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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귐으로의 초대 (요일 1.1-4)
최근 무릎 수술을 받으신 한 교우님으로부터 들은 간증입니다. 무릎에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수술을 받으시고, 수술 후 통증으로 아파하며 잠든 밤에 한 꿈을 꾸셨다고 합니다.
꿈속에서 보니, 당신의 무릎은 아직 그 뼈가 제대로 맞춰지지 않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무릎 옆에 끼워져야 하는 뼈가 빠져있는데, 어디선가 큰 손이 나타나더니 그 뼈를 쳐서 무릎으로 끼워 넣으시더라는 것입니다. 순간 ‘딱’ 하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도 그 다음 날도 똑같은 꿈을 꾸셨는데, 마찬가지로 큰 손이 나타나 당신의 무릎을 두드려 주셨다고 합니다. 이 세 번의 꿈을 꾸면서 그 교우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무릎을 만져주셨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이 나타났다는 증언은 구약 성경 다니엘서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의 자의식(自意識)
저는 이번 주일부터 여러분과 함께 요한일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인데, 그 주제를 한마디로 하자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올해 우리 교단과 우리 교회의 신앙주제가 ‘그리스도인,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주제인 말씀을 다루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기록자이기도 합니다. 요한일서를 펼치면서 먼저 요한일서의 기록자인 사도 요한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사도 요한에 대하여 말하자면, 먼저 우리는 그의 자의식(自意識)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 20절입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어서 24절입니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마치 자신이 주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셨던 것일까요?
성경 어디에도 그 증거는 없습니다. 얼른 보면 마치 주님께서 자신을 편애하셨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과연 우리 주님이 그런 분일까요? 누구를 편애하시고 더 예뻐하시는 그런 분이실까요?
요한복음 11장에는 이런 요한의 고백을 이해할 수 있는 본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나사로도 요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였다고,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증언해주는 것입니다.
또 이 소식을 듣고 주님이 찾아오시니, 이미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 하며’
요한은 자신을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고 증언하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요한을 특별한 편애하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한이 주님이 베푸시는 어떤 남다른 혜택을 입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보기에는 나사로도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다. 나사로도 주님이 사랑하셨고, 베드로도 주님이 사랑하셨고, 막달라 마리아도 주님이 사랑하셨지만, 나 또한 아니 나는 주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이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주님과 일대일의 만남을 가졌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내가 12명의 제자 중 하나, 주님을 따르던 무리 중 하나가 아니라, 주님과 마주서서 주님과 내가 서로 교통하는 직접적인 체험을 한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사귐으로의 초대
함께 읽은 말씀은 요한일서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한은 이 서론에서 자신의 서신을 읽게 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어떤 특별한 자리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귐으로의 초대입니다.
먼저 그는 지금부터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 말하겠다고 서신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 생명의 말씀은 우리가 직접 듣고 보고 자세히 살피고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합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로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게 되셨다고 말합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모습을 뵙고, 그 분과 직접 접촉했다는 말은 결코 빈 말이 아닙니다. 정말 그는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아, 공생애동안 주님과 함께 동행했으며, 십자가까지 따라갔고, 결국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기도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뜻밖의 이야기를 합니다. 3절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신학자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쉽게 풀이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고 듣고서 이제 여러분에게 전하는 것은, 우리와 더불어 여러분도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경험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가 예수님을 보고 듣고 두 손으로 확인하고 경험한 것처럼, 그의 서신을 읽게 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사귐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졌듯이, 우리도 그런 직접적인 관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하고, 그런 사귐의 경험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전해진 말씀
만약 주님과의 사귐이 신체적인 접촉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계셨던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그 시간들은 과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어떤 이도 과거로 돌아가서 주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이런 사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다시 3절로 돌아가면,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함은’, 그리고 2절에서도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라고 합니다. 즉 지금 그가 전하는 말씀, 그 말씀이 바로 주님과의 사귐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신데, 그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나타나신 것을 그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주님은 다시 당신의 말씀을 남겨놓으시고, 그 모습을 감추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중 어떤 이도 사람의 몸을 입은 모습의 주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이 주신 생명의 말씀이 남아있습니다. 요한은 그러므로 이 말씀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우리는 다시 살아계신 주님을 현재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생생히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사귐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갔는데, 다행히 그는 자신의 육성을 담은 음성파일을 남겨놓고 갔습니다. 그래서 남은 사람들이 그것을 재생하면서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추억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음성일 뿐이지, 그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여기 우리 손에 들려진 성경에는 분명히 주님이 하셨던 말씀과 주님에 대한 증언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이 하셨던 말씀일 뿐, 주님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읽고 들을 수 있지만, 그 말씀이 곧 주님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살았고
이에 대하여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12)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은, 성경 말씀이 무슨 마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기록된 말씀 즉 성경을 통하여 그 속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지금 들려오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전해진 주님의 말씀은 단지 과거에 주님이 하셨던 말씀, 혹은 주님의 행적을 기록한 기록물 정도가 아닙니다. 사도들이 전하여준 주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지금도 당신의 백성들과 만나고 계신 무대요,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통로이며,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는 생생한 현재진행형의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천년전 갈릴리 언덕에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던 과거의 주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 그저 하나의 교훈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살았고’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과의 사귐으로 나아가려면, 우리는 지금도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 자리는 바로 요한과 같은 사도들이 듣고 보고 체험한 바를 기록한 말씀 즉 성경이 펼쳐져 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지금도 살아계시는 주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는 자리입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우리 교회에서는 얼마 전부터 ‘갈빛동산 교우들의 일상을 위한 지향’이라는 제목으로 다섯 가지 일상의 목표를 정하고, 주일예배 때마다 함께 읽고 있습니다.
그 두 번째 지향은 ‘우리는 매일 성경을 읽습니다.’ 입니다. 매일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매일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하시고, 그 시간이 되면 성경을 펼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먼저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저에게 한 말씀만 하소서.’
그리고 상황이 허락한다면, 주보에 안내된 그날의 말씀을 소리 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3번 이상 소리 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조용히 눈을 감고 오늘 이 말씀 가운데서,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을 생각하면서,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묵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조용히 귀를 기울일 때, 주님은 어느덧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를 조금씩 변화시킵니다. 이렇게 전하여진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 바로 주님과의 사귐 가운데 있는 삶입니다.
지난 금요묵상기도 시간에 우리는 로마서 15.1-23 말씀을 함께 소리 내어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날 저는 3절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되새기면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니가 좋을 대로만 하지 말아라. 너는 무엇이든 니 기분대로 하는 사람이다. 그러지 말고 살펴라. 살피며 살아라.’ 그런 음성이었습니다.
음성을 들었다고 하니, 진짜 귀에 들리는 소리였다고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이 그날 저에게 그렇게 들려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입니까? 그건 목사님의 생각 아닙니까?’ 맞습니다. 제 생각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이지만, 그 생각은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제게 찾아온 생각입니다. 제가 말씀을 묵상하지 않았다면, 저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묵상한 바를 가지고 살아가다보면, 저는 어느덧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과연 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었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하게 확인되어집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다.’ 라고 합니다. 말씀의 빛이 비추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습관을 따라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삶을 살다가, 어둠 속에서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사도 요한과 꼭 같은 이야기를 다윗은 그의 시편 16편에서 들려줍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찌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그는 ‘내가 여호와를 즉 하나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라고 하는데 이 말씀은 그 앞 절에 설명이 있습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그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그는 하나님을 항상 모시는 것이라고, 또 그가 내 우편에 계시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환경이 빚어낸 사람, 말씀이 빚어낸 사람
얼마 전 저는 교우들과 함께 천기옥 집사님 선거사무실을 방문하였다가 그곳에서 일하시는 한 분으로부터 기분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제가 목사라는 말씀을 들으시고, 제가 예수님 같아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저로서는 매우 기분 좋은 말씀이었습니다.
‘과연 나의 어떤 모습에서 예수님이 떠올랐을까?’ 궁금한데, 아마도 제 얼굴형이 눈과 코가 크고, 턱 선이 길기에 아랍인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나의 존재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났으면... 하는 소망도 더욱 가지게 됩니다.
저는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주님과의 사귐의 관계 속에 있는 한 분명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안타깝지만 이 땅을 사는 대부분의 인생들은 그들을 빚어낸 환경, 그 환경의 영향을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그 생애를 마치게 됩니다. 그래서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라는 속담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환경이 빚어낸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빚어낸 사람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자라나고 경험해온 환경에 의해 지금의 내가 빚어졌다면, ‘이제 나는 주님과 사귐 속에서 말씀으로 새롭게 빚어지리라.’ 그런 마음을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환경이 아니라 말씀이 빚어낸 사람, 그 사람이 참으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전해진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우리의 길을 지도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우리의 영과 육을 참으로 살게 하는 복된 길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