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단팥죽 경담
동짓날이다. 햇빛은 쨍쨍한데 찬바람이 코끝에 매섭다. 파란 하늘도 꽁꽁 얼어붙은 듯 구름 한 점 흐르지 않는다. 청명한 날씨에 겨울다운 겨울을 맛보며 차가운 기운을 밀어내듯 웅크린 몸을 펴니 희열이 인다. 허름한 단층 가옥에 좁은 실내, 북촌의 단팥죽 가게는 사람들로 붐볐다. 커다란 솥에서 단팥죽을 담아내는 이들의 손놀림이 쉴 새 없다. 내 앞에 단팥죽 한 그릇이 건네진다. 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오르며 식욕을 돋운다. 걸쭉한 국물을 한 수저 떠 입에 넣으니 달다. 단맛이 입안에 퍼지고 목젖을 지나 가슴까지 저릿하다. 식재료가 내는 고유한 맛에서 음미되는 전통적인 은은한 단맛이 아니라 첨가물을 통해 얻어지는 자극적인 강력한 단맛이다. 새알심 한쪽을 떼어내 입에 문다. 떡 한 조각의 밍밍한 맛이 치명적인 단맛을 잠재운다. 달달한 국물과 부드러운 떡을 조화롭게 수저질하며 달콤한 추억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가사실습 시간에 배운 요리가 단팥죽이다. 학교에서 정식으로 배운 요리를 집에서 뽐내고 싶었다. 어머니는 내 요구에 따라 필요한 재료를 마련해 주셨다. 저울과 시계가 등장한 작업은 공책에 적힌 대로 진행되었다. 어머니와 나는 부엌에서 단팥죽을 끓이고 아버지와 형제들은 방안에서 군침을 삼키며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배운 단팥죽은 삶은 팥을 으깨지 않은 상태로 넣어 국물이 말갛고 새알심으로 노릇노릇 구운 인절미를 고르게 썰어서 넣었다. 그릇에 담아 연두색 매끈한 은행을 몇 알 띄우고 담갈색 고운 계피가루를 솔솔 뿌려 냈다. 기대에 찬 식구들이 단팥죽을 한 술 떴다. 의기양양한 나는 ‘맛있다’는 칭찬을 들을 준비를 하고 반응을 기다렸다. 누군가 “단팥죽이 왜 이래?” 하자, 너도나도 “이상하다”고 툴툴거렸다. 아버지는 “신식 단팥죽이다!”라며 웃으셨다. 단팥죽이 멀건 국물에 인절미 조각만 동동 떠다니는 형상이었다. 수저로 뜨니 국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속이 상한 나는 울상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식구들은 단팥죽 그릇을 비워주긴 했다. 나의 첫 번째 요리 도전이 실패했던 까닭을 한참 지나서야 알아냈다. 국물에 감자전분을 넣고 저어 끈기가 생기도록 해야 하는데 그 중요한 절차를 깜박했던 것이다. 이후로 나는 요리 분야에선 신임을 얻지 못했다. 내가 부엌에 들어가 뭘 하겠다고 나서면 으레 “또 단팥죽!”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었을 테지만, 요리에 대한 내 사기를 꺾었다. 또한 형제들은 공책과 저울, 시계를 가지고 덤비는 현대식 요리방법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재도전하여 단팥죽을 한번 제대로 끓여 잃은 명예를 되찾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학교에 다니고 직장에 다니는 동안 생활이 요리하고는 친할 겨를도 없이 지나는 바람에 그냥 지나치지 않았나 싶다. 연전에 친구들을 만나 인사동 거리를 다리가 뻐근하도록 걸었다. 초겨울 스산함 속에서 지쳐갈 무렵에 아늑한 찻집을 찾아 들어갔다. 마침 그곳에 ‘단팥죽’이라는 안내판이 걸려 있는 걸 보고 다 같이 주저 없이 단팥죽을 원했다. 같은 여학교를 다녀 단팥죽에 일가견이 있는 우리는 한 마디씩을 했다. “옛맛이 아니야!” 서울 도심에서 먹는 단팥죽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옛맛’이란 어떤 맛일까. 무척 달기만 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단팥죽을 두고 무슨 음미가 따르겠는가. 그저 한 그릇 상품에 그치는 단팥죽을 훌쩍거리며 우리는 각자 간직한 추억의 맛을 씹었다. 이제 북촌의 달디 단 단팥죽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바깥을 보니, 가게 앞에는 십여 명의 손님들이 언 손을 비비고 발을 동동거리며 줄을 서서 기다렸다. 서둘러 일어났다. ‘동지 팥죽’은 팥의 붉은 색이 잡귀를 쫓는다 해서 액땜으로, 새알심은 새로이 나이를 먹는다는 의미로 먹는다. 연중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지가 지나면 차츰 낮이 길어진다. 어둠이 거두어지고 밝음이 열린다.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다. 동지에 한 그릇 팥죽을 먹는 행위는 한 해를 보내며 액운을 다 떨쳐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는 엄숙한 의식이자 신선한 행위이다. 단지 추억의 맛을 찾아온 발걸음과는 달리 찬바람을 맞으며 문전에 줄을 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보다 굳건한 심지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혹은 추운 날 도처에 돋아난 서릿발에 덴 아픔이나 쓰린 상처를 어르기 위해 긴 줄에 발걸음을 멈췄을지도 모른다. 심장에까지 스며드는 짜릿한 단맛이 우리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다스려 줄 것이다. 팍팍한 세상길을 걷다가 지친 발걸음을 멈추고 따뜻한 단팥죽 한 그릇을 퀭한 가슴에 흘려내려 보낸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춥지 않으리라. 길고 추운 겨울 도심에 내리쬐는 환한 햇살을 받으며 가슴 가득히 태양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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