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3) : 과학혁명 그리고 현재의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근본적 변화는 15-16세기 유럽에서 나타났다. 일명 ‘과학혁명’의 시작이다. 저자는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왜 그것이 혁명이었는가 하면, 약 1500년 이전까지 전 세계 인류는 자신에게 새로운 의학적, 군사적, 경제적 힘을 얻을 능력이 있는지를 의심했기 때문이다. (....) 지난 5세기 동안 인류는 과학연구에 투자하면 스스로의 능력을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점차 믿게 되었다. 이것은 맹목적인 믿음은 아니었다. 경험적으로 반복해서 증명된 사실이었다.”
과학혁명의 성취를 이룬 핵심적인 사고는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기’였다. ‘무지의 인정’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알 수 있는 사례는 지도 제작에서 발견하게 된다. 과거 지도는 알 수 없는신비스러운 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15세기 이후 제작된 지도에는 빈 공간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알 수 없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전통적인 지식보다는 수학과 관찰의 중요성을 확산시켰고 지식의 가치를 인정하게 하였다.
과학은 홀로 발전할 수 없다. 과학연구는 특정의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제휴했을 때만 번성한다. 투자가 없이는 과학연구는 진행될 수 없다. 이데올로기가 연구비를 정당화하며 과학적 의제에 영향을 미치고 과학의 발견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과학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와 결합함으로써 비약적인 변화를 마주하였다. 제국주의는 영토의 정복을 원했고, 과학은 지식의 확장을 원했다. 둘의 결합은 새로운 세계를 도래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과학자들은 제국주의 프로젝트에 실용적 지식,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기술적 장치를 공급했다. 정복자들은 과학자들에게 정보와 보호를 제공하고, 온갖 종류의 이상하고 흥미진진한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지구 구석구석에 과학적 사고방식을 퍼트림으로써 보답했다.” 저자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을 과학혁명의 기초가 되는 사건이라고 설명하는 데, 그것은 과거의 전통보다는 현재의 관찰결과를 더 선호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콜롬버스는 자신이 발견한 대륙이 인도라고 생각했지만,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그것이 새로운 대륙임을 알았고 결국 대륙의 이름은 아메라카로 정해졌다.)
제국주의와 결합된 과학은 또한 자본주의적 사고와도 합치되어 무한한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자본주의 중요한 계율은 ‘생산에 따른 이윤은 생산증대를 위해 재투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의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을 채택하고 이윤을 찾아 전 세계를 정복하기 시작하였다.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마법의 순환이었다. 신용대출은 새 발견을 할 자금을 공급했고, 발견은 식민지로 이어졌고, 식민지는 수익을 제공했으며, 수익은 신뢰를 만들어냈고, 신뢰는 더 많은 신용대출로 바뀌었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는 이렇게 중국에서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인도에 진출하였으며, 이집트를 장악했던 것이다.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는 ‘이윤’에 대한 탐욕을 무한하게 확장함으로써 결국 피지배 사람들에게 끝없는 지옥을 제공했다. 무역의 확산으로 ‘설탕’의 수요가 늘어나자 사탕수수 농장 경영을 위해 노예무역이 활성화되었고, 고무농장이나 기타의 플렌테이션 농업 생산을 위하여 식민지에 대한 착취가 강행되었던 것이다. “성장이 최고의 선이 되고 다른 윤리적 고려에 의한 제약을 받지 않을 때, 그 성장은 쉽사리 파국으로 치닫는다.”
과학의 발전은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인간은 에너지를 전환시키는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이제까지의 삶의 형태를 바꾸었다. 사피엔스는 이제까지 식물의 성장주기와 태양의 변화주기에 맞춰 생활하면서 대부분 농촌에서 생활하였다. 하지만 발전된 기술의 힘은 농업의 기계화와 가축의 집단적 사육을 가져왔고 잉여의 농촌 노동력은 도시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동력이 산업화를 가져온 노동력을 제공한 것이다. 산업화는 끔찍한 비인간화를 가져왔지만, 전체적인 방향은 물질적 부를 확장시켰고 생활의 개선을 만들어내었다. 생산의 지속적인 증대를 위해서 ‘소비’를 부추기는 ‘소비지상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으며, 생산을 위한 원자재나 에너지를 얻기 위해 생태계는 파괴되었다. 산업혁명은 사피엔스의 삶에서 ‘도시화, 농민의 소멸,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등장, 보통 사람들에게 주어진 힘, 민주화, 청년 문화, 가부장의 해체’ 등과 같은 변화를 만들어내었다.
산업혁명이 가져온 변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과 공동체의 해체’였다. 이제 가족과 공동체를 대신하여 국가와 시장이 개인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국가는 ‘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통하여 개인들을 통합하고 관리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에게 필요한 물질적 욕구를 제공하였다. 시장 또한 잃어버린 과거의 공동체를 대신하여 ‘소비공동체’를 통하여 개인들을 통합시켰다. 현재의 팬덤문화 또한 상업적인 이해관계로 뭉친 특정의 소비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과학혁명의 힘은 사피엔스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삶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사피엔스가 성취한 삶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저자는 부정적이고 끔찍한 사례에 주목한다면 현재의 삶을 낙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을지라도, 전체적인 통계나 물질적, 개별적 사례를 통해 평가할 때 사피엔스의 삶은 상대적으로 평화와 평온을 증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평가한다. 인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끼친 전염병들이 정복되었고, 개인의 권리가 국가를 통해 보호받게 되었고, 일상적인 전쟁의 공포가 상대적으로 완화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축소 또한 과학혁명의 결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저자가 보는 전쟁이 줄어든 이유는 먼저, ‘핵무기’의 개발이다. 여기에 대한 상당한 논쟁을 차치하고 ‘핵무기’에 대한 공포가 대규모 전쟁에 대한 억제력을 가져왔다는 것이며, 세계 간의 대외무역과 투자 네트워크 속에서 평화가 전쟁보다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국제적 연결망은 국가들의 독립성을 서서히 약화시켜, 어느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줄인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더 이상 전면적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이제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생각은 현재에 대한 불안보다는 미래에 나타날 사피엔스의 과도한 욕망에 집중되어 있다. 사피엔스가 자연선택이라는 법칙을 거부하고 ‘지적 설계’을 통해 신적 존재가 되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과학계에서 추진하고 있는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 비유기물 공학’은 사피엔스의 생물학적 성격을 완전히 변화시키려는 시도이여 또한 사피엔스의 숨겨진 욕망인 ‘죽음의 극복’을 시도하려는 작업이다. 저자는 이러한 시도에 대하여 윤리적인 잣대를 통해 프로젝트를 중단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라고 말하며 다양한 정당화를 통해 사피엔스의 ‘신’이 되기 위한 프로젝트는 진행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끼치는 행동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저자의 질문은 국지적으로 벌어지는 사태에 머물고 있는 보통의 사피엔스에게 좀 더 넓은 시선을 제공해준다. 사피엔스가 가져온 변화와 욕망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통찰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과학혁명’의 영역이다. 기술적 변화가 인간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인간의 행복’이다. 개별적 인간의 가치와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사피엔스의 변화는 각자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인지 저자 또한 독립된 장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을 통해 개인의 행복의 의미를 다루고 있다. 역사는 한번도 개인의 행복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것은 역사가 담당해야 할 중요한 영역이라는 점이다.
사피엔스에 대한 포괄적 이해가 삶의 궁극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변화에 대한 이해가 세상에 대처하는 능력의 향상을 가져올 것인가? 최소한 독단적인 편견과 편향에 의한 극단적인 선택을 줄이는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접근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발견된다. 접근하는 사람은 변화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사람들이다. 편견으로 무장한 신념가들은 자기와 다른 세상에 대한 지식과 견해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의 생각을 확신시켜주는 목소리만 찾아 헤멜 뿐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변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무지에 대한 인정을 통하여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과 태도를 함양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길 바랄 뿐이다.
첫댓글 - 자연(땅)과 함께 살아온 인류가 자연(땅)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인류의 비극은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르는게 약인 시절을 지나 아는게 힘이라는 시대로 치닿고 있다. 장대한 우주의 역사를 인류는 겨우 몇 백년의 시간으로 추월하고 있으며, 인류의 변화는 더욱 가속도를 밟으며 달려갈 뿐이다. 우주는 말이 없고, 인류는 달려간다. 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