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헤이워드(Susan Hayward,1919~1975)
1917년 뉴욕 브룩클린에서 태어난 '수잔'은 학교를 졸업한 후 비서가 되려고 계획
했지만, 모델을 하면서 자신의 운명이 바뀌어버린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할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으나, 작은 배역을 맡으면서 영화배우로
성장한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를 내세운 20대보다 오히려 원숙해진 30대(1950년대)에
들어서 좋은 연기를 남겼다. 헤밍웨이의 소설을 영화화 한 <킬로만자로의 눈>에서
작가 '해리'(그레고리 펙)의 아내 '헬렌'으로 출연해, 죽음의 기운에 휩싸인 남편을
구원한다. 헌신적이고 인자한 아내 역할을 능숙하게 연기했지만, 운명의 장난에
시달려야 했다.
오늘 날 <킬로만자로의 눈>하면 떠오르는 배우는 당대 최고의 미모를 자랑했던
'에바 가드너'이다. 후배 '에바'는 “전 단지 행복해지려 해요”라는 식의 느끼한 대사
몇 개로 남자들을 완전 녹여버렸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리타 헤이워드'가 '필름
누아르(암흑가 영화)' 에서 보여준 카리스마가 없었다.
훗날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레오파트라>에서 보여준 여왕의 우아함도 다소 부족
했다. 이런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작품은 <디미트리우스와 글래디에이터>의
'메살리나' 나, <정복자 징기스칸>의 '보타이' 같은 역할이다. 테무진(존 웨인)은 시집
가던 '보타이'를 납치하고, 그녀는 테무진을 위해 칼춤을 추다가 칼을 던진다.
좀처럼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는 모습이나, 온몸을 흔들며 칼춤을 추는 '수잔'은 물론
아름다웠다.
할리우드 '핀업걸'로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매력이 지속될 순 없었다.
다른 여배우들의 환상적인 연기 탓에 그녀의 모습은 뇌리에서 서서히 지워졌다.
개인적으로는 웨스턴 무비 <가든 오브 이블>에서 그녀의 모습이 돋보였다. 카리스마는
부족했지만, 그녀가 영화 분위기를 지배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게리 쿠퍼'와 함께한
멕시코 사막도 잘 어울렸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웨스턴의 여신은 <자니 기타>의 '조안
크로포드'이니 이 장르 역시 최고는 아니었다.
'수잔' 의 전무후무한 연기는 갑자기 술병에서 나왔다. 어느 철 없는 뽕짝 가사처럼
'곤드레 만드레'의 화신(化身)이 된 건 <잃어버린 주말>의 여성 버전이라고 할
<내일 울련다>였다. <스매시 업> <마이 풀리시 하트>에 이어 <내일 울련다>(1955)
에서 알코올 중독자를 연기했다.
그녀가 말년에 실제 알코올 중독에 빠졌는지는 솔직히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술과 남자를 달고 다녔다고 해도 믿었을 정도로 난이도 있는 연기가 이어진다.
“오늘은 울지마! 내일은 하루 종일 울 수 있으니까”라는 유행어를 나은 이 영화에서
그녀는 흥청망청 취한다. 당시 여배우가 술에 절어 길거리에서 구르는 모습을 보인
다는 건 쉽지않았다. 이건 '미키 루크'가 술 독에 빠진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망가진
것 이다. 다들 코미디나 뮤지컬에서 콧대 높은 여왕을 꿈꿀 때 그녀는 아낌없이
몸을 던졌다.
여기서 한층 업그레이드 된 처절함이 <나는 살고 싶다>였다. 캘리포니아 킬러
'바바라 그래햄'의 실화를 연기한 그녀는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순간까지 처절하게
발악했다. 그녀는 두 영화에서 불행한 기운이 가득 찬 여인상을 창조해냈다.
지금의 어떤 다크 서클도 밑바닥 인생을 노래하는 그녀의 음침한 눈빛을 능가
할 수 없다.
아름다움을 완전 포기한 연기는 그 후 '샤를리즈 테론'의 가학(苛虐) 연기(演技)
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늘 스크린에서 살고 싶다고 외쳤지만, 정작 57세에 뇌암(腦癌)으로 눈을
감았다. 나중에 <정복자 징기스칸>을 촬영하는 동안 '유타'에서 그녀와 스태프들이
방사선에 과다노출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큰 센세이션을 몰고 왔다.
그녀가 환갑 이상 살았다면, 분명 선배 '베티 데이비스'의 ‘사악함을 넘어서는’
특별한 연기(演技)를 보여줬을 것이다. '수잔'의 열정과 이상은 누구보다 놀라웠으나
무심한 운명의 신은 그런 역사를 허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