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인물들 39 - 명장 강감찬
명장 강감찬
어느 봄날, 늦은 밤 하늘에는 뭇별들이 총총한데 임금의 명을 받은 한 신하가 말에 올라 시흥 금천마을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번쩍 빛이 일어나더니 제일 큰 별이 서서히 꼬리를 끌며 어느 집의 지붕 위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신하는 하도 신기하고 이상스러워 갈 길도 잊은 채 마을의 그 집을 찾아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더욱이 의문스러운 것은 다른 집들엔 등잔불 하나 없는데 이 집은 대낮처럼 밝은 것이 아닌가! 그리고 소슬 대문 안에서는 갓난 애기의 울음소리가 요란합니다.
문을 두드리니 잠시 후 심부름꾼 아이가 나왔습니다.
“이 집이 뉘 댁이냐?”
“삼한벽상공신 강궁진 어른 댁이시옵니다.”
“주인어른을 좀 불러다오.”
잠시 후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신하는 이 집에 오게 된 사유를 자초지종 이야기했습니다.
“하늘의 별이 글쎄 땅에 떨어지자 사내자식이 태어났다니 거저 볼 일이 아니옵니다. 나라의 큰 인물이 틀림없나이다. 어르신께서 잘 키워 나라의 기둥으로 내세워 주시오이다.”
신하는 예를 표하고 제 갈 길을 떠나갔습니다.
그날 밤에 태어난 어린애가 바로 강감찬이었습니다.
그 후 그 별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 속에 계속 전해졌습니다.
강감찬이 나라의 재상으로서 송나라에서 온 사신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강감찬을 보자 황급히 뜰아래 내려가 절을 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내 일찍부터 문곡성(별의 이름)이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아 지금 어디 가서 있는가 했더니 바로 공이십니다.”
이 이야기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강감찬의 어린 시절 이름은 은천입니다. 그런데 그는 몸집이 체소하고 키가 다섯 자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잘생기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그는 신동이라고 불렸습니다. 벌써 3살에 아버지로부터 천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5살에는 ?논어?, ?맹자?, ?례기?를 다 떼고 4서3경을 읽었으며 7살부터는 병서에도 막힘이 없었으므로 어른들을 놀라게 한 사실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10살이 되었을 때에는 천문, 지리, 술서, 병법을 모두 통달했습니다.
은천은 무엇이든 손에 쥐면 다 떼고야 마는 성미였고 성격이 언제나 침착하고 생활에서 매우 검박한 것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리고 아이 때 전쟁놀이를 하면 제일 조그마한 것이 언제나 대장이 되어 그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틀림없이 이긴 싸움이었습니다. 하기에 저보다 곱이나 나이를 먹은 아이들도 그의 ‘명령’에만은 철저히 복종했습니다.
그는 결단성이 있었고 자기의 주장을 굽히는 법이 없었습니다.
17살에 이르러서는 불교까지 완전히 익혔습니다.
그러나 20살이 지나고 30이 넘어도 벼슬에는 별로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만 학문에만 모든 정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를 불러 물었습니다.
“너는 과거를 볼 마음이 없느냐? 이젠 나이가 적지 않은데 나라를 위해서도 일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아버님의 뜻을 알겠으나 아직 저로서는 학문에 썩 깊지 못하오니 좀 더 수련을 한 연후에 벼슬을 하여 막힘이 없도록 하겠소이다.”
“네 뜻이 그러한 걸 내가 몰랐구나. 이젠 나도 70이 넘었으니 나라 벼슬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소원이 되어서 …”
강감찬은 그 학문연구에 더욱 힘을 넣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나이 35살이 되는 해인 983년 과거를 보러 개경으로 올라갔습니다.
“강감찬이 장원이요.” 시험관이 크게 외치자 장내는 일시에 웅성거렸습니다.
진사과에 단연 장원으로 뽑힌 강감찬이 어전에 나서자 사람들은 금시 놀라는 것입니다.
“아니, 저렇게 작은 선비가?”
“속에 있겠지 겉에 있겠소?”
“볼 품은 없긴 없구만.”
누구나가 한마디씩 뇌까립니다.
그러나 그가 얼굴을 드니 두 눈만은 그 어디에도 비길 데가 없었습니다. 거기에서는 알지 못할 세찬 빛이 곧추 내비쳤습니다.
“그대는 뉘 집 자손인가?”
“시홍 금천마을 삼한벽상공신 강궁진이 제 부친이옵니다.”
벽상공신이란 왕건이 삼국통일을 이룩할 때 그를 도와 공을 세운 공신을 말합니다.
“글세 다르다 했더니만 갈 데가 있겠소?”
이날 강감찬은 임금으로부터 양주목사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호랑이가 많아 사람들이 무척 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대낮이나 밤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이 호랑이가 내려와서는 집짐승들을 홀쳐가고 때로는 어린애들까지도 물어가는 난사가 일어났습니다.
부임지에 도착한 강감찬은 마을을 돌아보며 이곳이 군사에서도 중요한 곳이므로 백성이 편안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게 했습니다.
그는 이곳 백성들을 동원하여 주변 숲을 베여 정리하고 먼 곳까지 나무 한 대 없이 벌판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사냥꾼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 덫을 만들고 곳곳에 함정도 파게 했습니다.
강감찬은 호랑이 잡이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날마다 많은 호랑이를 잡아 들였습니다.
호랑이가 없어지자 강감찬은 나무를 벤 땅을 묵이지 말고 갈아엎어 곡식들을 심도록 했습니다.
얼마간 지나자 호랑이는 그림자도 없고 곡식은 풍성하게 자라니 마을사람들은 그제야 강감찬 이상 없다고 좋아들 했습니다.
그 후 강감찬은 경주부사로 부임되었습니다. 부임지로 떠나자 양주사람들은 먼 길까지 따라 나와 그와 헤어지는 것을 서운해 했다고 합니다.
경주에 도착해서도 그 작은 몸집으로 하여 처음 백성들은 그를 시원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소문에 듣던 바, 그의 재주를 시험하려 들었습니다.
며칠 후 마을 평민 몇이 찾아 오더니 강감찬에게 말했습니다.
“사또님께 아뢰옵나이다. 이 고을 늪에서는 밤마다 개구리가 너무 울어 온 마을이 잠을 자지 못하나이다. 이를 조처하여 백성들이 잠을 잘 자도록 해주소이다.”
그들의 속내를 단번에 꿰뚫어본 강감찬은 기꺼이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의 소원을 잘 알았다. 그러나 개구리도 생물이니 영원히 울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되느니라. 그대들이 정 소원이라면 오늘밤만은 그런 일이 없도록 할 터이니 그리들 알고 물러들 가라.”
강감찬은 즉시 아전을 불러 마을들에 방을 붙이도록 했습니다.
“본관은 모든 개구리들에게 오늘밤만은 울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었다. 그런즉 백성들은 마음 놓고 잠을 자도록 하라.”
경주사람들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개구리를 울지 못하게 한다구?”
그러면서 입을 싸쥐고 웃어댔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한밤이 다 가도록 개구리소리 한번 들리지 않았습니다.
해 떨어지기 바쁘게 귀청을 때리던 것들이 기척도 없습니다.
“어찌된 일인가. 사또의 영이 개구리에게도 미쳤는가?”
“거 참, 어젯밤 잘 잤다.”
저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였다. 강감찬은 그날 밤 심복부하들에게 긴 장대를 주어 비밀리에 늪에 내보낸 후 물과 풀숲을 온밤 휘젓게 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강감찬을 따르며 받들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사실을 들은 임금도 강감찬의 꾀에 감탄하여 그것 참 신통하다고 했다 합니다.
10여 년간의 지방장관 벼슬을 한 강감찬은 46살이 되는 해에 수도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이때 거란침략이 시작되었습니다.
10세기 초 거란족들은 강대한 세력으로 자라나 993년 고려에 대한 l차 침입을 개시했습니다.
소손녕이 이끈 80만 대군이 쳐들어 왔으나 한 덩어리가 되어 일떠선 고려인민의 힘을 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서희를 비롯한 뛰어난 장수들의 지략으로 무수한 죽음을 남긴 채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거란을 물리치는 싸움은 나라를 지켜내는 데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고구려, 발해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작전이 결합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고려는 대동강 이남의 후백제와 신라는 물론 고구려의 옛 영토와 발해주민 전체를 포괄하는 강대한 국가를 세울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란은 우리의 동족인 발해를 먹고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고려의 북방진출이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적들은 우리의 염원과 지향을 짓밟고 병탄하려는 음흉한 마음을 먹은 후 침략의 길에 나선 것입니다.
1차 침입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거란 놈들은 이번에는 왕의 직접적인 지휘 하에 40만 대군으로 2차 침입에 들어갔습니다.
고려의 군민들은 치열한 항전을 벌였습니다. 특히 양규가 지휘하는 흥하진 싸움은 성을 끝까지 고수하고 적의 후방을 차단했으며 적후의 인민들을 원수 격멸에로 추동했습니다.
하지만 거란군은 그 어떤 손실을 보더라도 빨리 개경으로 쳐 올라가 왕의 항복을 받으면 된다는 어리석은 술책 밑에 모험적인 진격을 계속했습니다.
거란군이 개경으로 접근해온다는 소식을 들은 대신들은 겁에 질려 항복할 것을 주장해 나섰습니다.
사태는 위급했습니다.
12월 27일 현종왕은 급히 어전회의를 열었습니다. 대신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시꺼먼데 대부분이 항복하자는 것입니다.
이때 단호한 태도로 비겁분자들의 제의를 누르고 나선 대신은 당시 예비시랑으로 있던 강감찬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나라의 위험을 하루빨리 물리치려는 일념으로 불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상감마마, 그렇게는 안 되오이다. 지금 강동 6주를 내주고 항복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오랑캐의 노예로 밖에 달리는 될 수 없소이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 국방에 힘을 넣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는 줄로 아옵나이다.”
“좋은 방책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현재 우리의 역량으로 그들의 힘을 꺾기는 어려울 것이오이다. 그러니 시간을 얻어내기 위해 화평을 제의하여 적이 공격을 일시 멈추게 하여야 하오이다. 상감께서는 남쪽으로 피난하시고 우리는 적이 지칠 때를 기다려 쳐 갈겨야 하나이다.”
어전은 잠시 약간의 화기가 돌았습니다.
임금은 힘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강감찬은 오늘의 처지는 바로 당시 방어군 총사령이었던 강조의 비겁성에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우리가 잠시 적의 예봉을 피하면서 역량을 재정비하고 군민을 동원시킨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구체적 안을 가지고 논증해 나섰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형편에 대처할 수 있는 가장 옳은 전술적 대안이었고 주장이었습니다.
고려는 적에 의해 일시 역량이 분산되었지만 강대한 무력과 서부 국경지대에 구축된 견고한 요새들이 있으며 특히는 죽음을 각오하고 일떠선 인민들의 잠재력이 있는 것입니다. 적은 현재 승전한다고 하지만 후방 도처에서 우리 인민들의 항전으로 진퇴양난에 빠져있습니다. 때문에 타산을 잘하고 군민을 옳게 불러일으키기만 한다면 승리는 결정적입니다.
강감찬의 주장은 곧 나라의 전략적 방침으로 되었습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고려의 애국적 군민들은 도처에서 적을 요정냈습니다.몸이 비록 가루가 되더라도 천년위업을 길이 받들 결심을 안고 40만 대군의 포위 속에서도 굴함없이 싸워 성을 끝까지 지켜 낸 흥하진 군민들(1010년 11월)은 그 모범이었습니다.
거란 놈들은 쫓겨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강감찬은 한림학사로 되었다가 이제는 중추사로서 국방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담당하고 나섰습니다.
거란은 더욱 노골적으로 6개 성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면서 그해 4월 그 나라에 간 사신에게 고려왕이 직접 자기 나라를 방문할 데 대한 이른바 ‘국왕친조’를 요구했으며 은근히 손을 들고 나앉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파렴치한 요구가 고려에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조정에서는 모두 머리를 싸쥐고 앉았는데 강감찬이 일어섰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대왕님이 다른 나라에 찾아가서 머리를 숙인 일은 없으며 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오이다. 지금 거란의 친조라는 것은 강동 6주를 강점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자는 것이옵나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임금도 좋은 방책이 없어 한숨만을 내쉽니다.
“우리의 힘을 길러야 하나이다. 그리고 그 방비를 서둘러야 하나이다.”
강감찬은 거란과 함께 동 여진족들도 우리 땅을 노리고 있기에 여기에 대한 수비를 먼저 해야 앞으로 거란과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쳤습니다.
그는 중추원사로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논밭 12결을 남김없이 임금에게 바쳤습니다.
“나라를 지키자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군사를 양성해야 하옵니다. 거란군의 침입이 이번으로 끝났다고 할 수 없소이다. 그리고 국민을 정신적으로 단결시켜야 하나이다. 그런데 군대에 나간 그 가족들이 헐벗고 굶주린다면 누가 안심하고 군사로 되겠사옵니까? 비록 신의 논밭이 얼마 되지는 않사오나 이것을 그 가족들에게 나누어주어 누구든지 기꺼이 군대에 나서도록 하여 주시오이다.”
여기에 감심된 임금은 그때부터 검소한 생활을 꾸리었으며 대신들도 모두가 군사가족들에게 관심을 돌리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장년들은 저저마다 앞을 다투어 군대에 들어왔습니다.
임금은 1018년 강감찬에게 다시 평장사라는 벼슬(정2품)을 주어 서경으로 보내면서 그 임명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기까지 했습니다.
“경술년(1010년) 거란의 침략군은 한강변에까지 이르렀도다. 그때 강공의 묘책이 없었던들 우리는 모두 오랑캐의 족속이 되고 말았을 것이로다.”
강감찬은 임금의 치하에 감격하면서 이 무거운 책임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는 부임지에 가는 날부터 젊은이들을 뽑아 군사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켰습니다.
용맹한 장수 밑에 약한 군사가 없듯이 강감찬이 앞장에서 지휘하니 고려군은 두려울 것이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018년 12월 거란의 성종은 사위인 소배압에게 또다시 10만의 군사를 주어 제3차 침략의 길에 올랐습니다.
적들은 전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병력으로 들어옴으로써 고려군과의 도중 싸움은 될수록 피하면서 개경으로 쳐들어가 고려왕의 항복을 받아 보려는 계략입니다.
적의 기도를 알아차린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첩을 부원수로 하는 20만 8,300여명의 강력한 방어군을 편성하고 주력은 영주와 그 이북지대에 배치했습니다.
나라방위의 중책을 지닌 강감찬은 이때 나이 벌써 71살의 고령으로 백발이 성성하였으나 향토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못 지 않았고 정력과 투지는 더욱 세차게 타올랐으며 지략은 무궁하게 샘 솟았습니다.
온 나라 백성들은 강감찬을 바라보았습니다. 강감찬은 홍화진으로 나가 먼저 그 일대를 자신이 직접 순찰했습니다. 그리고는 슬며시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벌써 머리 속에는 적을 무찌를 작전적 구상이 다 되어있었습니다.
“오랑캐는 내 손바닥 위에 놓인 거나 다름이 없다.”
진막에 이른 강감찬은 부원수에게 명령했습니다.
“부원수는 날랜 군사 1만 2천을 뽑아 거느리고 저쪽 골짜기에 가서 숨으시오. 그리고 말울음소리가 들리거든 일제히 적을 공격하여 쓸어 눕히시오.”
그리고 수하 장수들에게는 다른 지시를 내렸습니다.
“수백 장의 소가죽을 모아 한데 꿰어 매어라. 그것으로 강 상류의 물목을 막아 임시 제방을 만들도록 하여라.”
강감찬은 여기저기 말뚝을 박고 소가죽을 설치하게 했습니다.
소배압은 이번에는 자신 있다고 큰 소리를 치며 기세 좋게 달려들었습니다.
“어찌 고려군에 우리 앞을 가로막을 뛰어난 장수가 있을소냐. 일제히 강을 건너 성부터 무너뜨려라.”
소배압은 소리를 질러대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때 이른 것이었습니다.
적이 강 한복판에 들어서자 강감찬의 명령이 내렸습니다.
“소가죽을 터뜨려라.”
순간 강물은 천지를 뒤흔들며 소용돌이쳤습니다.
“악, 악, 사람 살려라.”
원수들이 아우성치는데 매복했던 고려 군사들이 노도처럼 쓸어나갔습니다.
물에 밀리고 창에 찔리고 말발굽에 밟히고 낯 설은 땅에서 적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흥화진 싸움에서 돌이킬 수 없는 참패를 입은 데 뒤이어 적은 마탄(대동강 미림나루)에서 다시 한 번 몰살당했습니다. 소배압은 기겁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아, 아, 내가 한평생을 싸움터에서 살아왔지만 이번 같이 비참한 꼴을 당하기는 처음이구나. 적장 강감찬이 이렇게 전략에 밝은 명장인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내가 무슨 면목으로 고국에 돌아가 임금님을 대한단 말이냐.”
소배압은 칼을 뽑아 제 가슴을 찌르려 했지만 그것 역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로부터 싸움의 승패는 병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였사옵나이다. 부디 힘을 내시어 의분을 푸셔야 하옵나이다.”
군사들이 달려들어 말리니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소배압은 심히 난처한 입장에 놓이었습니다. 군사들의 말대로 돌아가서 다시 오자 해도 될 일이 아니요, 이제 더 맞서 싸우자 해도 승패가 뻔했다.
생각 끝에 소배압은 겉으로는 화의를 제기하고 뒤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군사들이 전선에 나간 틈을 타서 비어있는 개경으로 들어갈 기회만을 노렸습니다.
하지만 적의 퇴로를 막아나서는 고려군의 진군 앞에 좀처럼 발걸음을 옮겨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려군은 선봉으로 섰던 500명의 거란군을 영주와 무주에서 순식간에 없애버렸습니;다.
강감찬은 서경에 대기시켰던 기동력을 동원하여 적들을 추격전과 불의기습타격으로 피로 약화시키며 청야전술로써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강감찬은 분별없이 날뛰는 적을 견제하기 위해 개경에는 계엄 상태를 선포하고 병마판관 김종현이 1만 명의 군대를 이끌어 지름길로 적을 앞질러 가 수도 방어군에 합세하도록 했으며 동북면 병마사가 보낸 3,300명의 응원군도 여기에 붙였습니다.
강감찬은 개경 밖의 주민들을 모두 성안으로 이주시켜 그 주변 100리 들판을 비워놓고 한 알의 쌀, 한 마리의 짐승도 남겨두지 않게 했습니다.
거란군은 신계 부근까지 왔으나 더는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벌써 식량이 떨어진지 오래고 가는 곳마다 쫓기고 나니 병사들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병사 한 명에 타호곡기라는 기병 한 명씩 배속되어 강점지역에서 그날그날 약탈하여 군량과 마초를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강감찬의 청야전술에 걸려들었으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강감찬은 개경에 들어온 적들에게 ‘뼈다귀세찬’을 안겼습니다.
모든 것을 걷어내고 오직 돼지, 말, 소 뼈다귀만 구덩이에 남겨놓은 것입니다.
강감찬은 100여명의 날랜 군사들을 어둠을 타서 은밀히 보내어 놈들의 척후병들까지 몽땅 잡아 죽였습니다.
드디어 강감찬은 총공격령을 내렸습니다. 고려군은 적을 추격 섬멸하는 격전에 나섰습니다. 강감찬의 지략으로 벌써 의주로부터 태천에 이르는 적의 퇴로가 차단되고 적들은 함정에 빠져들었습니다. 두드리는 북소리는 하늘을 진감했고 적의 비명과 아우성소리가 이에 합쳐졌습니다.
“이제 고려의 흥망이 이 싸움에 달려있다. 있는 힘을 다해 적을 무찔러라. 다시는 적들이 이 땅을 넘겨보지 못하도록 매우 쳐라!”
강감찬의 힘찬 외침이 산악을 울렸습니다.
“한 놈도 놓치지 말라. 모조리 무찔러라!”
고려군의 기세는 무서웠습니다. 창과 칼들이 부딪쳐 불꽃을 튕기고 적들의 투구와 갑옷, 시체가 온 벌판을 채웠습니다.
1019년 2월 구주대첩이 벌어진 것입니다. 적은 삽시에 녹아났습니다. 적의 피는 시내를 이루고 주인 잃은 말울음소리가 도처에서 울렸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3대 대첩의 하나로 불리고 있는 구주대첩은 이렇게 고려의 커다란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하기에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더불어 강감찬의 구주대첩은 우리 민족의 자랑인 것입니다.
고려군은 곧 추격전으로 넘어가 구성 황화천을 건너 반령까지 뒤쫓아가면서 적을 모조리 쓸어 눕혔습니다.
결과 소배압이 이끈 거란군은 10만 가운데서 살아 돌아간 놈이 수천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고려군은 수많은 적을 생포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과 낙타, 갑옷, 무기들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적은 얼마나 혼이 났는지 거란의 패전이 일찍이 이렇게 큰 적은 없었다고 아우성을 쳐댔습니다.
이렇게 강감찬은 72살의 늙은 몸이었지만 제일선에서 적을 견제함으로써 근 30년간에 걸치는 거란침략을 완전히 물리치고 고려의 존엄을 지켜냈습니다.
이와 같은 승리는 물론 제 땅, 제 나라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일떠선 애국적인 고려군민의 희생적인 노력의 고귀한 결실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강감찬을 비롯한 우수한 지휘관들의 뛰어난 지략에도 크게 달려있었습니다.
모든 역량을 구체적으로 타산하고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결전에로 군민을 옳게 동원했을 뿐 아니라 능숙하고 뛰어난 전술로 지휘관으로서의 의무를 옳게 수행한 강감찬의 공적은 반거란전쟁사에 남아있습니다.
대장기를 높이 추켜들고 승전고를 울리며 70고령의 강감찬이 개경으로 돌아올 때 거리와 마을들에서는 환호성으로 그를 맞았고 현종왕도 너무 기뻐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강감찬이 영파역에 도착하여 포로와 노획물들을 바치고 승전보고의 의식을 끝내자 준비되어있던 가설무대에서는 풍악이 울리는데 왕은 그의 손을 잡아 쥐고 금꽃 여덟 송이를 머리에 꽂아 주었습니다.
“정말 고맙소. 경과 같은 충신이 없었던들 이 숱한 백성들은 오랑캐의 노예가 되었을 것이 아니겠소.”
“저는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이다. 거란군을 무찌른 것은 우리 군사들과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친 결과이오지 어찌 신의 공로이겠나이까.”
개경에 돌아온 왕은 다시금 3일간에 걸쳐 큰 잔치를 차렸으며 그에게 검교태위문하시중, 평장사, 천수문개국남의 벼슬을 내리고 식읍 500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개선한 영파역을 ‘홍의역’으로 고쳐 부르게 했습니다.
강감찬은 70이 넘었는지라 여러 차례 왕에게 의례하여 조정에서 물러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일신의 안일보다도 나라의 안녕을 먼저 생각했고 교외에 은퇴하여 소박하고 평범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개경에 외성이 없는 것이 못내 걱정되어 이를 축조할 데 대하여 건의서를 올렸습니다.
“거란이 두 번째로 쳐들어왔을 때 개경이 쉽게 적의 손에 들어간 것은 여기에 성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지나이다. 하루빨리 외성을 쌓아 국가유사시의 방비를 튼튼히 해야 할 것이오이다.”
그리하여 개경에는 둘레가 2만 9천 7백보에 달하는 토성이 쌓아지게 되었습니다.
강감찬은 1031년 83살의 일기로 생을 마치었습니다.
그는 저작으로 ?약도교거집?, ?구선집?을 남겼다고 하는데 오늘에까지 전해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 하늘에서 문곡성이 이 자리에 떨어져 강감찬 장군이 태어났다고 전해 지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낙성대’라 일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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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인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백두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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