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의 열등감 극복기
달포 전 후배 목사가 갑자기 수술을 받았다고 연락이 왔다. 운동을 좋아하는 그가 고등학생들과 축구하다가 그만 발목 인대가 끊어져서 받은 수술이다. 공을 잘 차는 목사는 늘 사고의 굴레에 얽매이는 게 흠이다. 그래도 나는 그런 목사가 한없이 부러웠다. 그의 사고 소식을 듣고 축구 때문에 겪어야 했던 지난날의 아픈 기억이 갑자기 망각의 문빗장을 열고는 얼굴을 빼꼼히 내민다. 40여 년 전 내 고등부 때의 일이다. 그 당시에는 체육대회가 자주 열렸는데 주로 이웃 교회 고등부와의 친선 축구대회다. 이때는 운동 잘하는 남학생들은 귀하신 몸이 된다. 평소에는 존재감도 없던 아이가 운동으로 자신을 마음껏 과시하고 여학생들에게 인기절정이다. 대부분 정원을 채우기 위해서 운동에 소질이 없는 남학생도 선수로 뽑혀 얼떨결에 만인이 주시하는 넓은 무대에 서게 된다. 사실 그 학생이 우리편의 허점이다. 그것을 ‘구멍’이라고 불렀다. 구멍은 상대팀의 아군이고 내 팀에게는 상대편의 스파이다. 경기의 승패는 바로 이 구멍이 좌우할 때가 많다.
경기 중에 공을 몰고 상대의 수비를 요리 저리 따돌리면서 선제골을 넣는 선수는 열화와 같은 환호에 어깨가 으쓱해진다. 일약 스타가 되어 예쁜 여학생들의 연호(連呼)를 들으면 스타덤에 오른 인기 연예인 부럽지 않다. 하프 타임에 그 선수는 최고의 서비스를 받는다. 그러나 구멍은 그 처지가 정반대다. 구멍의 실수는 골로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보니 이기고 있던 경기의 흐름은 블랙홀처럼 그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최악의 경우 다 이긴 경기를 패배로 마감짓는다. 그때 구멍은 쥐구멍을 찾아야 한다. 그에게 쏟아지는 야유는 평생의 상처가 되고 아픈 기억으로 저장된다. 심하면 인생길에 걸림돌처럼 작용하여 자신감 결여, 의욕 저하, 열등감의 발현으로 이어진다. 불행하게도 천성적으로 운동에 재능도, 실력도, 관심까지 없었던 나는 그 시절에 구멍이었다. 공을 차면 공 대신 신발이 저 멀리 날아갔던 구멍 말이다. 훤칠한 키, 훈남 외모, 공부 우등생, 여학생에게 매너 짱인 내 절친은 운동선수 출신답게 남다른 실력을 발휘하는 바람에 나와는 선명한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가뜩이나 구멍인 나를 저 나락으로 떨어뜨렸으니 철천지원수가 따로 없었다. 그를 볼 때마다 마음 깊숙이 웅크리고 있던 열등감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좌절의 그림자가 땅거미처럼 드리울 때가 있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시작했다. 목회현장에는 왜 그렇게 체육대회가 많은지? 연회별, 지방회별, 교회별 체육대회는 목회의 고단함이었다. 이렇게 기쁜 목회 현장에서 이런 고역을 맛보아야 하는 현실이 때론 속상했다. 사실 체육대회는 모든 사람이 교제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행사가 아니던가? 기도와 말씀 외에 추가할 목회 덕목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운동실력이 좋은 사람에게나 해당되지 운동에 문외한에게는 달갑지 않아서 없애고 싶은 마음뿐이다. 사실 체육대회가 아니라 내 열등감 먹구름을 없애야 맞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은 지구상에서 가장 귀한 사명이 바로 목회임을 깨닫는 은혜를 부어주셨다. 목회자로서의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이렇게 은혜의 강물에 풍덩 빠지는 체험은 신기하게도 이 열등감의 먹구름을 몰아냈다. 축구선수는 축구에 전문가이고 목사는 기도와 말씀에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상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축구선수가 축구를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목사가 축구 못하는 것은 하나도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대신 목사가 기도와 말씀에 어설픈 게 진짜 큰 문제였다. 베드로처럼 ‘내 양을 먹이라’(요 21:17)는 목양의 귀함을 가슴 깊이 체험해 보니 목사가 목회 이외의 것에 무능한 것은 하나도 흠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축구로 인해 드리워진 열등의 먹구름을 하나씩 걷어내시고 운동 대신 목회에 열정을 불사르게 하셨다.
어느 해 목회자 체육대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그날도 축구의 달인처럼 넓은 경기장을 누비면서 멋진 골로 연결하는 국대급 어느 목사의 환상적인 플레이를 지켜보았다. 여기저기서 그의 실력에 감탄하면서 골인을 축하하는 열기가 후끈 달아오를 순간이었다. 이때 목회 연륜을 말하는 백발의 어느 사모가 혼잣말을 한다.
‘저 목사님은 목회는 안 하고 축구만 했나?”
그 순간 ‘축구만 하는 목사’라는 말이 크게 들렸다. 잠시 후 그 선수는 상대팀과 몸싸움하다가 그만 넘어지는 바람에 골절상을 입고 급히 병원에 이송되었고 수술 후 3개월 입원해야 했다. 당분간 주일 강단을 지킬 수 없는 목사가 되었다. 기왕에 몸이 부러졌다면 축구가 아니라 목회하다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스쳤다. 축구를 못해서 다리가 골절되지 않은 내가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축구를 못해 다칠 이유가 없는 나의 축구 무능이 너무 감사했다. 만년 구멍이었던 축구 열등생의 구멍에 환한 햇살이 비쳤다. 더 열심히 목양에 이 한 몸 불사르며 제도가 정한 날까지, 주가 부르시는 그날까지 목회에 힘을 쏟을 의욕이 샘솟았다. 그리스도인은 건전하다면 어떤 일이든지 잘하는 게 좋다. 다만 그것이 주의 일에 방해요소가 된다면 못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저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믿음생활만 잘하면 ‘만사 OK’이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바국 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