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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20일 ~26일
중부 러시아 옴스크에서 300주년기념 국제 음악축제를 총감독했다.
이 축제에 러시아 고려인들을 많이 도우는 "동북아 평화연대" 가족들을 초청했다.
축제를 마치고 이분들과 함께 노보 시비르스크를 구경하고 이르쿠츠크로 왔다.
이분들이 알혼섬을 구경하러 간 사이에 나는 모처럼 이르쿠츠크에서 여유있는 시간을 가졌다.
이르쿠츠크에서 - 울란우데 까지는 약 470km인데 기차로는 약 8시간, 버스로도 비슷하게 걸린다.
기차로 갈경우 , 왼편에는 4시간동안 바이칼 호수가 펼쳐지기에 낭만을 즐길수 있다.
이광수의 소설 "유정" 의 무대가 되었던 바이칼호수를 보면서 유정을 다시 펼친다면 새로운 느낌이 들 것이다.
2016년 9월4일
울란우데 오페라.발레극장에서
울란우데 350주년 기념 음악회를 가진다.
기념음악회의 성격을 살리려고, 상트 페테르부르그 마린스키 극장의 주역 성악가 2명과
크라스노 야르스크 오페라극장 소프라노 또 한국과 몽골에서 성악가와 가야금주자 또 섹스폰니스트를 초청했다.
이 음악회가 마치고나면 울란우데를 떠난다.
물론 가끔 객원지휘를 하기위하여 오기는 하겠지만 월급받는 곳이 시베리아 동토의 땅 야쿠티야 공화국으로 바뀐다.
이르쿠츠크 주정부청사다.
이런저런 일로 이르쿠츠크도 최소한 20회 이상 온것 같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단과 함께 음악회를 3회 지휘했고, 울란우데 오페라극장이 매년 순회공연을 오는 도시다.
바이칼 알혼섬을 가려고 두어번 갔었고 또 비행기를 갈아타거나 비자때문에도 여러번 갔었다.
원래
주정부 청사자리에 성당이 있었는데 공산주의 시대때 옮기면서 교회가 있었던 자리임을 나타내려고 세웠다나???
이런 예쁜 성당도 공산주의 시대에는 다른 용도로 많이 바뀌었었단다.
모스크바의 이름있는 성당은 말할 것도 없고, 니즈니 오브고로드 성당도 한때는 수영장으로 사용되었단다.
공산주의 시대에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그 많은 교회가 위기를 맞았었다.
이르쿠츠크에서 손꼽히는 오래된 성당이다.
러시아에는 어느 도시를 가나 레닌동상이 있고 또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이 있다.
(유럽에는 마을마다 흑사병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는 탑이 있듯이...)
러시아는 2차대전때에 2,700만명의 사람이 죽었는데, 도시마다 이들의 영혼을 기리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피어난다.
젊은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나면 이곳으로와서 헌화를 하고 신혼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유럽에는 결혼식을 마친 연인들이 이처럼 자물쇄를 묶어놓는 곳이 많이 있다.
러시아에서는 너무도 흔한 이름 / 스베틀라나와 알렉세이가 2014년 8월16일에 결혼식을 마치고 걸어놓았나보다.
어떤 곳은 자물쇄가 너무 무거워서 다리가 무너지기도 했다.
이르쿠츠크에서 동남쪽으로 1시간(60km) 정도 내려가면 바이칼호수(리스트비얀까) 가 나온다.
길은 최근에 포장이 잘 되어서 이전보다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다.
택시를 탈 경우 왕복 1,700루불, 봉고를 빌릴경우 2,700루불을 달라고 할 것이다.
물론 호수에서 택시를 세워둘경우 시간당 420루불(한화 8천원)을 더해서 지불하면 된다.
그러나 꼭 돈을 더 받아내려고 꼼수를 부리는 기사들이 있으니, 출발전에 깐깐하게 흥정하고 떠나야한다.
리스트 비얀까 초입에는 바이칼영감이 아름다운딸 앙가라를 쳐죽인 샤먼바위가 있다.
멀리서도 보이지만 가까이가서 보기를 원할 경우 1인당 150루불을 지불하면 소형선박이 그곳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온다.
이르쿠츠크에서 서남쪽으로 계속가면 울란우데로 가는데, 두시간 쭘 가다보면 이런 휴게소 겸 화장실이 나온다.
왼편이 화장실이고 오른쪽이 간이 휴게소다.
외편에 보이는 것이 바이칼호수다.
기차를 타고갈 경우 여기서부터 왼편에 호수가 펼쳐진다.
바이칼호수에서만 나는 생선 오물을 파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뛸것이다.
3시간 반쭘 가다보면 곳곳에 이런 개울이 보일 것이다.
차를 세우고 발을 담그면 더위를 잊을 수 있다.
물은 깨끗한데
산 정상의 눈이 녹아서 내리는 물이기에 발을 오래 담그고 있기가 힘들만큼 차갑다.
오른쪽으로 조금 더 흘러가면 바이칼호수와 만난다.
내가 3년을 일했던 부리야트 국립 오페라.발레극장이다.
이곳 별관에 살면서 많은 오페라와 발레를 지휘했었다.
9월4일 공연을 끝으로 더 추운 북쪽 시베리아로 떠난다.
동북아 평화연대 식구들이 찾아왔다고, 러시아 전통마을(따르바가타이) 사람들이 마을 초입에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러시아 전통마을 사람들은 러시아의 종교박해를 피하여 폴란드나 우크라이나로 갔던 사람들이다.
러시아 정부는 중국이나 몽고국경으로 구교 신도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들은 곡식을 심고, 채소나 감자를 주식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곳 원주민인 부리야트인들은 오로지 고기만 먹고 살았었다.
이들에게 고기를 주고 감자나 야채를 바꾸어 먹으면서 식생활이 개선되었다.
구교들은 손가락 두개로 선을긋고 절을 하는데 신교는 손가락 세개로 한다.
이작은 하나를 지키기위하여 목숨까지 버린 사람이 많았으며, 이곳 시베리아까지 쫒겨와서 살아야하는 어려움을 감수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들이 내놓은 술과 빵인데 술을 받아서 손가락에 조금찍어서 주위 신들에게 뿌리는 고시례(?) 를 하였다.
이것은 한국인들도 제사를 지내거나 무덤에 술을 따를때 하는 샤마니즘의 예식인데.
이곳은 절묘하게 기독교와 샤마니즘이 공존하고 또 동서양이 다투지않고 공존하는 곳이다.
뒤에 보이는 작은 산이름이 오물(바이칼에서만 사는 물고기)인데,
이유는 이곳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바이칼에서 올라오는 오물의 움직임이 보인다는 것이다.
바이칼호수에서 살던 오물이 때가되면 셀랭가 강으로 올라와서 알을 낳기에, 그때 고기를 잡는다고 하였다.
전통마을에는 가슴아픈 사연이 많은데 지금은 모두 추억으로 간직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공산주의로 분투하다가 전사한 동무들에게" 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고려인들의 러시아 이민역사는 눈물없이는 듣기 힘든 우리민족의 아픔을 간직하고있다.
러시아 공산주의가 좋아서라기보다는 , 공산당을 통하여 일본을 무찌르고, 조국의 독립을 갈망했던 것이다.
많은 고려인들이 적군(공산당)에 가담하여 백군(황제편)과 싸우고 또 일본군과 싸웠는데 그때의 승리를 기념하여 이 비를 세웠다.
노동자여 일아나라 !!!
모스크바 시내의 볼쇼이극장 건너편에 세워져있는 칼 막스 동상에도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
1917년 볼세비키가 공산혁명을 통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세웠지만, 동쪽은 여전히 황제를 따르는 백군이 지배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우리 고려인들과 몽골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울란우데의 백군을 무찔러고 승리했다.
볼세비키 혁명 3년후인 1920년에 이 비를 세워서 기념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 독립군들은 레닌에게 독립자금을 받아서 중국 등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후에는 박해도 많이 받았다.
울란우데를 떠나면서 지난 3년반을 돌아보았다.
어디나 성공하는 곳에는 성공으로 이끄는 사람이 있었다.
돈이 많거나 좋은 환경때문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있었다.
울란우데는 참 좋은 조건을 많이 가지고 있기에 언젠가는 발전할 것으로 생각된다.
오페라.발레극장 역시 좋은 시스템과 건물이 있기에 가능성을 많이 지니고 있다.
울란우데는 세계 최고의 호수 바이칼이 가까이에 있고, 아래로는 몽골, 주변에 아시아 부자나라들이 있는데도 활용을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것을 겁내하고, 장관이나 고위 공무원조차도 자신의 안위를 먼저 챙기고 있었다.
한때는 시베리아 최고의 극장에 최고의 가수들이 활동했었는데
지금은 그때의 꿈을 되세기면서 추억에 젖어 살고 있었다.
부리야트 족이 인구의 30%밖에 되지않지만, 극장 가수들의 80%이상이 부리야트인이다,
극장장과 부극장장이 부리야트인이요, 오페라감독이 부리야트인이다보니 은근히 부리야트인을 감싸고 돈다.
3년전에 금발의 러시아 여자 연출가가 의욕을가지고 활동했는데 결국은 힘의 균형을 걱정한 쪽에서 몰아 내었다.
그 이후로 아직까지 변변한 연출가없이 오페라를 하고 있으며, 축제때만 돈을 많이주고 모스크바쪽에서 모셔온다.
대도시 니즈니노브고로드보다 예산이 많은데도, 오케스트라 단원은 많이 부족하다. 특히 현악기가 ??
항상 현악기 단원이 부족하다고 걱정은 하지만, 모스크바나 빼째르부르그에서 놀고있는 단원들을 초빙하는데는 인색하다.
지휘자나 연출자가 오면 혹시 자기들을 쫓아 낼까봐 걱정하며, 하던 방식에서 탈피하기를 겁내한다.
서쪽보다 아시아쪽에 돈이 많은데도 계속 모스크바나 빼째르부르그만 바라보는 것이 아쉽다.
무엇이 안되는 단체를 보면,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극장전속 가수가 40명이나 되지만 정기적으로 노래하는 가수는 반도 안된다.
나이든 그룹들은 가끔 가곡 한두곡을 부르고 월급을 받아간다.
그렇다고 돌아가는 시스템을 바꿀만한 용기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냥 늙어갈때까지 조금씩 조금씩 같이 죽어가자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극장이 조금씩 시들어가는 것이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문화장관을 만나서 얘기해봤고, 또 음악대학의 학장과도 수차례 협의해보았지만, 상황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공하는 단체는 돈이 아니라 사람임을 절실히 느꼈다.
용기있는 문화장관이 뽑혀서, 상황을 인식하고 장기적인 플렌을 세워서 잘 이끌어가면 옛날 명성을 찾을 것으로 생각된다.
야쿠티야는 울란우데와 멀지않기에 교류가 계속 이어질 것 같은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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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시고자 하는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좋은 내용 잘 읽었습니다.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네요...
이곳저곳 옮겨다니는 삶이 부럽기도하고 힘들겠다싶기도하고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