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환했다
성명진
파란시선 0143
2024년 8월 5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08쪽
ISBN 979-11-91897-81-4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이 길 어디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몰래 환했다]는 성명진 시인의 두 번째 신작 시집으로, 「우수 무렵」 「어쩌나」 「단체 사진 속」 등 60편이 실려 있다.
성명진 시인은 1990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1993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그 순간] [몰래 환했다], 동시집 [축구부에 들고 싶다] 등을 썼다.
성명진 시인의 시들은 어렵지 않게 잘 읽힌다. 괴팍하고 난해한 단어들이나 기괴하거나 난삽한 표현이 없다. 그의 시는 단순하고 담백하고 단정하다. 그러면서도 상투적인 관념이나 식상한 이미지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낯설지 않은 언어가 시인의 손을 통해 낯선 사유의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 길의 끝에서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슬픔을 서로 나누는 따뜻한 세상을 꿈꾸게 된다. 그의 시를 읽으면 고통과 분노는 사라지고 슬픔마저도 따뜻한 햇살이 되어 우리를 위로한다. 그의 시의 힘이다.
다음 시가 성명진 시인의 시적 지향과 사유의 세계를 잘 함축해 보여 준다. “예뻐라//하지만/여기 잠깐 서 있거라//나는 어디를 다녀와야겠다/우리를 괴롭혀 온/슬픔 한 가지를 이기고 돌아와서//너를 안아 주겠다”(「들꽃에게」 전문). 시를 쓰는 것은 “슬픔 한 가지를 이기”는 일이다. 그것을 통해 나 아닌 다른 존재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그를 사랑해 줄 수 있다고 시인은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 수 있다.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슬픔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성명진 시인의 시 쓰기는 아름다움과 사랑을 위해 슬픔과 마주하는 일인 듯하다. 그의 이런 작업으로 만든, 아름답게 슬프고, 슬프게 아름다운 시편들이 들꽃처럼 슬픈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신다. (이상 황정산 시인・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여기, 슬픔을 “이기고 돌아와” “너를 안아 주겠다”고 ‘들꽃’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는 시인이 있다. 그런데 그건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누군들 슬픔을 이길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슬픔을 이기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차마 지켜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슬픔이 비록 “한 가지”고 “우리를 괴롭혀 온” 것으로 한정된 것이라 해도 그렇다. 아니 오히려 우리 앞에 당도하는 슬픔은 아무리 헤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을뿐더러 매번 “한 가지”씩 늘어나기만 한다. [몰래 환했다]의 면면마다 적힌 시인이 다녀온 “어디”들 곳곳에 스며 있는 저 막막(漠漠)한 슬픔의 내력들을 보라.(「들꽃에게」) 시인은 단 한 번도 슬픔을 이긴 적이 없으며 책엽을 넘길수록 그 질량과 밀도만 더할 뿐이다. [몰래 환했다]는 예컨대 “농가의 작은 방구석에 자빠져 있”다가 “벌떡 일어”나 차비 얼마를 얻어 상경한 “까무잡잡한 얼굴”의 ‘소년’이(「복서」) 결국엔 “서둘러 햇빛이 빠져나가는 도시의 끝자리”에서 죽은 채 “밀거래되”는 ‘김 과장’이(「고라니」) 되는 비루하고 비참한 역정이며, 그를 둘러싼 “멍하게 바깥을 바라보던 어미”와(「마루 끝」) “어째서 이리 됐냐” “그러게 세상일에 나서지 말라고 했잖어”라며 “자식을 보자마자 버럭 소리 지르”는 아비(「가지가 다쳤을 때」), 그리고 우리 곁의 누구여도 상관없을 “광식이”(「도마뱀」), “김삼구”, “판식이 대호 명기”(「오래된 냉장고」), 때로는 “얼마 전 사랑하는 이를 여읜 사람”의(「나물국」) 슬픔의 책력이다. 요컨대 [몰래 환했다]에는 “워낙 힘들게 살아” 온 사람들로(「감자꽃」) 그만 한가득이다.
그런데 놀라워라. 그 “가늘고 휜 조각 등들”이 “여럿 모이니” “둥글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빛이 났다”.(「보름밤」) 그리고 “그게 충분히 행운이 되었다”(「농부 김천식」). 그리고 “몰래 환했다”(「우수 무렵」). 대체 어떻게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 당장 말하건대 그 까닭은 이들이 다름 아닌 시인이 “예뻐라”라며 찬탄했던(「들꽃에게」) 저 ‘들꽃’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시인이 슬픔을 이기고 돌아와 안아 주겠다는 ‘들꽃’이 실은 바로 슬픔 그것인 것이다. 그러니 [몰래 환했다]는 이미 도착했으나 또한 이미 다시 출발하고 있는 슬픔의 편력인 셈인데, 단지 여기저기를 떠도는 천력이 아니라 오롯이 슬픔을 향해 무한 귀환하는 오디세이다. 시인이 적은바 “적막 속 한 사람이” “먼 곳을 향해” “목을 기울”이듯(「목례」), 나도 시인을 향해 고개를 숙여 다만 그 순순함에 고마움을 표할 따름이다.
―채상우(시인)
•― 시인의 말
말수가 줄었다.
그렇다고 나의 말들이
힘을 갖는 건 아니지 싶다.
시와 더 이야기하고 싶다.
어눌하더라도 사는 일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테고.
•― 저자 소개
성명진
1990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1993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그 순간] [몰래 환했다], 동시집 [축구부에 들고 싶다] 등을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마을 – 11
길 너머 – 12
우수 무렵 – 14
호박꽃 – 15
차라리 잘됐다 – 16
작약 – 18
조각달은 지금 – 20
탑 하나 – 21
고라니 – 22
오래된 냉장고 – 24
포도알 – 25
옆 – 26
농부 김천식 – 27
순명 – 28
산 메아리 – 29
버스 – 30
꽃이 진 일 – 32
제2부
오후의 일 – 35
앵두 – 36
연어 – 37
겨울포도밭 – 38
삼층탑 – 39
무지개 – 40
제비꽃 – 41
저물녘 – 42
어쩌나 – 43
오늘의 순서 – 44
같은 슬픔 – 45
생일 파티 – 46
공 – 48
밑접시 – 50
그늘 두 숟갈 – 51
동백 그 여자 – 52
제3부
활 – 55
참새들 – 56
새 차 – 57
얼룩 고양이 – 58
씨앗 일기 – 59
해변 – 60
단체 사진 속 – 61
도자기 – 62
땅콩 껍데기 – 63
꽃 피는 일 – 64
겨울날 – 66
쓰다듬다 – 67
감자꽃 – 68
시인 작파 – 69
제4부
보름밤 – 73
나물국 – 74
목련 꽃송이 – 76
도마뱀 – 77
복서 – 78
가지가 다쳤을 때 – 80
실을 푸는 남자 – 82
싸락눈 – 84
백반집 – 85
마루 끝 – 86
주의 사항 – 87
작은 불 – 88
목례 – 90
연보라 – 91
들꽃에게 – 92
해설 황정산 슬픔이 슬픔과 함께하는 희망의 노래 – 93
•― 시집 속의 시 세 편
우수 무렵
집 앞에 아이가 나와 서 있고
노인이 앉아 있다
한순간 아이와 노인이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사내 하나가 고개를 떨군 채
앞으로 다가선 것
한 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그는 노인에게 큰절을 올린다
허물어져
내내 들썩이는 몸
추운 행색이었으나
다행히 지은 죄는 없어서인지
지나는 햇빛에 비치는 몸이
몰래 환했다 ■
어쩌나
마당에서 두 살배기가 울어요 같이 새끼인 송아지가 다가가고 강아지는 벌써 아이 곁에 가 있네요 저쪽 어미 소젖이 방방 불어요 지난달까지 배에 젖꼭지가 달랑거린 어미 개는 아이 쪽으로 몸을 일으켰네요
새끼인 것들은 다가가고 어미인 것들은 품을 만들었어요 햇볕의 갈피마다 이런 정나미들이 있어 슬픔을 글썽여 주니 아이의 울음소리는 점차 연해져요
그 아비인 나는 뒤꼍에서 앞마당으로 가려다가 멈춰 서 있는 거예요 잘못 봤는지도 모를 저 아까운 정경, 내가 마당에 불쑥 들어서면 한꺼번에 가뭇없어져 버릴까요 ■
단체 사진 속
우리는 몰래 연인이 되어
옆에 나란히 섰어요
앞을 보면서도
손 하나씩을 사진 뒷면으로 내놓아 숨겼죠
허허벌판인 거기
힘내
그래
서로의 손에 살짝살짝 힘을 주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