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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원지역에도 나라가 있었다 - 칠포국
칠원지역이 함안군에 통합된 것이 1908년이다. 하지만 칠원의 독자적 역사와 문화는 여전히 남아있다. 칠원은 규모는 작지만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칠원은 삼국시대 이래 군현의 하나로 존속되었다. 이름난 인물들과 학자, 청백리를 배출하였고, 마산의 구산면을 속현으로 두기도 하였다.
칠원이 오랫동안 함안과 분리되어 있었지만, 함안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라가야가 번창하던 시기, 5세기대 이후부터는 칠원지역의 일부가 아라가야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라가야가 멸망하면서 함안과 분리되어 신라의 칠토현이 되었다. 함안과 칠원이 분리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형적인 이유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김해의 가락국은 스스로 항복했지만, 신라는 아라가야 정복에 대군을 투입해야 했다. 그만큼 아라가야의 저항은 끈질겼던 것이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신라가 복속된 지역에 대한 행정구역 재편과정에서 칠원지역을 함안으로부터 떼어내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칠원지역은 아라가야에 편입되기 전 독자적인 정치집단이었다. 함안에 안야국이 존재했던 시기에, 칠원에는 포상팔국 중의 하나인 칠포국(漆浦國)이었다.
칠원지역의 고대국명은 칠포국이었다
칠원지역의 고대국명은 변한 12국 중의 하나인 변진접도국이나 변진주조마국, 그리고 포상팔국의 하나인 칠포국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고학 자료에도 이른 시기부터 칠원지역에 정치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적이 조사되고 있다. 특히 대규모 복합유적인 오곡리 유적은 당시의 정치집단 성장 정도를 잘 보여준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생활유적인 주거지와 분묘유적인 지석묘뿐만 아니라 가야시대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포상팔국으로 이르는 골포는 지금의 창원에 합쳐지며, 칠포는 지금의 칠원이며, 고사포라 이르는 것은 고성을 가리킨다[본래의 명칭은 고자포이다]나머지는 알 수 없다.(『강역고』변진별고)
정약용은 『강역고』에서 칠포국이 칠원지역에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포상팔국이란 명칭으로 보아 칠원을 칠포국으로 보는 것은 의문이라는 지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즉 칠원의 위치로 볼 때 ‘포상(浦上)’즉 ‘바닷가’의 나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칠포국이 바다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는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닷가에 위치해 있는 지금의 마산시 구산면에 해당하는 귀산현이 칠원현의 속현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 있는 칠원지역의 토산품은 청어·대구어·조기·해삼․소금․홍어 등이었다.『칠원읍지』에는 생청어, 대구어, 소금이었다. 칠원면 유원리에는 해수산 패총인 유원리패총이 있다. 패총에서는 해수산의 참굴, 대합, 피뿔고등, 비툴이고둥 등이 나왔다. 패총의 위치는 남해안의 마산만과의 거리가 13.5㎞정도이다. 특히 소금이 특산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바다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또한 해창(海倉)에 대한 기록도 있다. 『고려사』의 기록에 고성칠포에 왜적이 침입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칠포는 고성과 가까운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포상팔국중 “골포·칠포·고사포의 삼국인이 갈화성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골포는 지금의 창원분지이며, 고사포는 지금의 고성군이다. 따라서 칠포는 골포와 고사포의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볼 수 도 있다. 따라서 칠포국은 지금의 칠원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마산만과 인접해 있는 구산면 해안과 깊은 관련을 가졌던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칠포국의 형성과 권역
칠원의 지형은 함안지역처럼 남고북저이다. 물이 광려천으로 모여들어 북쪽의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간다. 광려천은 마산시의 광려산(720m), 대산(727m)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칠북면 덕남리에서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으로 칠원지역의 중심을 관통하여 흐르고 있다. 광려천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좁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데, 광려천변에 다양한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광려천을 끼고 있는 들판이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는 근거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칠원지역에도 많은 유적들이 남아있는데,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군과 취락지 등이 광려천 주변 들판과 소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후기 가야의 유적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오곡리유적은 마산․창원권에서 칠원지역으로 이어지는 길목인 마산시 내서읍 호계리와 경계를 이루는 야산의 북측 구릉 위에 위치해 있다. 이 유적에는 청동기시대의 취락지와 지석묘 등의 분묘가 밀집되어 있고, 가야의 목곽묘 및 석곽묘 그리고 중․소형의 고분이 넓은 범위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발굴조사결과에 따르면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지석묘를 포함한 매장유구와 가야시대의 목곽묘, 수혈식 석곽묘, 석실분 등이 조사되었다. 특히 함안 아라가야의 대표적 유물인 화염문투창고배와 원통형, 통형 그릇받침이 다량 부장되어 있었다.
칠포국의 형성시기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칠포국이 실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포상팔국전쟁 관련기사이다. 따라서 포상팔국전쟁과 관련하여 칠포국의 존재시기를 유추할 수 있을 따름이다. 포상팔국전쟁이 일어난 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 칠포국이 3세기에는 실재했음을 알 수 있다.
칠포국의 권역은 지금의 칠원지역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연지세로 볼 때 북쪽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창녕지역과 구분되며, 동쪽으로는 천주산(688m), 작대산(647m), 무릉산(568m) 등이 창원지역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므로 창원지역에 존재했을 정치집단과는 분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변한의 여러나라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은 경남지역은 대부분 600~800m에 이르는 산을 경계로 시․군이 구분되고 있으며, 변한시기나 가야시기의 여러나라들도 지금의 시․군과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낙동강은 대강수(大江水)로 인근 정치집단과의 중요한 경계였다. 서쪽으로는 함안분지와 접해있는데 화개산(456m), 자양산(401m), 안국산(343m), 용화산(193m) 등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칠포국이 존재했을 당시에는 함안분지의 정치집단과는 분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신라시기에도 칠원은 칠제현이었다. 실제 함안분지와 연결되는 것은 도둑고개, 대치고개 정도이다. 남쪽으로는 광려천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마산시의 내서읍과 연결된다.
성장조건
칠포국이 형성될 수 있었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농업생산력, 해상교역 등을 들 수 있다.
읍의 경계가 뻗친 것은 30리에 불과하며 가로는 겨우 봉화대 둘을 설치할 만 하고 남쪽으로는 큰바다에 임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긴 강을 끼고, 동쪽으로는 무릉에 접하며, 서쪽에는 큰 하천을 끼고 있어서 9리의 넓은 들을 윤택케하고 밭을 찰지게 하며 가뭄을 막을 수 있고 비옥한 들은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니 이것이 바로 읍이 된 근본이다.(주맹헌,『칠원지』,1699)
이첨의 시에 “긴 강이 동쪽을 향해 줄줄 흐르는데 들은 넓고 산은 열려 하늘 끝까지로다. 배와 상앗대는 몇 해나 사람을 건너 주었는가. 풍진 만리 길에 객은 루(樓)에 올랐도다…갈림길이 남쪽으로 큰 진(鎭)에 통했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칠원현 산천조)
비록 후대의 기록이지만 칠원지역의 농업생산력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칠원지역은 마산시 내서읍에서 시작되는 광려천(17.8㎞)이 관통하고 있다. 광려천은 유원천, 장암천, 회산천, 칠원천, 운곡천, 가연천, 검단천 등의 지류로 구성되어있다. 광려천과 지류 주변에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좁은 들판과 구릉이 형성되어있다. 광려천변의 들판이나 구릉의 곡간지대는 농경지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교역도 칠포국 성장의 중요한 기반이었을 것이다. 변한의 여러나라들은 일찍부터 중국 군현이나 인근의 나라들과의 교역이 활발했다. 칠포국도 낙동강변에 위치해 있고, 마산만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주변 나라들과의 교역이 칠포국의 성장에 커다란 기여를 했을 것이다. 교역루트는 마산시 구산면 해안, 마산만, 진동만, 낙동강루트였을 가능성이 높다. 칠원지역은 남쪽으로 내서와 접하고 있다. 내서읍 호계리와 중리를 지나면 마산만과 이어진다. 칠원지역의 북쪽은 낙동강과 접한다. 낙동강은 이른 시기부터 남해안을 통해 수입된 선진문물이 경남 내륙지대로 전파되는 교역로였다. 기원전 1세기대로부터 3세기대까지 낙동강 하류를 중심으로한 동남해안 일대의 유적에서 낙랑이나 왜지역으로부터 유입되는 물품의 양이 다른 지역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이다.
창원 다호리, 김해 양동리, 대성동유적 등에서 나온 최근의 발굴자료로 볼 때 영남 동남부해안 일대가 낙랑과 왜를 연결하는 대외교통에 중요 지점이라는 점, 그리고 당시 대외교통으로 해로에 대한 의존이 높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창원 다호리에서 발견되는 오수전, 성운경, 각종 칠기류 등에서 낙동강을 통한 낙랑과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창원 다호리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칠포국 또한 낙동강을 통해 낙랑이나 왜와의 교역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칠원지역을 관통하는 광려천은 광려산까지 이어져 있으며 광려천변에 있는 감천마을을 지나 쌀재고개를 넘으면 구산면과 진동만으로 이어진다. 최근 진동지역에서 대규모 지석묘군과 석관묘군이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진동지역에 거대한 정치집단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파형동검, 관옥, 식옥 등의 출토유물은 바다를 이용한 선진문화의 수용이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근거이다. 이러한 선진문화가 칠원지역에도 영향을 끼쳤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칠포국의 해양을 통한 주요 대외교역루트는 구산면 해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산만은 창원분지에 자리잡았던 골포국의 교역루트였으며, 진동만은 포상팔국 중의 한 나라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구산면은 바다로 돌출된 지역으로 해상교역에 유리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물론 구산면 지역이 칠포국이 있었던 칠원지역과 거리상으로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구산면이 칠원의 속현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칠포국과의 역사적 관계를 엿볼 수 있다. 구산현이 칠원현의 속현으로 내속된 것은 고려말 공양왕 때 였으며 19세기말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칠원현이 구산현과 같은 속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칠원현이 인근 함안이나 창원, 진해 지역에 비하여 규모는 작지만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칠원인들에게 구산현은 진을 설치한 곳으로 19세기 중엽까지도 칠원의 자부심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구산현이 오랫동안 칠원현의 속현으로 있었다는 것은 이른 시기부터 칠원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구산현지역에도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보여주는 유적과 유물이 조사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사회모습을 보여주는 반동리지석묘군이 존재하고 있으며, 옥계리신촌고분군과 구복리 돗섬고분군은 삼국시대의 분묘군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칠원에 칠포국이 존재했던 시기부터 구산현이 칠포국의 해상교통로로서의 기능을 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구산현이 바다에 접해 있으므로 내륙에 있는 칠원현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포상팔국전쟁과 칠포국
칠포국은 포상팔국이 벌였던 두 차례 전쟁에 모두 참여하고 있다. 아라가야를 공격했던 1차전쟁 뿐만아니라 2차전쟁인 갈화성(지금의 울산) 공격에도 참여하고 있다. 갈화성 공격에는 골포국, 고사포국과 함께 3국만 참여하고 있다. 칠포국이 1차전쟁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포상팔국 중에서는 강력한 정치집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칠포국이 포상팔국전쟁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포상팔국이 전쟁을 벌인 것은 해상교역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농경지확보를 위한 내륙지역으로의 진출이 목적이었으므로 칠포국의 목적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함안지역은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유리한 교두보였다. 함안지역으로 진출하게 되면 남강을 통해 의령, 진주, 합천 등지의 내륙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칠포국이 자리잡았던 칠원지역은 광려천변으로 농경지가 자리잡고 있지만 폭이 좁다. 따라서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함안지역으로의 진출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창녕지역으로의 진출도 예상해 볼 수 있겠지만 앞에 놓인 낙동강은 장애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울산지역인 갈화성을 공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1차 전쟁때 아라가야를 구원한 신라에 대한 복수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제1차 전쟁에서 신라가 아라가야를 구원했기 때문에 아라가야와 신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 가장 커다란 타격을 받는 쪽은 포상팔국이었다. 2차전쟁에 골포 등 삼국만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1차전쟁으로 인하여 나머지 나라들이 커다란 타격을 입었거나 아라가야의 영향권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아라가야와 3세기말부터 인근지역으로 영역을 확대하기 시작한 신라와의 관계가 두터워진다면 칠포국 등의 성장은 봉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골포국 등은 신라의 남해안으로의 진출기지인 울산지역을 공략함으로써 신라의 진출을 막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조차 칠포국을 비롯한 3국은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잇단 전쟁에서의 패배로 포상팔국은 존립기반을 상실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칠포국은 새롭게 가야사회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함안 아라가야의 영향권으로 편입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칠포국이 4세기대 이후 아라가야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게된 상황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4세기대 토기 유통관계를 통해서 볼 때 토기유통의 근원지는 함안중심지역과 부산․김해지역 두 지역 인데 칠원지역의 오곡리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함안중심지역내에 포함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4세기대에 칠원지역이 아라가야의 문화적 영향을 받기 시작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4세기대 토기양식의 분포가 정치집단의 상호작용과 관련시켜 해석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치집단의 영역이나 그 세력의 확산과 관련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칠원오곡리유적에서 함안 아라가야의 전형적 토기유형인 화염문투창고배가 11점이나 발견된 것으로 보아 아라가야의 권역이 5세기대에는 칠원지역으로 확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칠원의 전지역이 함안권역에 포함되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칠서면에 입지한 5세기 고분인 안기고분군에서는 소위 창녕계 토기문화요소로 알려져 있는 굽모양 꼭지를 가진 뚜껑이 출토되고 있다. 이것은 칠원지역은 낙동강과 남해안 사이에 입지하였기 때문에 마산․창원권, 함안분지권, 창녕권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칠포국은 포상팔국전쟁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라가야는 포상팔국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급성장함에 따라 칠포국은 독자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아라가야의 전형적 토기인 화염문투창고배가 칠원지역에서 조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5세기대에는 아라가야의 영역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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