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속에 꽃길로 꽃을 밟고 나는 돌아가네-최병효 -

[홍경삼]

꽃 속에 꽃길로 꽃을 밟고 나는 돌아가네

최병효                                - 꽃에 취하고 보물에 취하고

​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의 연휴에 임실 산소를 찾았다.

봉분들을 수년 전 평장으로 바꾼 후 여유로워진 묘소에 심었던 주목과 반송, 벚나무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모두 시들어 사라졌다.

그러나 수십년 묵은 배롱나무와 모과, 감나무들은 여전함을 보니 ‘삼경취황 송국유존 三逕就荒 松菊猶存’이었다.

 (‘관직을 떠나 오랜만에 돌아온 시골 옛집 정원의 세갈래 오솔길은 잡초로 황폐해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여전 하네’: 도연명의 귀거래사중 일부)

산소에서의 예를 마친 후 차로 1시간여 거리인 지리산 노고단 아래 구례 천은사에 들렀다.

(泉隱寺: 828년 덕운선사와 인도 승려 ‘스루’가 창건, 화엄사의 말사) 일주문 一柱門을 지나니

계곡 위 무지개다리 위에 껑충 서있는 모습의 수홍루 垂虹樓 가 나타났다.

세월의 풍상을 많이 겪지는 않은 듯 좀 가볍게 보이나 그래서 신록에는 어울리는 그 누각 아래로

다리를 건너니 오래된 샘을 보호하는 정자가 보였다. 정자 지붕 위로 기왓장을 부수며 쓰러진 큰 나무 때문에

접근 금지라서 샘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는데 그 숨은 샘과 관련한 설화가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정유재란) 으로 절이 피해를 입어 불탄 뒤 중건할 때,

샘에 큰 구렁이가 자꾸 나타나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을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라고 바꾸자 그 뒤로 원인 모를 화재와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절을 지키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두려워했다.

이 소식을 들은 원교 이광사(員嶠李匡師, 1705～1777,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한 서체로 써서 일주문 현판으로 걸었더니 그 뒤로 재앙이 그쳤다”

지난해 9월 “김승웅의 마르코 글방” 고창 선운사 답사 시 신복룡 교수님 소개로 알게 된

원교의 글씨를 다시 접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원교체로 알려진 그의 글씨는 물 흐르듯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어 수체 水體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는데

강인하면서도 좀 삐딱한 모양이 많은 시련을 겪으며 인생을 달관한 그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고답적인 중국식 서체와 수구적 노론파의 기득권에 반발한 그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적폐청산을 염원했던 진보좌파였고 노론파의 종북 프레임이었던 역모=국가보안법에 걸려 오랜 고초를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자주적인 서체와 실용적인 양명학이라는 자신의 학문세계를

재야에서 추구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원래 전주 이씨 왕가 출신으로 조부는 호조판서였고,

예조판서를 지낸 부친은 노론 타파에 앞장서다가 처형을 당했으며,

그도 소론이 실각함에 따라 평생 벼슬도 못하고 지내다 대사성을 역임한 백부가 집권 노론파를 축출하려는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자 같이 역모혐의를 받아 50세에 귀양을 가서 22년의 긴 귀양살이 끝에 완도군 신지도에서 사망하였다고 하니

평범한 삶은 아니었던 것이다.

딸은 요절하고 부인은 자결하는 등 험난한 인생길을 귀양 생활로 보내며

쟁이가 아닌 도를 이루겠다는 집념으로 동국진체 東國眞體라는 조선의 고유한 서체를 완성하고

양명학으로도 높은 경지에 이르는 등 그 삶이 다산 정약용 (1762-1836)과도 비교된다고 한다.

그가 유배 길에 부인의 자결소식을 듣고 남겼다는 애도시는 한의 극치라고 할 것 같다.

          “내가 비록 죽어 뼈가 재가 될지라도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내가 살아 백 번을 윤회한대도 이 한은 정녕 살아 있으리

          천지가 뒤바뀌어 태초가 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연기가 되어도

             이 한은 맺히고 더욱 굳어져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해지리라

                  내 한이 이와 같으니 당신 한도 정녕 이러하리라

          두 한이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만날 인연 있으리.”

역시 오랜 귀양생활을 하였으나 금 수저 출신이라 큰 고초를 겪지는 않았던지

원만하고 자신감에 차서 매끄럽기까지 한 추사 김정희 (1786-1856) 의 서체와 여러 면에서 비교되고 있다.

제주도 귀양길에 해남 대흥사에 걸린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을 보고 조선의 다성 茶聖이라 불리는

초의 선사 (草衣禪師1786~1866) 에게 형편없는 글이니 내리고 자신의 것을 걸라고 했던 추사가

귀양을 마치고 귀경 길에 들려서는 자기 것을 내리고 원교 것을 다시 걸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으니

대가가 대가를 알아보는 일도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석 박원규와의 오랜 교유를 통해 서예세계에 가끔씩 접했을 뿐 글씨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추사와 원교의 글씨를 평할 안목은 없고 그저 그들의 글씨세계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할 뿐이다.

세상사 아는 만큼 보인다는데 알아야 될 것은 끝이 없으니 인생의 짧음을 아쉬워 할 뿐이다.

          

​                                       천은사 수홍루와 그 뒤 정자로 보호된 숨은 샘(2017.5.5)​

​             

                                                          천은사 일주문 一柱門과  이광사 글씨 “지리산 천은사” 현판(2017.5.5)

빗속에 잠시 둘러 본 천은사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규모로

그리 높지 않은 뒷산 아래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비에 젖은 오래된 기와지붕은 고향에 온 듯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었다.

절 뒤로 수백 년 된 소나무를 지나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 따라 걷고 싶었으나

인근 화엄사에 들를 계획이라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일단 노고단으로 향하였다.

차로 1천여미터에 오르니 강해진 비가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더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잠시 휴게소에 머물다가 화엄사를 향해 내려갔다.

20년 가까운 세월 전, 노고단 老姑壇 (1,507m)을 거쳐 여러 개의 지리산 봉우리를 넘어

뱀사골로 내려가는 등산 길 출발점으로 찾았던 화엄사 華嚴寺(백제 성왕 때인 544년 인도 승려 ‘연기’ 창건)는

그 때의 기억 속에서 보다 훨씬 규모가 커서 일본의 큰 사찰이 연상되었다.

입구 양쪽도 오사카 성 입구 벽을 이루는 엄청나게 큰 돌을 연상시키는 꽤 큰 돌들로 벽을 이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였다.

왜란 때 승병들이 요새로 만든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귀경 후 이 글을 쓰는 중에 화엄사 승병들도 왜란 때 많이 죽었을 것이라는 어느 언론 칼럼을 우연히 접하였다.

사전을 검색해 보니 1597년 수만 왜병이 진주를 거쳐 하동에서 남원성으로 쳐들어올 때 길목인

석주관성 石柱關城(구례군 토지면) 전투에서 1천여 명의 의병과 150여명의 화엄사 승병이 순사하였다고 하였다.

내 상상이 그리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화엄사 경내에는 국보인 각황전 覺皇殿 건물과 그 앞에 역시 국보들인 국내 최대의 석등과

네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삼층 석탑이 있고 그 옆의 보물인 대웅전 아래에는 동·서쪽으로 보물인 두 개의 5층 석탑이 있었다.

한 지점에서 국보 3점과 보물 3점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 싶었다.

경내에는 보리수와 배롱나무, 소나무 등 좋은 나무들도 눈에 많이 들어왔다.

각황전 옆에는 숙종 (1661-1720) 때 각황전을 증축하면서 심었다는 300여년 된 홍매가 있었다.

진홍색 꽃을 피워 흑매 라고도 불린다는데 매화를 보기엔 너무 시일이 늦어 아쉬웠다.​

       

​                                                화엄사 각황전과 그 앞의 석등 및 3층 사자탑, 왼쪽 아래는 5층탑(2017.5.5)

어딜 가나 이리저리 해찰하는 습관대로 절 뒤로 난 한적한 길을 잠시 따라 가니

몇 개의 절 건물이 있는 구층암 九層庵에 이르렀다. 마주보고 서 있는 빨간 무늬 줄기를 가진 두 개의 잘 생긴 나무가

작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눈에 많이 익었으나 무슨 나무인지 당최 생각이 나지 않아 답답하였다.

한참을 거닌 후에야 바로 오전에 산소에서 본 모과나무임을 깨달았다.

뒤늦게라도 생각이 난다면 치매는 아니라니 감사할 뿐이었다. 구부러진 목재로 된 그곳 건물의 기둥들도 모과나무라고 했다.

모과나무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줄기와 잎 새, 작은 꽃잎에 새삼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모과나무는 누구를 위하여 이런 아름다운 자태로 이 작은 암자를 지키고 있을까 존경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일행을 떠나 혼자 뒷길을 찾아 온 보람이 있은 셈이다.

                  

                                                                     화엄사 구층암 가는 길(2017.5.5)

4월 말 성북동 주한노르웨이대사 관저에서 열린 노르웨이 시인 Olav Hauge(1908-94)의 한국어판 출판 기념행사에서 접한 시

“길”이 생각났다. 시골 과수원 농부였던 시인은 도연명을 흠모해서 그에 관한 시도 썼다고 한다.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스스로 걸어야 한다

                   모르는 곳으로

                      먼 길이다

                    길은 그런 것

                    오직 스스로

                  걸어야 한다 길은

                   돌아올 수 없다

                 어떤 길을 걸었는지

                     남기지 마라

                지나간 처음의 길은

                  바람이 지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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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의 화엄사를 이리저리 살피며 오랫동안 거닐다 주차장으로 다시 내려오니

산 위쪽으로 인도승려 ‘연기’ 가 화엄사를 짓기 전에 토굴을 파고 가람을 지어 수행하며

화엄법문을 설법하였다는 연기암 緣起庵 가는 길이 보였다.

4킬로 정도는 되는 산길 양쪽은 나무 터널을 이루고 있었고 도중에 여러 개의 암자로 가는 또 다른 길들이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너무나 한적하고 아름다운 숲길에 감탄하며 연기암에 도착하니

단풍나무 위 언덕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석조 문수보살상 文殊菩薩像이 보였다.

산 아래로 섬진강이 보인다고 하나 비가 계속 내려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경사진 경내 가운데 부분인 문수전 옆으로 오르니 사람 키 높이의 나지막한 철쭉나무에 핀 새빨간 꽃들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화려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 비현실적 화려함은 나무 위의 새빨간 꽃들과

그 아래에 일부러 깔아 놓은 듯 빗속에 떨어진 새빨간 꽃잎들과의 상호작용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 장면은 마치 나무 위의 꽃들이 아래 거울 위에 반사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선명한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비 내리는 이 깊은 산사에서 이 화사한 붉은 꽃들은 누구를 맞으려고 그 아름다움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놓고 있단 말인가. 문수보살의 조화이런가.

   

                                                 연기암 문수전 옆: 빗속에서 철쭉은 누구를 기다리나? (2017.5.5)

이럴 때 언뜻 떠오르는 장면은

영화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의 마지막 장면에서 Gary Cooper가 다리에 총을 맞아

더 이상 사랑하는 여인 Ingrid Bergman과 같이 갈 수 없게 되자 억지로 그녀를 보내며 좇아오는 적들을 향해

땅에 엎드려 기관총을 조준하고 있을 때 들려오는 시 구절이다.

“Don’t ask for whom the bell tolls, it may also toll for you”

그러나 그 종소리는 이제 죽어야 되는 자를 위한 조종 弔鐘 이니 이 꽃들에게 적절한 것은 아니리라.

(Hemingway 소설의 그 구절은 영국시인 John Donne 1573-1631의 시, 1624년 작 Meditation XVII 에서

따왔다고 함 “…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e;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

이 철쭉꽃이 벚꽃은 아니나 차라리 한하운의 "답화귀 踏花歸" 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벚꽃이 피고

                     벚꽃이 지네

            함박눈인 양 날리네 깔리네

                       꽃 속에

                       꽃길로

             꽃을 밟고 나는 돌아가네

                꽃이 달빛에 졸고

              봄 달이 꽃 속에 졸고

                   꿈결 같은데

                별은 꽃과 더불어

 아슬한 은하수 만리(萬里) 꽃 사이로 흐르네 ​

                  꽃잎이 날려서

               문둥이에 부닥치네

           시악시처럼 서럽지도 않게

                 가슴에 안기네

                  꽃 지는 밤

                  꽃을 밟고

                나는 돌아가네“

어디로 돌아간다는 것인지는 모르나 귀거래사에서와 같이 고향으로,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인 자연으로, 우리들이 태어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일 듯 하니

결국 Meditation XVII로 돌아가는 셈이 아닌가.

내 생각 역시 자연의 모든 것은 영원히 순환한다는 윤회설 Karma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요승화이귀진 聊乘化而歸盡 인 것이다. (천지자연의 이치에 만족하고 순응하여 살다가

생명이 다할 때가 오면 자연의 귀결에 맡기리라.- 귀거래사의 마지막 부분 ) 연기암의 그 철쭉꽃은

우리나라에서 근래 조경에 무차별적으로 쓰이고 있는 유치하고 싸구려 느낌의 붉은 색이 아닌,

보기 드물게 고상한 새파랗다고도 할 수 있을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우리나라 TV색깔도 전의 유치한 색조에서 이제는 좀 더 나아졌지만

유럽이나 일본에서 보는 은근하고 격조 있는 TV색깔만은 아직 못한 것 같다.

그런 색감 때문인지 특히 영산홍등 우리 주변의 각종 철쭉꽃들의 색조는 그 진하고 단조로운 강렬함이 역겹기도 하여

나라의 격까지 떨어뜨리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에 비해 전통적인 진달래의 연분홍은 얼마나 세련되고 우아한가.

우리 벚꽃도 일본 벚꽃의 고상한 색조와 너무도 대비되게 단조롭고 싱거운데 새로 심을 때는

수양 벚처럼 나무 모양과 더불어 꽃 색깔도 좀 더 세련된 것을 심었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아무튼 연기암과 그에 오르는 긴 숲길은 나로서는 큰 보물을 발견한 셈이라 여행의 피로를 씻기에 충분하였다.

남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구례 산동면 온천마을이 보였다. 마음의 피로는 풀었다고 하나

육체의 피로도 풀어줌이 좋을 것 같아 잠시 몸을 담갔다.

그날 밤은 남원에서 자고 다음 날 지리산 둘레길을 좀 걷고 실상사에 들린 후

기차 편으로 남원에서 상경할 예정이었으나 남원 시내를 몇 바퀴 돌아도 숙소를 발견할 수 없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사월초파일을 전후하여 87년째 개최되는 춘향축제 기간이라고 하였다.

할 수 없이 남원 교외 육모정 인근의 산채전문식당에서 30여 가지의 산채로 지리산의 정기를 배에 담았다.

밤늦게 전주에 도착했지만 만족할만한 숙소를 찾아서 다행이었다.

사실 이번 여행의 주목적은 산소 방문과 가본 적이 없는 지리산 아래 남원 인월면의 실상사 實相寺 방문이었기에

남원에서 숙박코자 하였으나 미처 남원의 터줏대감 춘향을 생각지 못해 벌을 받은 셈이었다.

다행이 다음 날 아침 일찍 전주에서 기차를 타니 30분만에 남원역에 도착하여 바로 인월행 버스에 올랐다.

지리산 둘레길 2코스와 3코스가 만나는 인월에서 3코스 방향인 함양군 금계 방향으로 가는 마천행 버스로 바꿔 타고

실상사 (828년 증각대사 홍척스님이 창건, 금산사의 말사) 앞에서 내렸다.

통일신라 말 중국에서 들어온 선종사상에 따라 설립된 아홉 개의 구산선문 九山禪門 중 최초의 사찰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국보와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절의 하나라는 실상사는 저 멀리 지리산 천황봉이 보이는

남원 산내면의 시골 평지에 있었다. 근래 많은 증축을 통해 짙게 화장한 여인을 연상시키는 다른 돈 많은 절과는 달리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나이든 아낙네처럼 너무나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이었다.

한때 3천명의 승려가 있었다는 얘기는 그저 전설이었을까?

그러나 경내 전체에서 보일 듯 말 듯 진행 중인 미술전시는 무언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하였는데 조계종 ‘자성과 쇄신 결사추진본부’ 화쟁위원장을 맡으며

불교개혁과 생명평화사상을 추진해온 도법스님 (1966년 금산사에서 출가, 금산사 주지와 실상사 주지 (1995-2004),

조계종 총무원장 대리 등) 이 2013년부터 이곳 회주 會主 (법회를 주관하는 승려) 로 계신다는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되었다.

경내를 거닐다가 얼굴이 맑고 사심 없어 보이는 스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니 그가 바로 도법이었다.

통일신라 말기까지 불교는 경전 중심으로 불경을 잘 읽고 터득해야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가르침에 치중함으로써

상류층과 왕권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참선을 통하여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민중불교로서의 선종불교가 중국에서 도입되면서 전국 명산에 선종사찰을 지었는데

그 중 최초가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증각대사가 세운 실상사라고 한다.

4킬로쯤 떨어진 백장암의 삼층석탑은 국보이고, 실상사 주 법당으로서 비로자나불을 모신

보광전 앞의 동.서 쪽 삼층석탑들, 석등, 수철화상탑(부도)과 탑비, 증각대사(홍척스님) 응료탑과 탑비,

철제여래상, 청동입사향로, 약수암 목조탱화 등 9점과 백장암내 석등과 청동은입사향로 등 11점이 보물이라고 한다.

     

                                                           실상사 보광전 앞의 삼층 동.서 석탑들과 뒤 중간의 석등 (모두 보물, 2017.5.6)

^삼층탑 옆 동종은 1694년에 주조했는데

이 범종에는 우리나라 지도와 일본의 지도가 새겨져 있어, 이 종을 치면 일본의 경거망동을 경고함과 동시에

우리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소문 때문에 일제 말기에는 주지스님이 문초를 당하고

종 치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타종 부위를 벗어난 일본 지도 일부는 닳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전라도 지역을 황폐화한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절이 소실된데 따른 각성에서 그러한 지도를 범종에 새긴 것이라는 설이다.

                 

                         실상사 동종- 타종 부  위의 일본 열도는 호가이도와 규수만 남고 닳아 없어졌다

실상사에서 함양 금계까지의 둘레길 3코스 19km는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곳이라

일부 구간을 걷고 싶었으나 같이 간 일행이 힘들어해서 대신 남원에서 점심을 하기로 하고 실상사를 떠났다.

둘째 날은 차 없이 걸어 다니는 형편이라 한 시간 거리의 백장암 국보 삼층석탑과 보물 석등을 보지 못한 것도 유감이었다.

그런데 버스 정류장 옆 불자들의 협동농장에서 각종 유기농 빵을 파는데 팥빵과 호밀 빵을 먹어보니

서울 어느 일류 베이커리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 최고의 맛이었다.

의아해서 물으니 이 고장의 밀로 숙성시켜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기회가 되면 빵 때문에라도 다시 찾고 싶은 곳이다.

아쉬움을 남겨야 다시 오게 된다고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인월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남원에 내려 남원음식을 맛보고자 헤매다가

광한루 뒤편의 정통 한식집 ‘청학동 회관’에 들려 30여분을 기다린 끝에 일품요리를 먹었다.

1999. 8월 노고단-뱀사골-달궁-주천을 거쳐 12시간 만에 겨우 남원에 도착하니

남원경찰서장인 동창이 어느 한식집으로 안내했는데 송이버섯과 음식들이 너무도 맛있어

아직까지도 머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에 다시 그런 맛을 찾아 본 것이었다.

점심 후에 광한루에 들러 잠시 춘향예술제 농악을 보고 나오니 바로 옆에 새로 지은 거창한 한옥단지가 보여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대규모의 새 한옥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는데

‘남원예촌’ 으로 시에서 인간문화재들에게 의뢰하여 작년에 조성한 한옥문화센터 겸 호텔이라고 하였다.

다음에는 그 한옥호텔에 꼭 묵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건너편에는 ‘종가집’ 이라는 전통 한식당도 있었다.

광한루를 나오니 또 다른 쪽은 요천이었다.

60여 년 전 초등 2학년 때인지 진달래꽃이 만발한 철에 며칠간 남원에서 지내며 징검다리를 건너고 놀던 추억이 아련한 곳이다.

요천 뒷산에 동네 아이들과 올라가 진달래를 따먹고 놀다가 누군가가 ‘문둥이 온다’라고 소리쳐서

꽁무니가 빠지라고 도망쳐온 무서운 기억이 있다. 그때는 문둥병을 치료하려고 애들 간을 빼먹으니

조심하라는 얘기가 많았는데 어찌 무서웠던지 평생 그 악몽이 떠나지 않는다.

다시 지은 듯한 산 위의 정자가 멀리 보였다. 이제 나이 들어 간을 빼앗길 일은 없겠으나

그 산을 바라보니 간이 서늘해지는 기분은 여전하였다.

새로 놓은 다리로 요천을 건너가니 ‘춘향 테마파크’ 와 그 옆 언덕 위에 ‘심수관 도예전시관’이 있었다.

정유재란 때인 1597.8.1-16간 벌어진 남원성 전투에서 5만6천명의 왜군(사쓰마 번주 시미즈 요시히로의 대군으로

고니시가 선봉장)에게 맞서 싸운 1만 명의 조선병과 백성이 몰살당하고 기술자들은 대거 납치되었다.

당시 왜군들은 특히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자들을 많이 데리고 갔다.

당시 세계에서 제대로 된 자기(porcelain=1,300도 이상에서 고령토를 구운 반투명의 가볍고 강한 사기그릇)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뿐이었는데 예술성 높은 조선자기 찻잔에 매료되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지배층의 필요로

많은 사기장들을 납치해 간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그때 납치된 사기장 중에 심당길이 현 15대 심수관으로 이어지는 일본 가고시마 현(鹿兒島県), 전 사쓰마 번(薩摩藩)

사쓰마 야키(薩摩焼) “심수관 요 窯” 의 시조가 된 것이다. 1867년의 메이지 유신으로 봉건제도가 사라지고

사쓰마 번이 없어지자 12대 심수관 (심수관 1831-1906)은 독립된 가마를 열고

1873년 비엔나 만국박람회에 자기를 출품하여 국제적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로 유럽에 본격적인 수출을 시작함으로써 높은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14대 심수관 (심혜길 1926- )은 1998년 400년만의 귀향 행사를 남원에서 개최한바 있다.

금년 5.3에 15대 심수관 (심일휘 1959- )이 참석하여 도예전시관 앞에 제막한 14대 심수관의 흉상이 보였다.

여러 나라의 도자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세계적인 사쓰마 야키를 많이 보게 되어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한 셈이다.

나도 두어 점의 다른 사쓰마 야키 화병을 가지고 있지만 높은 예술성을 유지하기 위해

25명 미만의 장인으로 운영한다는 심수관요의 작품들은 워낙 고가라서 수출보다는 대부분 내수에 충당하고 있다고 한다.

정유재란 당시 사쓰마 북쪽 시가현(佐賀)으로 납치된 또 다른 사기장 이삼평(李參平, 공주 또는 남원에서 납치)은

아리타(有田)에서 일본 최초로 자기를 생산하여 1650년부터 이미 유럽(화란)에 수출함으로써 일본자기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한인 노인좌상- 15대 심수관 작                           사군자 화병- 15대 심수관 작

지리산 아래 사찰들에서 분에 넘치도록 많은 보물을 한꺼번에 보았는데

남원에서도 뜻하지 않게 여러 보물을 만나게 되니 부자가 되어 돌아온 느낌이다.

역시 여행은 우리를 여러모로 풍요하게 해주는 것임을 확인한 기분 좋은 1박2일이었다.

시간상 몇 가지 아쉬움은 두고 왔지만 요천 옆에서 원조 남원추어탕까지 먹고 밤기차를 탔으니

적이 만족할 만한 여행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최병효/주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  駐폴란드대사관 창설요원 역임/

   전주고~서울대 문리대 외교학과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