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사사건건 예수님과 충돌한다.
유대교에서는 지금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으니 신약성경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약성경만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교를 정통적인 구약 신앙의 맥을 잇는 종교로 볼 수도 없다.
본래 구약 신앙은 제사가 핵심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성전이 무너졌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다.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신앙 중심이 회당에서 율법을 연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율법 조항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신앙 근간이 되었다.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어느 만큼인가?”,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일이고, 할 수 없는 일은 어떤 일인가?”, “안식일에 목발을 짚고 다니는 것은 일인가, 아닌가?” 등을 연구한 것이다.
안식일에는 5리까지 걸을 수 있다.
바느질은 두 땀까지 할 수 있다.
목발의 경우 다리를 다친 사람은 짚고 다닐 수 있지만 다리가 성한 사람이 들고 다니는 것은 안 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유대교인데 이들의 구약 해석은 정통적인 구약 신앙의 틀에서 벗어나게 된다.
유대교는 구약 신앙을 계승한 것이라기보다 구약 신앙이 이교화한 것이다.
맥도날드는 세계적인 기업이다.
예루살렘에도 점포가 있다.
그런데 치즈버거는 팔지 않는다.
성경에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육류와 유제품을 함께 먹지 않는다.
하지만 따로 먹는 것은 무방하다.
고기를 먹고 2시간이 경과하면 우유를 마실 수 있다.
그 정도 간격이면 서로 섞이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할 모습일 수 있다.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지 자기가 정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는 일이 정말로 신앙적으로 가치 있는 일인지 따지지 않는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31)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는 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전달하는 선지자가 있는 이유는 백성들이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면 고지식한 선지자, 세상 물정 모르는 선지자로 취급하고 “하나님이 다 이해하십니다. 그만하면 충분합니다.”라고 말해주는 선지자를 좋아하면 그런 선지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
제사장도 마찬가지다.
백성이 엉터리이면 선지자나 제사장도 엉터리라야 대접받는다.
정당한 선지자와 제사장은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
차제에 당부 드린다.
목회자한테 이해해달라는 말은 하지 말기 바란다.
그 얘기가 목회자의 이해심에 해당된다면 관계없지만 자신의 불신앙이 걸린 문제라면 곤란하다.
목회자는 불신앙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목회자에게 이해해달라고 하지 말고 이해를 구하고 싶은 부분을 고쳐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어떤 것이 신앙이고 어떤 것이 신앙이 아닌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것이 자기 의를 세우는 것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것인지 분별해서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