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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 찬양대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풀려난 바울과 신라 갇힐 때는 매우 힘든 상황에서 갇혔지만 나올 때는 상관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그들은 풀려났습니다. 즉시 그들은 루디아의 집을 방문했고 거기 모인 성도들을 위로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다음 여정을 향해서 출발했습니다. 다음 여정은 데살로니가입니다.
사도바울의 여정은 어디가 편하고 안정됐다고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일을 위해서 그들은 전진하고 또 전진했습니다. 데살로니카로 가는 여정을 1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카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두 도시를 걸쳐 가는데 이름만 성경에는 언급되어 있습니다. 암비볼리, 마케도니아 지방의 수도였다고 합니다. 큰 도시였어요. 거기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들러서 그곳에 서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로니아에서 43km, 암비볼리에서 43km 떨어진 곳에 아블로니아가 있습니다. 저도 3주 전에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아블로니아에 도착한 바울은 여기서도 복음을 전했어요. 지금 조금 더 보여줍시다. 저기가 아볼로니아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 강단 바입니다.
저 위에 바울은 아닌데 누가 서 있네요? 접니다. 하나 더 보여주세요. 네 이게 이제 그 바위 지금도 사실 저렇게 성지로 어느 지역이 지정된 것은 아주 고고학적인 검증을 거쳐서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전승을 통해서 쭉 흘러내려온 곳에 저렇게 그곳이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강단이다. 바위 강단이다 해서 기념을 하고 방문을 합니다. 제가 여기 앉아 있고 이 저 뒤에 저 뒤에 보이는 것이 바울이 거기서 복음을 전한 곳이에요.
바울이 복음을 전한 장소들을 가보면 참 아름다운 곳이 많습니다. 사도행전은 사실 이름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특별히 사도행전은 역사서예요. 역사서를 읽을 때는 이름 하나가 나오는 것이 중요해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데 암비블리아 아볼로니아 이렇게 이름이 언급됐다는 것은 그곳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자세한 사건을 기록은 하지 않지만 그곳에서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런 상상력을 동원을 하고 요즘은 인터넷이 잘 발달돼 있어서 찾아 들어가면 좋은 정보들을 많이 얻을 수가 있어요. 그 지역에 대한 그래서 찾아 읽다 보면 그 암비볼리 아볼로니아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재구성할 수 있고 또 상상할 수 있고 그러면 그 상황으로 돌아가서 더 큰 은혜를 받을 수가 있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한번 그렇게 읽어나가시면 좋겠어요. 이 아볼로니아에서 다시 서쪽으로 60km를 갑니다. 그러니까 빌립부에서 암비볼리, 암비블리에서 다시 아블루니아 45km, 그다음에 60km 바울이 그때 걸어서 움직인 이 거리는 상당합니다. 그리고 건강한 상태가 아니잖아요. 잡혀서 박해받고 얻어맞고 또 감옥에 앉아 있다가 나와가지고 또 얼마나 잘 먹었겠어요? 굶어가면서 이 거리를 움직였다는 것은 바울이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거예요.
기독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사건을 가지고 기독교의 체계를 완성한 사람이 바울이에요. 그리고 그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일에 헌신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에게는 뜨거운 불이 있었고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미친 사람 광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냥 평범하게 와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다 가야 되겠다 그러면 속도를 늦출 수가 있어요. 하지만 기왕 태어나서 기왕 프랑스에 와서 공부하고 생활을 하면서 기왕에 예수를 믿었으니 내가 이 역사에 흔적이라도 남기고도 가겠다 하는 마음이 있는 분들은 그 일에 집중해야 됩니다. 남들이 볼 때 저 사람 미친 것 같아 그 일에 확실히 미쳤어.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것밖에 없나 봐 정도의 인정을 받아야 우리가 그 분야에서 그런 흔적을 남기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카에 도착했어요. 그곳에서 유럽 두 번째 교회 데살로니카 교회가 세워지고 사도바울의 최초의 서신 신약 성경 최초의 서신이 바로 이 데살로니카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됩니다. 고린도에서 쓰게 됩니다. 데살로니카 교회에서의 사역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은 이 지역을 데살로니키라고 합니다. 조금 이름이 바뀌었죠. 그리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에 하나라고 해요. 저는 이곳에서 이번에 두 이틀을 잤어요. 불행하게도 다른 지역을 보느라고 여기서는 잠만 잤어요. 데살로니카를 사실은 못 봤어 그렇게 아름다운 도시고 데살로니카 교회가 있는 곳이었는데 마케도니아의 중요한 항구 도시인데 여기서는 그냥 잠만 자고 네오폴리스 아블로니아 그다음에 빌립보 이런 지역을 돌다 왔습니다.
일정이 너무 짧아요. 그리고 이제 선교대회를 하면서 패키지로 가다 보니까 짐 싸고 새벽에 짐 싸고 밤늦게 짐 풀고 계속 그 일을 12일 동안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돌아오니까 막 몸이 붓고 멍멍하고 그 후유증이 한창 가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이렇게 계열론으로 갔지만 다음에 내년 정도는 정말 우리 교인들하고 소수의 그룹이 가서 한 일주일 정도를 그리스만 보면서 바울의 발자치를 밟아가면 굉장히 은혜가 될 것 같다 하는 생각을 하고 꿈을 꾸어봅니다.
데살로니카 그런 곳입니다. 이 데살로니카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어요. 알렉산더 대왕이 이 마케도니아 출신 아닙니까? 지금 데살로니카 베르아 그리고 빌립보가 있는 이 지역의 왕이에요.
근데 이 사람이 이제 서쪽으로 로마 쪽으로 진출한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진출해서 아시아까지 다 먹는 대제국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빨리 죽게 돼요. 그래서 그 4명의 부하들이 그 제국을 나누어 갖게 됩니다. 사진 한번 보겠습니다. 4명의 부하들은 카산드로스, 니시마쿠스, 셀리오쿠스 그리고 포톨로의 마이오스. 이 4명 중에서 우리가 셀리오코스와 포톨레마이오스는 익히 많이 들어서 알아요.
그런데 리시마코스와 카산드로스는 우리가 잘 듣지 않습니다. 익숙하질 않습니다. 그래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네 지역을 나눠 갖습니다. 그래 프톨레마이오스가 지배한 클레오파트라가 나오는 이집트의 역사 조금 더 봅시다. 그림 이 프톨레마이오스가 클레오 파트라이 코 얘기 나오는 클레오 파트라 그 시대에 그 파라오들은 이제 여기가 다스리면서 이스라엘 역사에 진출을 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고 나중에는 셀리우쿠스 신구약 중간 시대는 저 셀리우쿠스 왕조가 이제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아주 잔혹하게 박해를 하고 성전을 더럽힙니다. 그러면서 반란도 일어나고 100년 동안 독립운동을 통해서 독립도 일어나고 하는 그런 역사가 펼쳐지기 때문에 우리가 포톨레마이오스와 셀리오커스 여기에 대해서는 익숙한데 저쪽 터키 지역, 아나톨리아 반도 지역 그리고 마케도니아 지역을 점령했던 카산드로스와 리시마쿠스는 우리 익숙하지 않아요. 마케도니아 지역을 지방을 점령한 사람이 바로 카산드로스 장군인데 이 사람이 이곳을 점령하고 나서 그 기념을 그 민심을 수습한 다음에 기념으로 세운 도시가 바로 데살로니카입니다.
데살로니카. 근데 왜 데살로니카라는 이름을 지었냐? 이 사람의 아내의 이름이 데살로니카예요. 자기 와이프 이름을 붙여준 거예요. 그게 애처가인지 공처가인지 잘 모르겠지만 자기 부인을 굉장히 존중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세워진 도시가 바로 데살로니카입니다. 바울이 이곳에 가서 복음을 전했어요. 도착하자마자 회담을 찾아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2절 3절 보면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 들어가서 새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각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빌립보에서는 한 달 정도를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새해 안식일 그러니까 이것도 거의 3주간이라고도 하고 날짜로 따지면 거의 한 달에 가까운 기간이에요. 7주에서 8주간 동안 바울은 이 마케도니아 지방에 2개의 중요한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데살로니카 교회. 그리고 이 두 교회는 이 두 교회에 보낸 편지가 신약 성경에 들어올 만큼 매우 중요한 교회였어요. 그러니까 짧은 시간이지만 이 바울의 사역, 이 기간의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가 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늘 하던 대로 회당을 찾아갔어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회당. 빌립보에서는 회당을 찾았지만 없어서 개울가에 나갔다가 거기서 루디아를 만난 겁니다.
그런데 여기 데살로니카는 가보니까 회당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 메시지의 콘텐츠는 이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게 바울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다. 이 메시지를 듣고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생명이 임하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어떻게 전했는가 이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이 특이합니다. 성경을 강론하며 뜻을 풀었다. 저도 지금 설교를 그렇게 하고 있어요. 성경을 읽고 이 성경에 대해서 해석하면서 뜻을 풀어서 적용하는 거예요. 이걸 가리켜서 강의 설교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3장에 가면 BCD 안디옥 설교가 있어요. 회당에서 한 설교예요. 이것도 같은 형태를 취합니다. 구약 성경을 풀어서 읽고 풀어서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구약 성경에서 예언했던 그 메시아고 그분이 고난의 종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분을 믿으라. 내가 그분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
이게 회당 설교의 핵심이에요. 이 회당은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 다시 말하면 헬라인이지만 이 사람들이 주로 이제 지성인들이죠. 이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보면서 또 유대인의 성경 특별히 70인 역 이제 그 구약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이 됐어요. 그래서 그 성경 70인역 같은 것을 읽어보면서 유대교 하나님을 믿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 회당에 들어온 거죠. 그들을 대상으로 할 때는 그들이 이미 구약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기 때문에 그 구약 성경으로 시작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런 설교를 강의 설교라고 해요. 그런데 이 데살로니카 베레아를 지난 다음에 아테네에 가서 아래호하고 설교를 할 때는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합니다. 바울이 성경을 얘기하지 않아요. 처음부터 그리고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와가지고 여기저기 가보니까 여러분들은 참 신심이 두터운 사람들은 신들이 많아 열심히 신들을 섬겨 근데 어디 가서 보니까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이라는 신이 있는데 거기를 섬기고 있더라. 오늘 내가 여기 온 것은 바로 그 신 그 하나님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려고 했다 하면서 쫙 풀다가 마지막 결론을 예수 그리스도로 맺는 거예요.
이걸 귀납적 설교라고도 하고 상황 설교라고도 해요. 왜냐하면 이 아테네에서 지금 바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헬라인들이에요. 현지인들이에요. 그들은 구약 성경에 대해서 관심도 없어요. 그리고 구약 성경에 대한 전 지식도 없어요. 그들에게 성경을 펼쳐서 얘기를 하면 이게 와닿지 않는 거예요. 일단 접촉점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교를 전개를 해요. 이게 사도바울의 설교의 유연성이라는 겁니다. 상황에 맞게 아프리카에 가면 아프리카 상황에 맞게 파리에 있는 분들은 파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맞게 한국에 가서 신학교에서 설교를 한다.
저도 한 일주일에 한 번 장신대에서 신학교 새벽 설교를 한 적이 있어요. 신학생이나 교수님들을 대상으로 할 때는 또 접근 방법이 달라야 돼요. 아프리카에서 하듯이 해버리면 은혜가 안 돼. 이 사람들은 은혜 받는데 이 사람들은 또 은혜가 안 돼요. 굉장히 신경 쓰이는 설교입니다. 목사님들을 앞에 놓고 설교한다든가 이런 게 굉장히 힘들어요.
이번에 우리 예장 유럽 선교회 어디에요? 그 불가리아에서 할 때 개회 예배를 제가 유럽에 온 지 30년 만에 개회예배 설교를 맡은 거예요. 세상에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어요. 다 선배님들 후배 다 또 한국에서 온 강사님들 내놓으라는 분들이 다 앉았는데 이게 이제 우리 가령 여기 노래하는 사람이면 노래하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노래하기가 제일 힘들잖아요. 노래에 은혜 받는 게 아니고 뭐예요? 자란 나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앉았다고 생각을 하는 거지요.
그래가지고 얼마나 나는 그렇게 긴장을 해가지고 설교를 준비했는지 몰라요. 하여튼 그런 상황인데 가다가 어디로 갔어 원고에서 벗어나가지고 오늘 그래서 이게 설교라는 것은 하나 가지고 모든 데 적용하는 게 아니고 그 청중의 상황에 따라서 전개를 달리해야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에게 탁월한 설교갑니다. 지금 그래서 이렇게 여기 가가지고는 이제 회당 설교 형식을 가지고 쫙 풀어나가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구약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는 그분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 말씀을 딱 전했더니 기적이 일어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면서 그 사람들이 그냥 주님을 받아들이고 본어개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다시 거듭나는 역사가 현장에 일어나는 거예요.
누가는 4절에 이렇게 기록해서 그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가 이게 몇 명일지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큰 우리 지금 이 유대인의 회당에 와 있는 사람들 와 있는 사람들이 거의 다 특히 여기 헬라인의 경건한 큰물이라는 것은 헬라인이면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거의 믿은 것 같아요. 적지 않은 귀부인도 믿었다. 상류층이 믿은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대인 회당에 와 있는 이방인들은 대개 지성인이거나 상류층이라고 보면 돼요. 그래서 글을 읽을 줄 알고 그래서 유대인의 종교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고 나중에는 그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됐고 유대인은 아니지만 유대인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어요. 큰 부흥이 여기서 일어난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 보니까 그중에 야손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제 개종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게 돼요. 이 사람은 그 지방의 유지였던 것 같고 이 사람의 이름이 특별히 기록된 것은 이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서 특별한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복음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본격적으로 넘어가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이방인들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해요. 이렇게 세워진 교회가 여러분 데살로니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은혜가 넘치는 곳에는 방해와 박해가 있기 마련이죠. 5절에서 7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시기했다.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저잣거리에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했어요. 왜 그랬냐면 마음속에 시기가 일어났다는 거예요. 시기가 일어났다는 것은 뭔가 바울을 경쟁 상대로 안 거예요. 경쟁 상대 시기가 아무하고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길거리 가는 사람하고 저 사람 왜 이렇게 이쁘게 생겼어? 그래야 시기가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 같은 공간에서 뭔가 같은 경쟁을 할 때 시기 질투가 일어나는데 여기 있는 아마 데살로니카에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거의 안 믿은 것 같아요. 허다한 경건한 헬라인들이 있고 귀부인들임 있고 야소임 믿은 거지 큰 부흥이 일어났는데 사실 유대인들은 지금 거꾸로 가고 있어요.
여러분 똑같은 일이 일어나도요. 반응이 달라요. 어떤 사람은 받아들여서 진리를 붙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역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데살로니카의 유대인들은 바로 그런 역으로 가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의 행동은 좀 저급하고 수준이 떨어집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뭔가 우아하게 대응을 할 수도 있는데 지금 하는 것은 우리나라 양아치들이 하는 거하고 비슷하잖아요. 대적할 힘이 없으니까 논리가 떨어지니까. 그리고 시기가 일어났다는 것은 지금 회당의 교인들이 갑자기 바울에게로 떠난 거예요.
예루살렘에서 큰 박해가 일어날 때도 그것 때문에 그랬어요. 복음이 전해지니까 리버디노 리버디노라는 건 리버티라는 뜻이에요. 디아스포라 해외에서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해외 출신들로 구성된 회당이에요.
근데 주로 그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떠나니까 교인 뺏기니까. 그리고 이 사람들이 주로 돈이 많고 꽤 괜찮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까 교인 뺏기니까 헌금도 줄고 숫자도 줄고 세력도 줄고 그러니까 열받은 거예요. 그래서 박해가 시작된 거예요. 이 박해라는 게 뭐 고상한 무슨 종교적 신념 그런 거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런 인간적 계산도 있어요. 지금 여기도 그런 것 같습니다. 시기가 일어났어요.
왜 저기로 다 가냐 이거지
그래가지고 박해를 하는데 그 박해가 우아하지 않다 이거예요. 그런 일이 일어날 때는 왜 도대체 이 사람들이 그쪽으로 가나 우리는 무슨 문제가 있는가 이런 걸 돌아보면 발전이 있는데 그냥 열받은 대로 행동한 거예요. 그것도 자기들 힘이 모자라니까 불량배들을 동원합니다. 불량배들 용역을 동원했다. 이 용역을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 했을까 특별히 데살로니카 지역의 유대인들이 그랬을까 이게 좀 너무 거칠고 이 방법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에 누가가 글을 쓰면서 사도행전을 쓰면서 베레아에 대해서 쓰면서 다음 다음 목적지 베레아에 대해 쓰면서 이렇게 썼어요.
베레아 사람들은 데살로니카 사람들보다 신사적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그것이 그런가 해서 깊이 생각했다. 근데 저 사람들은 아무 생각이 없다. 너무 거칠기만 하다. 매력이 없다.
이걸 아예 역사책에 써버렸어요. 그럴 정도로 지금 그런 반응을 일으키는데 우리가 유대인들을 지역마다 이해를 해야 됩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고통을 당했어요. 바벨론 포로 생활을 했죠. 돌아왔더니 이집트가 또 지배했죠. 그다음에 셀리쿠스 왕제가 지배했죠. 그다음에 또 로마가 지배하죠. 지금까지 그러니까 이분들은 생존을 하기 위해서 주로 어디에 거주하냐면 해변 도시에 거주를 합니다. 요차 하면 도망갈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 데살로니카도 그런 지역이에요. 우리가 이 유대인 거주 지역을 개토라고 하죠. 개토 유럽 곳곳에 가면 개토가 있어요. 저기 체코에 가도 개토가 있고 이 개토라는 곳이 어디서 최초로 그 말이 생겼냐면 베네치아에서 생겼어요. 여러분 베네치아를 방문하면 베네치아의 유대인 거주 지역 개토지역 거기서부터 개토라는 말이 생겼는데 그 베네치아라는 것이 이건 제 해석입니다만 그 바닷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박해가 언제든지 배를 타고 도망갈 수 있는 그런 곳이어서 주로 그런 지역에 거주하지 않았나 이게 저의 해석이기도 하고 또 여러 전문가들의 해석이기도 합니다.
이 데살로니카의 유대인들이 그런 목적으로 거주를 했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의 직업이나 신분이 선원이 많았던 것 같아요. 바닷가 그 선언 그래서 내륙 지방보다는 비교적 성품이 거친 성향 여러분 부모님 중에 해변가에 살거나 선원이었던 분들은 이해하고 들으세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일을 하다 보면 그런 험한 일을 하다 보면 좀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제가 옛날에 아주 한 25년 6년 전에 그 섬기던 교회 젊은이들하고 단기 선교를 아프리카 말리로 간 적이 있어요. 거기 말리는 내륙 지방인데 정말 가난한 곳입니다. 바마코라고 하는 시내를 한 번은 이제 시장을 보기 위해서 트럭을 타고 나갔는데 거기는 사람들이 막 몰려들어요. 우리를 백인으로 아나 봐 그래가지고 막 몰려들어가지고 얘기하고 막 그러는데 등치가 큰 남보 같은 사람이 딱 이빨 두개 빠진 사람이 나와가지고 하는데 좀 무섭더라고. 처음에는 근데 한국말을 조금 해요. 하는데 그 한국말의 대부분이 뭐냐 하면 상욕을 한 거요. 제 설교 시간에 내뱉을 수 없는 그런 욕을 내가 반갑다고 그래가지고 어떻게 그 욕을 배웠냐 그랬더니 자기가 좀 젊었을 때 서부 아프리카의 해변 도시에 가서 일을 했는데 파트롱이 한국 사람이었대요.
이제 그쪽 가서 거주하는 분들이 주로 선원 출신들이에요.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굉장히 무섭습니다잉. 가서 자기보다 등치 큰 사람들도 다 그렇게 두들겨 패면서 꼼짝 못하게 하고는 많이 맞았대요. 그 파트롱한테 맞으면서 계속 뭘 먹었냐면 욕을 먹었어. 난 그 사람 100살까지 살 것 같아. 욕을 하도 먹어. 그러니까 배운 게 욕이요.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일을 하는 분들이 좀 굉장히 세고 거칠구나 하는 것을 그때 한번 생각을 해봤어요.
아마 이 데살로니카에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이라는 설이 있어요. 그래서 이 지역에 유대인들은 거친 거예요. 이런 일이 일어나니까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선동을 하다가 어디로 갔냐면 야손의 집에 가요. 야손이 예수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이 바울 일행을 영접했거든 그 집에서 머물렀거든. 그러니까 바울 잡으러 쫓아가는데 바울은 이미 알고 다른 지역으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꿩 대신 닭이라고 바울 대신에 야손과 그 가족들을 잡아가지고 읍장들에게 데려가서 고소를 하는 거예요.
데리고 갈 때 곤이 데리고 왔겠어요 두들겨 패면서 발길질이면서 갔겠죠. 이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했냐 우리 말로 역모를 꾀했다. 황제가 있는데 또 다른 임금 예수라는 이를 전한다. 또 다른 임금 예수를 전한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로마를 뒤덮으려고 하는 역모는 아니었어요. 공모자들이 있다. 바울이라는 사람을 맞아 죽었다. 서슬퍼른 권력 앞에 역모를 논하는 거야. 이게 잘못하면 다 죽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혐의가 입증되지 않아서 그들은 보석금을 받고 풀려나요? 그러니까 괜히 예수 믿었다가 집안이 쑥대밭이 된 거예요. 보석금까지 내야 되는 죽을 뻔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 내가 다시는 예수 안 믿지? 내가 그 바울이라는 사람 처음 본 사람이 전한 그거 듣고 혹해가지고 이렇게 됐구나 그렇게 생각했으면 그냥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자기가 받은 그 진리 예수 복음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 일로 인해서 그 복음을 더 가슴에 새긴 것입니다. 얼마나 복된 사람이에요. 우리도 똑같은 일을 경험할 때 어떤 사람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갑니다. 손을 털어 어떤 사람은 어려움이 올수록 예수 믿는 일로 인해서 어려움이 올수록 더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더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면서 진리를 가슴에 새기는 거예요. 야손이 그랬어요. 이 사람은 후에 바울의 고향인 타러소라고 하는 것, 타소 라고 하는 곳에 교회의 주교가 되었어요. 고향도 거기 출신이라고 합니다. 교회사에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에 위대하게 쓰임을 받았어요.
여러분 고난이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꾸 어려운 환경, 코로나 이후에 코로나 경제적인 어려움 이런 저런 어려움을 얘기하면서 신앙이 흔들리지만 그건 원래 가짜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진짜는 어려움이 올수록 위급한 상황이 올수록 더 빛나게 돼 있어요. 더 붙들게 돼 있어요. 고난이 있어도 진정한 성도는 더 강해집니다. 고난과 박해가 오히려 교회의 영적 자양분이 됩니다.
현대 교회가 힘을 잃고 우리 신앙이 해이해지는 것은 사실은 편안해서 그런 거예요. 오히려 이게 더 무서운 일입니다. 초대교회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 부흥과 축복을 경험했어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다음 목적지는 베레아 그리고 아테네입니다. 베레아 아테네로 떠나면서 베레아 지역을 사역을 마친 후에 디모데와 신라를 조금 남겨둬요. 그리고 이제 바울과 누가가 이제 그곳으로 떠나죠. 그러면서 여기 좀 남아가지고 아직 이제 막 교회가 세워졌으니까 미비한 상황들을 좀 돌보고 교회가 잘 세워지는 일을 돕다가 아테네로 와라 바울이 먼저 갔어요.
근데 여기 일이 계속 많아가지고 아테네에 오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테네에서 바울이 이 두 제자를 기다리면서 사역을 하다가 너무 힘들었어요. 바울도 사람이기 때문에 힘들 때가 있어 이 아테네 사역하고 고린도 사역이 힘들었나 봐요. 너무 힘들었어요.
동역자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 힘들 때 옆에서 누군가 같이 있어주기만 해도 힘을 얻습니다. 근데 이 디모데와 실라는 아테네로 합류는 못하고 바울이 아테네의 사역을 마치고 고린도로 갔을 때 내려와요. 내려올 때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어요. 그들에게 그들이 전해준 소식은 빌립보 교회하고 되살려니까 교회가 끝내준다는 거예요. 막 다 세워졌지만 정말 신앙생활을 너무너무 잘해요. 그래서 빌립보교회는 워낙 기쁨이 넘치는 교회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생각하면 막 기쁨 그래서 기쁨의 서신을 쓰잖아요. 기쁨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 데살로니카에도 너무 신앙생활을 잘해가지고 그 소문이 아가야 지금 아테네와 고린도 지역 거기 그다음에 마케도니아 지역까지 쫙 난 거예요.
야 거기 교회 데살로니카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 교회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너무너무 잘한다. 선행도 잘한다. 믿음도 좋다. 그 소식을 들으니까 바울이 힘들어 있다가 갑자기 힘을 얻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래서 힘을 얻어서 기쁨이 충만해졌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즉시 펜을 들어서 데살로니카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써요. 그것이 최초의 신약 성경이 되었어요.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에 7절에 보면 또 너희는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이게 데살로니까 교회입니다. 나중에는 너무 열심히 믿다가 너무 더 열심히 믿어가지고 약간 지나친 종말론에 빠져요. 주님이 곧 오신다. 이게 너무 세가지고 그래서 사도바울이 조금 온도를 시키는 편지를 썼는데 그게 데살로니카 후서예요. 그럴 정도로 열정 있는 교회가 됐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박해와 고난 어려움을 극복하고 열심히 믿고 살았던 데살로니카 교회 그래서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에 그들의 좋은 소문이 번지면서 본이 되었던 것처럼 바라기는 파리 선한 장로교회와 저와 여러분들이 좋은 소문이 이게 전도입니다. 그냥 파리에 가면 선한 교회가 8부에 있는데 거기 사람들이 믿음도 좋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선교도 열심히 하고 서로 사랑하고 싸우지도 않고 그냥 서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고 있더라. 이런 소문이 프랑스와 유럽 곳곳에 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