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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면의 지명 유래
*** 하정학 프로필 ***
1930년 동로면 간송1리 출신. 동로초등학교 12회 졸업, 한학(漢學) 수학
육군보병학교 28기 졸업. 육군 대위 전역(1967년). 동로면 예비군 중대장 역임(8년간)
농업협동조합 동로단위조합장 역임(6년간)
문경시 향토사연구위원(前)
동로면[東魯面]
동로면은 경상북도 문경시 동부에 있는 면이다.
면소재지는 적성리이다. 문수봉(1,162m)·대미산(1,115m)·황장봉(1,077m)·공덕산(913m) 등 900m 이상의 산들이 많으며, 소규모 하천이 산간 곡저를 흐른다. 평야의 발달은 매우 미약하며 도로와 경지는 하천연안을 따라 좁고 길게 발달했다. 특용작물로 잎담배·약초·고추 오미자 등이 생산되며, 한우사육이 활발하다. 남부일대에 경천호(慶泉湖)가 조성되어 있다. 북부 일부는 산악경관이 아름다워 월악산국립공원에 속한다. 적성(赤城)·석항(石項)·노은(魯隱)·생달(生達)·명전(鳴田)·수평(水坪)·마광(磨光)·인곡(仁谷)·간송(磵松) 등 9개 동리가 있다. 면적 142.94㎢, 인구 1,956(2002).
동로의 유래 및 현황
신라시대에는 난산현(蘭山懸) 경덕왕때 안인현(安仁懸) 고려시대까지는 작성현(鵲城懸)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동로소면(冬老所面)이 되었고 현재 동로라는 명칭은 생달1리(고불목) 마을앞에 동로소라는 큰 웅덩이가 있는데, 조선초기 조령통가 개통되면서 문경읍 관음리와 갈평리, 중평리를 거쳐 여우목고개(문경읍 중평리와 동로면 생달의 경계)를 넘으면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동로소의 명칭 때문에 [동로]라는 명칭이 붙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문경군 동로면(東魯面)이었다가, 1995년 점촌시 문경군이 통합되면서 문경시 동로면으로 개칭하여 적성리등 9개 법정리동과 20개의 행정리동으로 편성되어 있다.
1.연혁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 사벌주(沙伐洲)
고려시대 : 상주목 작성현(鵲城懸)
조선시대 : 예천군 동로소면(冬老沼面)
1906년 문경군으로 편입
1914년 문경군 동로면(東魯面)으로 개칭
1963년 수평출장소 설치
1995년 문경시 동로면으로 통합
1996년 수평출장소 폐지
2.지역특성
동로면은 문경시 최북단에 위치해있고, 충청북도와 도계지역으로 해발 1,077m의 황장산을 중심으로 남쪽은 낙동강 상류이고 북쪽은 남한강 상류가되는 중심부에 위치에 있으며 높은산과 빼어난 절경으로 산자수려하고 인심후한 순천백성이 사는곳 이었으나, 깨끗한 공기와 사시사철 맑은물이 흘러 하절기엔 피서객이 붐비는 피서지로 변모해 환경오염 문제가 중요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본면 입구 마광리에 문경팔경의 하나인 경천호는 2,720만톤의 물을 저수할 수 있으며 2개시군 9개읍면에 물을 공급하여 3,400ha 경지에 물을 적셔주는 우리나라 최대의 농업용수 댐이다. 그 외 경천호의 부가적인 사업으로 소수력 발전소가 건설되어 연간 236만 W의 전력생산으로 3,000호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어 기존의 화력발전에 소요되는 연료비절감과 환경오염 방지에도 일조를 하고 있다.
또한 경천호에 40여명이 빙어양식계를 결성하여 농한기인 동절기에 빙어를 잡아 생채 또는 훈제가공 판매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특화작목으로 영지, 표고, 느타리버섯 재배에 89농가가 참여하여 연간 10여억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고소득 작목인 고추, 엽연초, 포도, 사과 재배로 농산물 수입개방에 경쟁력있는 품목선택으로 대체하고 있으며 1999년도부터 새로시작한 오미자는 국제경쟁력까지 갖추어 새로운 고소득 작물로 자리매김 할 것으로 보고 있다.
(1) 마광리(磨光里)
◆ 마광리(磨光里) : 1484년 경(약 520년 전) 단양인(丹陽人) 우진사(禹進士)가 개척하였으며, 그 후 진사 손영조(孫永祚)와 통정대부(通政大夫) 변정언(邊正言)이 서로 상의하여 마을 앞산은 정침봉(正針峰)이고, 뒷산은 숫돌(礪石,여석)봉이니 바늘을 갈아서 마을을 빛내자는 뜻으로 ‘마광’(磨光)이라 이름 지었다.
◆ 꽃재(花嶺,화령) : 마광 동북쪽에 조그마한 동리가 있는데 춘삼월(春三月)이 되면 두견화(杜鵑花,진달래꽃)가 만발하여 마을 전체를 뒤덮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 인곡리(仁谷里)
◆ 인곡리(仁谷里) : 동로면내 마광을 포함하여 9개 이동(里洞)이 모두 삼국시대 안인현(安仁縣) 때부터 예천군 동로소면(東老沼面)이었는데 광무(光武) 10년(1906년) 9월 21일 칙령 제49호로 행정구역 조정 계획에 의거 예천군에서 문경군으로 편입되었다. 그 후 1914년 경상북도가 23군을 조정하면서 동로소면이 처음으로 동로면(東魯面)으로 표기되었고, 동시에 부군면리동(府郡面里洞)이 통폐합되었다. 이 때 인판리(仁坂里,원터)와 제곡리(諸谷里,난산蘭山)가 합쳐져서 인곡리(仁谷里)라 했다.
◆ 원터(院垈,仁板里;인판리) : 통일신라로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태종 13년 조령로(鳥嶺路)가 개설되기 전까지 도읍(都邑)에서 영남 지방으로 통하는 관로(官路) 및 민로(民路)가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오자면 현 미륵사지(彌勒寺址)에서 대원령(大院嶺,하늘재)을 넘고, 갈평 호항령(狐項嶺,여우목고개)을 넘어서 동로 소재지를 거쳐 사벌(沙伐), 다인(多仁)으로 가는 통로와 수평리(水坪里)와 인판리(원터)를 거쳐 예천과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및 동해 영덕 등지로 교통하던 시기에 이곳에 원(阮;여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을 지나는 길손을 위한 숙박 시설을 갖추어 쌀과 야채, 땔감 등을 항시 비치하여 놓고 빈 상자 옆에 기록된(가격표)대로 돈을 넣고 가도록 하였다. 과객의 편의를 제공했던 원(阮)이 있어 ‘원터’로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 돌문안, 돌문밖 : 마광리에서 인곡리 몽고지 동네를 약 1마장 못미쳐 가서 경천댐 축조로 신작로를 개설한 관계로 산모퉁이를 돌아서 가게 되는데 그 지점에서 약 30m 아래에 있는 마을 중앙에 돌문이 있어 그 안에 있는 마을을 ‘돌문안’, 그 밖에 있는 마을을 ‘돌문밖’이라 불렀다.
일제시 산북에서 동로 소재지까지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선돌문(立石)은 큰 느티나무 옆에 묻혀 있다가 1986년 경천댐이 축조되면서 지금은 완전히 수몰되고 말았다. 돌문이 있었던 관계로 마을 이름이 그렇게 불리어졌다고 하나 돌문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문헌상의 자료가 없어서 알 수가 없다.
◆ 사기막골(沙器幕골) :조선 초기 도자기 생산 기술이 처음 도입된 곳으로 예천의 사부리(沙夫里), 두인리(杜仁里), 산북의 소야리(昭野里), 종곡리(鍾谷里) 등 경북의 북부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분청자기(粉靑磁器) 요지(窯址)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3) 수평리(水坪里)
◆ 수평리(水坪里) : 원래 수평리는 갈평동(葛坪洞,칡들)으로 석평리(石坪里,돌머리; 수몰 전 東部)와 화장면(花庄面)의 수한리(水閑里, 물안,무라이)를 병합하여 이루어진 동리이다. 동로면내에서는 벌재 큰들 다음 큰들로서 처음에는 칡밭을 일구어 마련했다 하여 ‘칡들’(칫들) 또는 ‘수평’(水坪)이라 하였다.
◆ 창마(倉마) : 대동지지(大東地誌)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보면 안인현(安仁縣) 소재지가 갈평창(葛坪倉) 바로 옆에 있었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안인현은 삼국시대 때는 난산현(蘭山縣)이었던 것을 신라 경덕왕 16년에 안인현으로 개칭하였다고 나와 있고, 예천군에서 관리하던 군창(軍倉)이 ‘창마’(倉마)라 불리웠던 마을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 무라이(水閑里,수한리) : 화장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당시 수평리에 편입된 동리로서 사불산(四佛山) 벽에서 흐르는 개울물이 경사가 비교적 순해서 흐름이 한가롭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일설로는 어느 선지자(先知者)가 경천댐이 축조되면 ‘물안’이 될 것을 예상해서 붙여 놓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 비리(遷,천) : 모랭이를 돌아가는데 뚫린 길이라 하며 문경시내에서는 점촌에서 문경으로 가는 길목 진남교반(鎭南橋畔)에서 불정으로 통하던 ‘토끼비리’(兎遷,토천)가 유명하다. 그리고 우리 동로에는 갈평비리(葛坪遷, 수평에서 원터로 돌아가는 비리), 구정비리(九鼎遷, 간송1리), 마진비리(馬盡遷) 등이 있다. (참고 : 비리→벼루→벼랑)
(4) 간송리(磵松里)
◆ 솝들(솟대들), 마진비리(馬盡遷) : 송평동(松坪洞,솝들)에 함양박씨(朴氏) 성을 가진 사람이 무과에 급제하고 들 한가운데 솟대를 묻었다 하여 ‘솟대들’이라
오래 동안 전해오면서 ‘솝들’이라 변음되었다 하며, 그 동리 앞을 말을 타고 지나는 사람은 마진비리(馬盡遷)에 이르면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며 걸어서 갔다 하여 ‘마진비리’라 전해지고 있다.
◆ 간좌골(艮坐골) : 영조 47년 경 예천군 보문면 성본리에 살고 있던 여광벽(呂光壁)이라는 분이 일찍 취처(興壤李氏)를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상처를 하고, 그 곳에 머무를 뜻이 없어 예천군 하리면 맛질로 이사를 와서 재취(順興安氏)를 하였으나 그 또한 곧 세상을 떠나매 다시 이사하여 터전을 잡은 곳이 현재의 간좌골(艮坐골) 마을이다. 그 동리에 들어오니까 경주金씨네가 이미 자리잡고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고증은 없다. 그러나 여(呂)씨의 세 번째 부인이 경주金씨임이 분명하니 金씨네가 먼저 터를 잡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진성이씨(眞城李氏)네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呂씨가 바로 진성 李씨네 외손(外孫)이었던 연고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지금은 부락내 대문호(大門戶)를 이루고 있다. 처음 들어올 때는 그 동리가 풍수지리설에 의거 집 좌향(坐向)을 간좌(艮坐; 정北과 정東 간을 등지고 南西 간을 향하는 자리)로 놓아야 한다는 설에 의해 그 마을의 좌향이 간좌(艮坐)로 이루어졌고, 그래서 동리 이름이 ‘간좌골’(艮坐골)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 천주동(天柱洞), 구정비리(九鼎遷) : 행정리동으로는 간송의 주동으로 뒷산이 천주산(天主山)으로 그 산 밑에 자리잡은 동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수평리에서 천주동 700m 못미쳐 금천(錦川)에 구정비리(九鼎遷)가 있는데 이곳에는 천작(天作)으로 암반 위에 솥을 아홉 개를 동시에 걸칠 수 있도록 홈이 패여져 있다. 옛날 보부상이 그곳에서 요기를 하기 위해 밥을 지어 먹었다고 해서 ‘구정비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 사부래이(沙夫洞,사부동, 四佛峴) : 고산자(孤山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사불현(四佛峴)의 표시가 뚜렷하며, 1783년 정문오(鄭文五)란 사람이 이 마을 개척할 때 솥(釜,가마)을 만드는 여러 명의 사부(沙夫)가 사부령(沙夫嶺) 좌측 골짜기에 솥 만드는 터를 마련하였다. 지금까지 점터(店터)가 있으며, ‘사부동’은 거기에서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
◆ 허공다리(虛空다리) : 송평동에서 소재지 쪽으로 가다가 보면 암벽과 개울이 맞물린 곳에 암벽과 암벽 사이에 허공이 있는데, 옛날 통행인들이 그곳에 나무로 다리를 놓고 통행했다 하여 그 모퉁이 이름을 ‘허공다리’ 모퉁이라 불렀다 한다.
◆ 할무세이(姑城,고성) : 뒷산에 신라 시대시 축조된(편집자 주 : 최근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의 석성이라 함. 11쪽 참조) 노고성(老姑城)이 있다 하여 ‘할무세이’ 또는 ‘할미성’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5) 석항리(石項里)
◆ 돌목, 석항리(石項里) : 옛날 영주군 상리면 일부인 월경동(越境洞,지금 龜洛里;구락리)과 수진계리(水眞溪里,무진골)와 돌목을 병합하여 ‘석항리’라 부르며 1914년 동로면에 편입되었다.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네마다 돌이 많아 ‘돌목’으로 불리게 되었다. 돌목은 중간마와 윗돌목으로 구분된다.
◆ 솥터매기 :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龍門寺)로 넘어가는 고갯길 못미쳐 부락에 솥을 굽던 가마터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무진골(水眞溪里, 점마) : 영조 46년에 석릉군(石陵君) 용(龍)의 5대손인 석계공(石溪公) 정선(旌善) 전학문(全鶴文)이 정선에서 예천 금곡동(金谷洞,금당실)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고자 와 보니 현 석항리 801번지에 예천임(林)씨가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全씨 일가의 손세(孫勢)가 번창하여 약 200여 년 동안 동리 100여 호 중 80여 호를 全씨 문중이 차지할 정도로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었다.
처음 마을 한복판 돌 틈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있었는데 아주 맑고 물맛이 뛰어났다. 연 중 수량의 변화가 없고 항시 흘러 넘쳤다. 동민들이 이 물은 7년대한(七年大旱)에도 다할 날이 없을 것이라면서 ‘무진골’ (水眞溪里,수진계리)라 붙여진 이름이 전해오고 있다. 한편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솥가마터가 말해 주듯 솥을 만들어 팔던 마을이라 하여 ‘점마’ (店마)라고도 불리고 있다.
◆지통마(紙筒마) : 닥나무를 많이 재배하여 한지를 뜨는 지통(紙筒)이 설치된 동리라 하여 ‘지통마’라 불리어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 눌기(臥旗洞, 기를 눞힌 동네) : 옛날 어느 힘센 장수가 나타나서 그곳에 오래 유진(留陣)할 계획으로 병졸들과 진을 치고, 투구는 마을 뒷산 투구봉에 벗어 두고, 말은 마산(馬山)에 매어 두고, 무리를 상징하는 깃발을 세워 두었는데 얼마를 가지 않아 그만 그 깃발이 바람에 누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오고 있다.
◆ 구마(舊洞) : 약 500년 전에 경주金씨가 터전을 잡고 들어와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이룩하였는데 이 마을이 이웃 어느 마을보다 오래된 마을이라 하여 ‘구마’ 또는 ‘굿마’로 불리어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 그나기(龜落里,구락리) : 옛적 어느 해 오랜 장마비로 홍수가 심하게 났는데, 갑자기 천둥이 치고 먹구름이 몰려 오는 기상이변이 일어나더니 하늘로부터 홀연히 큰 거북 한 마리가 물줄기를 타고 땅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웃 동리 사람들이 이곳이 거북이의 운을 받은 상서로운 땅이라 하여 집을 짓고 터전을 잡아 살게 되었으며, 거북 ‘구’ (龜)와 떨어질 ‘락’ (落)을 써서 마을 이름이 생겨 났다고 한다.
◆ 성골(城골), 양지마(陽地마) : 이 마을들은 전후좌우로 바람막이 역할을 해 주는 산들이 아늑하게 둘러쳐 있어 그 골 안의 모습이 마치 성에 둘러 쌓인 것처럼 보인다 하여 ‘성골’이라 하고, 그 안의 마을에 볕이 들어가 따뜻하다 하여 ‘양지마’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6) 노은리(魯隱里)
◆ 노은리(노래이, 노루미)) : 1683년 경에 허(許)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 터를 잡아 개척하였으며, 풍수설에 주위 산세가 노루 꼬리 형국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오고 있다.
◆ 사평(泗坪) : 마을이 생길 당시에 하천의 시원(始原)이 공덕산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중국 옛 현인들의 출생지인 수사(洙泗)의 사자(泗字)와 동로면에서는 제일 넓은 들이 마을 앞에 있다 해서 ‘들평’자(坪)를 취해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오고 있다.
◆ 평지(平地) : 인동 장씨(仁同張氏)가 처음으로 들어왔다 하며, 마을이 위치한 터가 비교적 평평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도하동(道下洞),도화동(桃花洞) : 산북면 가좌리로 넘어가는 길 밑 동리라 하여 도하동(道下洞)이라 하였으며, 옛날 그 마을 둘레에 야생 복숭아 나무가 많아 봄 한 철이면 꽃이 만발하여 온통 동리 전체를 꽃으로 수를 놓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 교촌(校村) :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의해 지금의 적성 장기리(場基里, 장터)였던 것을 노은리로 편입시켰고, 벌재(伐嶺) 큰마에 있던 벌재학당이 1929년도에 동로보통학교로 인가가 남에 따라 당시 벌재학당의 훈도(訓導)로 재직 중이던 유지 김만호(金晩浩)씨가 자기 소유로 있던 현 학교 부지를 희사하여 그곳으로 옮겨옴으로써 ‘교촌’(校村)이라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7) 적성리(赤城里)
◆ 적성리(赤城里),벌재(伐嶺里) : 북쪽 산고개가 벌재인데, 그 밑에 자리함으로써 벌재 또는 적성리라 불리어졌는데 지금은 동로면 소재지로 되어 있다. 혹은 고려시대에 작성현(鵲城縣)으로 불리었다 하나 문헌상의 뒷받침은 찾을 길이 없다.
★ 벌재장 : 교통 수단이 발달되지 않아 도보에만 의존하던 시절에 이곳에 ‘벌재장’이라는 5일장(3일, 8일)이 섰다. 북쪽으로는 벌재를 넘어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지역인 벌천(伐川), 방곡(榜谷), 오목내(五目內), 도맹치(睹盲峙) 밑의 올산리, 서북쪽으로 문경, 갈평(葛坪), 중평(中坪), 여우목고개, 산북면의 소야리(昭野里), 창구(蒼丘), 거산(巨山), 가좌리(加佐里)까지와 동남쪽으로는 예천의 상리(上里), 명봉(鳴鳳), 용문면(龍門面) 외사부(外沙夫, 바깥사부래이), 두인리(杜仁里)까지 벌재 장터로 모여 들어 발디딜 틈도 없이 성시를 이루어 그 규모가 크고 붐벼서 “벌재장 뒷골목 같다”는 속언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점차 도로망의 확충과 교통 수단의 발달로 인근 도시로의 일일 생활권이 형성되면서 이제는 옛날의 흔적만이 역사의 잔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 벌재 큰마(大村),동내터(洞內垈) : 동내터를 기점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적성리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로 면사무소(張大永氏 古家), 현 지서의 전신인 함창 헌병파견분소(咸昌 憲兵派遣分所, 김선환씨 집 앞 정원영씨 논) 그리고 동로국민학교의 모체인 벌재학당(박동구씨 집터)이 모두 이 마을에 소재하고 있었다. ‘동내터’는 이름 그대로 동내의 터를 먼저 잡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동네 복판에 비(碑)를 세운 거리가 있다. 선정비(善政碑), 송덕비(頌德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 10여 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중 3기의 철비(鐵碑)가 세워져 있었는데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가 없고 다만 광복 후 명전 모녀치(母女峙) 아래 옛 점마을에 솥가마터가 있어 그곳에서 가져 갔다는 설과 예천군 상리면(上里面)에서 풍기로 가는 고리목 솥점(店)에서 가져 갔다는 설이 있으나 고증할 길이 없다. 다만 도수(都守) 이용태(李容泰)의 비가 남아 있었으나 그나마도 장로교회 뜰 안에 파묻혀 방치되었던 것을 1993년 동민들이 옛날에 있던 거리에 재현해 현재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 금곡(金谷, 식골) : 옛날 쇠가 나오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1910년 경 일본인 광업주에 의해 개발된 아연광으로 질이 양호하여 2차대전 말기에 비행기 프로펠라 연결 부품 제조의 재료로 쓰이다가 광복이 되면서 폐광이 되었고, 지금도 광구가 남아 있다.
◆ 멍들개이 : 금곡동 조금 아래 4-5호의 마을이 있었는데 저자거리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고, 크고 작은 돌들이 많이 흩어져 있어 혹 장날이 되면 술에 거나해진 행객들이 그곳을 지나면서 돌을 차고 돌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발목 등에 멍이 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장자불(莊子洞) : 적성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1630년 경 조성과(曺成戈)라는 사람이 개척하였다고 하며, 그 후 그 마을에 부자가 났다고 하여 장자동이라 불리어지다가 어느 해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서 제법 참하던 동리가 하루 아침에 불밭이 되었다 하여 그 후부터는 그 마을을 ‘장자불’이라 불렀다고 한다.
(8) 생달리(生達里)
◆ 산다리(生達里) : 생달리는 내생달(內生達, 안산다리)과 외생달(外生達, 바깥산다리)로 구분이 된다. 워낙 협곡에 위치한 마을로서 둘레에 산과 저녁 달만 볼 수 있다 하여 ‘산다리’라 이름지어졌다는 설과 바깥산다리 어귀에 안산다리로 통하는 길에서 고불멱(古佛覓)으로 가자면 개울을 건너야 되는데 그 높이가 5-7m 가량 되어 흔히 장날 같은 날 술에 만취되어서 그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개울로 떨어지는 사람이 많았으나 한 사람도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없어 ‘산다리’라 불리어졌다는 설이 있다.
◆ 고불멱(古佛覓) : 이 동리는 마을 뒷산이 대미산(黛眉山)에서 뻗어 내려온 산록에 위치한 마을로 동로 팔명산(八名山) 중에 노송고불(老松古佛)에 해당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약사재이(藥師亭) : 옛날 이 마을 뒤편 평평한 곳에 약사정사(藥師精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하며 지금도 보통 사람 크기의 약사여래석불좌상(藥師如來石佛坐像)이 기대(基臺) 위에 아래 위로 연꽃 문양이 새겨진 좌대(座臺) 위에 놓여져 있다. 불행하게도 목 윗부분이 떨어져 나갔는데 70이 넘은 노인들도 그 내력을 아는 사람이 없지만 그로 인해 동네 이름이 ‘약사정’ 또는 ‘약사재이’라고 불리어졌다고 한다.
(9) 명전리(鳴田里)
◆ 명전리(鳴田里) : 동로 팔명산(八名山) 중 첫 번째로 꼽히는 비학상천(飛鶴上天) 즉, 학이 하늘로 날아 오른다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하늘로 오르기 전에 밭에서 한 번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 대촌(大村, 큰마) : 지금의 명전 뒤편의 마을이며 앞들과 마을이 다른 동리에 비해 호수가 비교적 많다 하여 큰마라 이름 붙여졌다.
◆ 오목내(五目內, 방곡) : 마을 사방이 산으로 싸여 있고 골짜기를 따라 집이 있어 그 형상이 오목하고 재산이 그리로 모여들만한 곳이라 하여 오목내 또는 방곡이라 불리어졌다.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 멍애티( 모녀치, 毛女峙) :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에 이 고개 밑 마을에 한 과부가 말을 먹이며 살았는데 그 과부 턱에 남정네와 똑같은 수염이 나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모녀치라고 불렀다 한다.
◆ 그내기(건학, 乾鶴) : 동내 위에 정(正)터가 있어 비학상천(飛鶴上天)의 본자리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큰 학이라 불리던 것이 오랜 세월 동안 전해 오면서 변음이 되어 ‘그내기’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굴바위(窟岩) : 마을 뒤 큰 바위에 큰 구멍이 나 있는데 마치 굴(窟)같이 생겼다 하여 마을 이름이 굴바위라 불리어졌다 한다. 마을 아래 본명전(本鳴田)으로 내려가는 산모퉁이에 거북 형상을 한 바위가 큰 바위 위에 얹혀 있는데 그 돌거북의 머리쪽이 향하는 동네는 흉년이 들고, 꼬리쪽이 향해진 동네는 풍년이 든다 하여 지금까지 음력 정월 초순이 되면 윗 마을 굴바위 동네 사람들과 아래 본명전 동네 사람들이 서로 모르게 자기들의 동네쪽으로 거북바위 꼬리를 돌려 놓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다.
◆ 당골(堂谷) : 마을 입구 어귀에 마을의 평안을 비는 당(堂)집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옥수동(玉水洞, 玉水庵) : 이 마을 서편에 구슬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1480년 경 이 마을에 작은 암자가 구슬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 있었다 하여 ‘옥수암’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 쇠점마(鐵店마) : 옛날 솥을 굽는 가마터가 있었다 하여 ‘쇠점마’라 불리어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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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南山),몽고지(夢故地,夢峴) : 삼국사기 지리지(地理誌) 지리조(地理條)에 보면 난산현(蘭山縣)을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안인현(安人縣)으로 개칭하였으며 대동지지(大東地誌) 지리조(地理條)에 보면 갈평창(葛坪倉) 옆에 안인현청(安人縣廳)이 있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고산자(古山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보면 예천 북창(北倉) 옆에 안인현청이 위치해 있던 부호가 명확히 표시되어 있어 현 남산(南山)은 옛 난산(蘭山)이 구전되어 내려오던 과정에서 ‘남산’으로 변음되어 불리어졌음이 확실하다.
이곳은 현재 거주하고 있는 김희경(金熙敬, 商山金)씨의 5대조 되는 김중보(金重賓)씨가 6대조인 김상옥(金相玉)씨를 뫼시고 정착하여 동리를 이루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샅밭모리, 솥밭모리 : 간송리 천주에서 간좌골로 가자면 윗나들 건너 산모퉁이를 돌아가야 하는데 시대는 미상이나 옛날 그곳에 쇠솥을 만들던 밭(李東敎씨 소유)이 있는데 그 모퉁이를 솥밭이 있던 모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고장백이(古葬백이) : 현 동로 지서 뒤편 옛 천주교당(天主敎堂) 바로 옆에 연대를 알 수 없는 고총(古冢)이 있었는데 둘레와 높이가 보통 속가(俗家)의 무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컸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무덤 터를 잡을 때 지관(地官)의 이야기가 이곳이 바로 매화낙지(梅花落地) 형국의 대명당인데 좌향(坐向)을 두기에 따라 발복(發福)의 차이가 생긴다고 했다. 5일마다 1만 냥의 돈이 들어오는 것으로 하든지 5대손(五代孫)들이 정승되는 곳으로 하든지 택일하라 제의했다. 땅 주인이 가난하게 살아온 것이 한이 되어 5일마다 1만 냥 들어오는 것으로 좌향을 잡아 달라 요청하여 벌재장이 그 앞에 서게 되었고 호황을 누렸다 한다. 그 뒤부터 그곳에 고장(古葬)이 있었다고 하여 ‘고장백이’라 불러지게 되었다.
◆ 판서터(判書터) : 현 동로 적성리에 있는 금곡(金谷, 식골) 아래 동리인 저자거리 맞은 편 들이 ‘판서터’라 불리어진다. 고려 공민왕 10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왕을 호종(扈從)하여 복주(福州, 安東)로 오던 중 예천 선동 사람 노봉 학도공(老峰學徒公)이 그곳에 터를 잡아 집을 지었는데 부호군(副護君)을 지낸 뒤 노년을 그곳에서 소영(嘯詠)으로 보냈으며, 그 후 아들인 김인중(金仁重公)이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에서 물러나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교지(敎旨)를 받아 인근 주변에서 송축인(頌祝人)들이 모여 연일 잔치를 베풀고 평생을 후학 육성에 힘을 기우렸다. 그 뒤부터 그곳을 ‘판서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계경지(溪境地) : 현 간송리 천주 동리는 천주봉에서 발원하는 작은 개울이 동네 한복판을 북에서 남으로 관류(貫流)하고 있어 옛날에는 이 개울을 기준으로 하여 불단골(佛壇골) 쪽(북쪽)은 ‘천주동’이라 하고, 그 반대 편에 있는 동네는 개울을 경계로 삼았다 하여 ‘계경지’(溪境地)라고 불리어졌는데 광복 후에 법정 이동으로 통합됨에 따라 점차 그 호칭이 사라지게 되었다.
첫댓글 동로면의 마을 마다 전해오는 역사를 흥미있게 읽고, 친구가 살았던 지명이 더욱 친근감이 간다. -몽고지(夢故地,夢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