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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찰해야 한다”고 했다. |
『법화경(法華經)』에서 말하기를 “‘이렇게 내가 성불한 지 매우 오래되어 수명은 한량없고 아승기겁 동안이로되 항상 머물러서 입멸(入滅)하지 않느니라’고 하시자, 여러 사람들이 의심하기를 ‘성도하신 지 오래되어 항상 교화하셨다 하나 중간에 계셨던 연등불(燃燈佛)과 비바사불(毘婆沙佛)과 시기불(尸棄佛) 등이 성도하여 입멸하시고 설법도 하며 중생들을 제도하셨다. 그렇다면 그 분들은 누구란 말인가’”라고 했다. |
고석(古釋)에서 이르기를 “그 중간에 연등불 등이 성불도 하고 입멸도 하였다고 설명한 이와 같은 것의 모두는 지혜 방편의 교묘한 분별로써 다른 부처님을 설명한 것이니, 내 몸을 여의고 따로 저 부처님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
『금강경론(金剛經論)』에서 이르기를 “중생의 몸 안에 부처가 있고 은밀한 것도 아니다. 몸 밖에도 있으나 역시 은밀한 것이 아니다. 내지 몸 안이 아닌 데와 몸 밖이 아닌 데도 있고, 몸 아님이 아닌 데와 바같이 아님이 아닌 데도 있되 다 같이 은밀한 것이 아니다. 중생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은밀함이라 한다”고 했다. |
『보장론(寶藏論)』에서 이르기를 “한 법도 보내지 아니하고 한 법도 얻지 아니하며 한 법도 닦지 아니하고 한 법도 증득하지 아니하여 성품이 깨끗한 천진(天眞)이라 가위 큰 도[大道]이면서 참된 하나[眞一]이다”라고 했다. |
그러므로 천하를 두루 관찰하면 진인(眞人) 아님이 없는데, 누가 이 도리를 얻어서 그 한 무리와 같아지겠는가. |
태교(台敎)에서 이르기를 “10법계 중생이 곧 부처요, 10법계 중생의 음(陰)과 부처님의 음이 터럭 또는 개자만큼이라도 다름이 없고 3세의 부처의 일과 중생의 네 가지 거동이 다 원만하지 아니함이 없음을 관찰할 뿐이다”라고 했다. |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기를 “만약 적게라도 성품을 본 이면 역시 불승(佛乘)을 얻는 것이니, 마치 큰 바다 안의 한 터럭만큼의 물방울에서 많은 물방울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의 물방울 안은 모두가 큰 바다의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보살의 5위(位) 안과 10신(信)에서 10지(地)까지의 낱낱 지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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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도 모두 부처 과위가 있는 것이 마치 저 바닷물의 한 터럭만큼의 방울과 같다”고 했다. 부처 성품을 여의지 않으면서 모든 행을 얻기 때문이다. |
저 부처의 성품으로 나아가고 닦음이 있음은 마치 『화엄경』에서 “바로 온전한 부처의 과위와 부동지(不動智) 등의 10지(智)의 여래로 믿음과 닦음을 보인 것은, 마치 어떤 평범한 사람이 단 번에 보위(寶位)로 올라가 몸이 왕위에 있으면 신하를 두루 알게 되고 온갖 품류는 다 그에게 속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함과 같다. |
『화엄경』 안의 법문인 보살의 행상(行相) 또한 그와 같아서 처음 발심으로부터 10주(住)의 처음까지 단박에 이러한 여래의 법신과 부처 성품과 지혜 결과를 보며 보현의 온갖 만행을 두루 행하되 인연 따라 걸리지 않으면서 모두가 다 지음이 없다. |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기를 “부처의 성품은 짓는 것이 아니요, 다만 객진번뇌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
그러므로 이제 10주의 첫 지위로부터 지음이 없는 삼매 때문에 제 체성이 아라한[應眞]이요 객진번뇌는 전혀 체성이 없다. 참된 체성과 작용뿐이라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이 없고 저절로 그대로가 부처이다. 때문에 한 생각과 상응하면 한 생각에 부처를 이루고, 하루와 상응하면 하루 동안에 부처를 이루거늘, 어떻게 수겁 동안 점차로 닦고 여러 겁에 닦음을 쌓아서 3지(祗)에야 과위에 이를 필요가 있겠는가. 마음이 겁의 수량과 소견의 장애에 반연한다면 어떻게 쉬겠는가. 모든 불법의 문은 본래 시간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헤아리고 겁(劫)을 설정하는 것은 바로 불승이 아니다. |
또 경에서 이르기를 “온갖 세계와 바다의 작은 티끌만큼 많은 수의 겁 동안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고 친근하며 공양한다 함은, 공(功)이 없음의 지혜가 두루하여 법마다 부처가 아님이 없고 부처가 곧 법이라 함을 밝힌 것이다”라고 했다. |
시방 허공에 틈 사이도 없고, 바늘 끝 또는 터럭의 끄트머리만큼까지도 이는 온갖 법이요 온갖 부처가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작은 티끌만큼의 시비나 물들고 깨끗하다는 마음이 있다면, 모두가 부처는 보지 못할 뿐이다. 지혜 눈으로만이 그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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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르기를 “도무지 부처 세계의 작은 티끌 수만큼의 많은 부처님을 드는 것은 지혜가 만족하고 행이 두루하여 부처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 다 받들어 섬긴다 함은, 곧 성인 범부의 체성이 같아서 하나도 불법 아님이 없고 공(空)하여 사이조차 없으며, 넓은 눈으로 그를 관찰하여 그 마음과 경계를 통하면 부처 아님이 없으며 지혜는 모든 행을 따르고 모두가 다 부처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
이와 같이 보며 일로써 논하여도 실제로 그와 같고 표시되는 법으로 논하여도 온갖 것이 모두 진실인 것이니, 이것이 부처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 법이거나 한 물건이라도 이것을 부처라고 보지 않으면, 이 사람은 바로 삿된 소견이요, 바른 소견이 아닌 줄 알아야 한다. 곧 능소(能態)와 시비의 모든 소견이 다투어 생기게 되어 이 보현과 문수의 지혜 눈의 경계에 들지 못한다. |
그러므로 만약 다른 생각이거나 잡념이 계속 일어나게 되면, 그 때문에 중생이라고 한다. 곧 능소가 서로 일어나고 시비가 서로 관계하는지라, 바로 이것이 삿된 소견이다. 만약 망령된 생각은 모양이 없음을 깨달아 바깥 경계가 저절로 공허해지면, 모든 세계의 티끌이 정각 아님이 없다. |
그런 까닭에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에서 이르기를 “한 생각이 처음 일어나되 처음의 모양[初相]이 없다 함은 마음의 일어남[心起]을 말하는 것으로 처음의 모양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의 모양을 안다고 말함은 곧 생각 없음[無念]을 말한다”고 했으니, 곧 이것은 의심을 제거하고 훌륭한 알음[解]을 내게 한다. |
이를테면 어떤 중생이 ‘지극한 해탈의 도[極解脫道]가 본각(本覺)과 만날 때 미세하게나마 처음으로 생긴 앎[知]이 있는가, 없는가’라고 의심한다. |
만약 앎이 있다면 지극한 해탈의 도는 당연히 생각 없음이 아니어야 한다. 왜냐 하면 있다는 처음의 생각을 아는지라 처음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앎이 없다면 지극한 해탈의 도는 당연히 있을 수 없어야 한다. 왜냐 하면 이미 처음의 생각이 없는데 무슨 생각이 없다는 것을 기다려서 해탈이 있다는 것을 성립시키겠는가. |
이러한 의심 때문에 이제 널리 해석하되 알아야 할 대상[所知]의 모양은 본래부터 제 성품이 공(空)하여 없으며, 능히 앎[能知]의 지혜는 본래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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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는 때가 없다. 이미 깨달을 바[所覺]의 모양이 없고 능히 깨달음[能覺]의 지혜도 없거늘, 어찌 미세하게 처음의 모양이 있고 지혜로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그런데도 처음의 모양을 안다 함은 바로 생각 없음의 도리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왜냐 하면 법 성품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알아야 할 대상이 처음 일어나는 모양이 없고 능히 앎의 처음 깨닫는 지혜가 없다손 치더라도 알아야 할 대상의 모양이 없고 능히 앎의 지혜가 없음을 통달하면 모든 깨달음도 없고 도무지 공하고 없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도리에 의하여 ‘처음의 모양을 안다’고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
이 때문에 온갖 중생은 각(覺)이라 하지 아니하며 본래부터 생각생각이 계속되면서 일찍이 생각을 여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비롯함이 없는[無始] 무명(無明)이라고 말한다. |
바로 이것은 위의 생각 없음의 뜻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금강(金剛) 이하의 일체 중생은 혼자 힘의 업상(業相)인 큰 무명의 생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이것은 온갖 중생들의 모두는 생각이 있는지라 중생이라 하고,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가 생각 없음을 얻은지라 부처라 하는 까닭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
이로부터 이하에서는 시각(始覺)의 경계가 두루하고 원만함을 나타내 보인다. |
크게 깨달음[大覺]이라 함은, 이미 저 언덕에 이르러서 온갖 한량없는 중생들이 한 마음의 미혹[流轉]으로 나고 머무르고 달리하고 사라지는[生住異滅] 네 가지 모양을 짓는 줄을 두루 아는 것이다. |
그러므로 논(論)에서 “만약 생각 없음을 얻으면, 마음의 모양이 나고 머무르고 달리하고 사라짐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
어떠한 이치 때문에 이렇게 아는 것인가. 자신의 생각 없음을 얻은 때에 온갖 중생도 평등하게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논에서 “생각 없음이 평등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
어떠한 이치 때문에 오직 한 수행자가 생각 없음을 얻었을 적에 온갖 중생들도 모두 생각 없음을 얻느냐 하면, 낱낱 중생들에게는 모두 다 저마다 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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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이 있기 때문이다. |
이 이치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한 수행자의 시각이 원만하여져서 본각과 같아질 적에는 온갖 한량없는 중생들의 본각의 마음속에 두루 같아져서 자신만의 본각이 아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제 성품의 본각은 중생계에 두루하여서 이르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이다. |
청정하게 깨달은 이가 생각 없음을 얻을 적에 온갖 중생들도 모두가 생각 없음의 것을 얻거니와, 청정하게 깨달은 이가 무명을 끊을 적에 온갖 중생들 역시 끊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시각(始覺)한 이가 무명을 끊을 적에 일체 중생도 모두 끊어진다면 무엇 때문에 위에서 ‘금강 이하의 일체 중생은 혼자 힘의 업상인 큰 무명의 생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각이라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만약 모든 중생들이 비롯함이 없는 무명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으면서 모든 부처와 똑같이 생각 없음을 얻었다 하면 생각 없음이라는 이치들은 말로만이 있을 뿐 진실한 이치가 없다. 어찌 일체 중생들의 모두가 본각이 있고 시각도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이러한 문난을 결단(決斷)함에는 두 가지 문이 있다. 첫째 제 종(宗)에서 결단하고, 둘째는 다른 것에 견주어 결단하는 것이다. |
제 종에서 결단한다 함은 이 논(論)의 바른 종[正宗]에서 일체 중생은 동일하게 계속하여 차별이 없는 까닭을 나타내 보이려 함에서다. 한 수행자가 비롯함이 없는 무명이 마지막 끊어질 적에 일체 중생들도 똑같이 다 끊어지며, 한 수행자가 시각이 원만해질 적에 일체 중생들도 똑같이 원만해짐을 얻을 수 있다. |
그러므로 3신(身)이 본래 존재하는지라 계경(契經) 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
“그 때 세존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문수사리여, 나는 두 가지의 같음[等]으로 말미암아 정각을 이루었느니라. 첫째는 끊어짐이 같음[斷等]이요, 둘째는 얻음이 같음[得等]이다. 끊어짐이 같음이란 나의 지극한 해탈의 도가 처음 일어났을 적에 온갖 중생들의 비롯함이 없는 무명이 한꺼번에 마지막으로 당장 결단되었기 때문이요, 얻음이 같음이란 내가 처음 도를 이루어서 시각이 원만해졌을 적에 일체 중생도 다 만족되었기 때문이니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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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셨으니, 이것을 두 가지 같음이라 하기 때문이다.” |
다른 것에 견주며 결단한다 함은, 원만한 것을 중생계와 견주면 하나하나의 법마다 청정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모든 중생을 위없는 부처님과 견주면 무명의 광에 들어가 깨달아 아는 바가 없다. 모두가 다 청정하며 장애한 바가 없어야 생각 없음 등의 이치가 성립되고, 무명의 광에 들어가 깨달아 아는 바가 없어야 위와 위에서 말한 바의 글에 서로 어기는 허물이 없다. 이 한 모퉁이를 들어서 널리 관찰하여야 한다. |
이로부터 이하는 모든 시각에 융화하여 본각과 같게 한다. 쉰한 갈래[五十一分]로 시각이 원만해질 적에 실로 더욱 나아지는 점차의 결과가 없고 마지막의 원만한 극치도 없다. 왜냐 하면 온갖 시각은 네 가지 모양[四相]이 때를 함께 하면서 머무를 수 있고 모두가 자기 혼자 성립됨은 없기 때문이다. |
본래부터 한 맛이요 평등하여 제 성품이 원만하여 꼭 들어맞아서 둘이 없고 한 모양의 각(覺)이기 때문이다. 논(論)에서 “실로 시각의 다름이 없고 네 가지 모양이 때를 함께 하면서 존재하고 모두가 자기 혼자만으로 성립됨은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동일한 각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
『기신소(起信疏)』에서 이르기를 “환히 크게 깨쳐서 제 마음을 깨달아 알면, 본래 바꾼 바도 없고 이제야 고요하여진 바도 없어서 본래가 평등하나 갖가지 꿈 같은 생각이 그 마음의 근원을 움직였다. |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깨닫는다 함은 바로 깨달을 바 모양의 마음을 밝히는 것이요, 처음 일어난다 함은 무명에 의하여 생상(生相)의 마음 체성이 있어서 생각을 움직이게 하였다. 이제야 본각을 여의면 불각(不覺)이 없어서 곧 움직이는 생각이 고요한 마음임을 증득하여 알았기 때문에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니, 마치 동쪽을 미혹하여 서쪽을 삼았으나 깨쳤을 적에 비로소 서쪽이 동쪽이었음을 안 것과 같다. |
마음에 처음의 모양이 없다 함은, 본래는 불각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일어남이 있었거니와 이제는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마음에는 일어나는 바가 없으므로 처음의 모양이 없다고 말하며, 지금은 마지막 지위라 움직임의 생각은 온통 다 되어 한 마음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처음 모양이 없다고 말한다. |
무명이 영원히 다하여 한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면 다시는 일어나거나 움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