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동기와 좌절
<로얄 어페어>(니콜라이 아르셀, 드라마, 청소년관람불가, 2012)
시대 상황이나 현실 인식에서 서로 상응하는 세 편의 영화를 비슷한 시기에 함께 감상할 수 있었다. 사회를 반영하는 영화의 특성을 염두에 둔다면 필자는 세 영화에서 이 시대를 향한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 메시지를 읽는다. 왜냐하면 다른 지역 출신인 세 명의 감독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며, 또한 관객 역시 감독의 의도에 감응했다는 것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헤겔이 말하는 세계정신의 구체적인 드러남의 하나라고 본다고 하면 무리일까? 사실 헤겔 역시 프로이센에 온 나폴레옹이 자신의 창문 밑으로 말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세계정신(Weltgeist)이 지나간다”고 말하며 감탄하지 않았던가. 시대의 징후를 읽어내는 데에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이 필요하지만, 비슷한 주제의 영화가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상영되는 것에서 어떤 맥락을 읽어낸다고 해서 무리하는 일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 편의 영화라 함은 <광해>, <레미제라블>, <로얄 어페어>를 말한다. 각각 16-7세기 조선과 18세기 불란서와 덴마크의 정치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그리고 비록 성격에서 조금 다르긴 해도 공통점이 있다. 처음에는 성공하는 듯이 보였지만 결국 실패한 개혁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광해>와 <로얄 어페어>는 왕의 개혁 의지를 반영하고 있고, <레미제라블>에서는 시민 혁명이 등장한다. 장발장은 시장으로 재임할 때 인간의 선한 마음을 깨우는 정책을 펴면서 개혁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시민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면서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죄인으로 처벌되는 사실을 감당하기 어려워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와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그렇지만 그동안 자신이 모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선한 삶을 통해 개혁의 의지를 죽을 때까지 실천해나간다. 물론 시민 혁명에도 가담하지만 주체가 아닌 소극적인 입장에서 참여할 뿐이었다. 장발장이 시도한 개혁이 실패한 까닭은, 장발장을 쫓아다니는 자베르에게서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듯이, 과거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경직된 삶의 원칙에 있었다. 앞날을 보려고 하지 않고 오직 과거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혀 있는 수구 세력의 저항에 부딪혀 장발장은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학생들이 주도한 시민혁명의 실패 역시 수구 세력에 세뇌되어 두려움에 사로잡힌 시민들의 소극적인 태도에서 비롯한 것이다.
<로얄 어페어>는 심한 편집증으로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덴마크 왕을 대신해서 독일 출신으로 계몽주의 사상에 심취한 주치의 요한에 의해 개혁의지가 심어지고 또 일정기간 실행된 개혁의 한 단면을 소개한다. 물론 여기에는 왕비와의 금지된 사랑이 작용하고 있어서 왕비와 주치의 중에 누구의 의지가 더 강하게 작용한 것인지는 쉽게 단정 짓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왕비와 요한의 계몽사상을 통해서 잠시 동안이지만 유럽에서 가장 앞서 개혁의 의지가 실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개혁은 지나치게 서두른 점이 있고, 가장 심각한 한계는 왕비와의 불륜행각에서 나타난 도덕적인 결함이었다. 교회의 권위를 쉽게 무시할 수 없었던 18세기에 왕비와 요한의 불륜은 백성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고, 이것을 정략적으로 이용한 반대세력의 반발 때문에 덴마크의 개혁은 결국 벽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광해>는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광해의 개혁 의지를 부각시켰다. 성공한 개혁의 일면에 집중함으로써 다소 다른 맥락에서 조명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레미제라블>과 <로얄 어페어>와 더불어 세 작품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이 있다. 개혁의 단초가 고통 받는 백성에 대한 긍휼에 있었다는 점이다. 백성의 어려움과 곤고함을 돌아보는 마음에서 개혁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레미제라블>에서 나타나는 개혁의 단초는 백성에 대한 긍휼이나 휴머니즘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다시 말해서 신의 사랑에 대한 헌신적인 반응이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18세기 덴마크는 프랑스가 견제 세력으로 여길 정도로 대단히 강한 나라였다. 지금의 독일 부부지방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바로 이런 때에 유럽 전체로 퍼져나간 계몽사상을 정치적인 현실로 가장 먼저 실현해 나갔다는 사실은, 덴마크 왕에게 보낸 볼테르의 친서가 말해주고 있듯이, 매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 신앙을 우선하는 사람들에게는 창조를 믿지 않는 계몽주의자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덴마크 안에서도 역사적인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고 하니 판단하기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로얄 어페어>에서 우리는 두 개의 가능성을 접하면서 고민하게 된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우선하는 교회와 수구세력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라를 통치하길 원하는가, 아니면 아무리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해도 이성에 반하는 일이라면 인정하지 않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자유와 평등과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통치하는 것을 원하는가?
덴마크 개혁의 단초는 계몽주의의 실현이며 백성들을 해방하고 그들의 권리를 되돌려주는 것이었지만 결국 도덕적인 결함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백성들이 개혁자를 거부하는 장면에서 그 한계를 분명히 볼 수 있다. 영화의 말미에서 추방당한 왕비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사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면서도 개혁만은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을 전했는데, 이 때문에 중단된 개혁은 비록 유럽에서 가장 늦긴 했어도 실행될 수 있었다.
처음에 가졌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보자. 이 세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시대적인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까?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말은 개혁이다. 그러나 개혁은 자고이래로 정치사에서 결코 중단된 적이 없었던 주제다. 따라서 더욱 중요한 것은 개혁의 단초가 단순히 사상의 실현이 아니라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그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권리가 보장된 사회에서 살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교회가 하지 못하기 때문에 촛대가 옮겨져 세속적인 영역에서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나는 하나님 나라 사상의 실현이라는 표현보다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또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과제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개혁과 도덕적 혹은 윤리적인 정직함이다. 개혁자의 도덕적인 결함은 개혁의 흐름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치명적인 일이다. 기능만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이것이 종종 간과되는 경향이 있는데, 사필귀정의 교훈을 명심할 일이다. 개혁을 통한 역사의 진보를 가로 막는 일은 비리와 도덕적인 결함이다. 이것들 때문에 성공해야 할 개혁이 얼마나 거센 저항에 부딪히게 되는지를 생각한다면 개혁과 정직은 결단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