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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를 창건한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이 1916년에 깨달은 진리는 법신불 일원상(法身佛 一圓相)이다. 언설로 표명된 그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일원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인 법신불은 하느님과 같은 제1원인이다. 일원상은 그것을 상징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를 깨닫게 되면 부처가 되고, 깨닫지 못하더라도 모든 중생은 이 진리에 귀속되어 있다. 원불교가 현대 불교이자 깨달음과 자비의 종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소태산이 “불법으로 주체를 삼아 완전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고 했던 것이다.
원불교의 기원은 이처럼 소태산의 깨달음이지만, 원불교의 전신인 불법연구회를 창립한 것은 1924년이다. 현재의 익산이다. 그는 이곳에서 본격적인 공동체를 시작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수행 공동체였다. 선농일치는 중국과 한국에 정착한 선수행의 기본 정신이다. 어디서든 내면에 깃든 불성을 자각하며 살게 되면 부처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철학이 선농일치다. 내 안의 불성을 확인하게 되면, 처처불상 사사불공(세상 전체는 부처님들로 현현해 있으니 대하는 일마다 불공하라는 뜻)의 삶으로 자동 연동된다. 내가 대하는 상대는 모두 부처이며, 그들을 부처로 모시는 삶이다. 석가모니불의 모상에 불과한 불상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내 앞에 현현한 절대적 존재로서 모시는 것이 불공이다.
소태산이 1935년에 쓴 『조선불교혁신론』은 그의 꿈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재가와 출가에 대하여 주객의 차별이 없이 공부와 사업의 등위만 따를 것이며, 불제자의 계통에 있어서도 재가 출가의 차별이 없이 할 것이며, 수도하는 처소도 신자를 따라 어느 곳이든지 설치할 것이며, 경전도 그 정수를 가려서 일반 대중이 다 배울 수 있도록 쉬운 말로 편찬할 것이며, 출가 공부인의 의식 생활도 각자의 처지를 따라 직업을 갖게 할 것이며, 또는 결혼도 각자의 원에 맡길 것이며, 예법도 번잡한 형식 불공법을 다 준행할 것이 아니라 사실 불공을 주로 하여 세간 생활에 적절하고 유익한 예법을 더 밝히자는 것이니라.”라며 그는 공동체의 사명을 선언한다. 출가와 재가가 공동운영하는 화합교단은 사실 석가모니불 사후 2-300년 후에 발생한 대승불교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 핵심인 일승(一乘)의 정신은 출가와 재가, 성과 속, 남과 여, 부자와 빈자, 권력의 유무 등 어떤 이원적인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모두를 부처로서 불법의 대해로 평등하게 인도한다는 것이 일승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출가중심주의가 교단의 중심이 된 것이다. 3명의 스승과 7명의 증인이 있어야 출가 승려로서 인정된 석가모니불 이래의 전통이 고수되면서 출가는 불법의 등불을 밝히는 주체가 되었다. 재가 신자들은 이들의 경제를 지탱하는 후원자로 남게 되었다. 수행자의 외연을 보호하는 자인 셈이다. 사실 승가의 경제는 초기불교시대부터 재가자의 영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출가 재가 화합교단을 외치고 나온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의 늦고 빠름이 문제가 되었지 삶의 형태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것은 한국불교에서도 같은 문제를 야기했다.
숭유억불정책으로 조선시대에 산속 종교가 된 불교는 갈라파고스 같은 존재가 되었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이 강을 이루는 현실과는 절연된 그들만의 섬이 산속 사원이었다. 명맥이라도 유지하는 것이 다행이기는 했지만, 사바세계 내에서 중생들의 고통과 고뇌를 해결하기로 결심한 불교의 근본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소태산이 만든 공동체는 불법의 근본 뜻을 구현하는 실험장이었다. 현대불교의 인큐베이터로써 그 가능성을 배양하고자 했다. ‘불법이 생활이며, 생활이 불법’이라는 모토가 핵심이다. 출가자들의 결혼도, 직업도 자유의사에 맡겼다. 출가와 재가가 공유하는 계급이 있다면 오직 6등급의 법위뿐이다.
보통급은 입문의 단계, 특신급은 믿음을 확립하는 단계, 법마상전급은 내면의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싸우는 단계, 이 세 계단이 3급이다. 진리와 마군이 싸우는 법마상전급에서 전자가 백전백승하면 법강항마위로서 첫 성자의 반열에 올라선다. 그리고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심신을 다 내놓는 출가위, 마침내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세계 모든 중생을 다 구원할 수 있는 무한능력을 갖춘 대각여래위가 마지막 단계로 구성된 이 세 계단은 성위가 된다. 여기에 출가와 재가의 구분은 없다. 원불교의 교단 통치도 이 법위에 의해 구성된다. 이 원칙대로 한다면 재가자도 교단 최고의 직인 종법사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자 주위에는 제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자신이 태어나 구도하고 깨달음을 얻은 고향인 전남 영광군 길룡리에서 간척사업을 필두로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중 아홉 제자를 선발하여 1919년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물질에 지배된 인류의 정신이 바르게 돌아오도록 기도하여 하늘의 감응을 얻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자결을 각오하고 올린 기도에 대한 하늘의 응답이 이루어졌다. 백지혈인(白指血印)이 그것이다. 엄지손가락에 인주를 묻히지 않고 찍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맹서의 장에 붉은 피가 나타난 것이다. 이 사건을 원불교에서는 법인(法認)의 날, 즉 하늘로부터 종교적 사명을 부여받은 날로 삼았다. 그때의 제자들은 출가 재가의 구분이 없었다.
소태산을 비롯한 이 10인이 교단 운영의 핵심인 최초의 수위단(首位團)이다. 문자 그대로 머리에 해당하는 단이다. 원불교는 이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소위 이단치교(以團治敎)라는 방식이다. 수위단원 각자는 자신이 아래로 10인 1단의 단장이 된다. 이렇게 하위 조직으로 뻗어나가게 되면 피라미드형의 조직이 형성된다. 1943년 소태산의 열반 직전, 최초의 여성 수위단도 결성된다. 남녀 수위단 도합 18명이다. 임기는 6년으로 고정되었다. 수위단은 원불교의 최고의결기관으로서 집단지도체제의 형식을 띠고 있다.
교단의 핵심적인 운영은 수위단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교단 내 출가위 이상의 법위를 가진 자 중에서 종법사를 뽑는다. 이 외에도 교헌 제정, 법위 심사, 중요한 교단의 인사와 정책 등이 다루어진다. 그럼 어떻게 이들을 구성할까. 소태산 당대에는 임명을 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선거로 한다. 피선자격은 법강항마위 이상이다. 선거인은 모든 출가자, 중앙교의회 재가 위원이다. 중앙교의회는 전국의 출가와 재가의 대표가 교단사를 결의하는 의회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재정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수위단을 정점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교정원, 상벌을 주재하는 감찰원의 양원을 두고 있다. 종교법인으로서의 대표는 교정원장이다.
풀뿌리에 해당하는 교당은 재가자가 중심이 된 교의회가 있다. 교당의 모든 일들을 이 교의회가 중심이 되어 운영한다. 회장은 재가교도가 맡는다. 교당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교당 또한 단으로 편성되어 있어 각 단의 단장이 있다. 교무는 3년을 기본 단위로 단임이든 재임이든 인사가 이뤄진다. 따라서 교당의 운영은 당연히 그 주인인 재가교도들의 몫이다. 남녀의 구분은 없다. 여기에서도 주로 법위가 관건이 된다. 교무는 교법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역할이 중심이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제도는 현실에서는 어떨까. 아쉽게도 100여 년의 신생 교단은 여러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예를 들어 여성 교역자, 즉 여성 출가자에 대한 ‘성적 자기결정권’은 유보되고 말았다. 소태산이 교단을 이끌던 때, 첫 여성 수위단의 구성원은 오늘날 별칭으로 부르는, 결혼을 하지 않고 순결을 지키는 정녀(貞女)는 한 명도 없었다. 결혼을 했거나 이혼을 했거나 남성으로부터 소외된 여성들이었다. 정녀제도는 소태산 사후 확립되었다. 여성의 순결주의가 교단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정녀들의 조직인 정화단이 특별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하여 여성 출가자는 정녀가 기본 자격이 되었다. 소태산의 여성해방 정신이 망각된 것이다.
원불교 사회교의의 하나인 사요(四要, 자력양성・지자본위・타자녀교육・공도자숭배)는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교의다. 1920-30년대에 제정된 이 교의 중 자력양성은 처음에는 부부권리동일에서 남녀권리동일로 전환되었다. 봉건적 사회질서로부터 벗어나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양성평등을 사회교의로써 수용한 것이다. 자력양성은 이러한 남녀평등이 최종적으로는 불성이 현현된 절대적 권위의 부처로서 누구든 내적 자유를 존중한다는 의미로 정착되었다. 거기에는 이미 남녀로 분리된 장벽도 없다.
결국 소태산의 꿈이 유보된 것이다. 그만큼 한국사회의 여성 차별이 뿌리 깊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다행히 필자도 논쟁에 참여하여 여성 교역자의 결혼 문제를 금년에 완전히 원점으로 회복시켰다. 여성 출가자의 결혼은 각자의 권리로써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또 하나, 교단 운영에 재가자 참여는 실제로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을까. 금년 10월 17일에 최고의결기관인 수위단 선거법에 대한 공청회가 있었다. 과연 공정하게 수위단 선거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라는 문제가 쟁점이었다. 한발 나아가 수위단 구성이 출가 재가가 공평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라는 점에도 이르렀다. 현재 수위단 구성은 남녀 출가자 각각 9명, 직능별 단원 16명을 합하여 34명으로 이루어졌다. 이 중에 현재 재가자는 30%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재가자들은 이 공청회에서 남녀 출가자가 동수인 것처럼 출가 재가의 비율도 동수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가자들은 이마저 넘어서 글로벌 스탠다드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녀, 출가와 재가의 구분을 두지 말고, 교법 정신을 바르게 구현하는 대표들이 교단을 이끌어야 한다고 한다.
전통적인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재가자는 출가자의 언설을 믿고 따르는 신자를 말한다. 출가는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라는 측면을 드러내는 말이다. 석가모니불이 왕이 될 신분마저 버리고 제행무상에 처해진 인간의 한계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야밤중에 성을 넘어 숲으로 들어갔던 것을 의미한다. 집을 떠났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대각을 성취한 뒤에는 인간이 사는 저자거리로 다시 돌아왔다. 깨달음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제자들 또한 그를 존경하면서 세상과 연대했다. 번뇌로 인한 고해의 삶, 약육강식의 부조리, 그리고 불행으로 고통 받는 무명 중생의 세계를 구제하기 위한 자비행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이러한 정신은 계승되고 있으며, 교의의 발전에 따라 불법이 구현되는 장은 당연히 중생이 살아가는 현장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깨달음은 고요한 숲속이 아니라 오욕번뇌로 뒤덮인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원불교는 이러한 대승불교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엄밀히 보자면, 원불교는 불교의 핵심사상인 불법승 삼보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교단이다. 최종적으로 이 세계를 완전한 인격체인 부처와 부처가 사는 평등공동체로 만든다는 차원에서 재가중심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종래에 출가자들이 자신의 자유만을 구가했던 독선에서 벗어나 시끄러운 장터에서, 온갖 오염으로 뒤덮인 도시에서, 욕망의 극대화인 자본의 그물로 포획된 지구 위에서 불법의 그 근본 뜻이 성취되어야 한다고 본다. 원불교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뜻이 여기에 있다. 이미 성속의 구분은 사라졌다. 소태산은 불법이 세상 속에서 꽃을 피울 때 불토낙원의 향기가 충만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것이 한반도에 오랫동안 전래된 미륵의 용화회상이다.
미륵불은 석가모니불 사후 아득한 세월이 흐른 후에 나타날 새로운 부처님이다. 새로 오실 재림예수와 다름이 없다. 미륵불이 출현하는 회상은 용화회상이다. 소태산은, 이 회상은 처처불상 사사불공이 널리 행해지는 세상이며, 먼저 깨달은 사람이 주인이 된다고 한다. 승속(僧俗)의 차별이 없고, 법률과 도덕에 구애 받음 없는 삶, 수행과 삶이 일치되는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한다. 그 또한 이러한 미륵불의 세상을 앞당기고자 했다. 손수 앞장서 만든 불법연구회가 곧 용화회상인 것이다. 제국주의의 희생이 된 한반도에서 불의와 질곡을 떨쳐내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차별 없이 실현되는 그러한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다.
불성은 출가나 재가라는 성속은 물론 생물학적, 사회적, 정치적인 모든 차별은 허용되지 않는다. 인류가 꿈꾸어온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형제자매인 것처럼 불법 또한 무차별의 세계를 꿈꾼다. 원불교는 이제 태어난 지 10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기성종교에 비한다면 걸음마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작은 묘목이 바람에 흔들리듯 성현의 뜻은 중생의 눈높이로 왜곡되게 마련이다. 원불교는 출가와 재가가 함께 손을 잡고 불국토를 건설해가는 회상이다. 소태산의 꿈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깨달은 법신불의 진리는 근원이신 하느님이자 그 분이 주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 세계는 바로 법신불이 드러난 세계이다. 모든 존재는 법신불의 화현이다. 그러니 출가와 재가라는 위상은 중생의 눈으로 구별될 뿐 근본에서는 차별이 없다. 교단을 운영하는 참된 주체는 법신불의 진리에 먼저 다가선 사람이다. 앞으로는 최고 지도자가 여성이 되거나 재가자가 되거나 흑인이 되거나 백인이 되거나 모든 문은 활짝 열려질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부처님 당신이 주재하는 곳에 있는 중생들은 다 당신의 자녀들이라고 한다. 이제는 자신이 부처임을 깨달아 대자대비의 넓은 마음으로 세계를 한 가족 삼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직장에서 일하다가, 책상에서 공부하다가, 길을 걷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부처의 경지로 한 순간에 초월하고 비상하는 부처님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올 것이다. 소태산이 희망한 것은 모든 존재가 부처가 되어 부처의 삶을 사는 것이다. 종교적 권위와 형식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출가니 재가니 명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종교로서의 원불교의 궁극적 사명은 소태산의 꿈을 구현해내는 것에 있다. 꽃은 담장 아래 피어 있어 봄을 알리는데 집밖 어디에서 봄소식을 다시 찾을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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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종사님께서는 당신의 포부와 경륜을 담은 정전의
특신급 조항에
우리의 교리와 法規를 대강 이해하고...라 해주시고
그 이해를 바탕하여
상시에 노는 시간이 있고 보면
경전 法規 연습하기를 주의하라 하십니다.
...
세상에 다시 없는 이 희안한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요?.
...
현 교단의 모습은 법률배은의 결과라 할 것이니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편협히 받들거나 왜곡하여 받들지 않겠다는 수행자가 많이 나와 지난 잘못들을 바로 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감사합니다. 곳곳에서 공감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재가교도로서 현재와 같은 교단의 ‘과도기’가 지나고, 진정한 교단의 모습이 어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세상 교화는 우리 자신의 참다운 교화 없이는 다 겉치레일 뿐입니다. 무너질 때는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여성 출가자의 결혼은 각자의 권리로써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공감합니다.
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분하는 것 역시 이원성입니다.
이원성을 구분하지 않는 세계, 소태산님이 말하는 일원성의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