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예화 모음
* 스탠포드 대학 섭립의 동기 *
미국에서 스탠포드 대학은 우리나라 서울대 연 고대처럼 명문 대학입니다.
그런데 그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한 사람이 바로 '스탠포드'입니다.
스탠포드가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한 동기가 있습니다.
스탠포드는 부자였습니다.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잘 생기고 수재였던 외아들이었습니다.
극도의 슬픔에 잠긴 아버지는 장례식에서 말을 잃었습니다.
슬픔 속에 잠을 자지 못 하고 있는 데
그 날 밤 꿈에 아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나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저 대신 청년들을 도와주셔요.'
스탠포드는 이 환상을 보고 인생관이 확 바뀌고 말았습니다.
'예수님도 살아 계시고 내 아들도 살아있다!' 스탠포드는 이런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소원을 들어 주기고 하고 청년 교육에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당시 거액인 2천만 달러 약 200억 원을 바쳐서
오늘의 명문인 스탠포드대학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죽을 때 이런 유서를 남겼습니다.
'나의 재산은 10원짜리 동전 하나 남기지 말고 청년 교육에 사용하라'
* 김씨 부인의 부활 *
채필근 목사가 어릴 때, 한동네 사는 김씨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 준비가 잘 안되어서 사흘 만에 재목을 구하여 관을 짰다.
다음날 옷을 입히고 입관을 하려 하는데, 죽었던 김씨 부인이 일어나더니 물을 찾았다.
고양이가 시체를 뛰어넘으면 시체가 일어선다고 해서 야단이 났다.
그러나 김씨 부인이 정말 살아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강물이 있어 다리를 건너는데 좌우에 흰 옷 입은 사자가 잘 보호해 주었다.
그 중 한 사자가 '너는 아직 올 때가 못 되었으니 가서 예수 잘 믿고 잘 준비해 가지고
오너라' 라고 말했다"
이 소문이 퍼져서 백 리 밖에서까지 김씨 부인을 구경하러 와서 30명 모이던 교회가
100여 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 라이트 목사의 부활 신앙 *
1827년 스코트랜드의 항구에서 배에 올라탄 노인 목사가 있었다.
성 안드레 교회에서 50년간 설교한 라이트 목사 (Henry Francis Lyte)였다.
건강을 위하여 따뜻한 곳에 살아야 하겠다는 의사의 지시를 따라 프렌치 리비에라로
떠나는 길이었다. 첫번 기항지인 프랑스의 북부 항구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아침 출항
시간에도 라이트 목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여관방을 열었더니 노인 목사는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며 책상에는 밤사이에 쓴 시 한 편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 전세계가 애송하는 찬송가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Abide with me, 531장)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런 내용이다.
날은 빨리 저물고 어둠이 짙어가는데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아무도 나를 위로해 줄 수 없을 때
오직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주여,
나와 함께 거하소서
작은 인생은 썰물처럼 멀어가고
땅의 기쁨과 영광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변하지 않는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주님의 축복이 내 곁에 있으면
병도 힘을 못쓰며 눈물도 쓰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죽음도 무덤도 승리의 개가가 되리이다
내 눈을 감기 전에 십자가를 보게 하소서
하늘의 새벽이 밝아올 때
허망한 땅의 그늘은 사라질 것이오니
사나 죽으나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 부활 사실과 부활 신앙 *
기독교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두 기둥 위에 세워진 종교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크리스천들을 부활에 도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행 4:2)
부활신앙을 예수의 부활 사실 밖에서 기원을 찾으려는 잡설들이 처음부터 있었다.
예수가 기절했다 살아났다느니,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다 사기극을 꾸몄다느니,
환상을 보았다느니, 여자들이 다른 빈 무덤을 보고 착각했을 것이라는 등등의 얘기들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사도행전의 부활신앙과 생명종교를 만들어 내기란 동에서
서만큼 멀고 예수가 부활한 사실보다 더 힘든 기적이다.
* 부활 신앙의 부활 *
미국 대통령을 지낸 부시가 부통령 시절에 소련 부레즈네프 수상의 장례식에
미국 대표로 참석했다. 장례식은 공산당의 관례대로 진행되었다. 모든 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검정 색이나 붉은 색으로 덮여 있었다. 장례식의 말미에는 고인을 위한
마지막 경의를 표하는 순서가 있었고 이때 고인의 부인이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품에 간직했던 백합 한 송이를 꺼내어 관 위에 놓았다.
백합은 전통적으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그리고 미망인은 남편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식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여인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일어선 그녀는 성호를 그었다.
이 순간, 여기저기서 미망인을 따라 성호를 긋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았던 조지 부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얼어붙은 소련 땅에 기독교 신앙은 완전히 죽어 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순간 부활 신앙이 부활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 부활 주일 *
어느 교회 목사님이 주보에 부활 찬송을 많이 넣어서 인쇄소에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인쇄소에서 주보 원고를 받아 보고는 "이번 주일이 부활 주일도 아닌데,
부활절 찬송을 여기 넣습니까 ?" 하면서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 물었습니다.
목사님이 대답하시기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주일 예배가 부활절 예배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부활절 아침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갈라진 분기점입니다.
지금까지 유대교인들은 안식일, 즉 토요일에 예배드렸지만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아침을 계기로 하여 일요일을 주일로 정하고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에게는 사실 매주일이 부활주일인 것입니다.
[부활] 천국은 있습니다 -윌리암 브라이언
윌리암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iyan)이란 사람이 이집트를 여행하다가
3천년 된 미이라 속에서 말라빠진 밀(Wheat)을 발견하고 한 웅큼 쥐어다가 집에서
심었습니다. 그랬더니 약 한 달이 지나서 싹이 나고 잎이 나서 그 이듬해 다른 밀
종자와 같이 수확을 했습니다.
그후부터 브라이언씨는 방방곡곡에 다니면서 "3,000년 묵은 밀 알갱이에서
새 생명을 솟아오르게 하시는 하나님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죽음에서 부활시킬 수
없겠느냐?"고 하면서 전도하며 다녔습니다.
* 부활은 소망입니다 *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죽음을 완성으로 이끄는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 역사적 사건이란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결국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없는 셈입니다.
언젠가 키에르케고르는 그와 같은 생각을 부드럽고 편편한 돌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편편한 돌을 연못의 수면 위로 던지게 되면 춤을 추듯 물위를 미끄러져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더니 물 속으로 쑥 가라앉아 버리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수면이 잔잔해집니다. 마치 이것은 사후의 소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극작가인 사무엘 베케트는 '호흡'이라는 희곡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막이 오르면 쓰레기가 잔뜩 어질러져 있는 무대가 등장합니다.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아기의 첫 울음 소리로 시작한 연극은 한 노인의 임종의
헐떡거림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막이 내려옵니다.
여기서 베케트가 말하고자 한 요지는 인생은 허무하고, 존재는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벧전 1:3, 4). 이것은 한 마디로 소망을 의미합니다.
* 부활의 기쁜 소식 *
카우만 부인이 느긋한 마음으로 시카고의 한적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 때 어떤 집의 열려진 창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그림이 보였다.
부인은 그림을 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이상한 힘에 묶인 것처럼 오랫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문득 옆에 누군가 있는 것을 느껴 돌아보니 한 소년이 정신 없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십자가상의 그리스도 그림이 소년의 넋을 붙잡고서 놓지 않는 듯한 느낌 을 그의 표정에서
읽었다.
부인은 대견한 생각이 들어서 소년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물었다.
"얘야,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그림이 무엇인지 아니?"
"그럼, 할머니는 모르고 계십니까?"
소년은 부인이 그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놀라움에 가득 차 이렇게 되물었다. 그러고는 그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할머니, 저기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로마 군인이고, 울고 있는 저 여인은 예수님의 어머니입니다.
저 병사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부인은 그 그림 앞을 떠나고 싶지 않았으나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얼마만큼을 갔을 때 소년이 숨을 헐떡이며 따라와서는 말했다.
"할머니, 제가 가장 먼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말해야 하는데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그 사실을 알려 주려고 이렇게 달려왔어요."
* 부활의 신앙 *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은 부활 사실을 증명하려고 노력한 적이 없으며 목격한 사람들이
"우리가 그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인류역사상 예수님 부활사건처럼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일이 없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와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을 발견한 그리스도인은 현실적인 부활 능력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볼 때 예수의 부활능력 안에서 보므로 이 세상이
마지막이 아니며 시간적 여유가 있으므로 결코 초조하지 않습니다.
부활이란 높은 망대 위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큰 유혹도 "별것 아니다"며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우리의 생명도 그를 따라 부활하게 되는 사실이 믿는 자의
소망이며, 신앙의 뿌리입니다.
* 부활의 역사 -스펄전 *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가 하루는 새장 속의 새를 괴롭히는 불량소년을 보았다.
『새를 어떻게 할래?』
스펄전이 묻자 소년은 대답했다.
『괴롭히다가 죽일 거예요』
스펄전은 2파운드를 주고 그 새를 사서 멀리 날려 보냈다.
이틀 후 부활 주일.
스펄전은 이렇게 설교했다.
『마귀는 인간을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요, 부활의 역사입니다』
* 부활의 확증 *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려는 자들이 온갖 수단과 모략을 했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예수의 부활 부인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절설 -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남
둘째, 도거설 - 도둑질해 감
셋째, 타묘 - 다른 사람의 모재에 묻힘
넷째, 허보설 - 허위 보도
다섯째, 강령설
그러나 예수의 부활사건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확증된다.
첫째, 주일을 지킴
둘째, 성경의 예언
셋째, 교회의 탄생
* 부활절 계란 *
믿음이 좋은 로자린드의 가정이야기요, 부활절 계란 이야기이다.
그녀의 남편이 십자군으로 출정한 사이에 그의 영지의 하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넓은 영지와 모든 소유를 점령하고 그녀를 내쫓아버렸다.
그러자 다른 마을 친절한 사람들이 그녀에게 닭 몇 마리를 주어 계란을 받아서 살게 했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로자린드는 계란을 조금씩이나마 나누어주었는데
그 계란을 아름답게 색칠하고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 이라는 글을 써서 돌렸다.
어느 해 부활절 모든 교인들과 시민들에게 그렇게 만든 계란을 돌리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병으로 위독한 소년을 만나 그 계란을 모두 주며 그 계란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효도하라고 했다.
그 소년이 계란을 들고 가는데 어떤 노 병사 하나가 병과 굶주림으로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
그 소년은 가지고 가던 계란을 주었다.
그 계란을 받은 노 병사는 그 계란에 새겨진 글이 자기 가정의 좌우명임에 깜짝 놀라
어디서 그 계란을 얻었느냐고 물었다.
그 소년은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 노 병사는 힘과 용기를 얻어 그곳을 찾아가 사랑하는 아내를 만났던 것이다.
* 부활절 그 기쁨의 날 -Sandra Simpson LeSourd *
이제 난 알콜중독에서 벗어나 회복 단계에 접어들었다. 최근엔 결혼도 했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사역도 하면서 나는 무슨 일에서나 항상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다.
예수님의 수난일인 부활절 전의 성 금요일은 여전히 눈물을 닦아 주는 날이었으며
토요일은 기다림과 인내를 배우는 날이었다. 그러나 내겐 기쁨이 없었다.
특히 부활절의 그 기쁨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여러 해 동안 난 그 기쁨을 얻고자 갈망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부활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는 내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아주 엉뚱한 시간에, 뜻밖의 사람들을 통해 찾아들곤 한다.
내겐 그 기쁨이 10일간의 멋진 이스라엘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 찾아왔다.
정원 무덤(영국의 개신교도 고던 장군이 발굴한 장소로, 예수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고고학자들에게 인정을 받은 곳은 아니지만 기도할 수 있도록 꾸며진 아담한 장소로 기독교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편집자 주)에 이르러 돌산을 깎아들어가 만든 작은 방안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가슴 속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거기엔 좁고 긴 의자 같은 선반이 있었는데, 바로 그곳이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곳으로
추측되는 곳이었다. 아무 것도 놓이지 않은 이 돌 선반을 바라보면서,
난 그 양쪽에 앉아 마리아를 맞이했던 두 천사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자그마한 전자 하프를 가지고 있던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조심스레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무덤 안에 감미로운 음악소리가 울려퍼지자 우리들은 조용히 그 곡조를 따라 흥얼거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부활하셨네. 할렐루야!'
우리 일행 중 나머지 사람들도 우리의 노랫소리를 듣고는 무덤 앞뜰에서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쁨을 나누었다.
새 노래를 이어 부를 때마다 우리들의 영혼도 함께 소생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바로 그 방 안으로 옮겨진 듯 느끼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파도처럼 내 온몸으로 밀려들었다. 예수님은 살아계셨다!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예수님은 정말 무덤에서 일어나셨다!
우리들은 계속 노래하면서 밖으로 걸어나갔다.
차분한 성격의 영국인 안내인까지 우리들의 환희에 압도되어 흥겨운 춤을 추었다.
그때 친구 마가렛이 내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오늘, 나는 1984년, 성지 순례 여행의 기록이 담긴 사진첩을 죽 훑어보면서
내 모습이 담긴 그 사진을 바라본다.
두 손을 높이 든 채 내 얼굴은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로 그 얼굴엔 '기쁨'이 가득했던 것이다!
* 부활절 달걀은 사랑의 상징 -로잘린 *
십자군 전쟁때의 일이다.
로잘린부인은 전쟁터에 나간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문을 듣고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 틈을 이용해 재산을 가로챈 후 로잘린을 마을에서 내쫓았다.
그녀는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안착했다.
마침 부활절을 맞아 마을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준비했다.
얘들아.너희들의 나무를 하나씩 정하렴.
그리고 나무 밑에 둥지를 만들어 놓아라.그러면 둥지에 예쁜 알이 들어있을 것이다
로잘린은 둥지에 형형색색의 그림과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글이 적힌 달걀을
놓아두었다.어린이들은 신기한 표정으로 색달걀을 받았다.
그런데 한 소년이 달걀을 들고 친척집을 가던중 길가에 쓰러진 부상병을 만났다.
소년은 부상병에게 달걀을 주었는데 부상병은 그곳에 적힌 글씨와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것은 내 아내 로잘린의 그림인데.
그리고 이것은 가훈이 아닌가?부활절 달걀이 부부를 만나게 해준 것이다.
그때부터 부활절 달걀은 `사랑'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 부활절, 그 기적의 현장에서 -양복임 *
그날은 부활주일이었습니다. 친구의 손에 끌리다시피 해서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따라왔지만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이미 내가 가진 신앙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니까요.
하나님을 믿고 그분 안에서 만난 사랑하는 나의 남편은 바로 넉달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를 너무 많이 사랑했는데... 그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기약도 없는 이별만 남긴 채 그는 가버렸습니다.
우린 겨우 일 년을 함께 살았을 뿐인데. 절망했습니다. 세상에 절망하고 나에게 절망하고,
나락 끝까지 떨어진 듯, 삶이 끝나버린 듯 괴로웠습니다. 결국 나는 신앙을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으니까요. 만일 계셨다면 그이를 먼저 보내진 않았을 겁니다.
친구와 내가 교회에 들어갔을 때, 자리는 벌써 꽉 차 있었습니다.
이처럼 꽉 들어찬 교회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온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밝아보였습니다. 아무도 나처럼 고통의 침같은 건 지고 있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 넓은 교회 안에서 안절부절하는 건 오로지 나 뿐이었습니다.
음악이 울려 퍼지자 친구는 내 손을 꽉 잡았습니다.
음악이 울려퍼지자 마음은 조금 가라앉았습니다.
그 때 강단 위의 한 사람이 성경 구절을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순간 이상한 기류 같은 것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습니다. 그 넓은 교회 안에 나 밖에 없는 듯
눈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두려움에 두 팔을 허공에 휘저었습니다.
그 때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니요, 아니요, 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를 당신이 데려가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니요, 그는 이미 죽어버렸고 내 삶은 절망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니요.'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개를 흔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가요. 내 눈에서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겨우겨우 나는 한 마디를 내뱉었습니다.
'왜...왜 저를 사랑하시나요. 왜 아무것도 아닌 저를 위해 죽으신거죠?
왜요?' 그 때 한 빛이 내게 다가와 나를 감싸안는게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네가 믿느냐." 눈 앞이 환해셨습니다. 그제야 안 것입니다.
진정한 부활의 의미를. 그 이후로 내 눈과 코에서 흘러내린 물들로 얼굴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 속으로부터 솟아나는 큰 울림으로 인해 몸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가 가만히 속삭였습니다. "축하해. 너에게 성령이 임하셨구나."
그러자 갑자기 나는 이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짐이 사라져버렸어. 짐이 사라져버렸다구.
이제 괜찮아. 난 이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 부활하기 위해서는 *
한국의 여인들은 아기를 낳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댓돌위에
놓여진 자기의 고무신을 다시 한 번 바라보면서 눈시울을 적신다고 했다.
과연 아기를 순산하고 다시 이 고무신을 신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문지방이 흔들리고 대들보가 내려앉는 것 같은 산통을 겪어야만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한국 땅의 민주주의가 두꺼운 벽을 깨뜨리고 움터 오르고 진리가 무덤을 헤치고 부활하기
위해서는 산고가 필요한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영적 산고를 말하였다.
* 부활하신 주님 믿사옵나이다 *
봄이 되오니 보리는 뿌리가 세 마디나 내리고 푸른 잎 두 잎이 피어 나왔습니다.
때가 되오니 고치 속의 번데기는 나비 되었고 거미는 줄을 치고 송충이는 깁니다.
새벽 미명에 무덤문이 열리고 주님 일어나사 부활하신 그 몸을 보여 주었습니다.
부활한 주여 나의 생명되심을 굳게 믿사옵니다.
죽을 몸을 일으켜 구원하여 주소서.
생명인 주여 죽음을 이기고 씩씩하게 살아나서 생명의 길 사랑의 길 걸어가게 하소서.
* 고난 속에 잉태되는 부활의 생명 *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그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부활이라는 생명을 잉태시키고 계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운행의 법칙이다.
우리는 그 고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쓰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에 함께 하시고
이 고난을 부활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때 인간은, 역사는 성장하게 되어 있다.
아브라함 마슬로우는,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하느냐는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이겨 왔느냐와 비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없이 위대한 사람을 생각하기 어렵다.
우리가 겪는 고난 속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부활의 진리가 숨어 있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기 자신에게, 가정에, 교회에,
민족에게 어떤 시련이 와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하나의 깨어진 꿈은 모든 꿈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의 부서진 희망은 모든 희망의 마지막이 아니다.
폭풍우와 비바람 저 너머로 별들은 빛나고 있으니 그대의 성곽이 무너져 버릴지라도
다시 성곽 짓기를 계획하라.
수많은 꿈들이 재난에 무너져 내리며 고통과 상한 마음이 세월의 물결 속에서
그대를 넘어뜨릴지라도 그래도 신앙에 매어 달리라.
그리고 그대의 흐르는 눈물 속에서 새로운 교훈을 배우기를 힘쓰라.
* 생명과 부활 *
몇 년 전에 뉴욕에 살던 한 코미디언이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해부실습용 대상으로 기증하겠소.
특별히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주길 바라오.
이것이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오.
부모님의 평생 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소."
이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은 역시 고통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은 웃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죽음이 닥치면 죽음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와 철학과 사상들은 죽음을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 예찬론까지 등장하기도 합니다.
죽음에 관한 미화는 죽음에서 도피하고 싶은 인간 본능의 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은 필연적이며 산 자와 죽은 자를 분리시키기 때문에 아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는 "예수님의 최대 업적은 그분이 부활의 메시지를 선포하신 것이고
그 메시지로 다시 사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삶이 당신을 좌절과 어두움과 절망에 몰아넣더라도 주께서는 부활과 생명으로
다가오십니다. 주께서는 무덤 저 건너편의 놀라운 소망을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삶을 치유하시며 나를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문제는 이것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죽음의 극복은 불로초를 먹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기독교의 특성은 영혼의 불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로 인해 모든 종교나 사상을 뛰어넘습니다.
*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이유 *
"어째서 아저씨는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고 믿는지 어디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두 소년이 믿음이 좋기로 이름난 어른에게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어른은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늘 아침에도 나는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