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의 성경과 천주교의 성경은 권수가 다르다. 개신교는 신구약 66권으로 되어 있고, 천주교는 신구약 66권에 외경(外經)을 더해 73권으로 되어 있다. 개신교회는 외경을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비하여 천주교회는 외경을 제2경전으로, 즉 정경으로 취급하고 있다. 천주교의 연옥교리나 죽음 이후의 속죄 교리,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등과 같은 비성경적인 교리들이 바로 외경에서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경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믿음과 구약신학의 가장 기초적인 문제의 하나인 “정경”에 대한 부루스 월트키의 글을 타자 쳐 올린다. 가독성을 위하여 각주는 제외하였다.
구약신학의 기초- 좁은 정경
마지막으로, 이 책은 개신교의 좁은 정경인 66권의 구약과 신약 성경의 목록, 곧 역사적 기독교의 모든 종파가 공유하고 있는 책들을 전제로 한다. 청교도 설교자인 토머스 왓슨은 "두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두 입술이다."라고 말한다. 교회는 이 책들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인정했다.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헬라어 신약 성경 편집자 가운데 하나인 쿠르트 알란트는 이렇게 말한다. “[정경은] 주교단이나 교회 회의를 통해 위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공동체를 통해 받아들여졌다……제도권 교회가 정경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제도권 교회는 이미 만들어져 있던 정경을 인정했을 뿐이다. 사실은 정경이 교회를 만들었다. 하나님이 영감을 주셨기 때문에 이 책들은 다른 책들, 신앙고백들 그리고 기독교적 경험과 달리, 독보적으로 교회의 신앙과 삶에 대하여 권세 있고 규범적인 책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것(Credenda)과 우리가 실천하는 것(Agenda)을 보여 준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다(딤전 3:15). 말하자면 교회는 기둥 및 터와 같이 진리를 떠받치지만 진리는 교회에서 연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진리를 받아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영감받은 가르침 위에 굳게 서게 된다(엡 2:20).
비록 정경 문제가 당연한 권리로 풍부하게 논의되고 있기는 해도 이 주제를 적절히 다루는 것은 이 책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하지만 간략한 설명이 약간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로마 가톨릭 진영에 속하지 않은 여러 성경신학자들이 최근에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는 명시하지 않고 최소한 외경 몇 권을 정경에 포함시키기 위하여 정경의 범주를 희미하게 하는 주장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정경의 경계를 희미하게 하는 견해를 논박하기 위하여 다음 여섯 가지 요점을 제시한다.
(1) 정의상 정경은 엄밀한 경계를 갖고 있다. 신앙고백 공동체에게 신앙고백의 기초는 불분명한 테두리를 가질 수 없다. 어떤 책은 교리와 실천을 세우는 데 있어서 권위를 갖고 있거나 아니면 갖고 있지 않거나 하다. 불분명한 테두리는 영감받은 책에 대하여 애매한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할 것이다.
(2) 박식한 제임스 바가 흥미롭게도 언급하지 아니하는 로저 벡워스는 설득력 있게 유대교의 협의의 정경은 유다 마카비(주전 165년) 시기에 종결되었고, 이것이 신약 시대 교회의 정경이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입증했다. 비록 대부분의 외경이 신약 성경이 기록된 시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약 성경은 이 책들을 결코 인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단순히 부정적인 증거만 인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집회서 대부분은 바울의 사상에 동조적이고, 바울은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교리를 지지할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집회서를 결코 인용하지 않는다. 다른 외경도 마찬가지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책들은 랍비들이 읽도록 권유했기 때문에 사도들에게도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이 책들을 인용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이미 확립된 협의의 정경을 지지했다는 증거를 옹호한다. 제임스 바는 "기독교에 기반을 둔 일부 특수 집단에서는 정경이 아직 정해지지 않고 열려 있는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신약 성경의 교회가 정경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같이 주장한 적이 없다는 증거를 입증하지는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후기의 기독교 전통들이 최소한 외경 몇 권을 정경에 포함시켰다는 사실-그리고 이것은 트렌트 공회의에서 결정될 때까지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정착되지 않았다-로 사도들의 교리에 나타나 있는 이 근본적인 사실을 흔들지는 못한다.
(3) 제임스 바는 유다서 14절은 주전 1세기에 에녹1서(12:4)에 나오는 예언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사실로 보고 중시한다. 그러나 제임스 바는 유다가 자신의 자료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독자에게 지적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행했던 에녹'(즉 하나님과 걸으며 대화를 나눈)에게서 이어져 온 전통이었을 것이다. 유다서의 요점은 이 예언이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제임스 바는 또한 에녹서가 로마 가톨릭교회나 그리스 정교회의 성경에서도 한 부분이 아닌 위경의 하나라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위경은 아주 먼 지역(예, 에티오피아, 시리아어를 말하는 일부 교회들, 또는 슬라브 문화 지역)에서 "그것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마 제임스 바는 희한하게도 "우리의 목적상 외경과 위경 간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고 여기서 대부분 무시되어도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기독교 분파들이 정경의 경계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외경과 위경을 구분하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정경의 한계를 논하는 논문에서 무관심할 수가 있단 말인가? 교회가 먼 지역들과 교통할 수 있는 신속한 교통수단이 없는 가운데 기존 세계에 세워져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교회 간에 정경 이해에 있어서 사소한 차이가 발견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좁은 정경에 대한 견해에 만장일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4) 여러 세기 전 종교개혁자들은 외경에서 '거짓 교리'를 찾아냈다. 외경에서 우리는 나머지 성경과는 반대로 연옥 교리, 죽음 이후의 속죄 교리, 죽은 자를 위한 기도 교리 등을 찾아낼 수 있다(참조, 마카비2서 12장).
(5) 외경은 다른 인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종종 교훈적인 요소가 있고, 신약 성경의 배경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하기는 하다. 예를 들면 마카비1서 9장 27절에 따르면, 예언은 저자가 살던 시대보다 오래전에 멈추었고, 때가 되어 거룩한 역사의 무대 위에 요한이 등장할 때에는 예언이 더욱 두드러졌다(28장을 보라). 다시 말하면, 하늘은 4세기 동안 사실상 예언에 대하여 침묵을 지켰고, 이 기간 동안에 한편으로는 예언이 생생한 메시아 대망으로 무르익고 발전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을 떠난 전통들이 도입되었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때가 되자 이스라엘은 다시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때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선포했다. 이 예언의 음성이 공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제이 성전 시대에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요한 히르카누스와 같은 일부 대제사장들의 주장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28장, 각주 11을 보라). 하르트무트 게제가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는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가 무너졌다. 존재는 존재하게 되고, 진리는 역사적 진리가 되었다."
(6) 우리의 전제로 보아 ‘정경 안의 정경’ 가능성은 배제된다. 66권의 책 전체는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적인 계시로 함께 작용한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에 모든 진리가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5만원 지폐와 만원 지폐는 똑같이 권위를 갖고 통용되지만 똑같은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이유로 보아 신실한 자들은 어떤 본문을 다른 본문보다 더 선호하고, 그리하여 사실상 정경 안의 정경을 인정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포함하여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약 성경 39권 전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정하고, 지난 2천 년 이상 동안 그들은 신약 성경 27권에서 자기들의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교회는 정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적 실재를 표현하는 이 전달 수단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인정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기 때문에 성경신학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브루스 월트키 지음, 김귀탁 옮김, 『구약신학』(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pp. 39~42.
첫댓글 좋은 내용입니다. 외경, 위경을 집어 넣어서 좁은 의미의 진리를 훼손하면 안 되겠습니다.
공감합니다.
위경 [僞經]
[천주] 전거(典據)가 분명하지 않아 성서에 수록되지 않은 30여 편의 문헌.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서 기원전 2세기경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종교적 서적 가운데 경전에서 제외된 모든 서적을 부르던 말이다. 구약 위경에는 <12성조(聖祖)의 유훈(遺訓)>, <헤녹서>, <유빌레움>, <므나세의 기도>, <제3에즈라서>, <제3마카베오서> 등이 있으며, 신약 위경에는 <에피온인의 복음서>, <히브리인의 복음서>, <이집트인의 복음서>, <니고데모의 복음서>, <야고보의 복음서>, <베드로의 복음서> 등을 비롯하여 각종 사도행전, 서간, 묵시록 따위가 있다. 물론 신약 성서에선 제일 경전과 제이 경전의 구분이 없으므로 경전 외의 작품들을 모두 이렇게 부른다.
출처: Daum 국어사전
국어사전에 나올 정도가 위경의 용어이군요.
외경 apocrypha , 外經
요약) 역사를 통해 이 용어가 사용된 예를 보면 그것이 일종의 비밀스런 작품을 가리켰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작품은 처음에는 칭송되다가 후에는 관용적으로 인정되며 결국에는 배제되었다. 유대-그리스도교 성서 작품에서 외경의 일반적인 개념에는 진정성을 의심하는 여러 차원이 있다. 외경은 신의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지만 신자들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위경은 표면상으로는 성서의 인물이 쓴 가짜 작품이다. 제2의 정경작품은 하나의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일부에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초기 몇 십 년 동안에는 정통이란 것이 설정되어 있지 않았기에 여러 분파들이 역사가 짧은 교회에서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경쟁했다. 설교나 선교를 통해 신자를 얻으려고 했듯이 모든 싸움은 저술을 통해 행해졌다. 실제로 후에 이단으로 정죄당한 신앙을 옹호한 작품들은 거부되거나 파기되었다. 이런 일들로 인해 정통 그리스도교 교회는 성서의 정경화 과정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하 Daum 백과사전 참조
아래 링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민간인 위키 보다는 공적인 백과사전 Daum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6a2453a
딤전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호크마 주석>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 본절에서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청지기 역할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다. 몇 사본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헬라어 사본에서 '행하여야'라는 동사의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이 동사의 주어는 일반적인 사람이나 디모데가 포함될 수있다. 비록 본 동사('알게 하려')의 주어가 디모데이나 앞의 구절에서 열거되었던 지침들을 살펴보면 문맥상일반적인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Guthrie). 한편 '하나님의 집'(* ,오이코 데우)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우러러보는 그리스도인 전체의 가족'을 나타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정'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는 지 상에 있는 보편적 교리를 가리킨다. 교리를 집이라고 일컬은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되는 가족들을 소유하고 계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Earle, Lenski).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 교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살아 계셔서 주관하시는 하나임의 소유이다. 바울이 이처럼 교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소유라고 말한 것은 교회를 돌보는 사람들이 지킬 거국하고 흠 없는 생활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Hervey).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 여기서 '기둥'은 '터'에 의해 더욱 강화되는 지주(支柱)의 개념을 갖는다. 그리고 본문 전체를 볼때 '기둥'과 '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되는 '진리'의 확실성과 견고성을 강조한다. 혹자는 본문을 '하나님께서 각 지역 교회의 신앙의 증인들을 사용하사 교인들의 삶의 터전 위에 진리를 강화시켜 나가신다는 의미로 해석한다(Lock).
엡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호크마 주석>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 바울은 본절에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터'라고 진술한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에서의 속격에 대해 혹자는 주격적 속격으로 해석하여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놓여진 터'라고 주장한다(Meyer, NEB). 그러나 그것은 동격적 속격으로 '사도들과 선지자들로 구성된 터'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Lincoln, Bruce). 이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교회를 설립함에 있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함으로 교회의 기초가 되었음을 시사한다(Foulkes, Wood). 한편 혹자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하나의 관사로 수식되고 있기 때문에 동일 인물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D. Hill). 그러나 4:11에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각각의 관사를 사용하고 있기에 이들은 서로 다른 직분으로 다른 인물들을 지칭한다고 봄이 타당하다(Bruce, Wood). 즉 '사도들'은 부활한 그리스도에 의해서 위임(委任)받은
특별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가리키며, '선지자들'은 특별한 예언의 은사를 받은 남녀들을 가리킨다(행11:27;13:1, 2;15:32;19:6; 롬12:6; 고전14장; 살전5:20; 계1:3;10:11;16:6;18:20, 24).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이며 선포하는 자로서 교회 설립의 터가 되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 '모퉁이 돌'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건물의 기초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Mitton, Merklein, Percy). 이 경우는 70인역의 사 28:16에서 발견된다. (2) 혹자는 건물의 꼭대기에 얹는 돌이라고 주장한다(Barth, Caird, Hanson). 이 경우는 시 118:22에서 발견된다. 이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Lincoln). 결국 교회는 건물의 꼭대기에 있는 돌로서의 그리스도와 함께 완성 된 구조이며, 또한 기초석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성장해야만 하는 건물이다.
유다서 1: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호크마 주석>
아담의 칠세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 "아담의 칠세손 에녹"이라는 표현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창 5:3-24과 역대상 1:1-3에서 아담을 일대손으로 하여 계산할 경우 에녹이 칠대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유다는 창세기나 역대상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에녹서를 인용한 것이다(에녹서 60:8 ; 93:3). 유다는 당시에 인정을 받고 많이 알려진 위경인 에녹서의 인용을 통해서 자신의 진술의 진정성을 강조하고 있다(Gteen). 이어지는 인용의 내용은 에녹서 1:4, 9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많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셧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 "주께서 ... 임하셨나니"는 에녹서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도래 즉 현현에 대한 예언이었으나 (에녹서 1:4),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 적용해서 악한 자의 심판을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도하고 있다. 한편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 적용해서 악한 자의
심판을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도하고 있다. 한편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 적용해서 악한 자의 심판을 위한 그리스도의 재람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그리스도의 재림에 동반되는 "그 수만의 거룩한 자"는 천사들을 의미한다(신 33:2 ; 슥 14:5 ; 마 16:27, Cranfield). 그리스도께서는 파루시아 때에 천사들과 함께 임하셔서 불경건한 자들의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다.
@장코뱅 신약성경에 외경을 인용한 것이 있다는 것은 솔직히 처음 알았습니다.
제2경전 혹은 외경의 수용 여부
https://ko.m.wikipedia.org/w/index.php?title=%EC%84%B1%EA%B2%BD_%EC%99%B8%EA%B2%BD&wprov=rarw1
네, 읽어 보았습니다.
정경 앞의 '좁은'이라는 수식어를 보고서 진리는 넓지 않고 좁은 길에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7:13-15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