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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만드는 여인
김선희
나는 오솔길을 좋아한다.
교사생활 36년 6개월 동안 대구에 집을 두고 창녕, 밀양, 김해, 통영으로 장거리 출·퇴근을 했다. 정해진 노선이 있는 시외버스를 이용할 때는 정류장에 내리면 오늘은 이 오솔길, 내일은 저 오솔길을 걸으면서 유치원까지 오고 갔다. 출근시간에는 아이들의 “선생님, 빨리 오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지름길의 오솔길을 찾는다. 퇴근시간에는 여유를 부리면서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이 시간들을 아이들과 어떤 그림을 그리면 좋을까? 생각하며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채우기 위해 오솔길을 찾아서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헤매는 것을 즐긴다.
자가용을 이용할 때는 퇴근시간이 되면 자연이 주는 저마다의 얘기를 듣기 위해 오솔길에 차를 세운다. 일찍 나온 새싹들이 하늘거리는 바람결을 따라 추는 춤사위가 긴 겨울이 지나고 있음을 알리는 봄의 오솔길, 여름이면 바쁜 일상이 주는 노곤함이 몰고 오는 잠을 떨치기 위해 찾아가는 시원한 그늘이 뒤덮인 오솔길, 가을이면 샛노란 은행잎이 눈부셔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아름다운 오솔길, 겨울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아무도 밟지 않은 곳을 찾아 내 발자국을 남기며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게 해 주는 오솔길 등 일 년 사계절동안 매일 새로운 풍경을 뿜어내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진함을 오로지 가까이 만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제 2의 인생이라고 하는 퇴직을 맞이하여, 제 1의 인생에서 나를 키웠던 오솔길과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며 새로운 오솔길을 만든다.
첫 번째로 만든 오솔길은 신하모니카교실 길이다.
2018년 5월 21일 메시지가 도착했다. ‘공지합니다. 동기친구들과 하모니카 취미활동을 동기회 사무실에서 하고자 합니다. 관심 있는 친구들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모니카를 다룰 줄 몰라도 기초부터 시작할 예정이니 참여하시면 됩니다. 처음 모임은 6월 2일 토요일 오후 3시입니다. 참여를 희망하시는 분은 000에게 연락바랍니다.’
재능을 가진 친구 부부가 소중한 시간을 내어 무료로 하모니카의 기초부터 가르쳐 준다니... 책상 서랍 깊숙이 잠자고 있는 하모니카가 떠올랐다. “하모니카가 언제 어떻게 내 손에 들어 와 있지? 왜 나는 불지 못했지?” 하모니카교실에서 누가 물어볼까봐 기억을 되살려 보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서랍을 열 때마다 한 번씩 보이는 하모니카는 불지 못하고 있다는 실패감만 주고 있었기 때문에 ‘버릴까?’ 하며 손에 들었다가도 ‘언젠가는 불어 봐야지’ 하며 제자리에 놓고는 했는데 성희&대욱 친구가 하모니카를 불 수 있게 해 준다니 너무나 흥분이 되었다.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고 있는 모습은 나도 저렇게 할 수 있겠지 하는 욕심을 준다. 친구의 권유로 기타와 크로마하프를 잠시 배웠지만 “나는 재능이 없나봐.” 라고 변병하면서 중도에 그만뒀기 때문에 내가 다룰 수 있는 악기는 피아노뿐이다. 대학에 다니면서 시작한 피아노 치기는 오른 손과 왼 손을 다르게 움직이기, 굳어져 돌아가지 않는 손가락을 빠르게 튕기기, 음표가 말하는 제 자리 정확하게 찾기 등은 학점 취득이 아니었으면 결코 할 수 없었던 아픈 기억이 있다.
성희&대욱 하모니카 선생님이 설명 하는 대로 숨을 불기도하고 빨아 당기기도 하면서 가장 쉬운 ‘작은 별’을 연주한다. 조금씩 귓가에 내가 연주하는 소리가 들린다. 웃음이 나온다. 할 수 있다. 새로운 연주곡을 선택한다. 굳어서 유연하게 음을 찾을 수 없어 많은 시간이 걸려도 괜찮다. 정해진 시간에 해 내야하는 학점과 관련도 없다. 다른 사람과 경쟁해야 될 필요도 없다. 따라가지 못하면 나는 조금 쉬면서 잘 하는 사람의 음을 빌려 협동하면 된다. “잘하고 있네. 그리고 안 되면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즐기면 되지”라는 하모니카 선생님의 가르침이 고맙기만 한다. 오직 나만의 하모니카 오솔길이 넓고 길어지도록 만들어가고 있다.
두 번째 오솔길은 뜨개질 길이다.
유치원 교실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형들이 발가벗은 채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때가 묻은 몸을 씻기고 옷을 만들어 입히기로 했다. 털실과 뜨개바늘을 들었지만 막막하기만 하였다.
지난날을 돌아보니 뜨개질을 해서 완성한 경험이 하나도 없었다. ‘할 수 있을까?’ 망설임보다 내가 선택한 일이라 만들어야만 했다. 밤을 하얗게 밝히며 풀었다, 짜기를 반복하면서 하나씩 옷을 만들어 입혔더니 동료들이 예쁘다고 칭찬을 한다.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을 받았지만 어설픈 구석만 자꾸 보여 민망하였다.
기초가 없어서 책을 봐도 잘 알아지지 않아 선생님을 모셔서 정식으로 코바늘 뜨개질을 배우기로 하였다. 실 선택하기, 바늘 호수 정하기, 사슬뜨기, 빼뜨기, 한 줄 긴뜨기, 짧은뜨기 등등 기초를 닦는다. 실을 손가락에 걸어 코를 만드는 ‘매직링 코’ 만들기 방법을 배웠을 때는 인형 모자의 윗부분에 생긴 구멍을 메우지 못해 쩔쩔매다가 방울을 달아 완성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을...’ 선생님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것으로 뜨개질에 대한 배움의 목마름이 다 채워지는 듯하였다. 선생님은 나의 그런 건방진 마음을 안다는 듯 다양한 기법들로 채찍질을 해 주고 있었다.
이제는 어설픈 구석이 조금씩 메워져 인터넷의 동영상이나 다른 사람의 작품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사랑의 모자 뜨기로 신생아 및 암 환자를 돕는 자원봉사활동을 시작으로 원피스, 바지, 모자 등으로 멋을 낸 발도로프 인형들을 만들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자원봉사의 뜨개질 오솔길을 넓히기 위해 형형색색 아름다운 실들을 준비하고 있다.
세 번째 오솔길은 창작수필 길이다.
“퇴직한 기분이 어때?” 퇴직 일 년 선배인 친구가 묻는다.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고 있는 나에게 “자신을 돌아보는 글을 써 보면 어떨까?” 라고 이어서 말한다.
나에게 찾아온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실버 자서전 쓰기’ 강좌 제목을 보게 되었다. ‘음, 자서전? 좋은데,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으로 신청을 했는데 신청자 수가 모자라 폐강되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강의를 신청 해 놓은 그 며칠 동안 자서전을 쓰는 것이 원래부터 생각 해 온 최대의 과제인 것처럼 되었기 때문에 실망이 컸던 것이 기억났다.
“내가 연금공단에서 하는 수필창작교실의 강의를 듣고 있는데 좋은 선생님이 계시니 도움이 될 거야. 너도 와라!”한다. 그 순간 글쓰기에 대한 경험은 논문, 계획서, 보고서 쓰기가 다였는데도 불구하고 단번에 “그래! 언제 어디로 가면 될까?”하고 약속을 하였다.
창작수필을 위한 만남의 횟수가 많아져도 선생님이 주시는 글제와 함께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머물고 있는 나의 글쓰기에 대해 친구는 이런 저런 소재로 나를 이끌어준다. 웃음으로 그 자리를 슬쩍 마무리하면서도 꽉 닫혀있던 내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면서 창작수필 오솔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급기야는 좋아하던 TV 드라마도 외면한 채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 종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한 줄 한 줄 행을 채우는 글들이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는 창작수필의 오솔길은 ‘나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의 오솔길은 어떤 길일까?’를 기대하게 해 주는 길이다.
니, 내 동생 해라
김선희
나에게는 언니가 하나 있다.
70년대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 수업료를 걱정하며 선생님을 바라봐야하는 학교 보다는 내 손을 움직여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좋아서 일찍이 산업전선에 나섰다. 여자들만 모여 일을 했기 때문에 자연히 연령의 순서에 맞춰 언니, 친구, 동생이라고 칭했는데 갑자기 정색을 한 언니가 “선희야! 니, 내 동생 해라”, “내가 언니 동생이지 뭐꼬?”, “아니, 진짜 동생”한다. 부모님은 내게 오직 여동생 하나만 주셨는데 그 날부터 언니는 자기 집안의 대소사에 참여시키면서 큰 언니, 큰 오빠, 중간 오빠, 작은 오빠, 남동생을 한꺼번에 선물하였다. 이렇게 언니가 생겼다.
언니는 나의 기를 살려주는 조력자다.
부지런한 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아 평소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돼지꼬리, 닭다리, 순대 등의 재료를 가지고 맛있는 음식으로 뚝딱 만들어 시시때때로 나를 불러내어 맛을 보여주었다. 특히 언니가 만든 만두의 맛을 보고 나면 다른 만두는 먹을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런 언니의 음식 솜씨를 곁눈질하여 익힌 솜씨로 돈까스와 만두를 만들어 잔치를 벌이면 집으로 돌아간 친구의 아들, 딸들이 “엄마! ‘선희아줌마표 돈까스’처럼 해 주세요’라며 다른 것은 먹으려 하지 않는다거나, ”아이들이 ‘선희아줌마표 만두‘를 만들어 오라고 하니 오늘은 모여서 같이 만들어 봅시다.“라고 하여 만두 만들기 모임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음식이야기만 나오면 그 시절 얘기를 한다. 그러면 ”바쁜 직장생활을 한 덕분에 이제는 음식 잘 못한다“고 엄살을 부려도 통하지 않고 ’선희아줌마표‘를 만들어 낸 요리사가 되도록 해 준 언니다.
원감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었다. 추석명절이 되면 아이들이 우리의 음식을 사랑할 수 있도록 송편 만들기를 한다. 반죽을 하고, 송편을 만들어 찌고, 나눠 먹기 등 많은 일손이 필요하다. “언니야! 아이들과 송편을 만들어보고 싶은데 일손이 부족하네. 우리 유치원에 가서 선생님들 도와주면 어떨까?” 우리 유치원은 언니 집에서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나가야 했다. 언니는 멀미가 심해서 차를 타고 멀리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시쯤부터 필요한데?” “10시쯤부터 만들면 되지 않을까?” “그러지 말고 니가 출근할 때 조금 일찍 나서서 나를 태우고 같이 출근하자.”며 단번에 승낙을 한다. 그때부터 아이들에게 오색 송편을 만들도록 해 주자면서 치자물, 포도즙, 백년초, 시금치 등을 준비해 주었다. 반죽 하는 법, 만드는 법 등을 도와주고, 쪄서 내 준다. 아이들의 좋아하는 모습과 선생님들이 고마워하는 인사로 내 어깨가 으쓱 해 지도록 해 준 언니다.
언니는 손끝 솜씨가 좋은 나의 조력자다.
교구 전시 대회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두 친구와 곰’을 동극으로 발표할 때였다. “언니야! 두 친구가 입을 두루마기 필요한데...”, “내 두루마기 만들 줄 모르지만 한 번 해 보자.” 라며 광목으로 뚝딱 뚝딱 만들어 내니 너무나 앙징스러운 옷이 되었다. 언니는 “한복집에서 만든 옷처럼 좋은 것이 못 되어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아이들의 귀여움을 한껏 살려줄 수 있는 멋진 옷을 입은 아이들의 발표로 1등급을 차지하여 승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 해 준 언니다.
언니는 재봉틀을 움직이는 솜씨도 좋아 물건을 뚝딱 만들어낸다. TV 코미디 프로그램 중 ‘큰 집사람’을 보면서 유치원의 게임으로 도입하기 위해 언니에게 말했더니 커다란 옷을 재미있게 만들어 주었다. 옷 안에 아이들이 들어가도록 한 다음 나머지 공간에는 풍선을 넣어주었다. 신나게 아이들과 놀이하는 창의적인 선생님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유치원은 아이들의 특성으로 다양한 교구가 수도 없이 많이 필요했다. 아이들에게 이런 것 주고 싶다, 저런 것 주고 싶다고 말하면 온 집을 뒤집어 물건을 찾아내 만들어 주면서 “너 같은 선생을 만난 아이들은 참 좋겠다.” 면서 공을 내게로 돌리면서 나의 자존감을 살려준 언니다.
언니는 전폭적으로 나를 지지하는 조력자다.
직장을 다닐 때 항상 바쁘게 다녔던 동생이었기에 퇴직 후 어떻게 잘 지내는지 걱정이 되어 “선희야! 뭐 하노?”, “두류도서관으로 실버 대상 스마트폰 활용 기초교육 받으러 간다.”, “거기에서 뭐 배우는데?”, “카카오톡에서 택시 부르는 법, 메시지 및 사진 전송하는 법, 앱을 깔아 사진 편집하는 법, 동영상 만드는 법을 배운다. 아들이 네이버 지도 보는 법을 매번 가르쳐 주는데도 잘 사용하지 못해 자꾸 물어보는 내가 미안했는데, 선생님이 엄청 자세히 잘 가르쳐 줘서 네이버 지도 보는 법도 할 수 있다.”라고 하면 “배운 것 내게 가르쳐 줘!” 하며 내가 보내고 있는 시간들이 유익한 것이며, 잘 살고 있음을 치켜 세워준 언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빌리는 것에 서툴러 필요한 것은 다 갖추고 있다가 필요 없는 것은 버리며, 남에게 줄 때는 좋은 것을 줘야 한다는 명목으로 남에게 주는 것에 대해 엄청 인색하다. 인색함은 타인과 교류하는 것을 방해해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며, 유치원에서 교사들이 도움을 주고자하는 것을 받지 않으려고 정색을 하는 고집불통이었다. 언니는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을 즐겨한다. 특히 나에게는 집에 있는 것을 아낌없이 베푼다. 언니의 40년 넘는 무한정 나눔의 사랑은 차츰 나의 인색한 마음을 녹여 주었다. 대가족을 이루는 언니의 허심탄회한 지원에 힘입어 마음 터놓기 및 물질 주고받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가지게 되면서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여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즐거움을 알고 나누는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 준 언니다.
2018년 10월 31일이었다. 퇴직하고 처음으로 맞는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대중가수가 불러 히트를 쳤던 그날이라 언제부터인가 무슨 행사 없이 그냥 넘어가면 외톨이가 된 듯 허전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지만 올해는 더 심하였다. 오전 내내 정신없이 몸을 움직여 대청소를 하는데 깨끗해지는 주변과는 다르게 생각이 엉키면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선희야! 집에 와라 너희 형부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더니 뜬금없이 씩 웃으며 10월의 마지막 날이네 하더라. 우리끼리 멋진 10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보자” 라고 한다.
“지금 자존감 떨어져 우울해” 라고 말하면, “너는 어릴 때부터 계획한 것은 다 끝내고 하루 일과를 접는 그런 성실한 아이였다.”라고 말해준다. “배고파”라고 말하면 “된장찌개 맛있게 해 놨다. 같이 먹자”, 라고 응대한다. 긴 세월을 하루같이 언제 어디서나 그 자리에 서서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며 반겨준다.
“뭐해?” 라는 한 마디만 하면 되는 언니다.
미안해! 금붕어야!
김선희
우리 집 거실 입구를 차지하는 사각형 어항에는 금붕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항 가까이를 가면 언제 어느 때나 변함없이 온 몸을 흔들며 반기는 모습은 저녁이면 모이는 우리 가족들에게 하루의 피로를 싹 날릴 수 있는 생기를 주었다. 그 모습이 좋아서 가족들은 서로 먹이를 주려고 하였다. “금붕어는 먹이가 없어질 때까지 자꾸 먹기 때문에 배 터져 죽는데...” 라며 먹이통을 책상서랍에 숨겨 놓고 나만 조금씩 먹이를 주기로 하였다. 나의 바람대로 흐르는 시간에 비례하여 조금씩 몸집을 키워 “금붕어가 저렇게 크기도 하구나” 감탄사를 보낼 정도로 자라고 있었다. 신나게 물살을 가르며 떠다니는 금붕어에게 “어항에 딱 어울리네. 너 그렇게 크려고 혼자였니?”라며 금붕어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하였다. 이렇게 재롱을 부리고 있는 금붕어는 처음부터 혼자였던 것은 아니다.
따뜻한 봄날을 맞이하여 대청소를 하던 날, 비어있던 어항까지 깨끗하게 청소한 뒤 맑은 물이 출렁이도록 해 놓고 주인을 찾아 나섰다. 집에서 1Km 정도 떨어진 수족관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물고기 중에서 저마다의 빨간 색과 먹이를 찾는 입의 귀여움을 지닌 금붕어가 좋아보였다. 활기차게 움직여서 잘 키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주는 10마리를 선택하여 우리 집 어항으로 보금자리를 옮겨 주었다.
‘참 잘 했다’는 만족감은 한 달도 채 안 되어 걱정거리로 변했다. 수명이 길며, 특별한 보살핌이 없어도 잘 자란다는 설명과는 다르게 한 마리씩 그 숫자가 적어지고 있었다. 금붕어의 전문가이신 수족관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하니 “스트레스 예방약을 타 줬나요?” 하신다. 그런 것도 몰랐다니... 애완동물을 기르기 위한 준비가 덜 되었네. 금붕어에게 좋다는 약을 2가지 구입해서 물에 풀어 주고,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하루에 한 번 꼬박꼬박 먹이를 주고, 더러워진 어항 청소를 해 주면서 사랑을 주었다.
바쁜 일상생활 속에서 문득 생각이 날 때 들여다보면 그 수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수명이 짧네.”하며 죽은 금붕어는 금방 잊어버리고, 남은 금붕어들의 힘찬 몸놀림만 좋아하였는데 10년쯤 지나니 2마리만 남게 되었다. 조금 큰 것은 아빠 금붕어, 조금 작은 것은 엄마 금붕어라고 이름 붙여주면서 가족처럼 행복하게 잘 지내라고 했다. 우리의 바람대로 2마리는 어울려 다니면서 휘돌아 헤엄칠 때는 푸드득! 하는 큰 소리로 우리 가족을 깜짝 놀라게 하는 등 금붕어들은 재미있게 살고 있었다.
하루는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니 집안일을 하시면서 금붕어를 내 손자처럼 돌보시던 엄마가 “두 마리가 정겹게 잘 지내더니... 큰 것이 자꾸 못살게 하더니 작은 녀석이 힘이 없네. 쯧쯧쯧” 하신다. 안쓰러움이 담긴 엄마의 이야기가 있은 며칠 후 큰 금붕어만 남게 되었다. 사각형 어항에서 비록 혼자 남았지만 신나게 돌아다니며 먹이를 쫓아다니며 자신을 키워가고 있었다. ‘금붕어가 저렇게 커지기도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 크게 자라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지 먹이를 쫒아가는 움직임이 느려지고 피부에 광택도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그 녀석도 죽을까봐 걱정이 되어 ‘아파트 안에 있는 어항이기 때문에 열대어인 구피에게도 괜찮겠지’ 라고 혼잣말을 하며 구피 4마리를 넣어 새로운 환경을 주고 열심히 관찰하기로 했다.
어항에 들어가면 산소방울을 따라 전부 섞이는데도 불구하고 먹이의 냄새에 따라 서로 방해되지 않고 먹을 수 있도록 어항의 왼 쪽으로는 금붕어 먹이를, 오른 쪽으로는 구피 먹이를 주었다.
작은 몸집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는 구피와 한 가족이 된 금붕어도 덩달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피부에 광택이 반짝반짝 나기 시작하였다. 금붕어를 살렸다는 흐뭇한 마음과 “구피도 잘 살고 있네.” 라며 안심이 되어 먹이를 주는 손길이 즐거웠다.
혼자 담당하고 있던 금붕어와 구피의 먹이를 책상서랍에서 꺼내어 어항 위에 얹어놓고 가족들에게 먹이를 주라고 부탁을 한 뒤 남미로 22일간 여행을 갔다 왔더니 금붕어가 다시 혼자 놀고 있었다.
“구피가 어디 갔지?”, “금붕어가 구피를 다 잡아먹었네”, “금붕어는 전용 먹이만 먹고 사는 줄 알았는데 구피를 잡아먹었다고?”,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 잡아먹는 것이 당연하지.”, “따로 떼어놓고 갔어야 했는데...” ‘금붕어는 배고파 죽지는 않는다고 하더니... 무지로 구피만 죽였구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늦었지만 무지를 탈피하기 위해 금붕어 기르기는 방법을 알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시작한다. 동물성, 식물성 먹이 다 잘 먹으며, 수명은 20년 이상이라고 한다. 금붕어의 수명이 아직 10년 정도 남았으니 구피와 같이 살 때처럼의 활기도 찾고 같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하였다.
이런 저런 묘책을 궁리하다가 땅이나 음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에 하늘이나 양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결합하여 생명으로 연결하는 방지원도(方地圓島)가 생각났다. 하여 구피가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의 촘촘한 그물로 된 원통을 구입해서 사각형 어항의 안쪽에 매달았다. 원통 안에 들어 간 구피는 깊은 곳까지 오르락내리락 하며 신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따라 금붕어도 원통 주위를 맴돌다가 어항의 이 쪽 저 쪽으로 헤엄을 치는 등 신나게 놀고 있었다. “이제 됐구나.” 하며 열심히 먹이를 주었는데 일주일쯤 지나자 금붕어의 몸놀림이 이상했다. “어! 저 녀석 왜 저래. 힘이 없네.” “구피의 움직임은 보이는데 같이 놀 수 없어 그런가?” ‘같이 잘 살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고 어물어물하는 동안 금붕어는 그 큰 몸집을 구부리며 바닥으로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어! 이게 아닌데..., 둥근 통이 너무 컸나?, 원통을 넣기 전에 그 기회를 한 번 더 너에게 줬어야 했나?, 작은 물고기들의 움직임만 보이고 같이 놀지 못해서 애가 탔나?, 너를 생각해서 만든 것들이 도움이 되지 못했구나. 바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모습을 세심히 살펴봤어야 하는데 빨리 너에 대해서 알아차리지 못했구나.
때 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이 말뿐이었다.
미안해! 금붕어야!
약력
유치원원장으로 퇴직
대경상록자원봉사단 수필창작반 회원
첫댓글 좋은 글 올려주셔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