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의 휘는 順祖이고 호는 어은(漁隱)이며 성은 孫氏이니 그 계통은 시조 문효공 은 효성의 감응으로 석종의 이적(異蹟)을 이루었는데 그 사적은 동경지에 실려있다, 여러 대 를 지나 휘 긍훈(兢訓)에 이르러 고려 태조를 도와 남쪽 후백제를 정벌한 공훈으로 삼중대광 사도 상장군에 추증 되고 광리군에 책봉되었으며. 칠대를 이어 와서 휘 구에 이르러 관직은 참지정사 인데 청백이에 녹선 되었고.
사대를 이어 와서 휘 빈(鬢)에 이르러 조적(曹磧)의 난을 토벌 하였다. 그 품계는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밀성군에 책봉되었다.
세계의 중간 이.삼세 사이가 실전된 다음 휘 을상(乙相)에 이르러 양성현감이 되었고, 그 아들 휘 문례(文禮)는 부여현감이 되었는데.이는 공의 선고(先考)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이질(異質)이 있었고.총명이 절인 하였다.게다가 집을 떠나 외부에게 가서 배움에 올랐는데,가르치고 독려함에 번거로움이 없었고 스스로 학문에 힘써 잘 해 나갔다. 같은 류의 여러 아이들이 간혹 즐겁게 놀자고 하면 대답하기를 전심 전력으로 글을 읽어라는 것이 아버지의 명인데 감히 어기지못한다 하니 보는 사람들은 기이하다고 하였다. 장성 하여서는 진퇴와 취의하는 바가 과연 우아하였고. 집에 들어서면 어버이에 효도함이 더욱 극진하였으니,그것은 천성이었다,어버이를 봉양함에 마음과 안색을 부더럽게 하여 받들고 순종 하였으며 친상을 당하여 애휘함이 경술에 중정하고 절도에 맞았다.효행으로 천거되어 헌능참봉에 제수되니 공은 도리어 허명으로 인하여 정도에 넘치는 벼슬이 내렸다,하고 마음에 부끄러워 하여 사람을 대함에 항상 두려뤄 움추리고 불안해 하는 기색이 있었으니 그 겸손해 하는 德 또한 이와 같았다,
일찌기 어은(漁隱)을 자호로 하였는데.漁자를 취한것은 은거하여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공은 처음 경산 반야촌에 살다가 영천 대전리로 이거했다,이선생 보흠과 더불어 남매형제의 의를 갖은 위에 또 도의를 서로 상량했는데 이에 이르러 더욱 다행한 것은 그 사는 곳이 한마을이였으므로 절차탁마함이 이어지게 되었다,셋째 아들 서륜(敍倫)은 이 선생을 쫓아 특별히 앙모하더니 단종이 손위함에 이르러 함께 순흥의 화를 당하여 마침내 국조에 명성이 있는 사람이 되어 숙모전에 배향되었다, 당시의 혹화(酷禍)는 종족이 거의 주멸됨에 이르렀는데도 이제 이후로 늘 논자(論者)가 이를 말함에 당연히 그것을 불행이라 이르지 않고 도리어 다행이라 하는구나! 가문의 백세에 이르는 광예라 하지만 어찌 잘못임을 깨닫지 않으랴,공이 그것을 알고 있는 것과 같지 아니함이 있는 까닭인가? 배(配)는 영양이씨 인데 사직(司直) 현실의 따님이고 대재학 석지의 손녀이다,사남일녀를 두었는데, 장자 의륜.은 성균생원 이고 다음은 후륜.은 예안현감 이며, 다음이 서륜.은 집현전박사.이고 다음 명륜은 건원릉 참봉 이며, 딸은 김이로에게 출가했다, 義倫은 이남이녀를 두었는데, 장자 원개는 참봉이고,원량은 건공장군 이며,녀는 최희여.이세은에게 시집갔다, 厚倫은 삼남이녀로 장자 원신은 부여현감 이고,원보는 기자전참봉이며,원필은 출계 하였고,딸은 조언겸,직장 권명균에게 시집가고,서륜의 계자 元 弼은 비안현감이고,녀는 별시위 최효분에게 시집갔다,明倫은 아들 원장을 두었다, 원개는 아들 기문을 두었고,원량은 준을 두었다,원신은 삼남삼녀를 두었는데.장자 주.는 효행으로 정능참봉,을.. 옥주는 어모장군 .다음은 철주이고,딸은 성귀,생원 진일,이세공에게 각각 출가했다, 元寶는 이남삼녀로 억.과 전이고 녀는 김척.이영번.류몽춘.에게 출가하고, 元弼은 이남일녀로 응.은 학행으로 제능참봉.이요 다음은 억.이며 딸은 성희수에게 시집가고, 원장은 아들 成을 두었는데 진사요,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오호라! 공을 장사 지낸 곳은 영천서쪽에 있는 향화산 둔덕인데 묘에 지석이 있는데다 또 같은 둔덕에 3.4기의 고총이 있기 때문에 전소가 확싷치 못하여 부득이 산 아래에 설단하여 행 사 하다가 얼마간 지난후에 다시 사리를 쫓아 부인묘에 합향 하였으니,역시 예보다,권도를 취한 것이 도리어 情을 얻게 되었다,공이 재세한 때 까지는 이제로 부터 오백년이오,더군다나 병자대화를 거치면서 유문과 일승(逸乘)이 함께 재구덩이에 들어가 버렸으므로 비록 공의 행적에 기록할 만한 것을 상고하고자 하였으나 징신(徵信)함에 끝이 없으니 어찌 후인들의 한스러움이 아니겠는가? 이는 운잉 제현이 대대로 한을 품었던 것이라, 병락이 아득히 먼 후생으로서 어찌 감당 하겠는기? 묘도문자의 일을 거듭 회피하는데도 자손들의 신탁함이 간절한지라,마침내 문수에 넘침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촉문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때 와서 銘을 청한 사람은 후손 계상.과 승목이다,
명을 하여 이른다,
현조가 남긴 여덕 당연히 그 후손에 드리움이 넉넉하리라.
자손들의 신실하고 인후 함이여!
추정을 이어받아 거동에 법도가 있네.
어찌 후손들이 번창하지 않으리오
원포에 우거진 난초와 같도다.
그 싹과 그 꽃에서 봉등으로 드러남이 멀지 않으리라.
혹시 믿어지지 않거던 명이 가진 근본을 살필지어다.
을미.1955년 상사절 승훈랑 유릉참봉 안동 권병락 근찬,
註.
*어은 손순조.는 우리 2파 파조이신 생원공 할배의 처가 손위 동서가 되십니다,
공의 아들 집현전박사공이 순흥에서 외숙과 이종형인 정종소와 함께 단종을 복위운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외숙 이공께서 가장 먼저 생질 정종소를 멀리 숨게 하고 처형되니 정종소는 작은 외숙과 함께 외숙의 시신과 이종재의 시신을 수습하여 순흥에서 영천까지 가만히 운구 하여 외숙의 시신은 외가 선산에 장례하고 이종재 손서륜의 시신은 정종소의 집 뒷산 효양곡에 장레를 치루었다,
*이종 손씨 집은 대전2동(하대전) 처가집 뒤 200보 쯤에 살았고, 우리파조 생원공 집은 현 대전1동(중대전)효양곡 산 아래 살았다고 합니다,
1.추정 趨庭: 공자의 아들 이 鯉가 종종 걸음으로 뜰을 지나다가 공자로 부터 예.와 시를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듣고 물러나 시와 예를 배웠다는 고사에 연유하여 아들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듦는 말로 ,(過庭과정) 이라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