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달리면 고라니가 보여요 / 복향옥
노랗게 변해 버린 가을 들판 옆으로, 굽은 도로를 점령하고 있는 까마귀 떼가 보인다. 무슨 일일지 금세 짐작이 간다. 로드킬로 까마귀의 먹이가 된 무엇인가가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고양이일까, 개일까 혹은 까마귀일까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다. 이렇듯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널브러져 있는 동물 사체를 목격하는 일이 잦다. 그런 처참한 장면을 처음 마주했을 당시에는 그날뿐만 아니라 문득문득 생각날 때마다 온몸으로 전율을 느껴야 했지만, 이제는 비명횡사한 생명을 향해 애도하는 일을 먼저 할 만큼 일상이 돼 버렸다. 시골살이 16년에 담력이 많이 는 것이다. 멀찌감치에서 그런 낌새가 들면 시선을 더 멀리 두는 지혜도 생겼다.
도로에서 불청객을 처음 만난 건, 시골로 이사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새벽 기도회에 가느라 캄캄한 산길을 달리고 있었는데, 저 앞에서 누런 물체가 튕기듯 길 위로 올라서는 게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라 브레이크를 밟는 동시에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급정거가 더 큰 위험을 부를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낼 겨를이 없었다. 눈을 떠 보니 사슴 같기도 하고 노루 같기도 한 것이, 저도 놀랐는지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오가는 차가 없는 길이었지만 습관처럼 얼른 비상등을 켰다. 동물원이 아닌 데서 마주하기는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했고 그 자태가 예뻐서 감탄사를 터뜨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곧, 느닷없는 출현에 야속한 생각이 들어 상향등을 껐다 켰다 반복하면서 작게 소리쳤다. “제발 좀 빨리 지나가라. 예배 시간 늦는단 말이야.”
며칠이 지나서야 내가 실수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보다 4,5년 먼저 시골에 자리 잡은 큰언니에게 그 새벽 사건을 얘기했더니 그건 고라니였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눈이 부시면 분간을 못하기 때문에 캄캄할 때 만나면 불을 꺼 줘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날밤, 고라니가 한참을 서 있다가 풀숲으로 사라진 이유를 알고 나니 얼마나 미안하던지 가슴이 다 뻐근해졌다. 불빛을 번쩍이기까지 했으니 어린 고라니가 얼마나 놀랐을까, 지금 다시 생각해도 많이 미안한 일이다. 아무튼, 덕분에 그 후 만난 고라니들에게는 훨씬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됐으니 참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그때도 캄캄한 밤길이었다. 멀리 도로변에, 쌀자루 같은 게 보여 상향등을 켰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보니 고라니가 누워 있었다. 차에 치인 거라 판단하고 얼른 비상등을 켰다. 끔찍한 광경이 상상되면서 더럭 겁도 났지만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둘러 차를 갓길에 세웠다. 차에서 내리면서 뭘 해야 할지 생각했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119에 전화를 걸어 물었더니 야생동물보호협회를 알려 주었다. 그러는 사이, 서행하는 차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친 거야? 살살 좀 달리지, 여자가...”
순간, 그렇게밖에 생각 못 하느냐고 소리치며 해명하고도 싶었지만, 그보다 신고가 더 급했기 때문에 무시했다.
“봉강면 백운저수지 근처에 고라니가 쓰러져 있는데요, 다친 덴 없어 보여요. 배가 많이 부른 게 새끼를 가진 것 같아요. 많이 떨고 있는데, 빨리 오시면 좋겠어요.”
최대한 서둘러도 50분은 걸릴 거라는 관계자의 대답을 듣고 통화를 마치는데 지인 한 사람이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보니 어느새 예닐곱 대의 차들이 비상등을 켜고 멈췄거나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대부분, 나를 사고낸 사람으로 알고 범죄자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순간 오지랖 넓은 나를 탓하려다 고라니한테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수선한 생각들을 덮어 버렸다. 다행인지 고라니가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워낙 덩치가 큰 데다가 임신한 상태라 예민할 것 같아서 잡을 수도 없었다. 비틀거리는 고라니를 보며, “조금만 기다려. 도와줄 이가 올 거야.” 했더니 지인이 말했다. “놔둬요. 지 힘으로 가는 거면 할 수 있으니까 그러는 걸 테니.” 풀숲으로 사라지는 고라니를 힐끗거리면서 다시 야생동물보호협회에 전화했다.
지금도 가끔 산을 향해 그 고라니의 안부를 묻는다. 다른 야생동물의 혹시 모를 출현에 자동차 속도를 줄인다. 새벽이나 밤에 그들을 만나면 아무리 바빠도 먼저 비상등을 켠다. 그들이 먼저 비켜줄 때까지 기다린다. 고라니뿐만 아니라 다른 야생동물을 사랑하는 습관의 시작이기 때문이다.