럼 추락하게 만들었을까요? 그 많은 은혜, 그 많은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삼손이 보잘것없는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을까요? 삼손은 자신의 약점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약점에 갇혀서 살면, 삼손처럼 몰락할 수 있습니다. 삼손의 생애는 사사기 13장에서 시작합니다. 사사기 13장은 삼손의 출생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14장에서는 삼손의 사역이 시작되는데, 그 첫 두 구절이 이렇습니다. 14:1-2절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삼손의 사역에 관한 첫 언급은, 그가 여자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생애가 여자로 시작된 것입니다. 삼손은 여자 때문에 일을 일으키고, 여자 때문에 결국은 몰락하게 됩니다. 삼손에게 약점은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여자들을 조심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를 선택할 때, 단 한 번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기 느낌대로 여자를 취했습니다. 첫 번째 아내 때문에 문제를 일으켰다가 아내를 빼앗겼고, 기생을 좋아했다가 결국 들릴라를 사랑했고, 그 들릴라 때문에 죽임을 당합니다. 삼손이 좋아했던 여자들을 보면, 다 이방여자들이었습니다. 믿음과 전혀 관계없는 여자들이었습니다.
삼손의 부모님 역시 믿는 며느리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14:3절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그러나 삼손은 부모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습니다. 삼손은 자기의 약점이 여자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자기의 약점을 다스리지 못하면, 결국 몰락하게 됩니다. 약점이 있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약점을 모르는 게 문제고, 약점을 인정하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약점을 알고도 다스리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능력을 받은 사람이라도, 그 약점 때문에 결국 망하게 됩니다.
약점을 다스리지 못해서 망한 사람도 있지만, 그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질이 급했습니다. 생각이나 말보다 행동이 앞섰던 사람입니다. 그게 그의 약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의 약점을 잘 다스렸습니다. 벧후 1:5-7절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성질이 급하고 행동이 앞서서 실수가 잦았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깐깐한 사람입니다. 한 번 기면 기고, 한 번 아니면 아닌 사람입니다. 그게 그의 약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약점을 잘 다스렸습니다. 빌 4: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깐깐하고 날카로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거 같지 않았던 바울이, 감옥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마지막 잎새’란 소설로 유명한 오 헨리는, 옥살이 했던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가 시골 은행원으로 재직 시에, 부정 지출한 일 때문에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그 후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명성을 얻었습니다. ‘돈키호테’라는 소설을 쓴 세르반테스 역시, 옥살이를 한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가 해군 장교로 있을 때, 부정에 개입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그 후에 이 소설을 쓰게 되었습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소아마비 장애라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39살까지 소아마비 증세로 다리를 절고 고생했지만, 은퇴하는 그날까지 미국 대통령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4번이나 지냈습니다. 무엇보다 장애를 극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훌륭하게 치러냈습니다. 밥 호프라는 미국의 희극 배우는 가난이 약점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이름 없는 권투선수로서, 한 달에 겨우 200불(25만원)쯤 버는 가난뱅이였습니다. 그런 그가 미국 코미디의 황제가 되었고, 기네스북에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엔터테이너로 올라 있습니다. 슈베르트라는 음악가 역시 가난이 약점이었습니다. 그는 가난에 지쳐 31살에 죽은 그야말로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죽는 날까지 피아노 한 대가 없는 가난한 음악가였지만, ‘아베 마리아’ ‘마왕’같은 명곡을 남겼습니다. 그것도 오선지 한 장 없는 레스토랑의 웨이터로서 말입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이혼이란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나운서, 스포츠 해설가, 배우 등을 거쳐, 미국의 대통령직을 멋지게 감당해냈습니다. 이혼 경력을 딛고 대통령에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그는 지금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입니다.
약점은 다스리는 것입니다. 약점을 다스릴 때,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점을 다스리지 못하면 불행해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약점을 갖고 있습니까? 돈입니까? 돈만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까? 충동입니까? 매사에 충동적입니까? 친구입니까? 가족보다 친구를 더 위하는 편입니까? 성질입니까?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합니까? 건강입니까? 건강이 따라주지 않습니까? 게으름입니까? 게으름이 발목을 잡습니까? 잠입니까? 잠 때문에 문제가 일어납니까? 약점을 고치려고 해야 합니다.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점을 놓고 기도하고, 약점을 이기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합니다. 끝까지 내 약점을 극복해야겠다는 각오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약점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만 극복하면 됩니다. 약점 극복에 모든 에너지를 써버리면, 강점 개발에 힘쓸 수 없게 됩니다.
삼손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무시하였습니다. 삼손이 나실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날 때부터 하나님과 약속된 사람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세 가지를 금해야 했습니다. 첫째,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면 안 됩니다. 둘째, 부정한 것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머리에 삭도를 대면 안 됩니다. 그런데 삼손은 이 모든 것을 다 무시했습니다. 그는 부정한 것을 가까이 했습니다. 삿 14:8-9절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맞이하려고, 다시 가다가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율법은 사체를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만지지를 않았습니다. 가까이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죽은 사자의 몸에서 취한 꿀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도 갖다 드렸습니다. 그는 삭도를 대게 했습니다. 삿 16:17절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나실인은 어떤 경우에도 삭도를 댈 수 없다는 규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집요하게 요청하는 들릴라의 요구에 그만 굴복했습니다. 그가 기생집을 드나든 것을 볼 때, 그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셨을 거라는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맨 정신으로 기생집 드나들기는 힘듭니다. 그러니까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나실인으로 불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실인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지키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살아갔습니다. 자기가 나실인이란 사실조차 잊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자기 정체성을 잊고 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신분 안에서, 인생의 정도를 걸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삶의 정도를 걷지 않으면, 인생에 불행이 찾아오고 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신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 성령의 전, 청지기, 복음전하는 자 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기쁨으로 살았습니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았습니까? 성령의 전으로서 거룩하게 살았습니까? 청지기로서 주인의 뜻대로 살았습니까? 복음전하는 자로서 열심히 살았습니까? 삼손은 나실인이었지만, 나실인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나실인과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나실인과는 전혀 다르게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의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만족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때 거기에 행복이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 거기에 만족이 있습니다.
삼손은 세상 소리에 넘어갔습니다. 삼손이 결정적으로 몰락하게 된 것은 들릴라라는 여인 때문입니다. 삿 16:15-16절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들릴라는 삼손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들릴라는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고, 눈만 뜨면 삼손을 다그쳤습니다. 시간만 나면 삼손을 달달 볶아댔습니다. 들릴라가 삼손을 블레셋에 넘기면, 그 대가로 은 1,100냥을 받게 됩니다. 은 1,100냥은 당시로서 굉장히 큰돈입니다. 그 당시 한 사람의 연봉이 은 10냥 정도였다고 하니까, 그 액수가 얼마나 큰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은 1,100냥은 보통 사람이 쉽게 만져볼 수 없는 큰돈입니다. 이 큰돈을 닳고 닳은 여인 들릴라가 물리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들릴라는 돈 때문에 삼손을 판 것입니다. 들릴라는 돈 때문에 삼손을 넘겼고, 삼손은 여자의 눈물 때문에 자기 인생을 넘겼습니다. 삼손이 세상 소리를 들은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보다, 사람의 음성을 더 들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소리보다, 세상 소리를 더 들으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사람의 소리가 커지면, 하나님의 소리가 작아집니다.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면, 하나님은 목소리를 낮추십니다. 교회에서 들려야 할 사람의 소리가 있긴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기도 소리, 찬송 소리, 성경 읽는 소리입니다. 기도와 찬송과 성경 읽는 소리는,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고 믿습니다. 올 한 해 우리교회 기도 소리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찬송 소리도 100%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성경 읽는 소리는 충분하지는 않았습니다. 새해엔 우리교회에 기도, 찬송, 성경 읽는 소리가 충만하기를 기대합니다.
어떤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회중시계를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린 장소는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 안이었습니다. 아이는 사방을 뒤졌으나 찾을 길이 없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모든 스위치를 끄고 조용히 있어 보자고 했습니다. 정말, 얼마 있지 않아서 째깍째깍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시계는 주위 환경이 조용해지자, 구석진 바닥에서 자신을 주인에게 알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세상이 시끄러울 때도 조용히 있어 보렴. 잃어버렸던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하기 위해서, 세상의 소리에 대해 일부러 귀를 막아보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요, 성경 해석가인 윌리엄 바클레이는 평생 300여권의 성경 주석서를 냈습니다. 어떤 젊은 목회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책을 300권이나 쓸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그는 자신의 양쪽 귀에서 보청기를 빼면서, 다소 엉뚱한 말을 했습니다. “바로 이 보청기 때문에 그런 책을 쓸 수 있었어요.” 사실 그의 말이 틀린 게 아닙니다. 그는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의지하지 않고는, 잘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쓸 때 보청기만 빼면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집중이 잘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소리와 하나님의 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는 귀를 갖지 못했습니다. 하나의 소리가 잘 들리면, 다른 하나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새벽에 광야로 가셨습니다. 새벽은 고요한 시간입니다. 광야는 고요한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고요한 시간대와 고요한 장소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일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직 사람의 소리만 듣고 뛰어다녔습니다. 결국 일그러진 영웅의 뒷모습만 보여줬습니다. 한 때 영웅으로 호령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전설속의 인물이 될 뻔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삼손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삿 16:22절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비록 삼손은 하나님께 무관심했어도, 하나님은 그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을 떠나 살았으나, 하나님은 그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지만 불행했습니다. 영웅으로 태어났지만, 영웅답지 못한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비참하게 잡혀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눈이 뽑혀서 갈 곳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잔치에 노리개거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삼손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삼손을 다시 일어서게 하셨습니다. 삼손의 입에서 하나님을 부르짖게 만드셨습니다. 삼손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삿 16:28절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삼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하나님을 찾은 적이 없었습니다. 자기 인생이 몰락하고 나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처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그는 처절하게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우리 인생을 회복하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이번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딱 한번만 기회를 달라는 것입니다. “이번만”을 구하는 삼손의 기도는, 지난날 제멋대로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회개의 기도입니다. 자기 약점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하나님과 약속을 저버리고, 세상 소리만 듣고 살아온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해주셨습니다. “이번만”을 구하는 삼손의 기도는 진실했습니다. 조금도 가식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기도였습니다. 자기 욕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무욕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진실한 기도, 순수한 기도, 무욕의 기도’에 기쁨으로 응답해주셨습니다. “이번만”을 구하는 삼손의 기도는, 자기 사명을 자각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에야 자기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진즉 깨달았다면 그는 위대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탁월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애석하게도 지난날들을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죽기 직전에라도 사명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명 감당을 위한 기도에 응답해주셨습니다. “이번만”을 구하는 삼손의 기도는, 이타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눈뜨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힘센 영웅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죽어도 좋으니 민족의 원수를 갚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희생적인 기도에 응답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삿 16:30절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이 말씀은 삼손의 죽음에 대한 평가이기도 합니다. 삼손은 비참하게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명을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 사라져간, 다시 일어선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삼손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려고 결심합니다. 그래서 죽기를 각오하고 건물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삼손은 실패한 자리에서 살기를 원하기보다는, 죽기를 각오하였습니다.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더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고 나선 것과 비슷합니다.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서는 자가, 큰 일을 할수 있는 법입니다. 누구든지 희생을 아끼지 않는 자는, 무적의 용사처럼 강해질 수 있습니다.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희생하는 사람은, 가장 약한 존재라 할지라도, 위대하고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주의 독립군에 대한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젊은 신병들이 독립군에 지원할 때 독립군 선배들은 그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첫째, 너는 총에 맞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둘째, 너는 굶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셋째, 너는 추위에 얼어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 세가지 물음에 대해서 단단한 결단을 한 청년만, 독립군에 가담시켰다는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주의 일 감당하려고 나서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또한 삼손은 기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방백들이 다 모이는 이날에,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 삼손의 실패는 기도하지 않은데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과거 삼손이 블레셋과 싸우면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로 준비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단한번 삿 15:18절에 기도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블레셋과 싸우기 전이 아니라, 싸우고 난 뒤에 목이 말라서 죽을 지경이 되니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과 싸우기 전에 기도한 적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힘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삼손은 자기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넉넉할 때에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누가 기도 많이 합니까? 젊은 사람보다는 나이드신 분들이 기도합니다. 건강한 사람보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기도합니다. 돈 많은 사람보다 뭔가 부족한 사람이 기도합니다. 똑똑한 사람보다 평범한 사람이 기도합니다. 삼손이 그랬습니다. 힘있고 똑똑했기 때문에, 그는 기도할 줄 몰랐고, 기도의 필요성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무런 힘도 없고, 자신의 지식을 의지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자, 이제야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삼손은 두 눈이 빠져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절망에 부딪친 삼손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삼손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삼손이 다 잃어버린 것 같아도 기도하기 시작하니, 그의 인생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로 다시 일어선 삼손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시 일어서려면, 무엇보다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일생동안 기도 한 번 하지 않았던, 삼손도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희망찬 2024년을 맞이하는 이 시간,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우리 인생의 목표를 두고 살 결심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죽기 살기로 달려들 때,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란 약속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만 의지하며,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 영육간에 축복의 2024년 새해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지난 일 년 동안 저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드리는, 기도와 찬송과 경배를 열납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 나라와 민족이 겪는 수많은 고통의 파도에 휩쓸려 넘어지지 않고, 이렇게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경배합니다. 우리는 삶의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께 맞추게 하옵소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며 닮아가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험한 세상에서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비록 아픔이 있고, 박해가 있고, 고난이 있고, 절망이 있고, 낙심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나 혼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 잡혀있음을 확신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에 향기가 있게 하옵소서. 이제 새해에는 주의 도우심과 능력을 힘입어, 매사에 충성과 감사를 다할 수 있게 하옵소서. 혹시 있을 시련과 고난을 통해, 더욱 성숙해지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때로 저희가 연약해 질 때에도, 원수 마귀의 올무와 세상의 덫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성령의 강한 능력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실현하고, 가정이 화평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새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