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鄭氏)는 사로 취산 진지촌(觜山 珍支村) 촌장 지백호(智白虎)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동래 정씨의 시조는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繪文)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선계에 대한 문헌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의 후손으로 고려 때 보윤호장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1세로 하고 안일호장을 지낸 정문도(鄭文道)는 2세이다.[1][2] 정문도공의 장자 정목(鄭穆)공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올랐으며, 정목(鄭穆)공의 아들 4형제 정제(鄭濟)ㆍ정점(鄭漸)ㆍ정택(鄭澤)ㆍ정항(鄭沆)이 문과(文科)에 급제하면서 세거지(世居地)인 동래를 관향으로 삼았다.
동래 정씨는 대대로 호장이었으나 3세(三世)인 정목(鄭穆)이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르고, 정목(鄭穆)의 아들로 그의 네 아들인 정제(鄭濟)․ 정점(鄭漸)․ 정택(鄭澤)․ 정항(鄭沆)이 모두 문과(文科)에 오름으로써 명족(名族)이 되기 시작(始作)하였다. 정선조(鄭先祚)의 후손은 계속 동래(東萊)에 남아 향리직(鄕吏職)에 종사하였다.
이중에서 정항(鄭沆)은 숙종(肅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도(楊廣道)와 충청도(忠淸道)의 안찰사(按察使)를 역임한 후 인종(仁宗) 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ㆍ추밀원의 종2품 벼슬)ㆍ예부상서(禮部尙書)ㆍ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지냈는데, 청백(淸白)함으로 이름이 높아 "고려사(高麗史)"에 입전(入傳)된 인물(人物)이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집에는 초상(初喪)을 치를 한 섬의 곡식(穀食)조차 없었는데, 왕(王)이 그의 청빈(淸貧)함에 놀라 "30년 동안 근시(近侍)의 직(職)에 있었고, 11년 동안 승지(承旨)로 있었으면서도 가난함이 이 정도이니 가상하다" 고 하며 부미(賻米)로 쌀 100섬(一百섬)과 배 200필(二百畢)을 하사(下賜)하고, 친필(親筆)로 시호(諡號)를 문안(文安)이라 내렸다.
정항의 아들 정서(鄭叙)는 임금을 그리는 노래 "정과정곡(鄭瓜亭曲)" 을 남긴 인물(人物)로 국문학사(國文學史)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고려(高麗) 인종(仁宗)과 동서간(同壻間)으로 내시낭중(內侍郞中) 벼슬까지 지냈으나 의종(毅宗)이 즉위(卽位)한 뒤 모함(謀陷)으로 인하여 동래(東萊)로 귀양길에 오르는데, 그때 왕(王)이 곧 다시 부르겠다고 약속(約束)했으나, 오래도록 부름이 없자 그곳에서 임금을 그리는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후대(後代) 사람들이 이 노래에 그의 호(號)를 붙여서 "정과정곡(鄭瓜亭曲)" 이라 불렀다.
11세(十一世)인 정양생(鄭良生)은 단성보리 찬화공신(端誠輔理贊化功臣)에 책록되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봉(封)해졌다. 그의 아들 정구(鄭矩ㆍ1350~1418)는 우왕(禑王) 3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해 전교부령(典校副令)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에 태종으로 부터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을 제수 받았지만 거절하고 개경의 옛이름인 송악(松岳)과 같은 이름을 가진 송산(松山)에 은거하였다.
20세 정태화(鄭太和)는 1628(인조 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1673(현종 14)년 심한 중풍 증세로 사직이 허락되기까지 20여 년 동안 5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지 6개월 후 나이 72세로 죽으니, 현종은 3년 동안 늠록(鹿 늠자 한자 틀렸음 祿)과 제수를 내리도록 특명하였고, 그 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을 모아 엮은 "양파유고(陽坡遺稿)"와, 1656(효종7)년까지의 일기인 "양파연기"가 있으며, 시조 1수가 전한다.
고려조(高麗朝)에 대족(大族)으로 성장한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조선조(朝鮮朝) 전 기간에 걸쳐서 17명의 상신(相臣)을 배출하였는데, 이는 전주이씨(全州李氏) 22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것이다.[3] 그 외에 대제학(大提學) 2명, 호당(湖堂) 6명, 공신(功臣) 4명, 판서(判書)가 20여명이 나왔고, 문과(文科) 급제자 198명을 배출하였다.
동래정씨(東萊鄭氏)의 분파(分派)는 크게 3개파로 나뉘었다. 이 중 2개파는 3세 좌복야 휘 목(穆)의 후손인데 6세 교서랑공 보파와 6세 첨사공 필파이며, 정문도(鄭文道)의 둘째 아들로 동래(東萊)에 남아 호장(戶長)을 지낸 3세 휘 선조(先祚)의 후손들은 호장공파(戶長公派)로 분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